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농촌을 그리며 바람직스러운 아버지·어머니상을 보여주었던 TV 드라마 ‘전원일기’가 곧 막을 내린다. 극중에서 22년을 해로해온 최불암 김혜자. 두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들은 썰렁한 농촌을 아쉬워하며 작별을 준비하고 있는데….
방송계 뉴스에 따르면 방송 3사가 방영하는 드라마 가운데 단막극이나 사극을 뺀 21편 중 19편이 삼각 관계를 다루고 있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나 정상적인 사랑으로는 시청률을 높일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방송가에 형성돼 있는 형편이다. 삼각관계의 패턴도 바뀌어 과거에는 ‘미워도 다시 한번’처럼 한 남자와 두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이 주였지만 요즘은 한 여자와 두 남자 문제로 바뀌었다. 남편과 애인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부의 이야기를 얼마나 실감나게 그려내느냐에 드라마의 시청률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전원일기는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집권 이후 불륜 퇴폐 드라마를 정화한다는 바람이 불면서 MBC가 대안으로 내놓은 작품이다. 시청률에 얽매이지 않고 공해 없는 농촌 드라마로 잔잔한 감동을 전달하겠다는 기획의도였다. 1980년 10월21일 차범석 극본, 이연헌 연출로 첫 방송 ‘박수칠 때 떠나라’를 내보낸 후 그 동안 작가가 14번, 연출자가 13번 바뀌었다. 대표적인 작가는 김정수씨로 12년 간 집필하면서 ‘전원일기’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중년에 아버지 역을 맡았던 최불암씨는 이제 환갑을 넘어섰고 어머니 역을 맡은 김혜자씨도 극중 부부로 최씨와 22년 동안 해로했다.
22년간 해로한 극중 부부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전원일기를 보는 왕 애청자입니다. 저의 고향이 농촌이라서 전원일기를 보면 항상 따뜻해지곤 했는데 그런 마음의 고향이 사라져버리면 정말 허탈할 것 같습니다.’
‘고향을 보는 듯 그렇게 봐왔습니다. 종영 소식을 접하니 허전하고 섭섭해집니다. 원래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아 다른 연속극은 아는 게 없고 전원일기만 보거든요.’
최근 MBC 홈페이지 ‘전원일기’ 시청자 의견에는 종영 소식을 접한 시청자들의 아쉬움이 하루 100여건 씩 올라오고 있다. MBC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전원일기’는 제작진이나 출연자들 사이에서 내년 초 종영을 기정사실화한 분위기이다. 최불암 김혜자씨를 포함한 출연진 대부분의 의견은 첫회 제목처럼 ‘박수칠 때 떠나자’라고 한다.
전원일기 22년의 주역 최불암 김혜자씨가 절정을 달리는 인기인이다보니 공동 인터뷰 시간을 잡기가 무척 어려웠다. 스스로를 ‘집 귀신’이라고 칭하는 김혜자씨보다 최불암씨가 시간을 내기 더 힘들었다. 최씨가 장소와 시간을 여러 차례 변경한 끝에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 1층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장소에 김혜자씨가 먼저 나타났다. 종업원에게 ‘인터뷰 녹음을 하려는데 음악을 꺼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하자 김씨는 “다른 손님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돼요”라고 말렸다. 그러나 여 종업원은 인기 연예인의 등장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맞으며 음악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추어주었다. 최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빠듯한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곧바로 질문에 들어갔다.
―‘전원일기’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라는 평가가 있더군요. ‘전원일기’의 어머니 상에 갇혀 연기자로서 자질을 폭넓게 발휘하지 못했다고 할까요.
김혜자 : “옳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전원일기’ 외에 작품을 할 때는 굉장히 신중하게 골라야 했습니다. ‘전원일기’의 어머니 상이 다른 작품에 중복되면 안되니까요.”
―다른 작가들이 서운할지 모르지만 김정수씨가 10년 동안 집필할 때가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차범석 극본으로 출발했지요.
김 : “차범석씨는 얼마 쓰지 않으셨어요. 김정수씨가 쓸 때가 전성기였죠. 김정수씨가 ‘전원일기’를 제일 잘 표현한 작가라고 할 수 있어요. 김정수씨는 똑같은 인물, 똑같은 배경으로 10년 가량 쓰다보니 지쳤는지 거의 도망치다시피 이 프로를 떠났어요. 그 때는 지금의 어떤 드라마보다 인기가 있었습니다. ‘전원일기’를 안 보면 그 다음날 대화가 안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전원일기’에서 뭘 먹는 장면이 나오면 이튿날 시장에서 그 식품이 동이 난다고 할 정도였지요.”
―1980년에 방송국 간판 드라마를 시작하면서 무대를 농촌으로 잡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김 : “‘전원일기’를 농촌 드라마라고 하지만 사실은 농촌을 무대로 한 휴먼 드라마예요. 인간의 심성,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 같은 걸 그리려고 했습니다. 서울보다는 아름다운 산천을 배경으로 사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 그런 걸 표현하기가 더 좋아 시골을 배경으로 잡았던 것이죠. 그 때는 정말로 많은 사람이 ‘전원일기’를 보고 감동했습니다. 우리도 대본을 읽을 때면 마음이 설레곤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연습을 한 적도 있어요. 정말 가슴이 따뜻해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진하던 감동이 점점 시간이 가면서 퇴색하기 시작했어요.”
―전성기의 감동을 왜 지속하지 못했나요.
김 : “작가가 차지하는 몫이 참 크다고 생각해요. TV 드라마의 성패는 무엇보다 대본이 좌우합니다. 작가가 자꾸 바뀌면서 새 작가가 등장 인물들이 해오던 역을 그대로 계승하지 못했어요. 동일 인물한테서 전혀 다른 성격의 행동이나 말들이 나오면서 약간 갈지(之) 자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처럼 10년 동안 많은 분에게 감동을 준 휴먼 드라마였기 때문에 더 버틸 수 있었어요. 김정수씨 그만두고 3∼4년 뒤부터는 정말 힘겨웠어요.”
그때 최불암씨가 도착했다. 그는 ‘전원일기’ 김회장풍으로 카페를 한번 둘러보더니 “주위가 조금 소란스럽군요. 내가 장소를 잘못 골랐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소를 변경하는 것도 무리였다. 소형 디지털 녹음기를 마이크처럼 잡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김 :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시작할 때가 있으면 끝날 때가 있는 겁니다. ‘전원일기’는 끝날 때가 돼서 끝나는 거겠지요. ‘전원일기’가 처음에 워낙 좋았기 때문에 지금 나가는 것은 그 시절과 비교하기 곤란할 정도의 내용이 많아요.
요즘 드라마에서는 어른들 얘기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어요. 작가들이 자기 또래 얘기는 잘 쓸 수 있는데 어른들 얘기는 잘 모르니까 안 쓰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냥 마루에 멍청히 앉아 있거나 애들한테 ‘왔니’ ‘갔니’ 말하는 정도밖에는 할 게 없었어요. 전원일기를 다른 드라마와 차별화할 수 있었던 건 어른들의 삶에서 얻은 지혜를 전해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드라마와 흡사해지기 시작한 것이죠.
저는 2∼3년 전부터 이 드라마에서 빠지고 싶었어요. 내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 같고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곳에 얘기를 했습니다. ‘전원일기’를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막상 막을 내리기로 하니까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착잡해요.”
약속시간을 잡기가 어려웠던 최씨에게 “요즘은 무슨 일로 바쁘냐”고 묻자 “전원일기와 관계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며 질문을 막았다.
부모의 위치를 우리가 잡아주자
―‘전원일기’를 끝내는 양촌리 김회장의 감회는 어떻습니까.
최 : “방송국으로부터 끝내겠다는 확정 통보는 받지 않았습니다. 제작진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와 끝내야 하는 이유를 묻기도 하고 대답도 하고 그런 것 같습니다. 비슷한 후속 드라마를 만들겠다고 제작국장이 이야기 하더군요.”
―소재가 고갈됐고 연기자들이 지쳤다는 얘기가 나오던데요. 연기자들이 지쳤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최 : “오래 하면 구태의연해질 수밖에 없지요. 말하자면 아버지 어머니 이미지가 굳어지는 데서 조바심이 생기죠. 내 나이를 보면 앞으로 연기를 할 시간은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작진이 60,70대 연령도 볼 만한 드라마는 안방극장에서 인기가 없고 젊은 사람들 위주로 만들어야 시청률이 오른다고 말합니다.
1980년도에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드라마 세 개를 없앴어요. ‘수사반장’ ‘113 수사본부’ ‘암행어사’인데 없앤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치안이 좋아졌기 때문에 도둑놈 잡는 ‘수사반장’ 프로그램은 필요 없다는 거였지요. ‘113 수사본부’도 철통 같은 안보태세가 확립됐기 때문에 필요 없고, ‘암행어사’는 국민을 암행할 필요가 없는 정부를 만들겠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드라마가 강해 드라마 왕국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MBC가 22년 된 프로그램을 끝내겠다고 하는 것은 단지 소재가 부족하거나 연기자들이 권태로워서만은 아닐 거라고 봅니다. 어떤 맥락이 있겠지요.
물론 저희도 권태롭다는 말을 했습니다. 프로그램이 권태롭다기보다는 인물들이 모두 권태로운 거예요. 30대 작가가 일흔 살 먹은 아버지 어머니의 심리를 잘 묘사하지 못합니다. 김혜자씨도 말했지만 누가 나갔다 들어와 ‘아버지 다녀왔습니다’고 하면 ‘응, 일찍 왔니’ 이런 정도밖에 표현을 못하니까 30∼40년 연기한 사람들로서 너무 창피해요. 담당 PD에게 ‘우리가 이래서 되겠느냐’ ‘지금 안방에서 아버지의 위치가 사라지는데 아버지 어머니 위치를 우리가 잡아줘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홈드라마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고지신(溫故知新)입니다. 옛것이 있어야 새것이 있습니다. 역대 사장을 보면 취임하자마자 과거에 인기가 있던 프로그램부터 치려고 합니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는 기분으로 그러는 거지요.”
김혜자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한번도 서울을 벗어나 살아보지 못했다. 최불암씨는 인천에서 사업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와 성장했다. 농촌 경험이 전혀 없는 두 연기자가 농민 연기를 하자면 어색하거나 서투른 장면도 있었을 것이다.
―작고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지게 지는 자세가 틀렸다고 고쳐준 적이 있다면서요.
최 : “정주영 회장이 ‘당신 전원일기에서 지게 지는 걸 보니까 농사꾼 되기는 글렀어’ 하더군요. ‘지게를 뭘로 지는 줄 아느냐’고 물어서 ‘그야 몸의 중심으로 지죠’ 했더니 ‘그 얘기는 맞는데 지게는 목의 힘으로 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현장에 나가서 져보니까 그분 말씀이 옳더군요. 목이 핸들이고 목으로 기운을 쓰지 않으면 지게가 절대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이 정말 농사에 도통한 분이구나 하는 걸 느꼈죠.”
김 : “연기이기 때문에 농촌에 살아봐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물론 미숙한 게 있었겠지요. 그러나 드라마는 일하는 모습 자체를 담는 게 아니고 일을 하면서 느끼는 마음이 중요하지요. 한국인은 모두 농사를 짓던 사람의 후손입니다. 때문에 도시에서 나서 컸다고 하지만 내 속에도 농사 짓던 선조들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 같아요. 특별히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어요.”
두 연기자가 극중 부부로 22년 동안 해로하다보니 김혜자씨를 최불암씨의 부인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다. 최씨의 실제 부인은 인기 탤런트였던 김민자씨다. 김씨는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연기자의 길을 접었다.
MBC에 대한 아쉬움
―최불암씨와 극중에서 너무 살가워서 돌아가신 남편이 간혹 질투하지 않았습니까.
김 : “그러지 않았어요. 남편도 최불암씨 팬이었습니다. ‘전원일기’ 이전에도 부부로 많이 나와 최불암씨 부인 역은 그만하고 싶었는데 기획할 때 마지막으로 해달라고 해 맡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렇게 길어졌어요. 물론 우리 둘 사이에는 30년 가깝게 쌓아온 우정이 있죠. 오래된 친구입니다.
‘전원일기’의 종영은 우리에게는 굉장히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최불암씨와 다르게 생각해요. 아까 ‘전원일기’를 이렇게 끊는 것에 대해 무슨 의도가 있을 거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런 의도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2∼3년 전부터 ‘전원일기’를 그만하고 싶다, 더 이상 내가 거기서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배우는 대본을 보면서 가슴이 설렐 때 뭔가 충족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녹화 날 대본을 보아도 전혀 감흥이 없어요. 내가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데 시청자들한테 무엇을 전해주겠어요. 나는 배우로서 그것을 참 부끄럽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연기가 방송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면, 어떤 때는 무섭기조차 했어요.
어머니 역을 맡은 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권태로워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쉽다면 방송국이 좀더 신경을 쓰고 명실공히 자타가 공인하는 간판드라마가 되도록 제작비 등을 아끼지 말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말만 간판 드라마였지 별 신경을 안 쓰고 있었어요. 그냥 흘러가겠거니, 믿을 만한 배우들이 하고 있으니까 작가야 어떻든 다 꾸려가겠거니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우리는 참 힘들었어요. 제작국 사람들도 다음번 프로그램 개편 때까지만 해보라고 했습니다.”
김씨가 ‘전원일기’ 중단에 대한 최씨의 해석에 반론을 제기하자 최씨는 “정치적 의도가 아니라면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려는 방송국의 계획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며 처음의 강한 발언에 물을 탔다.
김혜자씨는 전원일기를 통해 한국적 어머니상을 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 : “의견이야 서로 달라야죠. 늘 같을 수는 없죠. 따로 하는 프로그램이 있지 않습니까. 김혜자씨가 나오는 드라마를 내가 비판하기도 하고 나도 비판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거 뭐냐는 식으로 이야기하다가 충돌할 때도 가끔 있었죠. 그 외에는 싸울 일이 없었어요.”
―두 분은 한국을 대표하는 아버지 어머니 상으로 대중에게 각인돼 있습니다. 두 분 이미지가 그렇게 굳은 것은 ‘전원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캔들이 없는 탤런트라는 세평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최 : “나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한국의 남성상을 내가 하는 역에 대입시키고 싶었죠. 한국인은 어떤 모습인가. 정말 한국인의 아이덴티티가 뭐냐는 쪽으로 공부도 제법 했습니다. 별로 건지지는 못했지만…. 우리 조상들은 흙과 같이 살면서 참고 기다림에 길이 든 분들이라 말수도 적고 몸으로 직접 실천하며 매우 둔탁한 인상을 풍깁니다. 흙으로 빚은 질박한 도자기 같은 성품입니다. 내 연기에 그런 모습을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버지 자리가 지금은 빈약해졌지만 옛날에는 사랑방과 아랫목이라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꼭 그 자리에 있고 싶어서 있었던 게 아니라 축을 하나 세우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요. 나는 ‘전원일기’에서 안방 아랫목에 축을 하나 세운다는 뜻으로 아버지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했죠. 어머니를 잘 모시고 아내와 사이좋게 살고 애들한테 강압적이지 않고 유순하게 알아듣도록 타일러서 그런 이미지가 형성됐다고 생각합니다.”
―도덕 교과서 같은 ‘전원일기’ 내용이 두 분 삶에 투영돼 스캔들을 예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 : “‘전원일기’는 정말 한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을 지닌 어머니를 그렸어요. 시어머니 잘 모시고 남편한테 순종하고 자식들한테 헌신적이고, 그러면서 지혜롭고 과묵한 어머니상을 창조했습니다. 나는 한때 ‘전원일기’가 내 인생의 스승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전원일기’에서 가정교육을 받고 아내 노릇을 배우는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뭘 배우는 것 같은 드라마였어요.
연기하는 배우가 드라마를 통해 뭘 배우는 느낌을 가지니 시청자들한테 주는 영향은 더 컸겠지요. 그랬기 때문에 이 드라마가 점점 추락해 망가지는 듯한 기분이 들 때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출연료는 노코멘트
―실례가 되겠지만 독자들이 궁금해 할 것 같은 질문을 해보지요. 두 분이 MBC로부터 출연료는 얼마나 받았습니까.
김 : “그건 말하지 않겠어요. 요즘 스포츠지 같은 데서는 젊은 배우들이 얼마 받는다고 흥밋거리로 보도합니다. 배우는 흥미의 대상이니까 알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이 느끼기에 기가 막힌 액수를 한 해에 받는다고 하면 그들에게 별로 좋은 영향을 주지 않아요. 생각 있는 연기자라면 절대로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 같아요.
여배우의 나이를 묻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김혜자라고 이름 쓰고 괄호 안에 몇 살이라고 밝히는 건 엄청난 결례입니다. 배우의 나이가 알려지면 무슨 역을 할 때 방해를 받아요. 내 나이보다 늙은 역을 할 수도 있고, 내 나이보다 젊은 역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틀을 깨지 못하고 몇 살이라는 걸 자꾸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인기 연예인은 세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고액의 개런티를 받는다. 희귀한 재화가 시장에서 비싼 값에 팔리듯이 수요가 큰 재능을 가진 사람이 높은 소득을 올리는 것은 시장경제의 논리다. 그러나 개런티와 나이에 대한 김혜자씨의 대응이 너무 진지해 보충 취재를 하지 않기로 했다.
―‘전원일기’ 출연료가 생활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됐을 텐데 큰 수입 항목이 줄어들면 타격이 있는 것 아닙니까.
최 : “그런 건 걱정 안합니다. 벌어놓은 돈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나는 그냥 연기할 뿐입니다. 연기하다 보면 거마비든 생활비든 주는 거니까 받아서 쓸 뿐이죠. 출연 못해서 돈 없으면 다른 거라도 해서 벌어먹고 살아야죠.”
김 : “나는 괜찮지만 ‘전원일기’에 의존해 생활하던 몇몇 연기자와 제작진이 걱정돼요.”
젊은 연기자들이 텔레비전에서 얼굴이 팔리면 영화 쪽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다. 영화 쪽이 출연료도 높고 아무래도 드라마보다는 작품성이 높다는 인정을 받는다. 두 연기자는 영화 쪽에 발을 깊이 들여놓지 않고 안방을 지킨 편이다.
―영화에는 몇 편이나 출연했습니까.
최 : “1980년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에 출연한 것이 마지막입니다. 제작비가 없다고 해서 무료로 출연했습니다. 영화 안한 지 23년이 되죠. 79년까지 20∼30편 출연했을 겁니다. ‘수사반장’이나 ‘전원일기’가 있으니까 안방 지킴이가 된 것이죠.”
김 : “영화는 잘 하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TV는 예술 작품을 만들려고 애를 써도 불가능해요. 그때그때 시청자들의 반응에 따라서 대본이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뜻대로 할 수가 없어요.
영화는 꼭 두 개 해봤어요. 옛날에 ‘만추’라는 걸 했고 3년 전에 ‘마요네즈’라는 작품을 했습니다. 두 영화 모두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탔어요. 요즘 한국 영화가 가능성을 보이고 있어 배우로서 참 반갑게 생각해요. 세계 각국을 많이 다녀본 편인데요, 아무리 가난해도 문화가 있는 나라는 깔볼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근사한 빌딩이 들어찼어도 돌아볼 것이 없고 문화가 없는 나라는 우습게 보이더라고요. 아까 출연료에 대해 말했는데 살아가자면 돈은 대단히 중요해요. 그렇지만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지금은 뭘 해도 밥 굶지는 않아요. 어디다 가치를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우리가 앉아 있는 쪽을 흘끗흘끗 쳐다보는 손님들이 있었다. 유명인으로서 살자면 익명 속에 숨어사는 잔잔한 재미를 놓치고 사생활 침해 등 불편함이 많이 따를 것이다.
최 : “나는 불편한 게 별로 없습니다. 내놓고 사니까요. 배우는 베일이 있어야 좋다고 하지만 안방으로 들어간 것 자체가 이미 베일을 벗은 거니까요. 영화배우는 사는데 불편을 많이 느낄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청자들이 다 가족이고 동생이고 어머니 아버지 누이 같다고 생각하니까 불편함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면 인사를 나누고 포장마차에 가서 술을 마셔도 같이 한잔 하자고 그럽니다.”
―김혜자씨는 여성 연기자라서 최 선생과는 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김 : “나는 잘 안 돌아다녀요. 집 귀신이에요. 나가려면 화장을 해야 하는 게 번거롭거든요.
그러나 어디 가서 뭘 사더라도 장사하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더 싸게 주고 친절하게 대해줍니다. 그런 점에서 불편한 건 없습니다. 그렇지만 연기자는 신비감이 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너무 터놓으면 아무래도…. 그게 남들하고 다른 점인가 봐요.”
김혜자씨의 부군은 4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떴다.
하나님 덕분에 금연 성공
―혹시 재혼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김 : (웃음) “예, 없어요. 어저께 케이블 TV에서 ‘아버지’라는 영화를 하더라구요. 거기 주인공이 남편처럼 췌장암으로 죽었어요. 그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현식 아빠 미안해’ 하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췌장암에 걸린 남자 주인공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니야, 저건 영화니까 몰라. 저 정도가 아니었어. 현식 아빠는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봤어요.”
김혜자씨 부부는 남매를 두었다. 둘 다 결혼해 딸은 미국에 산다.
협객 김두한씨 일대기를 다룬 SBS의 ‘야인시대’가 인기를 끌고 있다. 한때 사극이 인기를 끌자 방송 3사가 경쟁적으로 사극을 했는데 ‘야인시대’가 인기를 끌면 혹시 사극시대가 가고 조폭드라마 시대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김 : “외국에도 사랑을 그린 아름다운 드라마도 있고 폭력물도 있지요. ‘야인시대’나 ‘여인천하’도 있을 수 있는 거고 ‘전원일기’ 같은 드라마가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사극이 ‘야인시대’보다 나을 것도 없어요. 너무 야사만 다루는 바람에 얻어지는 건 없고 만날 여자들 아귀다툼 하는 소리만 들려 교육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한번쯤 나가는 건 괜찮지만 줄곧 그런 식으로 방송되는 건 정말 진력이 나요. 안 보고 외면하게 되죠.
어제 KBS에서 ‘고독’이라는 미니 시리즈를 봤어요. 유승범 이미숙씨가 나오는 드라마가 아주 아름답더라고요. 나이 어린 남자가 연상의 여자를 좋아하는데 그 좋아하는 방식을 신선하게 그리고 있었습니다. 드라마 소재가 고갈됐다는 말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람 사는 일이 거기에서 거기를 맴돌지만 어떤 시각으로 다루느냐가 중요하지요.”
최불암씨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와 최씨는 옆 테이블로 가서 전화를 여러 통 받고 걸었다. 다행히 김혜자씨는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지 않는다. 집 귀신이라니 휴대전화가 필요 없을 것이다. 최씨가 전화로 일을 보는 동안 김혜자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혜자씨의 부친 김용택씨는 우리나라 경제학 박사 2호였다. 미군정에서 재무부장(장관급)을 했고 정부 수립 후에는 사회부차관을 지냈다. 경제이론에는 해박했지만 경제행위에는 별로 밝지 않아 세상을 뜰 때는 누옥만 남겼다고 한다.
딸이 연기자로 성공해 아파트를 사드리겠다고 했다가 꾸중만 들었다. 부친은 김혜자씨에게 좋은 책을 많이 읽고 드라마 바깥 세상에도 관심을 가져야 명배우가 된다는 말을 남겼다.
―경기여중고에 이화여대를 졸업하셨으니까 어려서부터 공부는 잘했겠네요.
김씨는 서슴없이 “예, 잘했어요”라고 대답했다. 얼마나 잘했기에 이렇게 자신있는 대답이 나올까.
김 : “초등학교 때 1등 해야 경기여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반에서 1등 말입니까.
김 : “아뇨, 전교 1등. (웃음) 전교 1등들이 모인 학교라서 경기에 들어가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어요.”
김혜자씨는 분장실에서 항상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왕골초로 알려져 있다. 하루에 한갑 반을 태웠다. 좋아도 피고 속상해도 피고 노상 피웠다. 왕골초가 어느날 담배를 뚝 끊었다.
―담배는 어떤 계기로 끊었습니까.
김 : “남편 죽기 6개월 전쯤 끊었어요. 사위가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합니다. 딸이 외로우니까 교회를 열심히 다녀요. 크리스천들은 절벽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낭떠러지에서 너무 외롭고 힘들 때 하나님이 만나주신다는 얘기를 하거든요.
엄마가 담배를 피우면 몸도 상하고 별로 보기도 좋지 않으니 담배 끊게 해달라고 딸이 석달 동안 새벽 기도를 했대요. 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어 내가 담배 피우기가 싫어졌어요. 뚝 끊었는데 금단현상이 심하지 않았어요. 딸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셨다며 울었어요. 나는 크리스천이라서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뭐든지 다 하실 수 있지요.”
정치인으로 외도한 것이 좋은 경험이었다는 최불암씨.
김 : “나는 계획을 세우고 산 적이 없어요. 순간 순간 충실하게 살아요.”
최불암씨가 통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영화배우나 탤런트들 중에 정치 외도를 했던 분들이 더러 있죠. 강신성일 의원은 2전3기로 의사당에 입성했고 최선생도 한때 전국구 의원을 했습니다. 정치를 해보니 어떻습니까. 국민배우란 명성이 있던 사람이 의사당에서 별 영향력이 없는 초선의원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각도 있어요.
최 : “나는 정치할 때가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고 봅니다. 물론 TV를 통한 영향력도 크지만 국정 전반에 대한 것을 직접 체험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정치 경험은 내가 TV드라마를 하고 문화활동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고 정주영 회장이 국민당을 만들면서 최씨를 발기인으로 참여시켰다. 그는 이름을 빌려주되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뜻을 밝혔다. 하지만 정회장의 집념은 대단했다.
국회의원 선거 유세가 시작되면서 정회장은 지원연설은 하지 않아도 좋으니 유세장 단상 옆에 앉아 있어달라고 부탁해 거절하지 못하고 정회장이 연설할 때 옆자리를 지켰다. 그는 정회장에게 끌려 국민당 전국구 4번으로 의사당에 들어가게 됐다.
―이번 대통령선거에 그분의 아들(정몽준 의원)이 출마했는데 도와달라는 얘기는 듣지 않았습니까.
최 : “정의원은 중앙고등학교 후배입니다. 각별하게 관심을 갖고 있고 선배로서 후배가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정치 마당을 떠났습니다. 내가 뒤에서 후배를 도와주는 활동도 결국 정치행위이니까 유감스럽지만 못하고 있습니다.”
―농촌의 앞날이 아주 어렵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의해서 연차적으로 쌀 수입을 확대해야 합니다. 쌀 한 가마가 국제 시세로는 3만∼4만원이지만 우리나라는 16만원입니다. 농민 복지를 생각하면 쌀값을 더 올려야 되는데 국제 시세와 비교하면 더 내려야 됩니다. 농촌에는 노인과 도시로 나가 일자리를 잡을 수 없는 사람들만 남아 있어요. 전원일기를 하면서 혹시 농촌 문제를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최 : “농촌의 미래에 대해 비전을 제시해줘야 하겠지만 조금만 민감한 쪽으로 나가면 항의가 들어옵니다. 농민들은 농민들대로 ‘너희가 농사에 대해 뭘 아느냐’고 나무라고 행정부에서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합니다. ‘전원일기’는 농민들의 애환을 그리는 선 이상을 넘기 어려워요. 농촌이 WTO 체제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는 것은 전문가들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니에요. ‘전원일기’는 농사 문제를 걱정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마음 농사를 짓는 드라마여서 농촌문제의 현실에 깊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전원일기’ 무대가 시청자들의 항의 때문에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농민이 어디 있느냐, 냉장고 없는 농민이 어디 있느냐, 냉장고 들여놔라, 전기 켜라, 자동차 사라 등등 주문이 참 많습니다.”
최불암 시리즈
―최선생은 언제까지 연기를 할 계획입니까.
최 :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니터해 보고 내가 잘못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지요. 나는 노인 역을 젊을 때부터 했어요. 그래도 연령에 따라서 서너 번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작가 연출가 연기자 다 포함해서 좋은 동지들과 멋진 작품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드라마는 공동 작품이라서 나 혼자서 뛰어봤자 될 리도 없구요.”
1990년경에 최불암 시리즈라는 조크가 유행했다. 신세대 취향이라서 다소 썰렁했지만…. 최불암 약국에 손님이 들었다. 손님이 쥐약 좀 달라고 했다. 최불암 약사 왈 “쥐가 어디 아픈가요.” 이런 식이다.
최 : “나도 아주 재밌게 생각했어요. 아마 1990년경으로 민주화가 되면서 데모가 사라지고 인터넷 세대가 사이버 공간에 카페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시기였죠. ‘전원일기’의 김회장이 현실과 조금 동떨어진다고 판단한 젊은 네티즌들이 김회장을 희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대화에 나를 끼워준 것은 고맙지요. 최불암 시리즈 바람에 초등학교 중학교 아이들과도 마음을 터놓고 허물이 없어졌습니다.”
―부인 김민자씨는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연기생활을 희생한 데 대한 불만이 없습니까.
최 : “연기자끼리 결혼을 하면 두 사람 중 한 쪽이 희생하기 쉽습니다. 우리 부부는 아내 쪽에서 희생을 했지요. 그 사람은 그렇게 일을 많이 하고 싶은 욕심도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요. 남편이 열심히 연기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자기는 가정을 돌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까.
최 : “영화는 비디오를 통해서 다 봅니다. 조금 늦게 볼 뿐이죠. 최근에는 ‘오아시스’를 좋게 봤어요.”
최불암의 이미지가 앤터니 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시청자도 더러 있다. 앤터니 퀸은 실로 뛰어난 배우다.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보면 본전은 건진다. 그는 매우 다양한 역을 잘 소화해낸다. 그러나 최씨는 ‘수사반장’ ‘전원일기’ 등 장기 안방 드라마를 하다보니까 연기의 틀이 고착돼있는 느낌을 준다.
―수사반장과 양촌리 김회장 역이 연기 생활에 장애요소로 작용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최 : “잘보셨습니다. 나의 연기 생활은 ‘수사반장’하고 ‘전원일기’로 끝난 것 같아요. 이런저런 사랑 연기도 해보고 그랬으면 좋았을 듯싶어요. 유감스럽게도 두 작품으로만 이미지가 고착돼 연기 폭이 좁아졌지요. 다양한 역을 해보지 못해서 불만스럽습니다.”
―김혜자 선생은 어떤 배우를 좋아합니까.
김 : “나는 영화관에 잘 안가고 1년 후에 비디오로 나오는 걸 보는데요. 얼마전 ‘오아시스’라는 영화를 봤어요. 지나가다가 어느 극장에 간판이 붙어있어 차를 세워달라고 해서 들어가 봤지요. 참 많은 느낌을 주는 영화였어요.
우리 연기자들이 잘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구요. 맡은 역을 잘 소화해내는 연기자가 좋아요. 다시 말하면 어떤 역에서 그 연기가 빛날 때 그 배우가 더 없이 좋습니다. 자기 자리가 어딘지 잘 아는 배우가 좋다는 말입니다.
굳이 찍으라면 잉그리드 버그먼을 좋아해요. 어렸을 때 어니스트 헤밍웨이 원작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봤습니다. 참 아름다웠어요. 외모도 아름다웠지만 그 역이 참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잊혀지지 않아요. 잉그리드 버그먼은 대단히 정숙해 보이지만 어려서 어떤 유명한 감독한테 당신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어요. 나중에 유부녀로서 그 감독과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합니다. 영화에서는 정숙하기 이를 데 없는 역을 연기했지만 그렇게 내재된 정열이 있었기 때문에 좋은 연기를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대통령선거 철인데 정치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까.
김 : “전혀 없어요. 가끔 좋지 않은 정치 행태를 뉴스에서 보면 ‘아휴 세금 걷어 쓰면서 우리와 생각이 저렇게 다를 수가 있나’하는 생각을 해요. 우리는 전혀 관심도 없는 일을 갖고 왜 저렇게 야단일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누가 화살에 맞았다고 해보세요. 정치인들은 그걸 빨리 뽑아 치료해줄 생각은 안하고 화살은 어느 방향에서 날아왔으며, 무슨 나무로 만들었으며, 화살촉은 무슨 금속이며, 또 화살맞은 사람은 뭐하던 사람이냐는 걸 따지고 있는 것 같아요. 국민이 뭘 원하는지 저렇게 모르나 싶어요.”
―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맙습니다. 잡지라서 출연료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원일기’ 22년의 위업에 대해 한마디 부탁하겠습니다.
최 : “드라마에는 정치 문화 경제 철학이 다 포함돼 있습니다. 학교 공부만 잘해 시험 잘 친다고 좋은 드라마 만드는 건 아니거든요. 삶의 의미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드라마를 만들어야 하는데 요즘 드라마는 이걸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전원일기’가 그런 쪽으로 고민을 했습니다. ‘전원일기’가 끝나더라도 후배들이 사회에서 부도덕하다든지 나쁜 것들은 드라마를 통해 정서적으로 용해시켜주고 희석시켜주는 작품을 만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해외에 나가 있는 500만 동포들이 ‘전원일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고향은 잊을 수 없는 본능과 같은 겁니다. ‘전원일기’를 보면서 정말 고향에 가서 부모형제를 만나는 것 같은 대리만족을 얻었습니다. 고향 생각이 나고 향수병이 깊어지면 외국에서 살기 어렵대요. 이걸 달래주던 드라마가 사라지게 돼 해외동포들에게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어느날 미국 일리노이주 대학 교수로 일하는 분이 가족을 데리고 찾아왔어요. 서양 여자를 한 분 데리고 와서 자기 며느리라고 소개해요. 한복 입고 와서 한국식으로 절하고 떡 하나 드십시오,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이러더군요. 서양 며느리가 ‘전원일기’ 테이프만 보고 한국의 예절을 14개월 동안 배웠답니다. 한국말을 잘 하고 예의범절이 정확해요. ‘전원일기’를 통해서 할 일이 상당히 많다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전원일기’는 마음 농사를 짓는 텃밭이었습니다. 삶의 느낌을 전달해주고 우리가 가진 고유의 정서를 이해시키는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해외동포 시청자에 미안
―김혜자 선생도 ‘전원일기’에 대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김 : “나는 ‘전원일기’를 하는 동안 최선을 다했어요. 어머니상을 연구하기 위해 책도 많이 보았구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 같은 건 없어요. 시청자들이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어른들이 보는 동화 같았던 ‘전원일기’를 능가하는 프로그램을 낳기 위한 종결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나를 어떤 틀 속에 가두었다고 하지만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인상적인 드라마를 많이 했죠 ‘겨울 안개’라는 슬픈 드라마도 했고 ‘사랑이 뭐길래’라는 재미난 드라마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드라마를 했는데 앞으로 ‘전원일기’가 끝나는 시점이 제 연기에 전환점이 되리라고 생각해요. 더 좋은 작품을 통해 여러분들과 다시 만나 뵙기를 바라요.”
인터뷰를 마치고 바로 앞 여의도 공원에 나가 사진을 몇 커트 찍었다. 사진기자가 다정한 포즈를 요구하자 최씨는 “약혼사진처럼 찍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여의도 공원에 산책 나왔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사진 촬영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