- 한국에서 본격적인 진보주의는 1987년 6월항쟁의 열린 정치공간 속에서 비로소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했다. 진보주의 지식인 그룹은 1990년대를 지나면서 이론적으로 매우 성숙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심각한 정치적 딜레머에 빠져 있다.
지식인이란 지식과 연관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지식과 연관된 분야에는 교육, 언론, 문화 등이 있으며, 여기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넓은 범위의 지식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식인 가운데 ‘독특한’ 집단 하나가 바로 대학교수다. 여기서 ‘독특하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다. 첫째, 지식이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인식의 틀’을 다루는 것이라면, 이런 인식의 틀을 둘러싼 담론은 어느 나라건 주로 대학교수들이 만들고 유포해 왔다는 사실이다.
둘째 특징은 지식인 집단이 자리잡고 있는 대학제도에서 비롯한다. 최근 정보사회의 도래와 함께 대학의 위기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대학은 여전히 진리의 거처이자 자유의 상징이다. 대학의 상대적 자율성은 그 구성원인 대학교수에게 사회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을 하나의 권리이자 의무로 부여해 왔다.
좌파냐 우파냐
지식사회에는 적지 않은 균열이 존재한다. 특히 인간과 사회를 탐구대상으로 하는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이론적 접근이나 이념적 시각, 그리고 정치적 견해에 따라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해 왔다. 대학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서유럽의 지식사회는 이론 및 이념적 시각에 따라 매우 복잡다단하게 이루어져 있으며, 실용적 전통과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한 미국에서도 이념과 정치적 시각에 따른 미세한 차이들을 감지할 수 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볼 때 대학교수와 이들이 주축을 이루는 지식사회의 이러한 구성은 일견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교수로 대표되는 지식인이 사회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갖고 있지만, 적어도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지식인’으로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이 진리 탐구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탐구에서 완전히 가치중립적인 것이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오늘날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과학기술의 경우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일지라도, 그것의 사회적 적용과 영향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지식사회의 다양한 구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념적 시각과 정치적 견해에 따른 좌파와 우파의 개념이다. 1994년 ‘좌파와 우파’를 발표해 세계적으로 커다란 화제를 모은 이탈리아 정치학자 보비오(N. Bobbio)는 정치란 필연적으로 대립적이기 때문에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계속 정치적 사고에 영향을 끼치고, 따라서 이러한 구분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사회적 평등에 대한 태도에 따라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가능한데, 좌파가 더 많은 평등을 원하는 그룹이라면, 우파는 평등을 부정하지는 않되 사회가 불가피하게 계층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는 것이다.
정치적 이념의 스펙트럼으로 본다면, 일반적으로 진보주의는 좌파에, 보수주의는 우파에 속한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사실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며, 역사적인 시기와 문맥에 따라 변화되어 왔음에 주목해야 한다. 19세기 자유시장 옹호자들이 당시에는 좌파에 속했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우파로 분류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다.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구분도 이와 유사한데, 일반적으로 변화를 중시하면 진보주의로, 안정을 중시하면 보수주의로 분류한다. 하지만 변화와 안정도 시점에 따라 그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국에서 진보주의 인문·사회과학은 1980년대 중반에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물론 그 이전에 박현채 교수의 ‘민족경제론’, 한완상 교수의 ‘민중사회학’, 이효재 교수의 ‘분단사회론’ 등 진보적 성격이 강한 담론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진보주의 인문·사회과학의 시작은 1985년 ‘창작과 비평’에 실린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볼 수 있으며,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열린 정치공간 속에서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특히 사회구성체 논쟁은 ‘사회과학의 시대’를 열었다고 할 만큼 대학사회와 지식사회에 일파만파의 영향을 끼쳤다. 현 시점에서 보면 그 열기가 과도했던 감이 없지 않지만, 사회구성체 논쟁은 진보주의 인문·사회과학의 정립이라는 점에서 ‘전환적 의의’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한국전쟁 이후 단절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적 전통의 ‘복원’을 의미했다.
한국의 진보주의
하지만 사회구성체 논쟁은 1990년대 들어 그 열기가 갑자기 식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대외적으로 1989년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대내적으로 6월 민주항쟁 이후 제한적 수준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과거와는 다른 상황인식이 등장한 게 가장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이후 진보주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 시민사회 논쟁, 한국경제 위기 논쟁 등이 진행되었다. 또 1980년대와 다른 다양한 이론적 시각과 정치적 견해들이 나타났다. 1989년 합리적인 시민운동을 표방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의 출범 이후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의 창립,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의 출범은 이와 직·간접으로 관계된 진보적 지식인 그룹을 등장시켰다.
현재 한국의 진보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은 적지 않다. 지난해 ‘한국 현대사상의 흐름’을 발표해 국내 학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윤건차 교수(일본 가나가와대)는 한국 지식인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는 진보주의 지식인을 ‘구좌파적 마르크스주의’, ‘신좌파적 마르크스주의’,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 ‘좌파적 시민사회론’, ‘급진적 민주주의론’, ‘진보적 민주주의론’ 등으로 분류했다.
세부적으로 보면 이런 분류에 문제가 없지 않으나, 당대 우리 사회 지식인의 이념에 대한 체계적인 분류라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반성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반성이 사회학자로서 우리 지식사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었다면, 부러움은 윤교수가 국내 학계와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만큼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글은 최근 지식사회의 격동을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한국 지식사회에 대한 가벼운 사회학적 보고서다. 우리 사회 지식인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그들은 우리 시대를 어떻게 진단하고 또 어떤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생각을 탐색해 보는 게 이 글의 목표다.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밝혀두고 싶은 것이 있다. 필자는 가능한 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지식인들의 공과를 논의해 보려 했으며, 각 이념을 대표하는 지식인의 선정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학계 안팎의 다양한 평가에 의존했다. 이번 호에서는 한국 진보주의를 대표하는 네 명의 지식인들을 탐구했다.
정치경제학과 주역을 넘나들다
1980∼90년대 한국 진보주의 학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국내 저자의 책은 무엇일까. 정확한 조사는 없으나 필자가 추론하건대 아마도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일 것이다. 사적인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1989년 출간된 이 책을 필자가 처음 접한 것은 독일 유학 시절이었다. 넷째 형님께서 보내준 이 책을 주말 저녁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단숨에 끝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무거워진 기억이 난다. 아니 한없이 시렸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한 인간이 20년 동안 세상과 차단된 감옥 안에서 처절한 고독을 견뎌온 내면의 기록은 분단체제라는 비극적 현실을 인식하기에 앞서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 또 진정한 인간주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1984년 16년 만에 귀휴(歸休)하여 엿새를 보내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간 신교수가 계수씨에게 보낸 편지 ‘엿새간의 귀휴’에서 받은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교도소로 돌아오는 형님의 차 안에서 넥타이 풀고, 와이셔츠, 저고리, 바지 등 세상의 옷들을 하나하나 벗어버리고 다시 수의로 갈아입을 때, 그때의 유별난 아픔은 냉정한 이성의 언어를 거부하는 감정의 독립 같은 것이었습니다.”
신교수는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 1959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1963년 학부를, 1965년 대학원을 마쳤다. 졸업 후 그는 숙명여대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하다 1988년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는 19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동양철학’ 등을 강의해 왔으며 1998년 사면복권되어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로 부임했다. 그 동안 신교수가 발표한 책으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엽서’(1993), ‘나무야 나무야’(1996), ‘더불어 숲’ 1·2(1998)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사람아 아! 사람아’(1991)를 포함해 여러 권이 있다.
정치경제학과 물신숭배 비판
신교수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경제학자라기보다 진보주의 문명비판가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진보주의 경제학은 김수행 교수(서울대)를 필두로 쟁쟁한 학자들이 적지 않지만, 여기서 신교수를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삶과 사상이 갖는 상징성에 있다. 간단히 말해 신교수의 삶과 사상은 권위주의 정치체제에서 금기로 여겨온 진보주의 사회과학, 좁게는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의 역사를 웅변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가져온 정치적 개방은 진보주의 사회과학의 시민권을 회복시켰으며, 신교수의 삶과 사상은 바로 이 시민권의 회복을 단적으로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깥세상으로 다시 나와 발표한 일련의 글들이 비록 전문적인 경제학 논문은 아니었더라도 1990년대 진보주의 학계와 사회운동 진영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쳐 온 것은 이런 저간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신교수의 사상을 이루는 두 기둥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과 인간주의 철학이다. 신교수는 지난 10여 년간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논문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발표한 글들을 보면 정치경제학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눈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그 동안 신교수가 발표한 글들을 처음으로 통독했는데,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인 글은 ‘우리교육’에 실린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1998), ‘진보평론’에 발표한 ‘강물과 시간’(2000), 그리고 올해 월간 ‘신동아’ 7월호에 게재된 ‘따뜻한 가슴과 연대만이 희망이다’였다. 이 글들을 처음 읽을 때는 신교수가 자신의 생각을 쉬운 어조로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음을 느끼지만, 다시 한 번 읽어보면 그 속에는 깊은 사색의 씨앗이 담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대학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다소 멀어졌지만 1980년대를 풍미한 사회구성체 논쟁에서는 ‘전가의 보도’였다. 당시 대학을 다닌 지금의 30대는 운동권이든 아니든 서가에 아직도 정치경제학과 변증법에 관련된 책을 한두 권쯤은 꽂아놓고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대학시절 NL(민족해방), PD(민중민주),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해방론) 등 마치 암호와도 같은 변혁노선을 외우면서 강의실보다는 시위 현장이나 학교 앞 술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바로 이런 대학생활의 한가운데 놓여 있던 이념으로, 단지 경제이론이라기보다 하나의 새로운 세계관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신교수가 주목하는 정치경제학적 접근의 ‘합리적 핵심’은 자본주의의 중핵을 자본과 노동의 대립,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간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인간과 인간이 단절되는 물신성이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는 데 있다. 그에 따르면 이런 자본의 운동은 현재 우리 사회를 재생산하는 중심원리, 예를 들어 IMF 경제위기도 과잉축적자본의 순환에 따른 생산력의 파괴와 노동비용 통제의 결과라는 것이다. 신교수는 당대 금융자본주의가 낳은 파국적 결과인 ‘20 대 80의 사회구조’가 경제적 지배를 넘어 문화와 정신, 그리고 인종까지 지배하려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신교수의 책에서 저음(低音)을 이루는 또 하나의 사상은 인간주의 철학이다. 그의 인간주의 철학은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청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신교수에게 존재론은 인간을 하나의 고립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데, 경쟁력을 갖춘 개인, 경쟁력 있는 회사, 또는 경쟁력 있는 국가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문제는 근대사회의 등장 이후 이런 존재론은 언제나 승패를 요구하는, 결과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철학이라는 점에 있다.
이에 대한 신교수의 사상적 대안은 다름아닌 관계론이다. 관계론이란 ‘나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성의 총체’가 인간 생명의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뜻하는데, 신교수는 이 관계론적 패러다임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물신성과 소외를 극복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사상적 기반임을 강조한다.
나아가 신교수는 이 관계론을 실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을 제시한다. 첫째, 자본주의가 풍요를 가져왔다는 환상을 청산해야 한다. 둘째, 성급한 반성과 대안은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 셋째, 목표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도 중시해야 한다. 넷째, 속도, 성장, 번영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다섯째, 미완성을 주목해야 한다. 신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주역’ 64괘(卦)의 마지막인 화수미제(火水未濟)를 가끔 인용하는데, 그 뜻을 ‘부단한 반성이 진보의 조건’이라고 풀이한다. 여섯째, 자본주의 부문과 무관한 가정, 우정, 봉사 등의 부문이 적극적으로 조직화되어야 한다. 마지막 일곱째, 진정한 사상은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신교수의 대안은 얼핏 보면 소박한 인간주의로 읽히기 쉽다. 하지만 신교수의 글들을 꼼꼼히 읽어보면 그의 인간주의는 인간의 의지를 무조건 특권화하는 대중적 인간주의, 즉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있지만, 사실은 그 무력감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속류 인간주의와는 다르다. 필자가 보기에 신교수의 인간주의는 물신성이 특징인 자본주의의 강압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도, 그 구조적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이념이며, 무엇보다 진정한 사회해방을 염원하는 진보주의의 인간화를 겨냥하고 있다.
신교수의 삶과 사상을 압축하는, 널리 알려진 구절이 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만약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교수가 정치경제학에 인간주의 철학을 접목시킴으로써 진보주의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점에서 신교수의 사상은 새로운 생태주의와 민주적 공동체주의에 닿아 있으며, 이는 그의 책에 일반 시민들이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또한 사물의 정수(精髓)를 추출하는 간결한 문체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성공회대로 신교수를 찾아갔다. 그 동안 신교수에게 인사를 드린 적이 없지 않지만, 직접 만나보니 신교수는 글과 사람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신교수가 동의할는지 모르지만) 진정한 ‘선비’였다.
그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와서 한동안 혼자 걸었다. 그때 두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먼저 신교수의 모습에서 필자는 매천 황현 선생과 단재 신채호 선생을 떠올렸는데 우리 지식사회에서 아쉬운 것이 바로 이런 지식인을 제대로 아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과연 신교수의 대안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것은 한국 진보주의가 시민권을 회복하고 하나의 독자적인 담론체계를 구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정치적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정치적 딜레마 문제는 결론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찾은 역사의 희망
필자는 1997년 격월간지 ‘참여사회’에 ‘우리시대 지성·지성인’이란 대담을 연재한 적이 있다. 말이 대담이지 사실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을 연속 인터뷰한 것으로, 그들의 삶과 사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이 기획 의도였다. 대선을 앞둔 그해 10월 초 강교수를 고려대 연구실에서 만났는데, 소탈하면서도 차분하게 이야기하던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당시 과거와 현재, 역사와 현실을 넘나들며 자신의 삶과 학문을 말하던 강교수의 모습에는 그때까지 필자가 만나본 역사학 전공 교수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역사의 진보에 대한 굳은 신념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강교수는 1933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마산고등학교를 거쳐 1952년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해 1957년 졸업했다. 이어 고려대 대학원에 진학해 1961년 석사학위를 마치고 1975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67년 고려대 사학과에 자리잡았고 1980년 해직되었다가 1984년 복직했다. 강교수는 1999년 고려대에서 정년 퇴임하고 2001년 3월부터 현재까지 상지대 총장을 맡고 있다.
강교수는 고려대에서 박물관장, 중앙도서관장 등의 보직도 맡았지만, 그의 모습이 두드러진 것은 오히려 다양한 사회활동이었다. 1991년 월간 ‘사회평론’ 발행인을 맡아 박호성(서강대), 조희연(성공회대) 교수와 함께 진보주의 담론의 대중화에 주력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는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을 맡는 등 통일운동과 시민운동에도 관여해 왔다.
이런 공식적인 약력 이면에 감춰진 그의 개인적 이력을 엿볼 수 있는 글이 있다. 1996년 발표한 ‘역사에세이’ 1부에서 강교수는 1990년대 중반까지 자신의 삶을 담담히 회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의 대표 저작으로 꼽히는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을 발표했을 때부터 촉망받는 소장 역사학자였다. 김용섭 교수 등과 함께 주도한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는 진보적 역사학이었지만, 1970년대 이후 그는 조선 후기에서 20세기로 자신의 역사적 탐구 시기를 이동시켰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으나 곧이어 그것이 10월 유신을 위한 ‘멍석깔기’(그의 표현을 빌리자면)임을 깨달았을 때, 강교수는 ‘개성 상인의 이야기’를 넘어서 광복 이후의 역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의 대중화 작업
글쓰기에는 전공에 따라 어떤 묵시적인 원칙이 있게 마련인데, 한국 역사학은 유독 ‘잡문’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의 학부 시절을 기억해 보더라도 역사학과 교수들이 “학자는 연구논문과 잡문을 엄격히 구분해 모름지기 연구에만 충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수도 없이 들었다. 필자는 당시 교수들의 가르침에 공감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독일로 유학가서 보니 서유럽 역사학자들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그런 측면에서 당시 40대의 강교수가 실증적 연구논문보다 사론(史論) 쓰기에 주력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은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하다. 요즈음은 분단시대란 말이 일반화됐지만 강교수가 1970년대 분단시대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했을 때는 상당히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했다. 그는 “일제시대 역사학이 자신의 시대를 식민지 시대라고 잘못 말한 것처럼 광복 이후 역사학이 또다시 자기 시대를 다루지 못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광복 이후 우리 시대가 불행한 분단시대를 맞았는데, 이것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만 통일을 지향할 수 있는 역사인식이 생길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그것이 분단시대를 구분하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분단시대에 대한 강교수의 문제제기가 1980년대 이후 진보주의 사회과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다. 아래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조희연 교수의 ‘반공규율사회’ 개념이나 손호철 교수가 관여한 ‘분단체제’ 논쟁도 크게 보면 강교수의 문제의식 연장선상에 있다.
강교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84년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로 나아가 역사의 대중화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물론 여기에는 계기가 있다. 강교수는 1980년 7월 해직되어 야인생활에 들어갔다. 이때 그는 역사인식의 대중화에 관심을 두었으며, 그것이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로 열매를 맺었다.
필자가 관심을 둔 책은 ‘한국현대사’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그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일제시대 공산주의 운동사를 한국현대사에 과감하게 포함시켰으며,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에 초점을 맞춰 건국준비위원회 활동, 좌우합작운동, 1948년 남북연석회의 등을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민족운동사의 주요 흐름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현시점에서 보면 이러한 역사기술이 별반 새로울 것이 없을지 몰라도 1980년대 중반에는 상당한 용기를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이후 진보주의 역사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강교수는 1994년 두 권의 책을 개정하여 ‘고쳐 쓴 한국근대사’와 ‘고쳐 쓴 한국현대사’로 출간했다.
이후 학교로 돌아온 강교수는 활발한 학문활동을 벌이면서 사회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일제 시기 민족해방운동과 통일국가 수립운동, 그리고 평화통일 방안 모색이 그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일제시대 민족운동사는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이 주류였고, 이것이 해방공간에서 통일민족국가 건설운동으로 연결되었으며, 1960년 4·19혁명 이후 평화통일운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강교수의 중추적인 역사인식이다.
그의 이런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 1999년 발표된 ‘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의 2부 ‘분단 50년을 되돌아보고 통일을 생각한다’에 실린 여러 글이다. 간단히 말해, ‘흡수’ 통일이 아닌 남북 ‘대등’ 통일과 ‘타협’ 통일이 강교수가 제시하는 평화통일의 기본 골격이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와 진보주의의 접목
강교수의 사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초석(礎石)은 민족주의와 진보주의다. 주지하듯이 민족주의는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선생부터 시작해 최근까지 지난 20세기 우리 역사학을 이끌어온 핵심 이념이다. 20세기 한국역사가 일제 식민시대와 광복 이후 분단시대로 이어져왔다는 점에서 민족주의는 여전히 우리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통일국가 수립이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 가운데 하나라면, 민족주의가 남과 북의 이념적 공통분모임은 당연하다.
강교수가 1980년대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를 회고한 글이 있다. 당시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할 때마다 그곳을 다녀간 민족운동가들을 떠올렸다고 한다.
“성난 얼굴로 눈을 부라리며 앉아 있었을 것 같은 김구, (중략) 미친 사람으로 가장해서 석방되었다던 박헌영, 부처처럼 앉아서 명상했을 것 같은 안창호, (중략) 대단히 의연했다는 홍명희, 나이든 교도관이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던 조봉암…”
강교수는 그들을 떠올리며 우리 민족의 수난과 광복, 그리고 민족통일을 꿈꿨다고 한다. 요즈음 신세대들에게 강교수의 회고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전달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이 지난 20세기 우리 역사를 이끌어온 가장 중요한 이념적 원동력 중 하나였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진보주의는 강교수의 역사학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사상적 거처다. 이 글의 키워드이기도 하지만 진보주의는 그에게 역사의 진보에 대한 신념으로 집약된다. 그가 쓴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역사는 모든 인간이 정치적 속박에서 해방되는 길로, 경제적 빈곤과 불균등에서 해방되는 길로,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해가는 길로, 사상적 부자유와 탄압을 극복해가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다.”
강교수는 최근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대해서도 비교적 낙관한다. 즉 역사의 본질은 변화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언젠가 방향을 틀 수밖에 없다고 전망하는 것이다. 결국 “역사란 나선형으로 발전하면서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강교수가 말하는 진보주의 역사관인 셈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강교수가 이런 진보주의를 민족주의와 접목시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민족주의라고 해서 모든 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는 민족주의를 배타적인 국수주의 및 봉건적 민족주의와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올바른 민족주의란 인권의 신장, 만민 평등, 정치적·사상적 자유의 확대를 포함하는, 다시 말해 진보주의와 함께 가는 민족주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다른 개념으로 ‘개방적 민족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민족의 자율성을 지켜 나가되, 자유주의, 민주주의, 평등주의와 같은 계몽주의 담론을 적극 접목하는 것을 말한다.
필자도 이러한 강교수의 민족주의와 진보주의 역사관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다만 한 가지, 이런 담론이 현재 진행되는 세계사적 변화를 과연 어느 정도까지 담아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오늘날 세계사적 변화의 주요 흐름은 단연 정보화와 세계화다. 이 정보화와 세계화가 갖는 의미의 하나는 이른바 ‘근대적 민족국가의 종언’이다. 호들갑스러운 ‘역사의 종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재 진보주의와 민족주의는 이런 세계사적 흐름에 과연 어떤 답변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물론 강교수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라기보다 새롭게 전개되는 불확실성의 세계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후학들의 몫일 것이다.
당당한 마르크스주의자
사회과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듯이 손호철 교수는 현재 진보주의 정치학을 대표하는 학자다. 우선 지적하고 싶은 손교수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대다수 진보주의 지식인들이 ‘국내파’인 데 비해 ‘해외파’라는 점이다.(필자는 개인적으로 ‘해외파/국내파’의 이분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필자도 독일에서 공부한 해외파에 속하지만, 이런 이분법은 상업적인 구분일 뿐만 아니라 학문 자체를 이해하는 데 별로 유익한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손교수는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나 1970년 중앙고등학교를 졸업,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해 1978년 졸업했다. 동양통신(현 연합통신)과 미주 한국일보 기자 생활을 거쳐 1980년 텍사스대학에 유학해 198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제3세계 정치경제학의 종합적 접근을 향하여’다.
손교수는 귀국한 뒤 서울대 등 여러 대학에서 가르치다 1990년 처음 자리잡은 곳이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다. 그리고 1994년 광주를 떠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로 자리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손교수의 사회적 경력에서 주목할 것은 한국 정치학계의 주류와 반주류라 할 수 있는 한국정치학회와 한국정치연구회에서 모두 활발한 학문적 활동을 벌여왔다는 점이다. 물론 무게중심은 진보적 소장 정치학자들이 집결한 한국정치연구회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는 한국정치학회와 한국국제정치학회의 편집이사를 맡는 등 주류 학계에서의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손교수가 쓴 책들을 꼼꼼히 읽어본 독자들은 곧바로 감지할 수 있듯이, 그의 신문 칼럼이나 활발한 정치적 실천과는 달리 연구논문들은 학문적으로 매우 엄격하고 치밀한 논리를 구사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학술활동 이외에 그가 관여해온 정치적 실천이다. 손교수는 그 동안 민주화추진교수협의회(민교협) 공동대표, 한국노동이론연구소 부소장, 민주노총 정치위원회 자문위원장,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 이사 등을 맡았거나 맡고 있는 등 진보진영 곳곳에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손교수를 학계 내외에서 가끔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진보주의 정치학자로서 일관된 그의 원칙과 용기는 설령 그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제까지 손교수가 발표한 책은 ‘한국정치의 새 구상’(1991)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정치’(1999)에 이르는 학술 저서 다섯 권과 정치평론집 ‘3김을 넘어서’(1997)가 있다. 대학에 자리잡으면 이런저런 일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그가 왕성한 학술운동 및 사회운동에 적극 개입해 왔음을 고려할 때, 손교수의 이런 연구 업적은 그가 얼마나 열심히 학문활동에 주력해왔는지를 입증한다.
손교수가 1995년에 발표한 ‘해방 50년의 한국정치’는 그해 모 시사주간지가 선정한 ‘올해의 책’(사회과학 부문)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또한 손교수는 2000년 여름부터 1년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UCLA)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동아일보’에 정기적으로 정치칼럼을 연재하는 등 왕성한 집필활동을 해왔다.
논쟁의 중심에 서서
윤건차 교수가 작성한 지식인 지도에 따르면, 손교수는 김세균 교수(서울대)와 함께 ‘구좌파적 마르크스주의’자에 속한다. 그의 이제까지의 지적 경력을 돌이켜보면 이런 지적이 나름대로 타당하지만, 손교수가 활용하는 이론틀을 보면 신좌파적 마르크스주의 경향도 무시하기 어렵다.
필자가 보기에 손교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이론가로 마르크스 못지않게 그리스 태생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풀란차스(N. Poulantzas)와 영국 태생의 제솝(B. Jessop)을 지목할 수 있다. 신좌파 마르크스주의 국가이론을 대표하는 이 두 이론가에 대해 손교수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거니와, 특히 풀란차스의 정치적 결론이라 할 ‘민주적 사회주의’ 전략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의 연구와 실천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풀란차스가 강조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이중전략, 즉 국가 내부의 변혁과 국가 외부에서의 사회운동을 동시에 전개하려는 급진주의 정치기획을 말한다. 이 민주적 사회주의는 기존 사회주의를 대표해온 동구 국가사회주의와 서구 사회민주주의를 모두 넘어서려는 전략으로, 신좌파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 제시한 일종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손교수가 명시적으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언급하지는 않으나 강단에서 개진하는 정치이론이나 시민사회론에 대한 일련의 비판을 지켜볼 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적극 결합하려는 이런 이론적 시도와 정치적 실천에서 상당한 지적 자원과 영감을 이끌어오는 것은 분명하다.
학문적으로 손교수의 장점은 서구 진보주의 정치이론과 우리 정치현실을 접목, 치밀하게 분석하는 데 있다. 이런 그의 장기는 ‘한국 정치학의 새 구상’, ‘전환기의 한국정치’(1994), ‘해방 50년의 한국정치’,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정치’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며,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의 시각에서 비(非)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활발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참여한 논쟁 가운데 사회과학계 에 커다란 화제를 일으킨 것만 하더라도 백낙청 교수(서울대)와의 분단체제 논쟁, 황태연 교수(동국대)와 벌인 지역주의 논쟁, 김성국 교수(부산대)와 주고받은 시민사회 논쟁, 강준만 교수(전북대)와 벌였던 지식인과 글쓰기 논쟁, 그리고 민주화이론 비판 등 매우 다양하다. 이 가운데 손교수의 진보주의 정치학을 잘 보여주는 것이 분단체제 논쟁, 시민사회 논쟁, 그리고 민주화이론 비판이다.
먼저 분단체제 논쟁을 보면 손교수는 분단현실을 과도하게 부각하는 것을 우려한다. 즉 그는 남북한 관계의 특수성에 주목, 이를 세계체제와 개별 국가를 매개하는 분단체제로 파악하는 백낙청 교수에 맞서서 분단체제가 사회과학적으로 불명확한 개념이며, 한반도의 분단을 지나치게 특권화하는 문제를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진보적 사회운동 안에서 오랫동안 논란을 일으켜온 ‘통일이냐 민주주의냐’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이 논쟁의 공과는 접어둔다 하더라도, 손교수가 취하는 견해는 진보주의 사회과학의 엄격한 이론과 방법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손교수가 제기한 또 하나의 문제는 1990년대 우리 사회를 풍미했던 시민사회론에 대한 비판이다. 그 동안 손교수는 시민사회론을 다각적으로 비판해왔는데, 그 초점은 시민사회론에 내재된 자유주의적 경향에 맞춰져 있다. 그에 따르면, 시민사회는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의 장이며 계급 정체성이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도 비계급적 시민사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 내의 민중세력의 성장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 논쟁에서 손교수가 시민사회론의 다양한 흐름을 섬세히 구분하지는 않지만, 시민사회론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계급갈등을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은 일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진보주의 정치학의 한계
이 밖에도 손교수가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1987년 이후 민주화 과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기존 민주화 이론의 비판이다. 이에 대해 손교수는 한국의 민주화를 설명하는 유력한 네 가지 이론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구체적으로 전략적 선택론(임혁백), 사회운동론(성경륭), 조절이론(김호기), 세계체제론(브루스 커밍스)이 그 대상이다.
필자도 그 비판의 표적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이 비판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쉽지 않지만, 적어도 진보주의 정치이론의 시각에서 이뤄진 손교수의 비판은 상당히 예리하고 설득력이 있다. 필자가 보기에 비판의 초점은 두 가지다. 겉으로 드러난 하나는 민주화 과정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구조론와 행위론을 통합하는 변증적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면에 감춰진 다른 하나는 타협에 의한 민주화는 서구 진보주의 정치학자들이 비판하듯이 기실 ‘중도우파 대안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련의 논쟁들이 시사하듯이 손교수의 정치학을 지탱하는 중심축은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다. 손교수의 강점은 국가를 단순히 지배계급의 도구로 파악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국가론만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신좌파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종합해 자신의 이론적 지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 있다. 비판 정치이론의 시각에서 볼 때 신좌파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국가와 경제, 국가와 계급구조를 복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손교수의 시사 칼럼들이 일반 시민에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켜 왔다면, 그것은 손교수가 국가와 정치사회의 계급적 성격을 통찰하고 있는 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계급의 의미를 서둘러 폐기하려는 각종 포스트주의를 거부하고 국가정책에 각인돼 있는 ‘자본주의적’ 성격을 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지 않은 함의를 갖고 있다. 정치학자임에도 손교수가 서구 진보학계에서 뜨거운 논쟁으로 점화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분석마르크스주의를 다룬 ‘계급으로부터의 후퇴’(1993)를 편역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손교수는 이런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기반해 세련된 이론 구성과 치밀한 경험 분석을 모색함으로써 한국 진보주의 정치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있다.
하지만 손교수의 진보주의 정치학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왕성한 학문 활동을 하고 있으나 손교수가 제시하는 이론적·정치적 대안은 여전히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보주의와 보수주의가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다. 손교수는 민주화이론 연구경향을 비판하면서 ‘한국 민주화이론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게으름을 깨우쳐주는 또 다른 등에’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솔직한 고백이자 성실한 자기반성이다. 과연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은 21세기에 걸맞은 어떤 민주주의론을 제시할 수 있는가? 아마도 이것이 현재 손교수의 학문적 고민의 핵심일 것이다.
미국 진보주의에서 찾은 희망
조희연 교수는 현재 김진균 교수(서울대)와 함께 한국 진보주의 사회학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시민운동가다. 서울대 사회학과 75학번인 조희연 교수의 이력은 이채롭다. 그는 195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1975년 중앙고등학교를 졸업,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해 1980년에 졸업하고, 1981년부터 1992년까지 연세대 사회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마쳤다. 전공분야는 정치사회학, 산업사회학, 사회운동과 NGO다. 현재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와 시민사회복지대학원 교수로 일하고 있다.
공식적 이력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의 비공식적 경력이다. 조교수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1998) 말미에 실린 연보 ‘불행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행복’에서 자신의 개인적·지적 경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조교수의 개인적·지적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대학 4학년 때 경험한 학생운동,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 그리고 1990년대 참여연대 창립과 미국에서의 연구다.
학생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학생운동의 경험은 이 땅의 진보적 사회과학자들에게는 자신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원형적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조교수도 예외는 아닌데, 현장으로 갈 것인가 대학에 남을 것인가의 선택에서 조교수는 우여곡절 끝에 대학원에 입학했으며, 1992년 연세대 송복 교수의 지도 아래 ‘현대 한국사회 운동조직에 관한 연구: 1960년대 이후 비합법 전위조직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대 조교수가 주도했던 학술운동은 화려했다. 그는 진보적 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술모임인 한국산업사회연구회와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학술모임 연합체인 학술단체협의회의 창립을 주도 했으며, 1980년대 중반부터 불붙기 시작한 사회구성체 논쟁에서는 ‘민중민주주의’에 가까운(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시각에서 주요 논객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회구성체 논쟁을 조교수는 진보주의 사회과학의 대부 가운데 한 사람인 박현채 교수와 함께 ‘사회구성체 논쟁 1-4’(1989~1991)로 묶어 정리하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와 조교수는 새로운 이론적·실천적 활동을 모색하는데, 그것은 ‘진보적 시민운동론’을 주창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참여연대의 창립을 주도한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1994년 가을에 창립된 참여연대는 진보적 변호사그룹, 인권운동그룹, 청년운동그룹, 그리고 진보적 교수그룹이 모여 결성했는데, 조교수는 진보적 교수그룹을 대표해 정책위원회 위원장, 집행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으며 왕성하게 활동해왔다.
조교수의 지적 경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경험 중의 하나는 1990년대 중반 남캘리포니아대학(USC) 교환교수로 있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그는 미국 진보주의 지식인들과 직접 교류했으며, 이런 체험은 조교수의 생각을 더욱 확대, 심화시켰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조교수는 이런 지적·개인적 경험을 통해 ‘전통적 좌파’에서 ‘급진민주주의적 좌파’로 나아간 것으로 판단된다.
이제까지 조교수가 발표한 책은 박사학위논문인 ‘한국 사회운동과 조직’(1993)을 포함, ‘계급과 빈곤’(1993),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1998), ‘한국의 국가·민주주의·정치변동’(1998) 등 네 권이다. 또한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진보적 시민운동론의 대표적인 저작이자 시민운동진영에도 영향을 끼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진보적 시민운동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이론화하기 위해 우선 조교수는 우리 사회의 거시적인 사회변동 속에서 국가와 지배구조의 변화에 대응하는 사회운동의 변화를 분석한다.
급진민주주의적 좌파로
조교수에 따르면, 광복 이후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분단체제의 형성으로 고착된 ‘반공규율사회’와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국가주의적 발전동원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반공규율사회란 ‘냉전과 내전의 특수한 결합으로 인하여 반공이데올로기가 의사합의로 내재화된 특유의 우익적 사회를 뜻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런 반공규율사회와 국가주의적 발전동원체제가 압축적 고도성장을 달성하는 데는 유리했다 하더라도 그 고도성장 안에는 구조적 모순과 독재의 모순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조교수의 진단에 따르면, 바로 이런 국가주의적 발전동원체제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둘러싸고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다양한 세력간에 각축이 일어났으며, 이 각축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민주항쟁 이후 정치상황이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행’이 아닌 ‘점진적인 타협적 민주주의 이행’으로 귀결되면서, 기존 개발독재적 예외국가 및 지배구조가 재편되는 동시에 이에 대응하는 사회운동 역시 복합적으로 변화되었다.
조교수가 분석하는 1987년 이후 가시화된 ‘보수적 민간정권’의 ‘저강도 민주주의’가 사회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특히 시민사회의 확장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즉 시민사회의 성장은 이중적 결과를 낳았는데, 한편에서는 사회운동의 원심력적 분화 경향을 만들어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저항운동이 사회 각 영역으로 확장되고 대중운동이 조직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운동공간이 형성되었다.
조교수가 보기에 사회운동의 중요한 과제가 도출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인 것이다. 반독재운동을 주도해온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이중의 과제, 즉 제도정치에 의한 사회운동의 포섭을 넘어서는 동시에 사회운동의 원심력적 분화에 대응하는 대안적 실천을 통해 새로운 통합을 달성해야 하는 과제를 떠맡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운동의 자기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통합을 형성할 수 있는 새로운 실천은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는가. 1998년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관련해 조교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사회운동의 전략을 제시한다. 우선 조교수는 개발독재적 예외국가의 왜곡된 측면에 대한 폭넓은 ‘정상화’ 운동을 부각시킨다. 이 운동은 민주주의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 ‘천민적 자본주의’를 정상화하기 위한 운동, 반공적 사회질서를 정상화하기 위한 운동, 보수적 시민사회를 내부로부터 혁신하는 운동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조교수는 ‘민주 대 반민주’ 구도 이후의 질서로 ‘보수 대 진보’ 구도를 좀더 개혁적 방향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폭넓은 연대 정치를 제안한다. 다시 말해, 현단계의 한국 사회운동은 ‘왜곡된 근대’를 정상화하는 과제뿐만 아니라 지구화, 정보화, 생태주의의 도전 등으로 촉발되는 ‘탈근대적 급진운동’을 적극 결합하는 과제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진보주의 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된 ‘근대와 탈근대의 이중 과제’를 연상케 하는 이런 실천전략을 조교수는 ‘진보개혁적 파트너십에 기초한 공동개혁’이라 부르고, 한국의 현재적 경험이야말로 ‘세계운동사적 전형’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시민운동의 명암
이런 조교수의 진보적 시민운동론은 1990년대 비약적으로 증가한 NGO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구체적으로 조교수가 관여한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 환경운동연합의 동강 살리기운동, 그리고 지난해 봄 전국을 뜨겁게 달군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도 크게는 이런 진보적 시민운동론의 자장(磁場) 안에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진보적 시민운동론을 주창하고 이를 실천에 적극 접목시킨 그의 시도는 1990년대 한국 진보주의 사회과학의 새로운 돌파구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보적 시민운동론에 대한 비판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비판은 보수주의와 급진주의 양 진영에서 나왔다. 보수주의 학계가 시민운동의 순수성과 세력화 경향에 대해 회의와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면, 급진적 지식인들은 진보주의 시민운동론이 결국 자본주의 체제를 승인하는 개량주의 노선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사회학적 시각에서 조교수의 진보적 시민운동론을 검토해볼 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진보적 시민운동론은, 우리 사회의 변동에 대한 분석에 기반해 사회운동의 과제를 도출하고 있으나 여전히 많은 부분이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권력과 자본의 다면적 포위’를 강조하고 있지만, 자본과 시장 패러다임에 대한 문제의식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최근 조교수는 NGO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에 천착함으로써, 그리고 민중운동과의 연대를 활성화할 수 있는 다양한 전략을 모색함으로써 진보적 시민운동론을 체계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8월 말 그가 펴낸 ‘NGO 가이드: 시민·사회운동과 NGO 활동’은 이런 고민의 소산으로, 한국 NGO의 지속 가능성, 전문성, 책임성에 대한 논의를 다양한 각도에서 심화시키고 있다. 진보적 시민운동을 21세기에 걸맞게 더욱 대중화하고 참여민주주의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하려는 것이 조교수의 일관된 관심이자 목표라 할 수 있다.
조교수와 가까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탄해 마지않듯이 그는 대단히 부지런한 시민운동가다. 필자는 지난 20년 동안 학계 내외에서 조교수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았다. 요즘도 그는 주말이면 성공회대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를 보면 ‘불행한 시대를 사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더러 있다.
네 명의 대표 지식인을 중심으로 살펴본 한국 진보주의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 실천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보주의 학문이 정치적 실천에 관심을 두는 것은 광복 이후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볼 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들에 따르면 정치적 민주주의는 억압되고 경제적 자본주의는 왜곡된 상황에서 학문이 현실에 적극 개입하고 나아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진보적 지식인의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석논리나 대안 모색에서는 진보주의 지식인 그룹 안에서도 큰 차이가 나타난다. 지난해 봄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낙천·낙선운동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낙선운동을 정책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정책자문교수단에서 활동한 조희연 교수의 논리를 둘러싼 토론은 한국 진보주의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 조교수는 민주노동당 기관지인 ‘진보정치’에 ‘낙선운동-진보정당운동은 정치개혁운동의 양날개’라는 글을 기고해, 진보정치운동의 주체 역량 부족으로 인해 기성정당에 대한 불신이 곧바로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로 전환되지 않는 것이 현시기의 조건이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낙선운동을 통해 조성된 정치적 관심을 이용, 시민사회를 재정치화해 급진적 정치화를 위한 토양을 확대해 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조교수의 논리는 당시 낙선운동을 명시적·묵시적으로 지지하던 진보주의 지식인 그룹의 생각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진보주의 지식인 그룹은 이 낙선운동에 불만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총선시민연대 활동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보수 중심적 지배구조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으며,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과제를 소홀히 하게 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런 사실은 진보주의 지식인들이라 하더라도 이념적 시각과 정치적 견해에 따라 다양한 그룹으로 분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1990년대 들어 한국의 진보주의 지식인들은 시민운동에서 민주노동당, 그리고 진보적 사회단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및 사회운동 조직과 관계를 맺으며 때로는 연대하고 때로는 독자적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이론적 시각에서 보면 현재 한국 진보주의 지식인들의 이념적 기반은 케인스주의 좌파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 서구 진보주의 사회이론이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 도입되기 시작했다고 본다면, 불과 20여 년 만에 한국 진보주의 지식인들은 200년의 역사를 가진 서구 진보주의 사회이론을 나름대로 소화하는 남다른 능력을 보여왔다.
물론 그 동안 서구 진보주의 사회이론의 도입에 대해 ‘학문적 사대주의’ 또는 ‘기지촌 지식인’이라는 냉소적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를 지나면서 진보주의 지식인 그룹은 서구의 이론을 ‘교과서’가 아닌 ‘참고서’로 활용하면서 한국사회에 맞는 이론구성과 현실분석에 몰두해 왔다. 예를 들어,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손호철 교수의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정치’와 조희연 교수의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은 서구 진보주의 정치·사회이론과 한국 현실을 접목시킨 모범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성취에도 현재 한국의 진보주의는 정치적 딜레마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상당수 시민들이 기존 정당정치를 불신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곧 진보주의가 제시하는 노동자 계급의 대안적인 정치세력화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 사회의 이런 조건은 일제 식민지에서 분단체제를 거쳐 권위주의 정권에 이르는 동안 확대재생산된 정치적 무관심, 즉 반정치주의(反政治主義)의 역사적 경험이 시민사회에 각인된 결과이며, 그것이 오랫동안 구조화된 만큼 쉽게 해빙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1987년 백기완 민중후보부터 지난해 4·13 총선의 민주노동당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진보주의는 일반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 문제가 결코 간단하지 않은 것은 현재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정보화와 세계화 흐름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영향 때문이다. 정보화와 세계화 경향은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고도화를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까지의 자본주의 경제 및 사회구조와 다른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론과 정치의 미묘한 관계가 주목되는 지점도 바로 여기인데, 이론적으로 자본주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 현상은 새로운 변화로 나타나며, 대다수 국민은 자연스럽게 이런 새로운 현상과 질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구관이 여전히 명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진행되는 변화에 얼마나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느냐야말로 한국 진보주의의 미래를 결정하는 변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