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둬야 한다는 게 생활철학
- 가수가 롱런 하려면 TV보다 무대에서 승부 걸어야
- 교과서에 실린 ‘친구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 뮤지컬 하려는 이유? 대중이 변하는데 음악이 그대로면 안 되니까…
- 아내 잃은 상처, 좀체 아물지 않아
- 음악·소리·영상·무대 아우른 종합예술연구소 건립이 꿈
‘어두운 도시에는 아픔이 떠 있고, 진실의 눈 속에는 고통이 있고, 답답한 내 가슴에 간절한 소망….’
화려한 조명이 터지고 레이저 광선이 어둠을 갈랐다. 애니메이션이 투사된 장막을 뚫고 나와 노래하는 조용필은 화려한 의상을 숨 가쁘게 갈아입었다. 5인조 밴드 ‘위대한 탄생’의 열광적인 연주, 백 코러스의 화음, 솟아오르는 연기, 객석 위에 흩날리는 색종이….
그러나 관객은 무대가 아무리 요동쳐도 인형처럼 앉아 있다 노래가 끝나면 조용히 박수를 쳤다. 관객의 복장은 남성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 여성은 빛깔만 달랐지 한복 일색이었다. 원색의 치마저고리가 객석을 화사하게 수놓았다.
조용필의 공연은 평양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북한 관객의 태도는 예의바른 유치원생들 같았지만 카메라를 통해 클로즈업된 얼굴에는 조용필과 무대에 빨려든 표정이 역력했다.
조용한 북한 관객
서울 강남 YPC 프로덕션 사무실에서 평양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작은 거인’을 만났다. YPC는 ‘용필 조’의 영문 이니셜. 보라색렌즈 안경을 쓴 조용필은 청색 재킷에 노란색 계열의 면바지 차림이었다. 머리숱이 짙고 흰머리가 한 올도 눈에 띄지 않았다. 사진을 찍을 때 “염색하셨나요?” 하고 가볍게 물었으나 대답이 없어 묻는 사람이 조금 머쓱해졌다. 나중에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알게 됐지만, 그는 과거사와 프라이버시에 관한 질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TV로 평양 공연을 보았습니다. 북한 관중은 노래 도중엔 아무 반응이 없다가 노래가 끝나면 얌전히 박수를 치더군요. 나중에 북한에서 ‘박수를 세게 쳐도 안 되고, 그렇다고 성의 없이 쳐도 안 된다’는 사전 교육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관중이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에 당황하지 않았나요.
“긴장했죠. 사람끼리 만났을 때도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건넸는데 상대방이 무뚝뚝하게 나오면 무안하고 어색하잖아요. 익숙지 않은 광경이라 곤혹스러웠죠. 그쪽의 문화적 정서 같아요. 북한 분들이 노래를 중간에 따라 부른다든지, 박수를 치는 것은 관객의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더군요. 북한 당국자들이 사전에 그런 이야기를 해줬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 조용한 관객을 바라보자니 난감했죠.”
-공연 전반부에 북한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띄웠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전략적으로 북한 노래를 먼저 넣자는 얘기가 있었지만 저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연출상 점점 더 올라가는 것이 좋지, 처음에 푹 올라갔다 떨어지는 것은 안 좋아요.”
-북한 노래를 100곡가량 들어보고 두 곡을 골랐다면서요. 북한 가요를 들어보면 군가나 새마을 노래 같은 느낌이 들어요.
“거기 음악은 민요적인 게 많아요. 보천보 악단이 잘해요. 제가 고른 ‘자장자장’과 ‘험한 풍파 넘어 다시 만나리’는 둘 다 가곡이죠. ‘험한 풍파…’는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 주제가였더군요. 우리가 오랜 기간 갈라져 있는 분단 민족인데 이번에 만나서 동심(童心)의 세계로 가보자는 취지에서 자장가를 불렀죠. ‘험한 파도…’는 멜로디도 익숙하고 가사가 이산가족 찾기 주제가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공연 마지막에는 관중의 기립박수와 함께 ‘재청(앙코르)’이 나왔다. 조용필이 무대에 다시 나와 ‘홀로 아리랑’을 부르자 관중은 그때서야 따라 부르며 손뼉을 쳤다. ‘홀로 아리랑’은 환영 만찬에서 북한측 인사들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조용필이 북한에서 급하게 연습한 남쪽 민요. 북한 관객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홀로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조용필이 공연한 ‘유경 정주영체육관’은 보통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현대아산이 지은 건물이다. 필자도 평양에 갔을 때 본 적이 있다. 외관이 아름다운 체육관이다. 보통강변에는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유경(柳京)이라는 평양의 이명(異名)도 버드나무에서 유래했다. 평양에서 남한 가수의 단독 콘서트가 열린 것은 2002년 이미자씨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공연 장소를 놓고 남북의 의견이 달랐습니다. 올해 초 ‘필 앤드 피스(Pil and Peace)’라는 주제로 전국 월드컵경기장 순회공연을 시작할 때 ‘제주에서 평양까지’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저는 ‘필 앤드 피스’의 연장선상에서 콘서트를 하고 싶었습니다. 북쪽은 더 좋은 음질을 들을 수 있는 극장에서 하자고 주장했지요. 봉화예술극장은 2000석 규모입니다. 우리가 ‘필 앤드 피스’는 대규모 공연이라 극장 안에 넣을 수 없다고 설명했지요. 처음엔 3만명 이상 들어가는 체육관으로 정했는데 시설 문제가 생겼죠. 결국 7000석 규모의 정주영체육관으로 낙착됐죠. 새로 지었고 평양에서 제일 좋다고 하더군요.”
이미자의 공연은 2500석 규모의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렸는데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용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같은 북한 고위 인사가 참석했다. 조선중앙TV를 통해 북한 전역에 녹화 방송됐다. 조용필의 공연은 사전 약속과 달리 아직까지 중계되지 않고 있다.
-저같이 공연을 자주 안 보는 남쪽 사람이 보기에도 무대가 화려했어요. 북쪽 사람들한테는 강렬한 문화충격을 줬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노래도 트로트풍의 이미자·김연자씨와는 분명히 다른 면이 있었을 겁니다.
“북쪽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더랍니다. 아무래도 그런 공연은 처음일 테니까요. 무대 테크닉도 생소했을 테고. 심지어 남쪽 사람들조차 평양 공연을 TV로 보고 ‘조용필이 저렇게 요란하게 공연하는구나’ 하고 알게 된 사람이 많다고 들었어요. 평양에 따라온 기자들 중에도 이런 공연은 처음 봤다는 사람이 있었어요. 평양 시민에겐 엄청난 충격이겠지요. 우리 일행이 북쪽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면서 ‘공연이 어땠냐’고 물어보니까 얘기를 안 하더래요. 한참 있다 되묻더래요. ‘선생은 어땠습니까?’ 그래서 ‘감동적이었다’고 하니까 북쪽 사람이 ‘우리는 세 배라고 생각하면 됩네다’ 하고 얘기하더래요. 감동을 감추고 있었던 거죠.”
“통일의 시간을 앞당겼다”
-공연 다음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났을 땐 뭐라던가요.
“그분은 공연장에는 나오지 않았어요. 김영남 위원장이 ‘이번 공연에 대해 평양 시민 모두 기대가 컸고 훌륭한 공연이었다’고 치하하더군요. ‘통일의 시간을 앞당겼다. 통일 역사에서 한 페이지를 크게 장식했다’고 말했어요.”
-공식적인 말 외에 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김정일 위원장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조용필 공연을 조선중앙TV 카메라 5대가 촬영했는데, 김 위원장이 생중계로 공연을 본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물론 북한의 실정상 확인할 수는 없었다.
-평양은 ‘북한의 진열장’이라고 하지요. 3박4일 동안 북한의 수도를 살펴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아무래도 생활수준이라든가, 이런 것은 우리에 비해…. 우리가 버스 타고 돌아다녔는데, 평양엔 차가 많지 않으니 다들 걸어서 다녔죠. 3년 전에 와봤다는 분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하더군요.”
-좋아졌다는 뜻일까요.
“네. 저는 뭐가 좋아졌는지 모르죠. 아무튼 자유롭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거기 사람들이 긴장해서 살고 있으리라는 선입관이 있잖아요.”
-백두산 공연을 한다는 기사가 나오던데요.
“언젠가 한번 했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북쪽이 이번 공연의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진정으로 통일의 길을 앞당겼다고 생각할지, 아니면 북한 주민에게 문화적 충격이나 상처를 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단 말이죠. 미묘한 면이 있어요.
우리를 초청한 단체의 사람들은 남한을 여러 번 왔다 간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은 남북간 문화와 정서의 차이를 잘 알아요. 한국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분들도 있었어요. 조용필이란 사람은 북쪽으로 치면 굉장한 인민배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 노래를 몇 곡 부를 줄 아는 주민이 많았죠. 문화적 충격이라고 하면 우리가 과대평가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공연 보고 나서 북쪽 사람들은 다르게 느꼈을 겁니다.
북한에도 유명한 예술적 창작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아리랑축전이라든가 카드섹션 같은 것은 엄청난 규모이고 예술성이 뛰어나다는군요. 물론 무대 테크닉은 다르겠지요. 우리는 영상이나 첨단 악기를 가지고 하기 때문에. 북쪽 사람들이 야외 공연을 한번 더 봤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30달러에 암표 거래
-북한 사람들이 한국 가수들의 노래를 부르고 드라마도 본다고 하는데, 폐쇄 사회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중국을 통해 들어간다고 합니다. SBS가 이번에 평양 공연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탈북자를 인터뷰했지요. 그 탈북자가 제 노래를 이불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평양 주민은 제 얼굴은 모르더라도 이름과 노래는 많이 알 거라고 말해줬습니다.”
SBS가 어떤 경로를 통해 확인했는지는 모르지만 조용필의 북한 공연은 미화 30달러에 암표가 거래됐다고 한다. 남한의 3만원에 상당한다. 북한에선 노동자 1년 봉급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30달러라고 하면 거기서는 큰돈이거든요. 글쎄 나도 보도를 보고 이게 어느 쪽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궁금했어요. 아마 사실이니까 나왔겠죠. 아무튼 거기서는 제 공연에 관해 물어볼 겨를이 없었어요. 도착하자마자 환영 만찬이다 뭐다 해서 끌려다니느라 바빴어요. 3박4일 동안 공연 준비하고 공연 끝나고 나서는 인터뷰하고, 일정이 빡빡했어요.”
올해는 가수 인생 37년째인 조용필에게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해다. 광복 60년, 대중문화 60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에서 최고 노래(‘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최고 가수로 선정됐다.
기지촌과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던 무명가수 조용필은 1972년 아세아레코드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들어간 첫 음반을 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이 음반은 4년 동안이나 죽어 있었다. 1976년 조총련 모국 방문단의 한국 방문이 시작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부산에서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삽시간에 국민가요가 됐다. 그해 이 노래는 가요차트 1위, 방송횟수 1위를 기록하며 무명의 가수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각고 끝에 찾아온 희열의 순간은 길지 않았다. 다음해 조용필은 대마초 스캔들에 휘말렸다. 그리고 정부가 작성한 방송 금지가수 명단에 포함됐다.
1970년대 살벌한 유신 치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은 외아들이 연예인들과 어울려 대마초를 피운 사실을 알고 나서 격노했다. 전면적인 대마초 사범 검거령이 내려졌다.
조용필은 용주골 기지촌에서 공연할 때 미군 병사의 권유로 대마초를 몇 차례 피워본 일이 있다. 대마초 연예인에 대한 단속 열풍이 계속되면서 조용필은 남산(중앙정보부) 마약반에 불려가 “1969년에 대마초를 피운 일이 있다”고 자백하고 벌금을 내고 풀려났다. 이것이 문제가 돼 방송에도 못 나가고 나중엔 무대에도 설 수 없었다. 그 시대엔 가혹한 이중처벌이 당연시됐다.
그는 대마초 이야기를 꺼내자 “과거 이야기는 재미없다”며 말하길 꺼렸다.
“사실 그때 생각이 잘 안 나요. 저는 어떤 생활철학이 있어요.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둬야 한다는 거죠. 과거가 나한테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미래가 더 중요한 법이지요. 또 오늘이 중요하고요. 남들이 제게 그때 얼마나 고생했냐고 곧잘 묻지만 전 고생했다고 생각지 않아요.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큰 꿈이 무너진 거죠. 그렇지만 현실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부터 내가 헤쳐나가야 된다기보다는 이제부터 새로운 걸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음악 연주도 하고, 다른 것도 하고…. 그런 일들은 지나간 추억에 불과하죠.”
방송과 무대 출연이 금지된 조용필은 좌절하지 않고 판소리와 남도창을 배우고 독자적인 창작 활동을 계속했다.
“제 목소리가 미성(美聲)이라서 좀 허스키한 탁성(濁聲)으로 바꿔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미성으로는 다양한 노래를 할 수 없어요. 탁성은 가능하죠. 판소리는 전부 탁성이잖아요. 어느 날 TV에서 조상현씨의 판소리 공연을 보다 ‘저걸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흥보전’ ‘심청전’ 판소리 레코드판을 샀어요. 사서 그대로 흉내내본 겁니다. 흥부가 놀부에게 가서 구걸하는 대목이 마음에 들어 100번 이상 불러봤죠. 제가 국악을 하려 했던 건 아니고, 목소리에 변화를 주려는 시도였죠. 도움이 됐어요. 판소리에서 남도창과 서도 민요로 발전했죠. 그러다 ‘한오백년’도 부른 거죠.”
이 나라를 18년 동안 무소불위로 통치했던 박 대통령의 시대는 궁정동의 총성과 함께 막을 내렸다. 박 대통령이 죽고 한 달여가 지난 1979년 12월 대마초 연예인이 해금(解禁)됐다. 동아방송 안평선 프로듀서가 막 풀려난 조용필에게 ‘창밖의 여자’라는 라디오 드라마의 주제가 작곡과 노래를 부탁했다. 1960∼70년대에는 라디오 드라마가 인기를 끌어 주제가가 히트곡이 된 경우가 많았다.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도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다.
조용필 시대의 탄생
‘창밖의 여자’는 당시 유행가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멜로디의 노래였다. 여기에 심금을 울리는 절절한 가창이 어우러지면서 듣는 이의 감정을 고조시켰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창밖의 여자’는 조용필 시대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안평선 프로듀서는 노래를 듣는 순간 전율이 느껴지며 ‘이건 된다’는 직감이 스쳤다고 뒷날 술회했다.
1980년 3월 정식 앨범으로 나온 이 노래는 국내 최초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소득수준이나 물가와 비교할 때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대박이었다. 지구레코드사는 그에게 100만장 발매 기념 골드 디스크를 만들어줬다.
“미국 암펙스가 ‘골든 릴’을 주었어요. 세계 각국에서 인구 대비 최다 판매 음반에 주는 상이었죠. 제가 스케줄 때문에 미국에 가지 못해 미국대사관에 가서 받았죠.”
필자가 ‘그 노래가 그 시대에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조용필은 “그때 뭐 여러 가지 기사가 안 나왔나요?”라고 반문했다. 수없이 나온 이야기를 인터뷰 때마다 반복하자면 조금 짜증이 날 것이다. 필자도 ‘창밖의 여자’ 스토리를 사전에 공부하고 갔지만 그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노래이기 때문에 지금 이 시점의 견해를 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음악의 변화였죠. 멜로디와 가사의 변화, 또 소리의 변화를 담은 노래였죠. 1980년대 들어와 제가 만든 곡의 소리, 멜로디, 가사 그리고 악기음이 1970년대의 노래와는 달랐던 거죠. 젊은 학생들이 새로운 음악과 새로운 장르를 경험하는 기분이 들어 좋아하게 된 거죠.”
딱딱하게 굳어 있던 북한 관객들은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을 풀고 호응했다.
-인터넷 시대에 불법 다운로드가 많아 이제 음반이 옛날같이 안 팔리죠.
“우리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음반시장이 거의 죽었다고 봐야죠.”
-그걸 뚫고 나갈 방법이 없을까요.
“방법이 없어요. 힘듭니다. 지금은 젊은 음악 팬들이 앨범 단위로 사지 않고 곡 단위로 구입합니다. 자기가 안 좋아하는 곡이 든 앨범은 살 필요가 없다는 거죠. 기념으로 앨범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아요. 500원이나 1000원씩 내고 여러 곡을 다운로드해 자기 나름대로 편집해서 각자의 앨범을 만드는 거죠. 우리나라처럼 컴퓨터와 인터넷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그런 현상이 첨단을 걸어요. 불법 다운로드도 많고요. 신문에 얼마 팔렸다고 기사가 나오지만 그건 믿을 수 없죠, 홍보 차원의 숫자니까.”
-1990년대를 거치면서 노래가 방송용에서 무대용으로 발전했다는 평가가 있더군요.
“1980년대까지는 TV에 의존했지만 1990년대 들어서서 무대로 옮겨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연문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낮았지요. 공연 가수로 성공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가수가 롱런 하려면 무대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나만의 철학이 있었죠. 그런 이유로 방송을 기피했어요.
처음엔 힘들었죠. TV에 나오던 사람이 갑자기 그만두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겠습니까. 조용필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당연하죠. 늘 보던 사람이 안 나오니까. 가끔이라도 나오면 새롭게 부각될 수도 있겠지만 늘 나오던 사람이 전혀 안 나오니 일단 대중한테서 점점 멀어져간다는 두려움이 생겼죠.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무대로 갔습니다. 잘못 되면 지금까지 해온 게 다 허물어지는 거죠. 그걸 극복하는 데 3년 정도 걸렸어요. TV 출연을 중단하고 나서 지방에 가면 때로 손님이 반밖에 안 오는 때도 있었죠.”
-TV 금단(禁斷)현상이었군요.
“그런 경우겠죠. 지금은 TV에 안 나오니 공연장으로 가야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제 공연장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몰립니다.”
조용필은 낯가림이 심해 처음 보는 사람과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원고지를 100매 이상 메워야 하는 인터뷰인데도 답변을 길게 하는 경우가 적었다. 그리고 말투도 약간 어눌했다. 답변을 쥐어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용필은 인터뷰 중간에 껌을 꺼내 씹었다. 담배를 끊은 지 얼마 안 돼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다. SBS에서 방영한 평양 공연 다큐멘터리에서도 조용필이 공연 관계자들과 회의를 하면서 껌을 씹는 모습이 나왔다. 나름대로 긴장을 푸는 방법인 것 같기도 했다.
인터뷰어를 조금 만만하게 보고 편안하게 이야기해보라는 뜻에서 “제가 음악을 잘 몰라 가끔 무식한 질문을 해도 이해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조용필은 “하도 그런 경우가 많아서 괜찮아요”라고 받았다.
55kg의 ‘작은 거인’
-립싱크 가수들은 기계가 노래를 대신 해주고 춤만 춥니다. 비디오용 가수죠. 그런 현상이 마음에 드나요.
“노래 기계가 너무 발달했어요. 사람이 할 일을 기계가 하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자꾸 기계한테 의존하는 시대가 됐어요. 이러다가는 로봇 가수도 나오겠어요. 아무렇게나 불러도 기계를 거치면 완벽한 음이 되거든요.”
-저 같은 음치가 노래해도 그럴까요.
“가수처럼 될 수 있어요. 듣기와 보기의 비중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댄싱도 잘해야 인기를 얻죠. 이게 시대의 흐름이라고 봐요. 꼭 나쁘게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은 그 사람한테 매력이 있기 때문이죠.”
-무대엔 몇 살까지 설 작정입니까.
“그건 정말 몰라요. 언젠간 스스로 결정해야죠. 이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그만둬야지….”
-체력이 중요합니까.
“물론이죠. 체력이 달리면 일단 그만둬야 해요. 체력이 안 되면 보는 사람들이 실망하죠. 청중이 ‘아, 저 사람도 이제 안 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쯤 관둬야죠.”
조용필은 하루 두 갑씩 피던 담배를 끊었다. 고등학교 때 피기 시작한 담배를 끊자면 고통이 심할 것이다. 체중이 너무 줄어 살을 찌울 요량으로 금연했다고 말했다.
“담배 끊은 지 5개월 돼 가는데 5kg 늘었어요.”
현재 몸무게가 얼마나 되냐고 묻자 “그건 좀 그래요” 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동아일보’ 허엽 위크엔드 팀장한테 들은 대로 55kg이냐고 묻자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1∼2kg만 더 늘었으면 좋겠는데 여기서 더 안 올라가네요. 58kg 정도만 됐으면 좋겠어요.”
-루치아노 파바로티 같은 클래식 가수들을 보면 배도 나오고 거구(巨軀)지요. 몸에 살이 좀 있어야 울림통이 커져 노래를 잘한다는 속설도 있던데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죠. 노래는 힘만 가지고 하는 건 아니에요.”
-발표한 210곡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무엇인가요.
“대답하기 힘들어요. 시대에 따라 이런저런 곡들이 나오죠. 그중에서 한 곡 짚으라면 힘들죠.”
‘조용필학(學)’의 등장
-노래 하나하나에 사연이 깃들어 있나요.
“그럼요.”
-‘조용필학(學)’을 정립하고 있는 전북대 김익두 교수(국문학)가 최근 18집 앨범의 노래는 좀 어려워졌다고 하더군요. 세미클래식 같은 분위기가 있다는 거죠.
“앞으로 뮤지컬을 만들어볼 생각이거든요. 그런 곡이 많이 나올 거예요. 꿈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못 만들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뮤지컬에 대한 음악적 대비를 하고 있지요.”
김익두 교수는 전통적 대중공연을 연구하다 옛날 대중에게 사랑받았지만 지금은 죽어 있는 문화라는 데 한계를 느꼈다. 현재의 대중에게 사랑받는 문화를 함께 연구하려는 생각에서 대중가요의 거대한 산맥인 조용필 연구에 들어갔다. 내년 발간 예정으로 조용필 관련 저술을 집필 중이다.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이 이미자와 조용필입니다. 이미자는 2000곡을 넘는 대단한 업적을 남겼지만 하나같이 트로트예요.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죠. 그 뒤 데뷔한 사람들은 서양물로 흘렀죠. 조용필은 유일하게 일본풍과 서양풍을 극복하면서 한국의 정한(情恨)을 대중가요로 담아낸 사람입니다. 서양에서는 대중음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예컨대 비틀즈에 대한 연구도 ‘비톨로지(Beahtology)’라는 학문으로 체계화하고 있습니다.”
김 교수의 ‘조용필로지(Choyongpilogy)’에 기대하는 바 크다.
-뮤지컬을 하려는데 대해 걱정하는 분들이 있더군요. 대중성을 지키면서 자기 세계를 확대 심화해야지, 클래식으로 무리하게 가려다 보면 자기 세계가 약화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음악 전체를 그리로 가져가는 건 아니죠. 부분을 그렇게 가는 것이지, 전체를 그렇게 가는 것은 아닙니다. 대중도 변화합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옛날 노래들이 지금 나왔다면 히트하지 못했을 거라 보거든요. 옛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생각하면 안 되죠. 옛날 건 그대로 놔두고 새로운 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대중이 변하는데 음악이 그대로라면 새로운 사람들을 붙잡기가 어렵죠.”
-외국에 나갈 때마다 외국 판을 엄청 많이 사서 듣는다던데, 외국 가수 중 누구를 특히 좋아합니까.
“누구를 특히 좋아한다거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죠. 제가 음반을 구해 듣는 것은 음악의 변화를 보기 위해서지요. 지금 어떤 것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이거를 보고자 듣는 거죠. 생판 모르는 사람 것도 많이 삽니다. 아는 사람들 판만 들으며 거기에 집착하다 보면 내 음악의 변화를 이룰 수 없죠. 내 자신을 한곳에 붙들어놓으면 안 된다고 보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내가 변화하면서 가야 한다고 봐요.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좀 내라고 하는 김익두 교수의 말은 일리가 있지요. 그렇지만 대중은 계속 변화하고, 새로운 젊은 세대도 있지 않습니까.”
-미국 뉴욕에서 머무를 때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과 골프를 번갈아 하다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때는 뮤지컬을 10 작품이나 보고 온다면서요.
“새로운 작품을 보는 이유는 무대의 메커니즘 때문입니다. 어떤 무대를 만드느냐, 어떤 색깔을 쓰느냐, 어떤 새로운 디자인을 하느냐, 이런 것을 연구하기 위해 보는 것이지요.”
2002년 제7차 교육과정 음악교과서(교학사)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수록됐다. 이에 앞서 제6차 교육과정에서는 ‘친구여’가 한국 대중가요로는 최초로 교과서(두산교과서 고1 음악)에 올랐다.
“저한테는 영광이죠. 교과서에 오른다는 것이 쉽습니까. 음악 하는 사람한테는 최고의 영광이죠.”
‘오빠 부대’의 원조
조용필은 음악인생 30주년 기념 베스트 음반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자작곡에 대한 저작권료를 지구레코드에 지급했다. 그는 저작권 개념이 희박할 때 지구레코드와 1∼8집 수록곡에 대한 저작권 양도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에까지 올라가 다퉜으나 조용필이 패했다.
“가슴아픈 일이죠. 되찾아오기 위해 지금 협의하고 있습니다.”
조용필이 평양에 갔을 때 순안공항에 마중을 나온 이종혁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이 “여기는 ‘오빠 부대’가 없습니다”라고 조크로 맞았다. 사실 조씨는 1980년대부터 오빠 부대를 가장 많이 끌고 다닌 가수다. 1980년 그가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를 열창할 때 소녀들은 열광했다. 무대로 뛰어오르고, 공연장의 현관 유리창이 박살났다. 공연 때마다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용피리 오빠’를 외치던 소녀 팬들은 지금 40대가 됐다.
서울 반포동 빌라촌에 있는 조씨의 집 근처에는 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아줌마 팬들이 종종 나타난다. 조용필은 해마다 12월이면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한다. 올해로 일곱 번째다. 매년 12회 공연 2만7600여 장 전석(全席)이 보름 전에 매진된다. 앞줄에는 일본에서 온 여성 팬들도 앉아 있다. 무대감독 윤호진씨의 목격담.
“어떤 아줌마가 공연장 뒤에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춤을 췄어요. 보기엔 잘사는 아줌마 같지도 않고, 아마 돈을 모아서 티켓을 샀겠지요.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믿음이 깊은 신도가 예배당에 온 것처럼 진지하더군요.”
-팬레터가 지금도 옵니까.
“오죠. 특별히 사연이 있어서 오는 건 아니고요. 그냥 뭐 늘 우리 곁에 있어서 고맙다, 늘 함께해달라는 이야기 같은 것이지요.”
-집 앞에서 기다리는 아줌마 팬들은 어떻습니까.
“귀찮아요. 애들이 아니니까.”
-올 12월 예술의 전당 공연은 어떤 컨셉트로 할 계획입니까.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닙니다. 어제도 회의를 했는데 지금 시놉시스(줄거리) 작업을 하고 있어요.”
“가수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직업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하냐”고 생뚱맞은 질문을 던져봤다.
“전혀 모르죠.”
‘국민 배우’ 안성기와 중학교 단짝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쌍정리에서 태어난 조용필은 화성 송산중학교에 다니다 2학년 때 서울 경동중으로 전학을 왔다. 아역배우로 일찍이 이름을 얻은 안성기가 같은 반 29번이었고 조용필이 30번. 한 책상을 쓰는 짝이었다. 안성기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먼저 학원에서 기타를 배워 조용필 앞에서 자주 연주해 조용필의 음악 혼에 불을 지펴줬다”고 주장했다.
“나는 집에 기타가 있었어요. 형이 치던 통기타였죠. 형이 캠핑 가면 밖으로 들고 나가 치기도 했죠. 집에서 좀 유난스럽게 쿵쾅쿵쾅 치다가 부모님한테 야단도 맞았죠. 정릉도서관에서 통기타 치는 애들을 만나 어울려 다니며 기타를 쳤죠. 그때 학생들 사이에서 기타가 크게 유행했어요.”
-그러니까 안성기씨 혼자서 음악 혼에 불을 지펴준 건 아니군요.
“기타학원에 다니던 성기는 저에게 일부분 영향을 줬죠.”
중학교 같은 반 동창인 ‘국민 배우’와 ‘국민 가수’는 가끔 골프도 같이 친다. 핸디캡이 10개로 같다.
조용필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입시 공부를 하지 않고 집안 몰래 세광음악학원에 다니며 기타를 배웠다.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집안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때만 해도 대중문화라는 것이 그렇게 대중화돼 있지 않았죠. 소위 옛날 사람들이 얘기하는 딴따라였죠. 지금은 달라졌지만. 자기 자식이 머리 기르고, 복장도 아주 불량스러워 보이고, 음악을 한다는 것이 노인네한테는 정서적으로 안 맞았죠. 평범한 가정이나 좀 의식 있는 집안의 자녀는 기타 치는 짓거리 안 한다는 인식을 갖고 계셨습니다. 아버님이 기타 치는 것을 좋아할 리 없죠. 늘 ‘너 이 다음에 뭐가 돼라, 훌륭한 사람 돼라’는 말씀이셨거든요. ‘너 딴따라 돼라’ 하는 부모는 없을 때니까요. 그 시절의 시대상이에요.”
-자살 소동을 벌였다면서요.
“음악을 못하게 하니까요. 그때야 어렸을 때니까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 아닙니까.”
-누구한테 발견됐습니까.
“부모 모르게 할 수는 없으니까 아셨죠.”
-약을 드셨습니까.
“약 먹었죠.”
-병원에서 깨어난 건가요.
“네. 정릉에 살 때였어요. 시골 화성에도 집이 있었죠. 아버님은 속이 상해 화성으로 내려가셨죠.”
기타 마니아가 돼버린 조용필은 드디어 졸업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한양대 공대 기계과에 다니던 형의 제도기를 몰래 들고 나와 청계천에서 처분했다. 그 돈으로 음악을 위한 가출을 단행했다.
“기타 연습은 그냥 취미 삼아 하는 것이었죠. 어린 마음에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부모님이 싫어하는데도 왜 자꾸 그걸 했느냐 하면 반항심이었죠. 기타를 그냥 하게 내버려두면 제가 지쳐서 안 할 수도 있었죠. 남들은 하는데 자꾸 못하게 하니까 반항심이 생겼어요. 집을 나온 것도 반항심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 얘기가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조용필은 경기도 파주시 장파리 미군부대 앞 ‘DMZ’라는 나이트클럽에서 수습 밴드로 일을 하다가 용주골로 옮겨 미군 클럽 ‘첵돌스’에서 기타리스트로 활약했다. 6개월이 지난 후 첵돌스는 용주골 최고의 밴드로 성장했다.
가출 2년 만인 1970년 여름 신문에 난 나이트클럽 광고를 보고 둘째형 영일이 찾아왔다. 형의 설득으로 집으로 돌아와 대학입시 준비를 하다 한 달 만에 음악의 인력(引力)에 끌려 다시 집을 나왔다.
부친 조경구씨는 1986년, 어머니 김남숙씨는 1991년에 세상을 떠났다. 3남4녀 중 여섯째로 막내아들인 조용필은 가수로 성공한 뒤 서울 논현동 아파트에서 부모를 모셨다.
-아버님이 그렇게 반대하던 가수가 된 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그런 말씀 안 하셨죠. 과묵하신 분이죠. 말씀 안 하셔도 서로 알죠. 막내아들이 그렇게 성공할지는 모르셨죠. 그냥 미군 부대 근처에서 딴따라 하는 걸로 아시다가 제가 가수로 성공하자 무척 흐뭇해하셨죠.”
조용필의 첫 결혼은 4년 만에 끝났다. 첫 아내는 국회의원의 딸이었다. 팬과 가수의 관계에서 결혼으로 발전했다. 그를 잘 아는 기자가 “인터뷰 도중 첫 부인에 관한 질문을 하면 인터뷰는 그것으로 중단될 것”이라고 조언해줬다.
1988년 결혼한 재미교포 사업가 안진현씨와는 2003년 1월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깊은 사랑 속에서 살았다. 아내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가 1990년대에도 멈추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내조의 힘이 컸다. 미국 전 하원의원 김창준씨가 그의 동서다.
아내는 심장병을 앓다 사망했다. 조용필은 부인이 남긴 유산 24억원을 아내와 같은 고통을 겪는 심장병 어린이들을 위해 내놓았다. 그는 아내의 무덤을 화성 선산 부모 묘소 발치에 만들었다. 화성 선산에 갔다 밤을 새우고 오는 일도 많다.
-넓은 집(100평)에서 혼자 살려면 쓸쓸하지 않습니까.
“나는 일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거 없어요.”
-주위에 재혼을 권유하는 사람은 없나요.
“재혼은 생각조차 않습니다. 이대로가 좋아요.”
2세 없는 게 내 운명
답변이 너무 짤막짤막해 80개 이상 준비해간 질문이 거의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잡지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봐도 조용필은 질문에 비해 늘 짧은 답변을 했다. 필자는 “답변을 좀 길게 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저는 그래도 평소보다 굉장히 많이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말수가 적다는 얘기를 들어요.”
조용필은 1982년 일본에 진출한 한류(韓流)의 원조다.
“아시아 뮤직포럼이라는 데서 초청해 처음 공연을 했어요. 아시아의 각 나라의 가수들이 와서 페스티벌을 했는데 한국에서는 저를 선택한 거죠.”
그는 이후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양국 팬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 일본에서만 골드 디스크 3장을 받으며 공식적으로 600여 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다.
-공연이 대형화하면서 시각효과가 풍부해진 데 따른 장점도 있지만 작은 장소에서 인간적인 호흡이 오가는 야외공연 또는 소극장 공연도 했으면 좋겠다는 팬이 있더라고요.
“소극장 공연을 하면 장기 공연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무리가 돼요. 공연이 어차피 커질 수밖에 없었어요. 올해는 횟수를 줄이되 큰 데서 하자는 생각이었죠. 평양 초청을 받고 ‘제주에서 평양까지’라는 타이틀로 ‘필 앤드 피스’ 투어 공연을 기획했죠. 시장조사를 해보니까 지방에서 월드컵 경기장 공연을 하더라도 객석을 채울 수 있겠더라고요. 전반기엔 다 성공했어요. 네 군데에 12만명이 들어왔죠. 9월10일 대전 공연도 표가 거의 매진됐어요. 5만8000명가량 수용하는 경기장인데 유료관객을 5만명 정도로 잡고 있어요.”
-술을 잘한다던데요.
“옛날에 젊을 때는 많이 마셨죠.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못 마셔요.”
-두 차례의 결혼에서 자녀는 없지 않습니까.
“없죠.”
앤서니 퀸은 81세 때 증손녀뻘 딸을 얻어 팬들을 놀라게 했다. 테너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도 60대 후반에 자신 나이의 꼭 절반인 연인과의 사이에 손녀뻘 딸을 얻었다.
-2세를 가져볼 생각은 없습니까.
“아니요. 저는 없는 게 제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자식에 절대 미련 안 갖습니다. 편하게 살고 싶어요.”
-사생활에 관한 질문을 싫어하는 줄 알지만 이 인터뷰의 특성상 안 물어볼 수도 없으니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인터뷰하다 마음에 안 들면 하다 말고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생활 진짜…. 어떻게 보면 나한테 상처 주는 걸 자꾸…. 그러니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걸 자꾸 나한테서 끌어내려고 하면 나는 못해요. 사생활 같은 거, 그러니까 와이프 얘기나 이런 얘기 하면 굉장히 싫습니다. 왜냐하면 상처 입은 사람한테 더 상처를 주거든요. 묻는 사람이 아주 미워져요. 그러니까 상처가 지금까지 안 아물었죠. 그리고 재혼하겠느냐는 질문도 실수한 거죠. 왜냐하면 이제 (상처한 지) 2년 반밖에 안 된 사람한테 그런 얘기를 묻는다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상대방을 생각해줘야죠. 건설적인 얘기를 합시다.”
-인간 조용필에 관한 이야기를 팬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사생활을 건드리게 됐는데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특히 저는 나이 먹어서 그렇게 사별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아내를 믿고 의지했거든요.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런 얘기는 되도록 피하셨으면 도움이 된다는 취지입니다.
오늘 비가 올 거 같아 아까 산소 좀 갔다 오려고 했어요. 평양가기 전에 갔다 오고 못 갔어요. 오늘 가려고 했는데 이 인터뷰를 깜박했어요. 오늘 인터뷰 있는 날이라는 연락을 받고 깜짝 놀라서 왔죠.”
애창곡은 가곡 ‘떠나가는 배’
-영화를 좋아하나요.
“영화는 집에서 TV나 DVD로 봐요. 극장과 효과는 똑같지 않겠지만.”
조용필은 1980년 복귀 첫 해에 이형표 감독의 ‘그 사랑 한이 되어’에 여배우 유지인과 함께 출연한 적이 있다.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은 많지 않겠군요.
“책을 보다 도중하차한 적이 많죠. 영화를 보더라도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영화음악 때문에 봐요. 음악과 영화에 집어넣은 효과음향을 주의 깊게 듣죠. 집에 있는 DVD에서 완전히 음악만 뽑아내 컴퓨터에 넣어 이펙트용으로 소장하죠. 내가 내년에 꼭 성사시키고 싶은 게 있어요. 내 꿈이 무대연구소 만드는 거예요. 이런 종합예술연구소를 한번 만들 계획입니다. 음악, 소리, 영상, 무대까지 전부 해보고 싶습니다.”
-뮤지컬을 해보고 싶은 구상이 있다니까 묻는 건데요. 가수들 중에는 대중음악을 하다 클래식 쪽으로 들어가보는 사람도 있고, 클래식 가수가 대중음악으로 외도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대중가수가 클래식으로 가는 것은 있을 수 없고요. 클래식은 창법이 전혀 달라요. 소프라노 음을 내려면 배우고 연습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요는 보통 부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창법이 클래식 쪽에서 대중 쪽으로 오는 건 가능해요. 대중가수도 뮤지컬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중가수가 오페라를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정치엔 관심 없나요.
“정치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저는 그런 게 복잡해서 싫습니다. 시간 나면 그냥 작품이나 감상하고 그래요. 뉴스는 가끔 보죠. 안 볼 수는 없는 거니까.”
조용필은 가끔 노래방에 갈 때도 있다. 애창곡은 가곡 ‘떠나가는 배’.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도 제게 노래할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아요. 서로들 하려고 해서. 나는 노래를 거의 잘 안 해요. 오히려 제 노래를 자기들끼리 부르죠. 제 음악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데 사실 다른 사람 노래 부르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리 잘 불러도 원래 부른 가수보다 더 낫지 않거든요. 잘 해봐야 본전이죠.”
“말을 길게 못해 미안합니다”
조용필은 노래 다음으로 골프를 좋아한다. 안양베네스트 골프장을 즐겨 찾는다. 드라이버 비거리는 200m 정도지만 롱 아이언 기술이 절묘하다. 어프로치 샷과 숏 게임은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다. 반포동 집에는 프로골퍼 프레디 커플스와 라운드를 함께하며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그러나 그는 골프 애호 취미가 알려지는 것을 싫어한다고 YPC 직원이 귀띔해주었다. 사진기자가 촬영을 할 때 필자가 “골프를 좋아하냐”고 묻자 “골프 하는 사람한테 골프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곤란하죠”라며 넘어갔다.
인터뷰 중인 조용필씨.
“‘위대한 탄생’은 제 음악적 동지예요. 같이 음악 하는 거죠. 아주 옛날부터 사람만 바뀌고 이름은 그대로 가고 있죠. 우리나라 최고 뮤지션들이 와서 나와 같이 하는 팀이죠.”
-오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을 길게 못해 미안합니다.”
-묻지 않아서 못한 이야기는 없습니까.
“2시간 가까이 했기 때문에 다 한 것 같은데요.”
필자가 “반포동 집을 구경할 기회를 달라”고 청을 넣자 “그러죠. 누추합니다. 혼자 사는데…”라고 대답했다.
10대 청소년들을 열광시키던 우상의 얼굴에서도 쉰여섯 살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세월 따라 흘러가버리지 않고 10대에서 60대까지 팬을 거느린 가수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윤호진씨는 “그처럼 히트곡이 많은 가수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말한다.
속기사가 ‘조용필 The History’ 책자에 사인을 받았다. 그녀가 여고생일 때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가 나와 10대 소녀들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동행(同行)한 인터뷰 중 가장 즐거운 모습이었다. 조용필은 인터뷰를 끝내고 계단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