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위스에서 공립중학교 다녀
- 김정일 요리사, “정운은 통 큰 대장동지”
- 김정일, 자신 꼭 닮은 정운 편애
- 올해 9월 하순~10월 중순 후계자 공식결정 가능성
- 모든 북한 파워엘리트, ‘김정운 세력’
그러던 중 한국 국가정보원은 북한 당국이 후계자 결정 내용이 담긴 외교전문을 해외공관에 보낸 사실을 포착하고, 6월1일 국회 정보위 위원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이 같은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됨으로써 김정일 후계자를 둘러싸고 그동안 진행됐던 논란은 종지부를 찍게 됐다.
김정운의 성장과정에 대해 현재 해외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인물은 1988년부터 1996년까지, 그리고 1998년부터 2001년까지 11년간 김정일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다. 그는 북한의 당과 군대, 국가 고위간부들이 참석하는 연회뿐만 아니라 김정일 가족의 생일파티를 준비했고, 김정일의 바캉스에도 동행함으로써 김정운의 신상정보와 자질, 위상 등에 대해 잘 알게 됐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해 12월 일본을 방문해 후지모토 겐지와 북한의 주요 엘리트와 김정운의 위상 등에 대해 심층적인 인터뷰를 장시간 진행했다. 이 글에 소개하는 김정운의 성장과정은 후지모토 겐지의 수기 ‘김정일의 요리사’, 그리고 필자가 진행한 인터뷰 등을 참고해 정리한 것이다.
생년월일을 둘러싼 혼란
김정운은 고영희와 김정일 사이에서 1983년 1월8일 태어났다. 김정일은 고영희를 1975년경에 만나 1976년경부터 동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과 한국의 일부 연구자들은 고영희가 북한 유도의 창시자인 고태문의 딸이라고 주장해왔으나, 한국 정보당국은 고영희가 1999년 사망한 재일동포 고경택의 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김정운에게는 친형 김정철과 여동생 김여정(또는 김일순)이 있다. 김정철은 1980년생이고, 김여정은 1987년생이다.
그런데 올해 김정운의 후계자 지명 사실을 보도한 국내 통신사는 처음에 김정운이 1984년 9월25일생이라고 주장했다가, 필자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9월25일은 차남 김정철의 생일이라고 지적하자 한 달이 지나서야 김정운의 생일을 1월8일로 수정했다. 그리고 비로소 “김 위원장이 ‘후계 교시’를 내린 올해 1월8일은 공교롭게도 정운의 25회 생일이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필자는 그동안 여러 논문에서 군주제 국가에서 군주의 생일이 가장 중요한 명절인 것처럼, 북한에서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이 ‘최대명절’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북한이 군주제적인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김정일의 후계자 결정이 1974년 그의 생일 바로 3일 전인 2월13일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졌고, 김정일의 아들 중 하나가 후계자로 결정되는 것도 그의 생일을 전후한 시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해왔다.
승부욕 강한 김정운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 김정운을 처음 만난 곳은 신천초대소였는데, 그때 김정운은 어린 나이에도 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김정일이 아들들을 군인처럼 씩씩하게 키우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김정운은 후지모토 겐지를 처음 만나 악수할 때 험악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후지모토 겐지는 ‘이 녀석은 증오스러운 일본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듯한 김정운의 당시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수기에 적었다. 김정운이 어려서부터 대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김정운의 이 같은 면모는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김정일이 그를 통 크게 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지모토 겐지에 의하면 김정일은 김정운에게 때로는 술도 마시게 했고, 7세부터 초대소 안에서 벤츠600형을 운전하게 했다고 한다.
김정운은 또한 어려서부터 강한 승부욕과 리더십을 보여왔다. 반면 그의 형 김정철은 어려서부터 화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으며 야망도 없어 보여 북한을 통치할 능력이 있을까 의심스러웠다고 후지모토 겐지는 필자에게 말했다. 한 예로 정철팀과 정운팀이 농구시합을 한 후 정철은 팀원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데 비해 정운은 오랜 시간 반성회를 가졌다. 김정운은 팀원들에게 “네가 왜 그쪽으로 패스했느냐? 더 연습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의 승부욕과 보스 기질을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김정운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그가 12세 때 여동생이 그를 ‘작은오빠’라고 부르자 화를 냈다는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그 사건 이후 후지모토 겐지는 정철을 ‘큰 대장동지’라고 부르고, 정운에게는 ‘작은’을 빼고 ‘대장동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정운은 상당히 기가 셌다. 그는 스포츠에도 만능이며, 김정일처럼 영화도 좋아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왼쪽)와 만난 필자.
또한 백두산에서 마실 맥주가 떨어져 무심코 김정운에게 이야기했더니 며칠 후 밤에 그가 후지모토 겐지의 방으로 찾아와 양쪽 바지 주머니에서 하이네켄 맥주를 두 병 꺼내면서 마시라고 내밀었다고 한다. 후지모토 겐지는 그때를 기억하며 김정운의 “그런 따뜻한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정말이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격했다”고 수기에 적었다.
김정운에 대한 김정일의 편애
김정일은 자신을 닮아 적극적인 성격의 김정운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한번은 식사 후 두 아들이 농구장으로 나가자 김정일은 간부들에게 “정철은 마음이 여려서 안 된다. 정운은 나하고 닮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후지모토 겐지에 의하면 김정운은 김정일의 얼굴을 쏙 빼닮았으며 체형까지 흡사하다. 아들들을 군인처럼 씩씩하게 키우고자 어려서부터 군복을 입혔던 김정일이 김정철에 대해 “마음이 여려서 안 된다”는 평가를 내렸다면, 그의 마음이 대담한 성격의 3남 김정운에게 더 기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이 김정운을 편애하고 있음이 가족의 식사자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술회하고 있다. 식탁에서 김정일이 가운데 앉고, 그 왼쪽에 부인 고영희가 앉았으며, 김정운은 고영희 왼쪽에 앉았다. 그리고 딸 김여정이 김정일 오른편에 앉았고, 김정철은 김여정의 오른쪽에 앉았다. 그래서 부인 고영희가 빠질 경우 김정운은 김정일 바로 옆자리에 앉았지만, 김정철은 늘 김정일 옆에 앉지 못했다는 것이다.
북한에는 ‘초대소’라고 하는 호화 별장이 곳곳에 있는데, 그중 평양 근처에 위치한 강동(별칭 ‘32호’)초대소에는 김정일 전용의 ‘장군 건물’, 고영희와 그 자녀들을 위한 ‘1호 건물’,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당중앙위원회 경공업부장)와 남편 장성택(현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 부부를 위한 ‘2호 건물’, 그리고 초대소 내부를 총괄하는 ‘본관 건물’이 있다. 초대소의 이 같은 구성은 외부세계에서 김정남의 ‘후원자’로 간주되는 장성택이 실상은 고모부로서 김정운과 가깝게 지냈음을 보여준다. 후지모토 겐지는 바로 이 강동초대소에서 김정철, 김정운에게 당구를 가르쳤고, 그 후 이들은 줄곧 당구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
후지모토 겐지의 수기에는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작은 왕자 정운”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수기에 ‘초등학생’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에 의하면 김정철과 김정운은 북한에서 정식으로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며, 장성택이 이들의 교육 문제를 담당했다. 장성택은 고모부로서 김정철 및 김정운의 성장과정에 밀접하게 관여한 셈이다.
김정운과 고모부 장성택 간의 관계
장성택과 김정운의 어머니 고영희 간의 관계는 적어도 2003년 황장엽 전 비서가 김정일 이후 장성택이 차기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하기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중반 김정일 패밀리가 식사하는 자리에서 김정일과 장성택이 싸운 적이 있었다. 이 때 장성택이 “안 됩니다”라고 하니까 김정일은 냅킨을 던지려 했고, 이를 고영희가 말렸다. 그때 상황이 매우 심각했는데, 고영희는 장성택의 편이 되어주었고, 당시 고영희와 장성택 간의 사이는 좋았다고 후지모토 겐지는 필자에게 설명했다.
국내외에 알려진 김정운의 스위스 유학에 대한 정보 중엔 부정확한 것이 많다. 연합뉴스는 올해 1월 김정운의 후계자 결정 사실을 보도하면서 그가 1990년대에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를 ‘졸업’했다고 소개했다. 스위스에서 발행되는 프랑스어 시사주간지 렙도(L?Hebdo)는 올해 3월5일자 기사에서 김정운이 베른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 of Berne)를 ‘박철(Pak Chol)’이라는 이름으로 다녔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와 L?Hebdo의 이 같은 보도를 국내외의 언론들은 무비판적으로 소개했는데, 베른국제학교를 ‘박철’이라는 가명으로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다닌 것은 3남 김정운이 아니라 차남 김정철이다.
김정철이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베른에 유학한 사실은 이미 2006년에 국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인 일본인 오노 가즈모토(大野和基)씨의 스위스 현지 취재에 의해 밝혀진 바 있고, 국내의 한 월간지를 통해서 상세히 소개된 바 있다. 필자도 김정철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해 2008년 8월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김정철의 베른국제학교 재학 시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했다.
‘박철’이라는 가명에서 ‘박’은 1998년까지 스위스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이모부 박건(고영희의 여동생 고영숙의 남편)의 성에서 따온 것이고, ‘철’은 김정철의 이름 끝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공교롭게도 후지모토 겐지의 북한 이름도 박철이었다.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철이 자신을 좋아해서 베른국제학교에서 ‘박철’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그와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L?Hebdo는 또한 ‘박철’의 성격에 대해 “수줍고 내성적”이라는 증언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3남 김정운의 성격이 아니라 차남 김정철의 성격이다.
김정운의 스위스 유학에 대해서는 6월 14일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이 가장 정확한 사실을 확인해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김정운은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가 아니라 자택 인근의 공립중학교를 ‘박운’이라는 가명으로 다녔다. ‘박운’이라는 가명에서 ‘박’은 스위스에서 북한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이모부 박건의 성에서 따온 것이고, ‘운’은 김정운의 이름 끝 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김정운도 스위스 유학
김정운은 1996년 여름부터 2001년 1월까지 베른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김정철이 다녔던 베른 국제학교에 입학했지만 몇 개월 뒤 그만두고 현지학교로 진학했다. 중학교 기록에 따르면 인접 초등학교에서 독일어 보충교육을 받은 후 1998년 8월부터 7학년(한국 중학교 1학년 해당)에 편입했고, 9학년생이었던 2000년 말에 학교를 그만뒀다.
김정운이 다닌 학교의 현재 교장이자 당시 수학 교사였던 페타 부리(52)씨는 김정운에 대해 “열심히 공부한 아이였다. 수학이 뛰어났지만 영어와 독일어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담임이었던 쿤씨는 “말씨가 적은 아이로 베일에 싸인 분위기도 있었다”고 전했다.
필자는 잘 아는 사이인 일본 주간 겐다이의 곤도 다이스케 부편집장에게 곧바로 전화를 해서 마이니치신문이 공개한 김정운의 16세 때 사진의 진위에 대해 후지모토 겐지의 견해를 물어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후지모토 겐지는 “마이니치신문이 입수한 사진이 100% 맞다”고 확인해준 뒤 “그 사진을 보니 과거에 김정운과 놀았던 시절이 생각났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김정운은 농구를 매우 좋아했는데, 이는 김정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스위스 유학시절 김정철은 특히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로 7년 연속 리바운드 왕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데니스 로드맨을 좋아했으며, 언제나 로드맨의 등번호가 새겨진 시카고 불스 티셔츠를 입고 농구를 했다. 후지모토는 1996년 일본에 귀국했다가 1998년 북한에 돌아와서는 과거 김정철과 김정운이 사용하던 체육관이 멋진 농구 코트로 변했으며 각종 기구도 미 NBA에서 쓰는 것과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오랜만에 김정철과 김정운을 보게 된 후지모토 겐지는 “2년 사이에 두 사람 다 몰라볼 정도로 키가 자랐으며 근육도 붙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고영희 개인숭배와 김정철·김정운 嫡子論
후지모토 겐지는 1992년 김정일이 부인 고영희, 비서와 함께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용 팩스 용지를 하나씩 검토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수기에서 적고 있다. 이는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이전에 이미 김정일이 고영희와 국사를 논의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1990년대 말부터 북한 군대를 중심으로 한 고영희 개인숭배 및 그녀의 후계문제에 대한 관심은 북한 지도부 내 김정운의 입지를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1998년경부터 북한군 특수부대인 민사행정경찰을 중심으로 시작된 고영희에 대한 개인숭배는 2002년 절정에 다다랐다. 북한 내부자료에서 고영희는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 동지와 꼭 같으신 분” “인민군 장병들을 충성과 위훈의 한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자애로운 스승” 등으로 치켜세워졌다.
이처럼 고영희가 북한 내부에서 ‘국모(國母)’로 내세워짐으로써 그와 김정일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김정철 또는 3남 김정운이 김정일과 성혜림 간에 태어난 ‘장남’ 김정남보다 후계자로 지명받기에 더욱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됐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도 2002년 8월 북한 강연자료를 보고 “나는 김정남이는 절대 안 된다고 계속 얘기를 했어요. 후계자는 왕이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가 되는 거니까. 성혜림이 오래전에 떨어져 나갔고, 김정일은 고영희를 가장 사랑하는 게 사실이야”라고 평가했다.
미국에 망명한 고영숙과 그녀의 남편 박건은 고영희가 1990년대 초부터 김용순 당중앙위원회 대남비서를 자기 측근으로 만들어 김정철, 김정운 형제의 후계자 옹립을 준비해왔다고 미 정보당국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져고 있다. 김용순 대남비서는 2000년에만 해도 김국태 비서와 함께 김정일 총비서의 각종 공개 활동을 각각 37회 수행하는 등 김 총비서의 최측근 인사였다. 고영숙은 또한 김용순 비서와 고영희가 특히 2001년 김정남이 일본 밀입국을 기도하다 적발돼 추방된 후 북한에 귀환하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인 후계자 옹립작업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고영숙의 진술이 어디까지 사실과 부합하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김용순 대남비서가 음주운전으로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한 2003년 6월16일이 고영희 생일이라는 점은 김 비서가 고영희 생일파티에 참석하고 돌아가다 사고를 당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김용순 비서가 10월26일 사망함으로써 고영희는 중요한 측근 한 명을 상실하게 되었다.
황장엽의 ‘김정일 이후’ 발언과 장성택의 직무정지
고영희의 부상 및 그녀의 후계문제에 대한 관심은 2000년대 중반 권력엘리트의 부침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고영희는 김일성 사후인 1995년경부터 김정일의 군부대 방문에 동행하면서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해 2002년 시점에는 제2인자로서 확고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2003년 7월4일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한국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탈북자·북한인권 문제 토론회’에 참석해 “김정일 체제가 무너질 경우, 그래도 다음을 이을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장성택이 제일 가깝다”고 지적하고, “장성택이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사방에 자기 사람을 박아놓았다”고 발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황장엽의 이 같은 발언은 김정철 또는 김정운을 김정일 후계자로 내세우려던 고영희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음이 틀림없다. 그 결과 2003년 7월 이후 장성택의 공식 활동이 갑자기 중단됐으며 2004년에는 직무정지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고영희와 그의 측근들이 황장엽 발언을 빌미로 장성택을 김정일의 권력을 넘보는 ‘야심가’로 몰아 무력화시킨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고영희는 2004년 5월26일 프랑스에서 유선암으로 사망해 6월초에 북한에서 장례를 치른 것으로 확인됐다. 고영희의 사망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같은해 8월 말이었다. 이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고영희 사망으로 기존의 후계구도에 변화가 발생했다는 주장들이 제기됐다. 물론 고영희의 사망으로 김정철과 김정운은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를 상실하게 됐다. 하지만 절대권력자 김정일의 마음이 김정남보다 여전히 그들에게 기울어져 있으므로 기존의 후계구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았다.
김정철은 2001년부터 2006년 4월까지, 김정운은 2002년부터 2007년 4월까지 군 간부 양성기관인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특설반에서 ‘주체의 영군술’을 비롯해 군사학을 극비리에 공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정철과 김정운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서 공부한 것은 고영희가 생전에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이어받아야 한다며 김정일에게 강력히 요청해 이뤄졌고, 이에 따라 이들만을 위한 특설반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특설반을 마친 정철·정운 두 아들이 김정일이 참석한 공개석상에서 ‘주체의 영군술’을 구현한 군사이론을 내놓아 김정일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한 것으로 안다”는 주장도 있다. 김정철과 김정운은 2007년부터 김정일의 군부대 시찰을 비롯한 각종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운 형제의 건강상태
‘장남’ 김정남은 이미 결혼해서 딸까지 둔 인민배우 성혜림을 김정일이 강제 이혼시키고 동거하면서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성혜림이 우울증으로 모스크바에서 장기간 치료받게 됨으로써 김정남은 김정철이나 김정운과는 다르게 어머니가 정치적 후원자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리고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정철과 정운이 태어나면서 김정일의 마음도 김정남에게서 떠났기 때문에 김정남이 후계자로 지명될 가능성은 희박한 것이었다. 게다가 김정남의 건강상태도 양호한 편은 아니어서 심장질환 치료차 유럽을 들락거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차남 김정철은 호르몬 질환을 앓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일본 후지TV는 “할리우드 액션스타 장 클로드 반담의 육체미를 부러워한 정철씨가 근육증강제를 과다 섭취한 결과, 호르몬 분비 체계에 문제가 생겨 목소리가 여성처럼 변하는 등 ‘여성호르몬 과다 분비증’을 앓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김정철의 목소리가 호르몬 질환으로 여성화되었다면, 김정일이 그보다 자신을 많이 닮은 3남 김정운을 후계자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김정운은 키가 175㎝ 정도이고 체중은 운동 부족 등으로 인해 90㎏을 웃돌며, 20대임에도 고혈압과 당뇨가 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8월 김정운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졌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신뢰할 만한 한 소식통에 의하면, 김정운이 오토바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맞지만 사고가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쨌든 김정운의 건강상태가 그가 후계자로 지명되기에 곤란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군주제적인 정치문화를 가진 북한사회에서 김정운은 단순히 김정일 당중앙위원회 조직비서의 아들이 아니라 ‘왕자’로서 성장했다. 사람들은 김정운을 ‘왕자님’이라고 불렀다. 김정운은 자신보다 나이가 19세나 더 많고 김정일의 스케줄을 관리했던 서기 김옥(김정일의 현 동거인)을 ‘이모’나 ‘김옥 동지’도 아니고 그냥 ‘옥이’라고 불렀다. 이 같은 사실은 김정운이 어려서부터 특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김정운이 18세 때에 후지모토 겐지에게 “나는 매일 제트스키를 타고, 해양스포츠를 하고, 롤러블레이드, 승마를 하고 있는데 일반 국민은 어떻게 하고 있나?”라고 물은 적이 있다. 이때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운이 18세의 나이에 벌써 일반 사람의 생활을 궁금해 하고 있어서 놀랐다고 술회하고 있다.
김정운은 원산, 신천, 평양 등 전국에 있는 초대소를 돌면서 자연스럽게 당과 군대 간부들을 만나 이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배웠다. 후지모토 겐지는 이들 간부들도 자연스럽게 3대 세습을 통한 후계 계승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 김정일이 김정운을 편애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후지모토 겐지는 간부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고영희도 김정철보다 김정운을 후계자로 내세우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그는 또 김정일이 김정운을 후계자로 지명하면, 장성택이 100% 지원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한 김정일의 현 부인인 김옥도 성격이 착한 사람으로서 야망을 갖기보다 김정운을 지원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김정일 패밀리에서 김정운을 후계자로 내세우는 데에는 어느 정도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의 건강이상과 후계자 지명
지난해 8월 김정일은 뇌혈관계 이상으로 쓰러지면서 건강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해 더 이상 후계자 결정을 미룰 수 없게 됐다. 그리하여 결국 지난해 하반기에 가장 총애하는 3남 김정운을 후계자로 내세우기로 결정하고, 올해 초부터 이를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를 통해, 그리고 당과 군대와 국가의 파워 엘리트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직접 알려 김정운에 대한 충성서약을 받기 시작했다.
북한의 고위 간부들도 처음으로 ‘김정일 없는 북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김정일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사망하면 파워 엘리트들 간에 권력투쟁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한데, 누가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김정일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다면, 북한의 파워 엘리트들은 스스로 후계자를 결정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적인 사고능력이 결여된 북한의 파워 엘리트들은 김정일이 후계자를 지명하고 자신들이 후계자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것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최상의 방안이 될 것으로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관점에서 장성택 행정부장이 김정일로 하여금 후계자 결정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8년 하반기에 김정일이 이미 김정운을 후계자로 내세우기로 결정하고, 그 같은 결정을 구체화하기 위해 북한의 핵심 엘리트들과 논의를 진행해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부장의 김정일 수행횟수 증가에서 확인된다. 리제강 제1부부장은 본부당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주로 군대나 경제와 관련된 김정일의 공식 활동을 거의 수행하지 않는 편이다. 리 제1부부장은 2006년에는 김정일의 공개 활동을 전혀 수행하지 않았으며, 2007년에는 단 한 차례 수행했을 뿐이다. 그 같은 리제강이 2008년에는 8월 김정일의 와병 전에 한 차례 수행한 데 이어 김정일의 공개 활동 재개 이후 무려 8회나 수행하는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였다.
이는 김정일이 리제강과 특별히 논의할 문제가 발생했으며, 당조직 중 가장 핵심적인 본부당에 대한 지도와 통제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음을 시사한다. 올해 1월초 김정일이 노동당 조직지도부에 김정운을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교시를 하달하고, 리제강 제1부부장이 조직지도부 과장급 이상 간부들을 긴급 소집하여 김정일의 결정 사항을 전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지난해 하반기 김정일과 리제강 간에 후계자 결정을 북한의 엘리트들에게 통보하는 방식과 김정운을 당내에서 후계자로 ‘추대’하는 절차에 대해 깊은 논의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北 핵심엘리트, 김정운에 충성서약
김정일이 김정운을 후계자로 결정한 이후 후계체계 구축을 위한 움직임은 매우 급속도로 진행돼왔다. 지난 1월 조직지도부를 통해 김정일의 후계자 결정 사실이 전달된 후 김정일은 장성택 행정부장을 비롯해 북한의 핵심 엘리트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직접 설명하고 그들로부터 김정운에 대한 충성서약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는 김정운의 후계체계 구축을 위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조직과 핵심 엘리트들까지 결정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를 간단하게 도식화해 소개하면 ‘도표 2’와 같다.
김정운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북한 내 핵심 엘리트들에게 통보하는 과정이 어느 정도 완료된 뒤 해외공관의 대사들에게 그 같은 사실을 알리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최근 우리 정보당국에 포착됐다. 그 결과 김정운 후계체계 구축은 단순한 ‘설’이 아니라 ‘사실’로 명확하게 확인됐다.
현재 김정운이 북한 지도부에서 맡고 있는 직책에 대해서는 ‘국방위원회 지도원’ 설과 ‘군 총정치국 비서’ 설 등 다양한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이 같은 보도들은 모두 김정일이 김정운을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함으로써 김정운이 사실상 ‘제2인자’의 지위에 올라 당과 군대, 국방위원회 등을 통합적으로 지도하는 위치에 오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북한의 후계자론에 의하면, 수령의 후계자는 수령과 함께 “인민대중의 뇌수, 통일단결의 중심, 당과 혁명의 최고지도자”로 간주된다. 물론 김정운이 당과 군대, 국가를 확고하게 장악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가 후계자로 결정된 이상 당이나 군대 또는 국방위원회의 한 조직에서만 활동한다고 보는 것은 북한의 후계자론이 후계자에게 부여하는 지위와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김정운 후계자 추대 올가을 절정 이룰 듯
근래에 북한 노동당의 하부 단위에서 김정운을 김정일 후계자로 ‘추대’하기 위한 작업이 이미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올가을경에는 ‘추대’ 운동이 절정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운이 지도하는 것으로 알려진 ‘150일 전투’는 9월 중순경에 완료될 예정이고, 10월10일에는 당 창건기념일이 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9월 하순과 10월 초순경에 북한이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해 김정운을 김정일 후계자로 공식 결정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김정운을 대외적으로 공식화하기까지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북한이 김정운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시점은 김일성 출생 100주년, 김정일의 생일 70회를 맞이하는 2012년경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때 북한이 제7차 당대회를 개최하면서 김정운을 대외적으로 드러낼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그때까지 북한의 경제사정이 현저하게 개선되지 않으면 당대회를 개최하지 않고 김정운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정운 후계체제 당분간 안정적
김정운의 후계자 결정 보도 이후 전문가들은 김정운 후계체계의 취약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부 연구자는 북한의 당·군 일각에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과 3남 김정운 지지세력 간에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김정일이 김정운을 후계자로 결정한 상태에서 김정남 세력과 김정운 세력 간의 권력투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정일의 의지에 반해 김정남을 지원하는 인사들이 있다면 그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친척 모두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운명에 처할 것이다. 현재 북한의 파워 엘리트는 모두 ‘김정운 세력’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김정운을 떠받들고 있는 핵심세력은 당과 군대를 장악한 조직지도부의 리제강, 리용철 제1부부장 등 구 고영희계와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성 등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억압기구를 장악한 장성택계라고 할 수 있다. 2003년과 2004년 갈등을 보였던 두 핵심세력이 현재 김정운을 중심으로 단합해 있기 때문에 김정운 후계체계는 더할 나위 없이 확고한 조직과 인적 기반 위에 놓여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만약 후계자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정일이 갑자기 사망하게 되면 북한 지도부 내 권력투쟁 발생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김정일이 3남 김정운을 후계자로 이미 지명했고,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김정운이 카리스마와 지도력을 가지고 있으며, 북한의 핵심 엘리트들이 김정운을 후계자로 받들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해갈 수 있기 때문에 향후 김정일이 갑자기 사망하더라도 지도부 내에서 심각한 권력투쟁이나 ‘급변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김정운이 권력을 승계한 후 핵보유를 고수하면서 북한이 더욱 고립되고 대내외적 상황이 심각할 정도로 악화된다면 당내 다른 지도자에 의해 교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