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천헌금’ 6억 수수 무죄, 당채(黨債) 이자가 시중금리보다 낮다고 유죄
- ‘공천 대가’ 주장하던 검찰, 대법원의 위법성 지적에 뒤늦게 공소장 변경
- 대법원, “허위범죄경력조회서 발급한 국가는 창조한국당에 피해 보상하라”
- 대선 때 나를 사퇴시키려는 단일화 세력과 지지세력 갈등 심각했다
- 당에 40억 빌려주고 55억 기부, 재산 90% 날렸다
- 뉴 패러다임 연구소 차려 중국기업들 컨설팅, 드러커경영원도 설립 예정
●1949년 서울 출생<br>●한국외대 영어과 졸업,<br>서울대 대학원 경영학 석사 <br>●유한킴벌리 사장 <br>●킴벌리클라크아시아 사장 <br>●사람입국 신경쟁력특별위원회 위원장 <br>●창조한국당 공동대표 <br>●18대 국회의원(서울 은평을) <br>●현 뉴 패러다임 인스티튜트 대표
그를 가까이에서 처음 본 것은 아마도 2007년 2월경이 아니었나 싶다.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 강연회에서였다. 당시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사장이던 그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갔다 온 얘기를 들려줬는데, 신선했다. 평소 환경문제에 대해 수박 겉핥기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적절한 깨우침을 주는 내용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가 정치판에, 그것도 대선후보로 나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저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현실참여형 기업인 중 한 명으로 여겼을 뿐이다.
그해 8월 그는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창조한국당을 창당했다. 그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그가 당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대통령선거에 왜 나오려는 건지 납득되지 않았다. ‘새로운 정치실험’이니 ‘대안후보’니 하는 언론의 호들갑스러운 평가엔 믿음이 가지 않았고 그저 아까운 기업인 하나 잃게 생겼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예상대로 그의 대선 성적표는 초라했다. 5.8%의 낮은 득표율. 그것으로 그의 정치적 행보는 그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가 이듬해 4월 18대 총선에서 서울 은평을에 출마해 여권 실세 이재오 의원을 꺾었을 때 나는 그의 정치적 잠재력을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그 정치적 잠재력이 무력화되는 데는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해 10월 검찰은 그를 정치자금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표적수사 논란이 일었지만 그의 이미지는 뭉개질 대로 뭉개졌다. 총선 직후 학력과 범죄사실기록을 위조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한정 의원한테 6억원을 받고 창조한국당 비례대표로 공천했다는 사실은 대중의 감성을 자극했다. 법리적으로는 따져볼 게 없지 않았지만, 대중은 늘 그렇듯이 언론의 ‘선도’에 따라 도덕적 단죄부터 했다. 기자인 나조차 그랬으니까. 2009년 10월 그는 선거법 위반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잃었다. 그리고 지난해 7월 이재오 전 의원은 은평을 재보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문국현 전 대표는 현재 뉴 패러다임 인스티튜트 대표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문 대표라고 부르겠다. 뉴 패러다임 인스티튜트는 말 그대로 경영의 뉴 패러다임을 연구하는 곳이다. 일찍이 문 대표는 유한킴벌리 사장 시절 4조2교대 근무와 직장 내 평생학습을 골자로 하는 뉴 패러다임경영을 창안하고 성공시켜 경영혁신의 선구자라는 평을 받아왔다.
지난 1년 동안 그는 미국 드러커대학원의 초빙교수로 지내면서 미국 육군사관학교와 MIT대학,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대학원과 연구소 등에서 강연과 토론을 했다. 지난해 8월 이후엔 중국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가 요즘 주로 하는 일은 중국 기업들에 대한 컨설팅이다. 이 얘긴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재판 얘기부터 해보자.
선거비용 보전액 반환 판결
1월말 서울고등법원은 문 대표가 은평구 선거관리위원회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2009년 11월 은평구 선거관리위원회는 문 대표에게 의원직 상실을 이유로 18대 총선 후 돌려받은 기탁금과 선거비용 보전액 1억여 원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문 대표는 “비례대표 선거에서의 법 위반을 이유로 선거비용을 반환하라는 선관위 결정은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패한 것이다.
“법정한도는 2억원 안팎이지만 남들은 몰래 5억도 쓰고 10억도 씁니다. 나는 딱 1억 썼습니다. 1억 쓰고도 정권 실세라는 이재오 의원을 누르고 당선됐어요. 그것도 압도적으로 이겼습니다. 돈 안 쓰는 선거의 표본이었습니다. 순전히 발품만 팔고 정책만 팔았어요. 사실 은평을 지역구를 위한 공약은 하나도 없었지요. 3월4일부터 한 달간 24시간 은평에서 살았습니다. 다른 지역구 유세지원 요청도 거절하면서. 그렇게 돈 안 쓰고 이긴 건 기적인데, 재판에서 졌으니 다시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좋다, 내놓긴 하겠지만 행정소송으로 되찾겠다’고 나선 겁니다.”
그가 특유의 느릿하고 차분한 말투로 얘기를 시작했다. 법원은 “의원 본인이 출마한 지역구 이외의 다른 선거구(지역구 또는 비례대표전국구)에서의 활동으로 공직선거법이나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경우에도 당선 무효로 볼 수 있어 선관위의 선거비용 반환 처분은 합당하다”고 판시했다.
문국현 대표는 2010년 12월 중국 상하이에서 룬우그룹과 컨설팅계약을 맺었다.
“1억원, 나라에 기증한 셈 쳐도 됩니다.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이죠. 지역구민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사람을 당 운영상 문제가 있었다고 의원직을 박탈한 것도 우리나라 역사는 물론 인류역사에도 없었던 일일 겁니다.”
▼ 하여간 6억원 받은 게 문제였지요?
“아니지요. 당이 무슨 가상의 이자놀이를 했다는 건데, 말이 안 되죠. 다 선관위 승인을 받고 한 일입니다. 민노당은 0%이고 우리는 1%였습니다. (당채) 이자율이. 그런데 그 이자가 너무 낮다고 문제 삼은 겁니다. 선관위 가이드라인은 실효성이 없다면서. 말하자면 시중금리에 비해 이자율이 낮아 당이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거지요. 3500만원쯤 되는. 총선 때 나는 당 대표를 내놓고 지역구에 출마했습니다. 그런데 조그만 당에서 무슨 선대본부장과 당 대표대행이 따로 있느냐면서 내게 책임을 물은 겁니다.”
돈 받은 게 문제가 아니라 이자를 낮게 쳐줬다고 유죄가 선고됐다니. 재판관들이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만, 흔치 않은 일이긴 하다. 문 대표의 하소연이 아니더라도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2008년 10월 검찰이 그를 기소한 죄목은 정치자금법 위반과 공직선거법 위반. 문제의 이한정씨에게서 6억원을 받은 게 공천대가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당시 창조한국당이 6억원을 받으면서 연 1%의 이자가 붙은 당채(黨債)를 발행한 점을 들어 정치자금법 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선거법 위반에 대해선 유죄를 인정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당채 이자를 시중의 이자보다 낮게 책정함으로써 당이 재산상 이득을 취했으므로 선거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득을 본 것은 당이지만 당은 인격체가 아닌 만큼 문 대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2009년 7월 2심 재판부도 같은 논리로 유죄를 선고했다.
검찰 따로, 법원 따로
그런데 여기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연이 있다. 바로 공소장 변경 논란이다. 애초 검찰이 공소장에서 제시한 문 대표의 혐의는 구속기소된 이한정씨와 맞물린 공천헌금 수수였다. 당채 저리(低利) 발행에 따른 선거법 위반은 1심 재판부의 논리였다. 재판부는 검찰에 공소장 변경을 요구했으나 검찰은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재판부는 검찰의 의사와 상관없이 당채 이자를 문제 삼아 문 대표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2심 때도 검찰은 정치자금법 위반이라는 주장을 접지 않은 채 재판부의 공소장 변경 요구를 거부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그 무렵 대법원이 이한정씨에 대한 1, 2심 판결이 잘못됐다며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2심까지 인정된 이씨의 죄목은 허위 이력서 제출과 더불어 당채를 낮은 금리로 사들여 당에 재산상 이득을 제공한 것이었다. 대법원이 제동을 건 것은 두 번째 죄목이었다. 검찰의 공소장에 없는 내용이므로 1, 2심 재판부가 공소장 변경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권으로 이씨에 대해 선거법 위반죄를 적용한 건 위법이라는 것이다.
대법원의 지적에 당황한 검찰은 뒤늦게 공소장을 변경했다. 창조한국당이 저리의 당채 발행으로 액수 미상의 재산상 이익을 얻었다는 예비적 공소사실을 추가한 것이다. 선고 이틀 전의 일이었다. 검찰은 금액을 특정하지 않았다. 재판부 논리대로라면 6억원이 건네진 2008년 3월의 평균 시중금리가 6.9%이고 당채 금리가 1%이므로 그 차액에 해당하는 수천만원의 이득을 얻었다는 것이다. 문 대표에 대한 2심 선고와 이한정씨 파기환송심 결과는 같은 날 나왔다. 문 대표에게는 1심과 같은 형량이 선고됐고, 이씨는 징역 2년의 실형이 확정됐다. 문 대표는 상고했다.
“이율이 법에 정해진 것도 아니고, 더욱이 선관위가 인정한 당채 발행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이자놀이 했다는 근거도 없고. 검찰은 내가 공천 대가로 뒷돈을 받은 게 아니냐고 의심했는데 1년 반을 조사해도 전혀 나온 게 없었지요.”
목소리를 높일 법도 하건만 여전히 조근조근 말한다. 어쨌거나 판결이 묘하다. 공천헌금 명목으로 돈을 받아도 당채를 발행했으니 죄가 안 되는데 당채 금리가 시중금리보다 낮기 때문에 죄가 된다는 논리다. 뒤집어 말하면 시중금리보다 높거나 같으면 죄가 안 된다는 거다.
▼ 비례대표 공천 조건으로 거액을 받는 건 구시대의 정치관행이지요. 그 돈을 안 받을 순 없었나요?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 대표셨잖아요?
“어느 당이든 지역구에 출마하면 당 대표직을 내놓습니다. 비례대표 공천은 대표대행과 선대본부장 두 분의 권한이었어요.”
조금 무책임한 답변으로도 들린다. 2008년 4월21일 이한정씨가 학력을 속인 혐의로 구속되자 다음날 창조한국당은 이씨에 대한 당선무효소송을 대법원에 제기했다. 당선무효소송은 단심제다. 그해 12월 대법원의 원고 승소판결로 이씨는 의원직을 잃었다.
경찰, 검찰의 허위 범죄경력조회서 발급
▼ 이한정씨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2008년) 3월15일 ‘생명의 숲’ 창립 10주년 기념일에 제가 프레스센터에서 그 행사 준비로 바빴어요. 그때 나를 찾아와 명함과 입당원서를 주기에 비서한테 전해줬어요. 그 다음에 당 공천위원회의 부탁에 따라 호텔에서 한 번 만난 일이 있지요. 당의 선거관리대표들과 함께 한 5분간. 그게 다예요.”
▼ 당시 대표직을 내놓은 상태였다는 거죠?
“그렇지요. 그런데 검찰은 조그만 당에 무슨 대행이 있느냐고….”
▼ 실질적인 대표가 아니라는 거죠?
“그런 주장은 증거가 없는 거죠.”
▼ 그때 누가 대표대행을 맡았나요?
“선경식 최고위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천위원장은 송영 선생님이었고요. 그분들이 엄격하게 자기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대표대행도 선대본부장도 공천위원장도 다 허수아비일 거라고 지레짐작한 거죠.”
▼ 공천헌금을 안 받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 아닙니까.
“은평을에서 문국현 지지율이 막 오르니까 ‘야, 이거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사람들이 흥분해서 돈을 낸 거예요. 자기 선거비용으로 쓰려고 낸 건데 누가 왜 말리겠습니까.”
▼ 당에 낸 거잖아요?
“아니에요. 자기네 선거비용으로 쓴 겁니다. 전국 유세 다니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은평에는 단 1원도 안 썼어요.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돈입니다.”
문 대표에 대한 대법원 재판과정에서는 공소장일본주의(公訴狀一本主義)가 논란이 됐다. 공소장일본주의란 검찰이 기소할 때 공소장만을 제출하고 수사기록 따위의 다른 서류나 증거물은 일절 제출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다. 재판부가 사건에 대한 선입관을 갖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문 대표에 따르면 검찰이 공소장에 자신과 주변사람들이 주고받은 e메일, 범행배경 등 혐의와 직접 관계없는 내용을 기재했다는 것이다.
원래 이 사건은 대법원 3부(주심 신영철 대법관)로 배당됐으나 공소장일본주의 위반 시비를 가리기 위해 전원합의체로 넘겨졌다. 대법관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졌으나 13명 중 9명이 위법이 아니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공소장일본주의 위반도 아니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피고인이 그것을 문제 삼을 수 있는 시기가 지났다는 게 다수 대법관의 견해였다. 이로써 문 대표의 유죄가 확정됐다. 형량은 원심과 같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그보다 두 달 앞선 2009년 8월 창조한국당은 국가에 100억원의 손해배상액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허위공문서를 발급해 창조한국당에 엄청난 손해를 입혔으니 보상하라는 요구였다. 허위공문서란 전과기록이 말소된 이한정씨의 범죄기록증명서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책임을 물은 기관은 강남경찰서와 대검찰청이었다. 문 대표의 말이다.
“두 가지가 잘못됐어요. 첫째는 경찰과 검찰이 가짜 증명서를 떼준 것이고요. 둘째는 검찰이 그것을 갖고 혐의사실을 조작해 유포한 겁니다. 10년 전, 40년 전에 전과가 있었던 사람을 공천한 걸로 봐서는 틀림없이 돈을 주고받았을 거라고.”
소송 논거는 이렇다. ▲이한정씨는 창조한국당에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할 때 서울 강남경찰서에서 발급한 범죄경력조회서를 제출했는데 거기에는 전과기록이 없었다 ▲창조한국당 공천심사위원회는 이를 믿고 이씨를 비례대표로 공천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다른 비례대표 후보자들과 마찬가지로 대검찰청에 이씨의 범죄경력을 문의했고 대검은 서울중앙지검에 확인해 ‘전과 없음’이라는 범죄경력조회서를 회신했다 ▲그런데 나중에 수원지검에 의해 이한정씨에게 금고 이상의 전과 4건이 있음이 드러났다 ▲경찰과 검찰이 고의로 이를 누락하지 않았다면 창조한국당은 이한정씨를 비례대표로 공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한정과 라자로마을
이 소송은 현재 2심이 진행되고 있다. 1심에서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이 나왔다. 국가가 창조한국당에 5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었다.
“이한정씨가 천주교에서는 유명한 사람이에요. 라자로마을 운영회장이 김수환 추기경이셨는데 그 사람이 수석부회장이었어요.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일반 부회장을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고흥길 의원이 맡았습니다. 그런데 사기꾼이었다는 거예요, 10년 전에. 10년 전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이명박 대통령도 과거에 전과 13범이었다면서요? 경찰과 검찰이 가짜 증명서를 떼어주면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잖아요?”
▼ 그게 참 납득이 안 되네요. 수사기관에서 왜 그랬는지.
“그래서 그 사람들 다 파직당했어요. 나중에. 일부는 복직했다는 소리도 들리지만.”
2008년 5월 강남경찰서는 이씨에게 범죄경력조회서를 발급하면서 전과기록 4건을 누락한 박모 경위를 파면했다. 2009년 9월 창조한국당은 대검의 범죄경력조회서 발급에 관련된 검찰 관계자들을 허위공문서 작성,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 등으로 고소했다.
▼ 이한정씨가 손을 쓴 건가요?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게 없나요?
“어떻게 수사기관 두 군데서 동시에 가짜 증명서가 발급됐는지… 밝혀진 게 없어요. 조작을 한 건지, 두 기관이 짰는지. 아무튼 대법원에서 인정했지요. 국가 잘못이라고.”
문 대표 주변에서는 그가 정치에 참여한 이후 거의 전 재산을 날렸다는 소문이 있다. 그런데 확인해보니 2009년 3월 그가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에 신고한 재산총액이 96억5529만원이다.
▼ 정치하느라 날린 돈이 얼마나 되나요? 재산의 반은 날렸습니까.
“반이 뭐예요? 제 처 것 빼고는 90%는 날렸어요. 집도 차압당한 적 있고. 제 처가 애써 번 돈도 일부 날렸습니다.”
▼ 재산신고 한 걸 보니 그래도 재산이 많던데요.
“당에 빌려준 40억원이 포함돼 있는 겁니다.”
▼ 2009년 재산신고하신 게 97억원쯤 되던데요.
“그러니까 그중 40억원은 채권입니다. 자꾸 차압이 들어오니 갚아줘야 하잖아요. 그것 때문에라도 당 대표직을 맡을 수밖에 없었어요. 주변에서 나보고 도망가라고 하는데 다른 다섯 공동대표가 도망갔으면 됐지 후보마저 도망갈 순 없잖아요.”
문 대표는 당에 40억원 빌려준 것과 별개로 55억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남들은 대선 때 1000억대를 쓰는데 우리는 95억원 쓴 겁니다. 대선 때 전국적으로 당 활동이 많잖아요. 또 대선 끝나고도 당은 돌아가야 하잖아요. 처음에 제 돈으로 한 30억원 댔고 나중에 65억원을 추가로 지원했습니다. 제 처 돈도 들어갔지요. 그와 별개로 대선후보 등록금 6억원 낸 게 있고요.”
▼ 빌려준 돈은 받을 수 있는 겁니까.
“기부금이 많으면 당연히 받겠지만, 당 사람들이 자기네 월급으로 먼저 쓰겠지, 제 돈부터 갚겠어요? 때가 되면 갚을지 모르지만.”
▼ 하여간 재산이 얼마나 남은 겁니까.
“40년간 모은 제 재산은 다 날리고 10%도 안 남았어요. (2009년에) 신고한 재산은 40억 채권하고 제 처 돈이지요. 제 돈은 한 10억원 되고 나머지는 집사람 돈입니다. 퇴직금 나온 게 더해지고 주식값이 올라가 (전년도에 비해) 재산이 조금 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다보스에서의 깨달음
이제 그의 정치실험 성과를 짚어보자. 그의 정치적 기반인 창조한국당은 2007년 10월30일 창당됐다.
▼ 어쩌다 대선후보로 나설 생각을 하셨습니까.
“3월쯤부터 우리 회사를 자꾸 공격하는 거예요, 신문에서들. 제가 이명박 대통령과 꽤 친했잖아요. 그런데 대운하를 계기로 갈라섰지요. 저는 기업인이자 시민운동가였어요. 유엔에서 환경상을 받은 기업인으로서 유엔환경운동가로 지정돼 있었지요. 그러니 유엔 차원에서라도 (대운하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지요. 언론의 공격을 받자 회사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일자리에 대한 고민, 젊은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지요. 내가 국제 업무를 핑계로 해외로만 떠돌아다니는 게 옳은지 반성도 했고요. 2007년 1월 다보스포럼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에서 나온 좋은 얘기를 아무리 전해줘도 듣지 않는 거예요. 이런 비합리적인 사회를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6월까지는 열심히 설득했어요. 전세계적으로 금융·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곧 우리나라에도 위기가 찾아온다고. 다보스에선 세계 경제위기에 대한 대책을 논하고 있는데, 대운하가 뭐냐. 게다가 이명박 후보가 당시 주가가 2000일 때인데 집권하면 1년 안에 3000으로 올리고 임기 내에 5000으로 끌어올리겠다고…. 747(7% 경제성장, 4만달러 소득, 세계 7위 경제)이라는 것도 약속하고. 전세계의 고민과는 너무나 다른 얘기를 하는 거예요. 대운하도 잘못이지만 허황된 정책 제시로 국민을 오도하는 건 더욱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가가 1000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진실을 얘기해야 한다고. 나중에 실제로 주가가 800까지 떨어졌잖아요. GDP도 아직 2007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았고. 그래서 창조적 미래세력을 만들어 대한민국을 업그레이드하고, 미국과 일본, 중국 중심의 제1 경제공동체 외에 한반도와 동북아가 중심이 되는 제2 경제공동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려면 국내에서 서로 싸우는 정당세력과 합해선 안 되고 국제관계에 능한 사람들끼리 모여야겠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는 자신의 대선출마에 대해 “창조적 미래세력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면서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자평했다.
“한 60일 사이에 150만표가 나온 거니까요. 연고주의와 지역주의가 판치는 우리 사회에서 창조적 미래세력이 필요하다고, 떨어질 줄 알면서도 한 150만명이 투표장에 나와준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 목표치에는 못 미쳤지요? 10%대를 예상하셨잖아요?
“처음엔 12%가 넘었지요. 이회창 후보가 나오면서 뺏긴 표가 많았지요. 그리고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가 진행되면 문국현은 사퇴한다는 소문이, 제3세력의 길을 막는 어떤 힘이 작용한 거지요.”
일과 삶의 균형
2010년 8월 중국 옌타이에서 열린 드러커 경영 포럼에 참석한 문국현 대표.
“잘못된 사람이 되는 것보다야 백 번 낫지요. 아무리 준비가 잘돼 있어도 그것이 나쁜 방향이라면, 예컨대 모래밭에 열심히 집을 짓는 건 소용없잖아요. 제가 우리 사회 양심세력이 힘을 합하는 데 중심은 될 수 있었지요.”
▼ 정치경험이나 행정경험은 별로 없으시잖아요?
“왜요, 많이 했지요. 국가경쟁력위원장을 2년 지냈고요. 고건·이명박 시장 시절 서울시 자문위원을 7년 했습니다. 총리자문위원을 지내면서 장관 거부한 사람은 저 하나일 거예요. 노무현 대통령도 당선되자마자 저를 환경부 장관으로 내정해놓으셨지요. 물론 고건 총리가 추천한 거지만.”
▼ 그때 좀 하시지 그랬습니까.
“킴벌리클라크아시아 회장에 막 취임했을 때입니다. 2003년이니까. 매출 20조의 세계적인 회사 회장을 1월에 맡았는데 아무리 대통령과 총리 말이라 해도 2개월 만에 그만둘 수는 없지요. 그 다음에 탄핵사태 끝나고 노동부 장관 얘기가 있었지요. 그때는 우리가 학습사회, 창조적인 사회가 되려면 좀 더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거절했습니다.”
그는 당시 유한킴벌리 사장과 킴벌리클라크아시아 회장을 겸직했다. 유한킴벌리 사장 연봉은 5억원, 킴벌리클라크아시아 회장은 10억원이었다.
▼ 대선 때 표어로 내세운 게 사람중심사회였지요?
“사람중심, 창조경제.”
▼ 거기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구체성이 결여된 게 아니냐고….
“지금도 그대로 하면 300만 일자리는 금세 생길 겁니다. 선진국에선 연간 1600시간 일해요. 많이 하는 나라가 1800시간이고. 우리나라는 2300시간이에요. 많이 일하면 생산성이 높아질 걸로 생각하는데 정반대예요. 졸릴 때 운전 잘해요? 아니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과로 사고가 선진국의 10배, 20배예요. 국가가 1년에 17조원의 사고부담을 지고 있습니다. 대선 당시 제가 2000시간으로 줄이자고 하니까 미친놈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최근 노사정이 1800시간으로 합의했잖아요. 단 10년 유예기간을 두는 걸로. 그래서 또 거짓말하는 게 됐지만.”
문 대표가 말하는 창조경제의 핵심은 일자리를 늘리는 만큼 노동시간을 줄여 그 시간에 사회활동과 공부를 하게 해서 지식과 창조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Work and Life Balance’라고 표현했다. 일과 삶의 균형이다.
“선진국이 왜 생산성이 높습니까. 우리보다 머리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노동량이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고용률도 높지요. 그런데 우리는 노사분규 난다고 기존 노동자들에게 일을 많이 시키고 사람을 안 늘리려고 해요.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기업들이 깨끗하기만 하면 노동조합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지요. 일자리를 늘리면 오히려 사람이 부족하게 돼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됩니다. 비정규직으로는 사람 모으기가 힘드니 정규직 월급을 주고 공부를 시키는 쪽으로 가는 거죠. 그게 선진국형이죠.”
“당에 애정이 없어졌다”
▼ 대선 때 혹시 당선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셨습니까.
“그건 아니고요. 뭐 15~20%까지는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 지지자 그룹 중 상당수가 대선 후 이탈했지요?
“대선에서 지자마자 저는 외국에 나갔어요. 5명의 공동대표가 두 달간 당을 이끌면서 빚을 많이 졌지요. 제가 끝내 귀국을 안 하니까 당 해체 선언을 하고 민주당으로 몇 명이 갔지요. 그래서 난리가 났지요. 빚을 어떻게 갚느냐고. 결국 나중에 제가 다 갚았지요.”
▼ 외국 나간 건 더는 정치를 안 하려고 그랬던 겁니까.
“피로했어요. 90일 동안 정신없이 돌아다녔거든요. 그리고 정당에 애정이 없었어요. 제가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으니까. 알던 교수들도 다 돌아간 지 오래고. 공동대표들은 빚만 남기고 떠나고. 왜들 그렇게 민주당 가는 게 급한지. 대통령 취임 전에 숭례문에서 불이 났잖아요. 나라의 운명이 불길하더라고요. 그래서 귀국했는데, 제가 전혀 모르는 당원 70~80명이 남아 있더라고요. 이분들의 요청으로 2월17일에 (당에) 복귀했지요. 열흘 뒤엔 저도 총선에 나가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지역구에 나가 장렬하게 전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은평으로 정한 게 3월1일인가 그래요. 은평에 내가 아는 사람이 세 명밖에 없었어요. 내가 은평에 나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당은 자기네가 알아서 운영할 테니 거기 가서 하는 데까지 해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은평으로 이사를 갔지요. 3월7일부턴가 터전을 잡고서 하루 18시간 이상 (선거일까지) 한 10만명을 만난 것 같아요. 상황이 그랬는데 나중에 검찰이 나보고 당 대표니 어쩌니 해서 웃고 말았지요.”
▼ 지난해 7월 이재오씨가 재보선에서 당선된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 없는 상황에서 한 건 의미가 없지요(웃음).”
▼ 다시 붙으면 자신 있습니까.
“그거야 뭐 해봐야겠죠. 그런데 은평에 나가 있던 전 대표한테 당채 이자 책임을 지라는 게 말이 됩니까. 국민이 동의하지 않은 시비이고 억지 중 억지죠. 그러니 이 정권이 지지를 못 받는 거예요.”
▼ 은평을 주민들이 이재오씨를 다시 선택한 건 현실정치의 힘을 기대한 게 아닐까요. 문 대표한테 실망하고 나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뭐 표가 늘었나요? 저하고 할 때와 비교해 거의 안 늘었잖아요. 한 70% 나왔다면 모르겠지만. 정권의 2인자치고는 적게 나온 거지요.”
이재오 의원은 은평을 재보선에서 58.3%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8대 총선 때의 40.8%에 비해 17.5% 높아졌다. 문 대표의 주장과 달리 그 정도면 지지표가 꽤 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문 대표의 당선 득표율은 52%였다.
단일화 세력의 끈질긴 사퇴 요구
▼ 대선 이후의 행동은 무책임했던 게 아닌가요?
“누구요? 저요?”
▼ 예. 당이 있고 지지자들이 남아 있는데….
“공동대표가 5명이나 있고 저는 후보였으니까.”
▼ 실질적인 구심점이었잖아요?
“당직자들은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어요. 저한테 만날 사퇴하라고 했지요. 민주당과 합당하라고.”
▼ 갈등이 심했군요.
“대선 한 달 전부터 저보고 사퇴하라는 내부세력과 의병처럼 모인 외부세력의 갈등이 컸습니다. 내부세력은 사퇴하거나 민주당과 후보를 단일화해서 이기자고 했지요. 말이 그렇지 어떻게 이깁니까. 그리고 경선을 통해 나온 사람더러 그만두라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 처음 단일화 얘기가 나왔을 때 문 대표께서 검토하라고 해서 논의가 진행됐을 것 아닙니까.
“제가 검토한 게 아니라 김영춘씨 등이 그쪽에서 밀명을 받았는지 자신의 소신인지 밀어붙인 거지요. 결국 제 힘을 약화시키는 일만 한 겁니다.”
▼ 처음부터 단일화엔 뜻이 없었군요?
“아니요. 가능하다고는 생각했지만….”
▼ 정동영 후보로 단일화하는 건 안 된다?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정동영씨가 양보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요. 정동영씨 지지도가 낮다는 건 국민 모두가 알고 있었잖아요. 이미 진 게임이었어요, 그쪽은.”
▼ 그쪽에서는 문 대표의 지지세력을 합하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제3세력의 씨앗은 죽는 거지요. 150만명이 투표장에 나와 우리나라에 제3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렸다는 데 의미가 있지요. 그 힘이 은평에서 재현된 것 아닙니까. 지금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고 제3세력이라 할 만한 도지사나 교육감이 전에 비해 얼마나 늘었습니까. 곽노현 서울시교육감도 제 홍보팀장이었지요.”
▼ 당시 명망 있는 재야 원로들이 단일화를 권유했는데 거부하셨지요?
“거부한 게 아니지요. 시기가 너무 늦어 충분히 얘기할 수 없었어요.”
▼ 민주당 쪽에선 막판에 자기들이 문 대표 측에서 요구하는 바를 거의 다 수용했는데 끝내 단일화를 거부했다고 얘기하던데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 대선 전날 박정희 찬양 발언을 해서 논란이 일었지요?
“제가요?”
▼ 예.
“아니지요. 무슨 찬양을 합니까.”
▼ 대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얘기를 해서 민노당 같은 데서 공격을 받으셨잖아요?
“제가 굳이 찬양할 이유가 없잖아요.”
▼ 언론에 보도도 됐는데. 당시 이렇게 말씀했잖아요. ‘박정희 대통령은 그래도 깨끗하고 부패가 없었고 산업화를 추진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군대에 갔다 왔다.’ 군대 얘기는 이명박 후보를 겨냥한 것이지요?
“저는 군대 갔다 온 것은 중시합니다. 그분은 일제 군대니까 좀 다르지만 군대를 안 갔다 온 사람이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건 거짓말인 경우가 많아요.”
▼ 대구 표를 얻으려고 그랬던 겁니까?
“박 대통령의 긍정적인 면을 얘기한 거지 찬양한 건 아닙니다. 군에 안 갔다 온 사람은 설령 몸이 아파 그랬더라도 공직에 나오면 안 되죠. 그런 면에서 박 대통령은 나라를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했지요. 산업화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고요. 그걸 부인하면 안 되지요. 다만 혁명이 나빴고 독재가 나빴던 거죠.”
ROTC 임관시 국방장관賞
그는 현재 창조한국당과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다. 창립행사에도, 당원대회에도 안 갔다고 한다. 아예 당 사람들을 안 만난단다. 하지만 “완전히 인연을 끊은 거냐”는 질문엔 모호하게 대답했다.
“대선 후 2년 동안은 워낙 뜻이 다른 분들이 있어서 그랬고요. 지난 1년은 해외에 나가 있었고. 하여간 활동이 자유스러워져야 당을 도와주든 말든 하겠지요.”
▼ 창조한국당은 문 대표님의 분신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대선 초기엔 그랬지만 도중에 변질됐어요. 정치 프로들과 아마추어들 간의 갈등이 심해졌고 그게 지난해 5월까지 계속됐습니다. 지금은 창조적 미래세력을 만드는 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거의 당을 떠난 상태예요.”
▼ 창조한국당을 세상에 내놓았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또 출마하느냐 마느냐는 별개 문제지요. 아무 죄 없는 사람을 묶어놓고 그 사람들이 언제까지 편히 잠자겠습니까. 지금 회비를 내는 당원은 몇 천 명도 안 됩니다. 당 바깥에 일반 지지자야 수백만 명 있지만. 그 수백만명이 무서워 제 활동을 못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의 이력서를 보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1972년 국방부장관(賞)을 받은 것이다. 그에게 물어보니 ROTC 장교로 임관할 때 성적이 1등이라서 받은 상이란다. 그는 한국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한 후 ROTC 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제대 후 유한킴벌리에 입사한 그는 군에서 쌓은 컴퓨터 지식 덕분에 초대 전산실장을 맡았다. 그리고 1983년부터 그 유명한 ‘우리강산 푸르게’라는 나무심기 운동을 전개한다. 그런데 나무를 심을 때마다 나라에 벌금을 내야 했다. 국유지에 심었기 때문이다. 한 10년 그렇게 벌금을 내다가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후 구제를 받았다. 정부에서 이를 기업의 정상적인 영업활동(기부행위)으로 인정해 손비처리를 해준 것이다. 민자당 실력자이던 이춘구 의원이 그의 나무심기 열정에 감복해 대통령을 설득한 덕분이었다.
학창시절 그의 꿈은 경영자였다. 부친은 큰 운송회사 몇 개를 갖고 있었다. 경영에 뜻을 뒀던 그가 외대에 간 이유는 뭘까.
“하도 영어를 못해서 외대에 갔어요. 거기서 경영학도 공부했지요. 40년이 지난 지금 국제사회에서 어눌하지만 그런 대로 의사소통을 하는 건 그때 배운 영어 덕분이에요.”
▼ 어릴 때 반듯한 모범생이었을 것 같은데요.
“모범생이라기보다 자원봉사자였지요. 어디서나 궂은 일 해결하는 학생. 저는 (초중고) 12년 동안 단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안 했을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건강의 비결이 어려운 친구를 돕고 늘 지역사회와 이웃에 관심을 갖는 것이었어요. 그게 저를 행복하게 만든 것 같아요. 그게 노사분규를 해결하는 힘도 되었고요.”
나무심기와 외톨박이
▼ 유한킴벌리가 일찍이 사람중심 경영을 해온 데 아닙니까.
“제가 사장하면서부터 그랬지요. 이전에는 사람도 자르고…. 그래서 노사분규가 심했죠. 제가 대표를 맡고나서는 단 한 명도 안 잘랐어요. 협력회사가 1400개인데 단 하나도 손을 안 댔지요. 대개 사장이 바뀌면 협력사들이 좍 바뀌거든요. 제가 사장이 된 후 회사가 다섯 배 이상 커지고 순익이 수십 배로 늘었지요. 해외진출도 활발해지고. 사람의 창조력이 원가절감보다 몇 배 효율적인 겁니다. 사람 자르고 월급 줄이고 품질 속일 게 아니라 직원들한테 주인의식을 심어줘서 창조력과 열정이 생기게 해야죠. 그러면 뭣보다도 사고가 안 나요. 서로 신뢰하면. 그전엔 사고가 많이 났거든요.”
▼ 주로 어떤 사고가 났었나요?
“공장 규모가 수십만 평 되니까요. 교통사고도 많이 나지만 기중기 사고, 엘리베이터 사고, 프레스 사고에 손 잘리고 심지어 죽는 사람도 많았지요. 지금도 공장에서 사고로 죽는 사람만 1년에 3000명이 넘어요.”
▼ 산업현장 전체에서 말이죠?
“그렇죠. 또 교통사고로 7000명 죽어요. 자살이 2만명쯤 되고.”
▼ 문 대표께서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일탈을 하시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렇지요. 남이 대학시험 공부할 때 농촌 돕기나 불우청소년 돕기 운동한 게 일탈이라면 일탈이랄까.”
▼ 대학시절엔 데모 좀 하셨습니까.
“많이 했죠. 그때는 누구나 다 했으니까. ROTC 지원한 후에는 크게 줄였지만. 주로 3선 개헌 반대시위였죠. 제가 외대에서 문학활동을 했어요. 시 쓰고 시화전도 열고. 시위를 하더라도 폭력 쓰는 건 반대했어요. 그 문제로 다른 학생들과 다투기도 했지요. 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보호해주려 했어요. 나중엔 학교가 폐쇄됐지요. 군인들이 진주하고.”
▼ 그간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라면요?
“뭐 지나간 날은 안 돌아보고 늘 앞을 내다보니까 후회할 일이 없어요. 피터 드러커라는 분이 저보다 40세가 많았는데 제가 친구처럼 사숙을 했어요. 공통점이 뭐냐 하면 남의 약점보다는 장점을 보고, 미래에 투자하는 거예요.”
사람이 반듯한 얘기만 하고 약점을 보이지 않으면 왠지 거리감을 갖게 된다. 상대를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도 힘든 시기가 있었다.
“남들이 묻지요. 너의 낙관주의는 어디서 비롯된 거냐고. 유한킴벌리에서 10년간 나무 심을 때 외톨박이였어요. 제가 나무심기운동 하느라 골프를 안 쳤습니다. 동료나 선배들이 다 골프 치고 골프대회에서 어울리는데 저만 빠지니 얼마나 밉게 보였겠습니까. 그것도 회사에 벌금을 내게 하면서. 정말 외로울 때가 많았지요. 그런데 결국 면세를 이끌어냈고, 그 운동이 국가적 차원으로 번졌잖아요. 낙관주의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겠지요.”
그는 3월8일 중국에서 4개 기업에 대한 컨설팅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의 뉴 패러다임 연구소가 지난해 12월 예비진단을 했던 기업들이다. 뉴 패러다임 연구소는 그가 국가경쟁력위원장을 지낼 때 만든 뉴 패러다임센터의 후신이라 할 만하다.
문 대표에 따르면 중국은 현재 우리나라의 1970~80년대처럼 노사분규가 심하고 자살사고가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대만계 IT회사인 팍스콘(Foxconn)에선 지난해 한 해에만 13명이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뉴 패러다임 경영의 골자는 고객감동, 높은 성과, 사회책임, 지속가능, 창조경영이다.
미국 드러커대학원의 이사인 그는 올해부터 국내에 드러커의 경영원리를 소개하는 드러커경영원을 운영한다. 1차로 1000명쯤의 수강생을 모아 교육할 예정이다. 영어로 진행하는 경영학 강좌다. 올해는 뉴 패러다임 연구소를 강의시설로 활용하고 내년에 별도의 시설을 마련한다는 복안이다. 그의 열성에 찬 설명을 들으며 나는 그가 정치보다는 이런 일로 사회에 기여하는 게 그 자신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나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