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호

희망이 없을수록 아름다워지는 짝사랑의 비밀

괴테의 베르테르 vs 투르게네프의 블라디미르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10-06-04 10: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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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하거라.
    •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해.”
    • -투르게네프, ‘첫사랑’ 중에서
    • 모든 젊은이는
    • 그렇게 사랑받고자 하고,
    • 모든 소녀는
    • 그렇게 사랑받고 싶어한다.
    • -요한 볼프강 괴테
    희망이 없을수록 아름다워지는 짝사랑의 비밀
    인간의 행복이 되는 것이 또한 인간의 불행의 근원이 되리라는 것은 도무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중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지닌 치명적인 매혹이 있다. 왠지 진정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제 맛(?)일 것 같은 낭만적인 환상을 심어준 괴테의 출세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베르테르 효과’라는 불명예스러운 신드롬을 탄생시켰다. 베르테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비극적인 죽음의 충분한 사유가 된다는 위험한 환상을 유포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또한 이에 못지않은 절절한 문체로 비극적인 짝사랑이 파괴해버린 한 젊은 영혼의 고백을 담고 있다. 대답이 없을수록, 기약이 없을수록, 희망이 없을수록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 짝사랑의 기이한 매혹이다.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은 ‘나’와 ‘그/그녀’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그/그녀의 달콤한 눈빛 속에 있다. 오직 다른 사람의 품에서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그/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치유 불가능한 외로움이 짝사랑의 실질적인 콘텐츠다. 짝사랑의 ‘현실’은 지독한 외로움이며, 짝사랑의 ‘이상’은 오직 공허한 망상 속에만 존재한다. 그리하여 짝사랑과 가장 친밀한 감정은 외로움이다. 타인을 향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깊어지는 외로움을, 마음속에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되자마자 더욱 외로워지는 뼈아픈 역설을, 우리는 저마다 고통스러운 통과의례의 기억으로 간직한 채 어른이 되어간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일으킨 파장은 어디를 가나 극단적인 것이었다. 재판의 제2부 앞머리에는 “사나이다우시오! 그리고 나를 따르지 마시오!”라는 작가의 글이 실렸다. 베르테르 열병, 베르테르 유행, 베르테르 모방자(Wertheriade) 같은 신조어들이 생겨났다. 고통에 찬 삼각관계가 유행하고, 베르테르 향수가 나왔으며, 베르테르와 로테의 초상화는 부채, 도자기, 찻잔, 동판화 등의 도안으로 쓰였다. 베르테르가 입었던 푸른 연미복에 노란 조끼와 바지가 유행했고, 예루살렘(괴테가 베르테르의 모델로 삼았던 인물로 알려진 인물)의 묘지에서는 베르테르의 추모제가 열렸다. 심지어는 베르테르를 모방한 자살자까지 속출했다. 이 같은 열광적인 찬사와 아울러 이 작품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광적인 거부도 있었다. 이 소설은 “성직자들은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는 말로 끝맺고 있는데 특히 정통파 신학자들은 이 작품이 자살을 찬양한다는 이유로 ‘사탄의 미끼’라고 비방했다.

    -정두홍,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수용에 관한 연구’ 중에서



    낭만적 환상의 인큐베이터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한 안타까운 응시 속에서 점점 통제할 수 없는 열정으로 치닫는 짝사랑의 맹목. 그것은 어떤 만족스러운 보답도 받을 수 없고 어떤 희망적인 약속도 바랄 수 없기에 더욱 순수한 열정으로 기억되곤 한다. 무한 쾌락과 무한 고통이 동시에 찾아드는 기이한 열정을, 사람들은 짝사랑이라는 마음의 열병을 통해 배운다. 짝사랑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만이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심장 깊숙이 새겨졌다. 이 순간 나는 그녀가 슬퍼하지 않게만 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투르게네프, ‘첫사랑’ 중에서

    짝사랑의 가장 좋은 점은 데이트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는 꽤 의미심장하다. 짝사랑은 서로의 합의 아래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랑과 달리 ‘세속적인 현실’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데이트 비용뿐 아니라 그/그녀와 함께 할 ‘현실적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보금자리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할 필요가 없고, 그들 사이에 태어날 아이의 미래를 위한 저축을 들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오히려 사랑이라는 비상구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도망친다. 짝사랑의 중력장 안에 있는 한, 그들은 낭만적 환상의 인큐베이터 속에 안전하게 머물 수 있다. 그들에게 사랑은 원치 않는 세계로, 경쟁자와 속물들이 가득한 위험한 세계로 나아가고 싶지 않은 현실도피 심리에 탈출구를 제공하는 것이다.

    희망이 없을수록 아름다워지는 짝사랑의 비밀

    짝사랑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한 안타까운 응시다.

    베르테르는 로테뿐 아니라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미래도 현실도 생각하지 않는 ‘첫사랑’ 속 블라디미르의 눈먼 사랑도 ‘사랑밖엔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픈 현실도피의 욕망을 보여준다. 베르테르는 로테와의 로맨스가 좌절되자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는 탐욕과 경쟁이 판치는 세상이 아니라 오직 자기 안에서만 ‘진정한 세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나는 나 자신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하나의 세계를 발견한다! 명확한 표현이나 팔팔한 힘에서보다는 예감이나 막연한 욕망 속에서 더 많은 세계를 발견한다. 거기에서 모든 것이 나의 오감(五感) 앞에 두둥실 떠오른다. 그러면 나는 멍청히 꿈꾸면서 다시 그 세계 속을 향해서 미소를 보낸다.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가족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초특급 모범생 블라디미르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첫사랑 지나이다를 추종하는 남자들의 무리 중 가장 어린 블라디미르를 향해 이제 ‘미래’를 생각하고 ‘공부’에 전념하라고 충고해주는 루신 박사에게 블라디미르는 명백한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다. 루신 박사는 매일 지나이다의 집에서 맴도느라 모든 일상을 작파해버린 블라디미르에게 점잖게 충고한다. “젊은 양반, 왜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이곳을 헤매십니까? 아직 젊으시니 일을 하고 공부를 하셔야 한 텐데,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블라디미르는 상대방의 지긋한 나이도 고려하지 않고, 거만하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루신 박사의 충고를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제가 집에서 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당신은 모르지 않습니까?” 사랑의 달콤한 환상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현실’을 상기시키는 그 어떤 충고도 자신을 향한 ‘가혹한 공격’으로 들리는 것이다.

    패배가 예정된 게임

    나는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되었다. 나의 고통은 바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투르게네프, ‘첫사랑’ 중에서

    도저히 ‘나’와는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은 강력한 연적(戀敵)은 패배가 예정된 짝사랑 게임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로테의 연인은 너무도 완벽한 교양과 도덕을 갖춘 사람이기에 베르테르는 도저히 그에게서 로테를 빼앗을 수 없을 것만 같다. 베르테르는 마음껏 질투조차 할 수 없는 고상한 인품을 갖춘 로테의 연인을 보며 괴로워한다.

    블라디미르의 첫사랑 지나이다의 연인은 그가 가장 동경하는 남성인 ‘아버지’이기에 도저히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다. 블라디미르의 아버지는 아름다운 외모와 매력적인 지성으로 지나이다를 단숨에 굴복시킨다. 누가 봐도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블라디미르에 비해 훨씬 강력한 남성성과 중후한 매력을 갖춘 아버지는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상대였다. 블라디미르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지나이다는 모든 면에서 자신의 미숙함을 상기시키는, 자신을 언제나 ‘소년’으로만 바라보는 존재였던 것이다. 블라디미르의 풋풋한 남성성을 단번에 끌어내놓고는 이제 막 개화한 그의 남성성을 본 척도 하지 않는 지나이다는 블라디미르를 끊임없이 애타게 만든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빛나는 이상적 사랑과 현실의 여인 그 자체를 동일시한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로테가 누군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어머니가 되는 것, 시간이 가서 그의 짝사랑마저 지속될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의 이상에 비하면 ‘현실’은 가변적이고 세속적이고 아름답지 않기에. 그렇게 그들은 점점 자신이 창조한 이상의 세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일상은 철저히 마비되고 사랑 이외의 다른 모든 관계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워지는, 오직 사랑만을 찾아 헤매는 무중력의 자아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단지 한 여자의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 무한한 생동감으로 충만하던 세상은 그녀의 한 마디 거절로 인해 철저한 암흑의 무대로 변해버리고 만다. 세상을 향한 모든 빛은 그녀를 통해 나 있었고, 그녀가 희망의 스위치를 내려버리는 순간 세상을 비추던 그 모든 빛도 함께 꺼져버린 것이다.

    생생한 자연에 대한 나의 마음속에 따뜻하게 차오르던 감정, 그렇게도 많은 환희로 내 가슴을 넘쳐흐르게 하였고 주변의 세계를 낙원으로 만들어주었던 그 감정이, 이제는 어딜 가나 나를 따라다니며 견딜 수 없는 박해자, 성가시게 구는 귀신으로 변해버렸다.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여자가 없는 남자들만의 대화는 마치 기름칠을 하지 않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마차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투르게네프

    박제된 정열

    희망이 없을수록 아름다워지는 짝사랑의 비밀

    짝사랑을 하는 이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이 사랑이 결코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그들은 상대방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반하긴 하지만 그녀를 성적인 매혹의 시선으로 바라볼 만큼 충분히 친밀하거나 편안한 거리까지 다가가지는 못한다. 그들은 불가능한 사랑을 현실적/육체적 사랑과 아예 유리시켜 ‘성스러운’ 관계로 미화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적 사랑의 고통을 보상받는다. 그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 사랑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그들은 사랑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순간 비로소 깨닫는다. 가장 아름다운 행복이 흘러나오던 바로 그 원천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절망의 씨앗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천국과 지옥이 한마음속에 공존하는 고통을 베르테르는 이렇게 묘사한다.

    서글픈 일이다! 모든 죄가 나 혼자에게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절실하게 느낀다. 아니, 죄가 아니다! 내 마음속에 불행의 원천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 옛날 내 마음속에 모든 행복의 원천이 숨어 있었듯이. 그 옛날 풍성하게 넘치던 감정 속에 떠돌며 거니는 발자국마다 낙원이 뒤따르고 사랑에 넘쳐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움켜잡을 만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나와 동일한 내가 아닌가? 그런데 내 마음은 이제 죽어 있다. 이 마음에서는 다시는 희열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나의 눈물도 말라버렸다.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흥미로운 점은 괴테의 로테나 투르게네프의 지나이다 모두 ‘현실적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러니까 작중 인물들은 그 여인들이 처한 ‘진짜 현실’에 대해 거의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는 점이다. 로테에게는 돌봐야 할 수많은 가족이 있고 약혼자가 있으며 베르테르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현실의 문제가 산적해 있을 것이다. 지나이다는 몰락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나 생존을 위협받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귀족 남성들의 호의에 기대어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무언의 압력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상상 속의 그녀들

    베르테르의 이상적 사랑은 로테의 현실을 침묵시킴으로써 보존되고, 블라디미르의 낭만적 사랑은 지나이다의 골치 아픈 생존의 문제와 복잡한 이성관계를 무시함으로써 성립된다. 우리는 로테가 된장찌개를 끓인다든지 지나이다가 빨래를 너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녀들은 짝사랑의 주인공들에게 도저히 손에 닿을 수 없는 높은 성곽 위에 갇힌 공주들로 이상화됨으로써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들은 육신을 가진 현실 속의 여성들로 체험되기보다는 남성들의 마음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이상형이 강력하게 투사된 환영(illusion)으로서만 완벽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재클린 살스비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연인들의 자기애적(自己愛的) 충동을 이렇게 꼬집는다. “연인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서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안타까운 ‘자기 응시’를 아직 멈출 수 없다. 그것은 짝사랑뿐 아니라 모든 사랑의 여정에 통용되는 편도 티켓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번 이 아득한 레테의 강을 건너면 성실한 시민으로서의 균형감각(?)을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 사람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토록 허무맹랑한 맹목이 없다면 이미 사랑이 아닐 테니까. 그 모든 안타까운 사랑의 첫 번째 장면은 결국 이렇게 시작되지 않을까.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는 사이에 그녀는 내게 정말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고, 그녀가 나타나기 전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으며,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투르게네프, ‘첫사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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