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는 항상 내 머리 위에 올라가 있던 무거운 바윗돌 같은 존재였다.
- 나는 그렇게 권위적인 아버지가 싫었고, 그 아버지로부터 빨리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 어느덧 세월이 지나 노인이 된 나는 지난 세기 일본은 ‘아버지 죽이기’에 몰두한 사회였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에 아버지는 없다.
구로다 특파원의 부친 구로다 쓰카사(黑田司)씨는 결혼 후 구로다 특파원의 형(1936년 생)을 낳은 후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공병대 병사로 입대했다. 제대하고 나서 구로다 특파원이 태어났는데, 부친은 다시 출전해 대만과 필리핀전선에 투입되었다.
나의 부모님은 1980년대에 돌아가셨다. 두 분 다 70대였다. 지금은 80 인생이 보통이지만, 나름대로 장수하셨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4형제 중에 둘째다. 그런데 한국에 살았기 때문에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항상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제대로 효도 한번 못했다.
지금의 일본은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국민적 작가로 존경받다 10년여 전에 사망한 유명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씨는 일본 국민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아름답게 늙자”라고.
아버지를 죽인 일본의 근대화
일본은 이미 고령화사회가 된 지 오래다. 도처에서 노인들이 눈에 띈다. 나도 이제는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 되었다.
나는 불효자였지만, 한 가지 효도는 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내 걱정은 하지 않게 살아왔다는 점이다. 학교성적이나 취업, 가정생활, 돈문제. 무엇하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불효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의존하지 않는 ‘독립정신’을 부모님으로부터 배워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 부모님 곁을 일찍 떠나 사회인으로서 독립 생활을 하게 됐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부모님과 소원해지는 요인이 됐다.
‘개인으로서의 독립정신’과 ‘부자(父子)간의 정’은 원래 대립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나는, 이 둘을 공존시키는 지혜가 부족했다. 내가 젊었던 시절 일본에서는 근대적인 정신을, ‘자아확립’ 즉 가족으로부터 개인을 독립시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부자간의 정’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근대화 일본의 아들’중의 한 명인 나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다.
내가 특파원으로 서울에 온 것은 1980년 9월이었다. 그해 일본의 NHK TV는 대하드라마 ‘사자(獅子)의 시대’라는 사극을 방영하고 있었다. 이 드라마는 일본의 근대화혁명인 메이지(明治)유신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드라마의 무대가 된 곳은 내 고향인 사쓰마(현재의 가고시마·鹿兒島)였다. 사쓰마 출신 엘리트들은 메이지유신의 주체세력으로, 메이지 정부에서 군이나 경찰 같은 권력의 핵심을 차지했다.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를 위해 신분제를 폐지하고 그때까지의 지배계급이던 무사계급을 없애버렸다. 메이지유신이라는 근대화혁명을 일으킨 것은 무사계급이었지만, 혁명에 성공한 후 이들은 스스로 계급적 특권을 포기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 역사에서 전례 없는 일로 메이지유신 혁명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특징이다.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무장반란이 공교롭게도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사쓰마에서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킨 것은 수구적인 무사계급이었다. 그러자 신정부는 무력을 동원해 이들을 진압했다. 사쓰마는 일본의 남서부에 위치했기(규슈 섬 남쪽) 때문에 ‘서남전쟁’으로 불렸는데, 내란은 거의 8개월간 지속되었다.
‘사자의 시대’에는 이러한 역사가 잘 그려졌다. 주인공은 혁명주체세력으로 중앙정부의 사법관료가 된 청년이었다. 주인공은 고향에서 일어난 무장반란을 진압하는 정부군의 참모로 임명돼, 고향인 사쓰마로 파견된다. 그리고 반란군에 가담하고 있던 아버지를 죽인다.
이 장면에는 ‘국민통합’과 ‘국가통합’을 위해서는 ‘부자간의 정’이나 ‘고향에 대한 배려’를 거부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에 있어서는 근대화를 의미했다.
일본은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근대화를 달성했다. 그래서 일본의 근대사는 슬픈 역사인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부드럽게 말하면 이것은 ‘부자간의 정에 대한 거부’이고 ‘가족과 혈연에 대한 부정(否定)’이다. 일본사람은 근대화를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필수라고 여기고 실천했다. 나도 그런 교육을 받았고 그렇게 자랐다.
1945년 패전 후 일본에서는 또 한번 근대화 혁명이 전개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 즉 서양문명에 패배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1945년 패전은 ‘제2의 개국’이라고 할 수 있다. 개국은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다. 1945년 이후 미국 지배하에 들어간 일본 사회는 군국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거부정·자기부정을 강요받았다.
나는 1941년에 태어났지만, 1945년 패전 이후의 교육을 받았으므로 ‘전후세대’이다. 나와 같은 ‘전후세대’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제1의 개국’의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제2의 개국’으로부터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모순과 갈등이 발생하였다.
내가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그 사이 한국 사회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경제발전으로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생활환경은 편리해지고 깨끗해졌다. 사람들이 접하는 일상적인 정보량이 늘어나고 다양해졌다. 물질적으로는 이미 선진국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질서의식이나 준법정신은 여전히 부족한 듯하다. 한국인 자신도 이러한 점을 자주 지적하고 있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나는 ‘질서의식과 준법정신’을 놓고 일본과 한국을 비교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나에게 ‘질서와 준법’은 아버지 그 자체였다.
50년 전 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치신 핵심은 ‘질서와 준법’이었다. 물론 “열심히 공부해라”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훨씬 더 강조한 것은 ‘질서와 준법’ 쪽이었다. ‘질서와 준법’은 사회적·법률적인 질서와 준법 같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일상생활에 관련된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말씀은 ‘정리·정돈’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입었던 옷을 잘 개서 베개 옆에 두고 잘 것, 책상 위는 항상 깨끗하게 정리해 둘 것, 벗은 신발을 가지런히 하고 방으로 들어올 것, 식사 때는 먹기 전에 꼭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할 것, 먹고 난 다음에는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할 것, 나온 음식은 절대 남겨서는 안되며, 공부는 항상 목표를 정해두고 계획적으로 할 것, 방학은 계획적이고 규칙적으로 보낼 것, 약속시간은 꼭 지키고 일은 가능한 한 빨리 끝낼 것….
그리고 행동은 씩씩하게 하고, 부모가 하는 말에는 반대하거나 말대꾸를 해서는 안된다. 되도록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남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울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항상 ‘절약’과 ‘인내’ ‘자기책임’을 강조하셨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우리 형제에게 가르친 것은 ‘군대식’ 규율이었다. ‘정리’ ‘정돈’ ‘규칙’ ‘계획성’ ‘신속’ ‘복종’ ‘절약’ ‘인내’ ‘자기책임’등등. 이것들은 모두 군대생활의 기본자세 아닌가. 아버지는 아마도 군대에서 경험한 것을 그대로 자식들에게 가르쳤던 것 같다.
구로다 특파원의 부친 구로다 쓰카사(黑田司)와 어머니 구로다 시즈에(黑田靜江)의 신혼여행 사진. 히로시마의 유명한 해상공원 미야지마(宮島)에서 찍은 것이다.
아버지는 두 번이나 징병을 당하셨는데 첫 번째 징병 때는 중국전선에 참전하셨다. 병과는 공병, 계급은 하사관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 징병으로 대만과 필리핀전선에 참전했다가 패전으로 귀국한 다음에는 오랫동안 말라리아로 고생하셨다. 그리고 체신부 관련 부처에 하급 공무원으로 들어가 정년퇴직 때까지 근무하였다.
아버지는 징병으로 군대에 갔으니 결코 직업 군인 출신이 아니다. 그러나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은 군대식이었다. 아버지는 몰락한 하급 무사계급 출신 농가의 자식이셨다. 도쿄(東京)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오사카(大阪)에서 직장을 얻었다. 농촌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공부하고 도시에서 취직했으니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전형적인 ‘돈벌이 취직’을 하신 것이다. 나는 그 도시 출생의 2세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나의 고향은 가고시마(鹿兒島)다. 가고시마는 역사적으로는 보수적인 사무라이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일본에서의 고향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 아니라 집안이 대대로 자리 잡았던 곳이다).
아버지에게 ‘근대’는 아마 ‘군대’였을 것이다. 그 결과 아버지는 고향의 전통적인 사무라이 문화와 근대국가에 걸친 군대문화를 가정교육의 양 축으로 삼았던 것 같다. 나의 가설이지만, 근대 이후 일본 사람이 갖게 된 질서의식과 준법정신은 군대 경험과 학교교육의 결과라고 본다. 아버지 경우에는 특히 전자(군대 경험)의 영향이 더 컸다고 생각된다.
군대식 가정교육을 하신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아주 엄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웃는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어딘가 데리고 놀러가 주신 적도 없다. 가족여행이나 외식도 없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도 좀처럼 칭찬해 주시지 않았다. 좀더 위를 목표로 삼으라는 말씀뿐이었다.
그 결과 나는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립심을 깨쳤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내 좋은 학교에 들어가 좋은 직장을 얻어 사회인으로서 빨리 독립하고 싶었다. 이러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한국에 와서 생활하면서 크게 놀랐다.
한국은 징병제가 존재해, 남자라면 모두 군대에 간다. 60만 젊은이들은 군대경험을 통해 군대문화를 몸에 익혀 가정으로 돌아오지만 어쩐 일인지 일상생활에서 군대생활의 영향이 아주 미미하다.
물론 민주화시대를 맞이하여 ‘군사문화’라는 말이 나오고 그것을 부정하는 말이 한국에서 유행했다. 그러나 무슨 말로 표현하든, 일본인의 눈으로 볼 때 군사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질서의식과 준법정신’은 한국 사회에서 잘 발견되지 않았다. 모든 남자가 군대에 가는 한국 사회에 왜 질서와 준법정신이 정착되지 않는걸까?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과 같은 일상적인 교육(?)은 한국 가정의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기업이나 학교라는 집단생활에서는 가끔씩 보여도, 어쩐 일인지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런 기억이 있다. 내가 상주특파원으로 서울에 온 1980년 9월은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시작된 시기다. 당시 신문이나 TV에서는 ‘줄서기 운동’을 전개했다. ‘사회적 질서는 줄서기부터’라는 문구가 지금도 뇌리 깊이 남아 있다.
줄을 선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줄을 서지 않는 것은 기다리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 기다려도 자기 순서가 오지 않을까봐 불안하기 때문에 줄을 서지 않는 것이다. 줄을 선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의미하고, 반대로 줄을 서지 않는 것은 불안을 의미한다.
‘줄서기 운동’은 미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갖자는 운동이었다. ‘기다리면 반드시 자기 순서(행복)가 온다’는 미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감을 준다면, 사람들은 줄을 설 수 있을 것이다. 버스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정확히 온다면, 그리고 기다리던 손님은 반드시 버스에 탈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손님은 줄을 서는 것이다.
군대교육의 핵심은 줄을 서는 것인데, 왜 한국 사회에는 줄을 서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을까. 나는 무척 의아스러웠다. 줄 서는 것과 규칙과 법을 지키는 것은 상당히 유사하다.
한국의 아버지들은 가정에서 자식에게 군대식 교육을 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한국에서는 군대생활은 어디까지나 비일상의 세계일 뿐이다. 부정하고 거부해야 하는 세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군대에서 얻은 문화와 습관을 일상세계로 가져 가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다시 우리 아버지 이야기로 돌아가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항상 “당신은 봉건적이다”라고 비판하셨다. 그래서 부부싸움도 적지 않았다. ‘봉건적’이라는 말은, 1945년 패전을 계기로 미국식(?) 문화가 유입된 후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간 전후(戰後) 민주화시대의 유행어였다.
어머니 말씀대로라면, 아버지의 군대식 가정교육은 봉건적인 것이다. 또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아버지의 태도는 봉건적이어서 마음에 안 들었다는 것이 된다. 가정에서 나온 ‘봉건적’이라는 비판은, 지금 생각해보면 ‘가부장적이고 일방적인 것’ 또는 ‘권위주의적이며 남존여비(男尊女卑)적인 것’ 아니면 ‘아내나 자식의 의견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비판을 무시하고 사셨다. 그래서 나에 대한 군대식 가정교육에는 변화가 없었다. 자식은 성장과정에 ‘반항기’를 거치는데 이 시기에는 엄한 아버지를 꺼리게 된다. 나는 아버지한테 자주 대들고 반항했고 그로 인해 맞은 적도 많다.
특히 어머니에 대해서 애정을 표시하지 않는 아버지(그렇게 보였다)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같은 어른은 절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아버지 영향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나는 아버지에게 반항하기보다는 아버지를 무시하는 쪽을 선택했다. 아버지나 가정, 가족에 대한 관심을 끊고 내 자신의 세계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우리 집은 지성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서민가정이었는데, 나는 독서에 열중하였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아버지는 구두쇠여서 여간해서는 용돈을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책이나 잡지를 살 돈은 주셨다. 아버지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대학 진학을 자식에게 기대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전후 일본사회는 미국의 주도 하에 과거의 군국주의를 부정하느라 바빴다. 이른바 민주화시대였는데, 정치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좌익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학교 교육이나 출판계, 언론계는 좌익적인 것을 좋아했다. 거기서는 권위주의가 부정되었고 ‘하극상’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것이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그 무엇보다 권위주의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군국주의적인 과거’의 대표가 되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를 거부하는 것이 민주화이고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나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이제는 내가 ‘그 아버지’가 되어…
현대 일본사회는 ‘아버지 부재 사회’로 일컬어진다. 무거운 바위처럼 자식들 머리 위에 있던 권위적인 아버지가 사라졌기 때문에 가정은 붕괴하고 인간관계는 황폐해졌다. 그 결과 젊은 세대가 무기력하고 패기를 잃었다고 볼 수도 있다.
고집 세고 완고한 아버지는 자식을 강하게 키운다. 아버지의 강제력이나 명령은 자식과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결과적으로 자식에게 반항심을 키우는데, 그것이 독립심을 일깨워준다. 그렇게 하여 아버지를 뛰어넘는 것이 진정한 성장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나는 아버지께 진정으로 감사한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혐오감이 더 컸다. 아버지 같은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강한 ‘정’을 느낀다. 특히 돌아가신 뒤에 더욱 그러하다. ‘효도하고 싶을 때는 부모가 안 계신다’는 말을 절감하고 있다.
‘부자간의 정’은 원래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효도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이 진짜 효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나는 요즘 돌아가신 아버지를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나 자신이 자식들에게 어떤 아버지인지 지나간 날들을 씁쓸하게 돌이켜 볼 때가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