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이육사의 땅에 그의 외동딸 옥비 여사가 살고 있다. 앞에 강이 흐르고, 뒤에 산이 둘러쳐진 풍수적 길지다. 퇴계 후손들이 대대로 군자가 되기를 염원하며 살아온 곳. 아버지의 강직함을 속으로 이어받은 외유내강형 딸이 소박하지만 꼿꼿한 삶을 보여준다.
이육사문학관을 지키고 있는 딸 옥비 여사.
나는 진작부터 이옥비 여사에 관련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해마다 1월16일 조촐하나 진지하게 열리던 순국 추모행사에도 참석하곤 했다. 동지 지나고 한 달 후쯤이면 일년 중 가장 추운 날씨가 이어진다. 그날 육사를 추모하는 이들은, 들어올 땐 추위에 퍼렇게 질렸다가 곧이어 회한과 참담과 자괴로 다시 벌겋게 상기되곤 했다. 그들은 곁에 앉은 사람과 “베이징은 안동보다 얼마나 더 추웠겠느냐, 이런 날 감옥에서 온몸에 피가 낭자하도록 얻어맞으며 버틴 힘은 과연 무엇이었겠느냐, 그렇게 목숨을 바쳐가며 이뤄낸 독립인데 우린 지금 제대로 잘하고 있는 거냐” 같은 말을 낮은 소리로 두런거렸다. 그럴 때 이옥비 여사는 단상 아래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해맑을 정도로 담담히 감정을 갈무리하는 육사의 한 점 혈육을 보며 참석자들은 섣불리 눈물을 보일 수도 없었다.
독립운동가의 아내와 딸
육사 이활, 또는 이원록! 그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남긴 시로 ‘청포도’와 ‘광야’와 ‘절정’이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 이육사가 어떤 고난을 겪었으며 그의 이상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후손들은 어떻게 삶을 꾸려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기에는 우리 현실이 너무 팍팍하거나 너무 여유가 없다. 또 우리는 역사에 무관심하다. 하긴 역사랄 것도 없다. 바로 엊그제같이 손에 잡히는 이야기가 아닌가.
“1943년 봄에 베이징에 가셨는데 7월 할머니와 맏아버지 소상에 참여하러 안동에 오셨다가 붙잡혀서 다시 베이징으로 끌려가신 모양이에요. 국내가 아니라 베이징으로 압송된 걸 보면 충칭과 옌안 등지에서 무기를 사서 국내로 반입하려는 계획이 탄로난 것 같아요. 체포되기 전 어머니께 세상이 좋아지면 쓸 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러시아 지폐를 몇 장 주셨대요. 아마 어머니가 아버지에게서 난생처음 받아본 돈이었을 거예요. 그것도 나중에 순사에게 뺏겨버렸다지요.”
내가 옥비 여사에게 듣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 육사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할머니와 어머니에 관한 기억과 딸인 옥비 여사 자신의 삶이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남자들이 서울로, 만주로 떠나간 후 빈집과 조상과 아이들을 지켜야만 했던 여자들의 사연은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져버린다. 옥비 여사가 더 나이 들기 전에 그 이야기들을 기록해둬야 할 의무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독립운동 하는 남편을 둔 요시찰 인물이니 순사가 자꾸 어머니를 찾아왔대요. 어머니는 ‘나는 소박데기다. 설령 남편이 조선에 와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대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잡혀가서 면회를 갔더니 그 순사가 소박데기가 어찌 면회를 오느냐고 따졌대요. 어머니는 조선은 예가 높은 나라다, 암만 소박을 맞아도 남편이 고초를 당하는데 돕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하면 ‘소데스까’하면서 물러선대요.”
2004년 육사문학관 개관 당시 옥비 여사는 일본에 있었다. 니가타 총영사관 사택에서 한식(궁중음식)과 꽃꽂이를 담당하고 있었다. 막 위암 수술을 끝낸, 38㎏의 몸으로. 궁중음식은 어머니께 배운 솜씨였고 꽃꽂이는 평생 의탁해온 취미였다.
“남편(양진호씨)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쌍둥이 손자들이 왔다가서 배웅하고 들어오니 방금 멀쩡하던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있더군요. 우린 평생 참 의좋게 살았어요. 제가 하겠다고 하면 뭐든지 밀어줬고 언제나 제 기를 살려주는 남편이었어요. 평생 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니 견딜 수가 없데요. 암 걸린 나를 살려놓고 자기만 가버렸으니…. 마침 총영사관이 직원을 구하고 있다기에 지원을 했지요. 아무도 없는 곳에 가고 싶었어요.”
그때가 옥비 여사 나이 쉰아홉이었다. 영사관에서 3년을 일했고 일본 전역에 김치를 판매하는 대리점에서도 일했다. “원래는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어요. 아들이 둘 있지만 혼인해서 각자 살고 있으니 내가 필요할 시기도 아니고! 기념식에 참석하러 잠깐 나왔던 거예요. 그러나 원촌에 와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산천도 좋고 인심도 좋고. 무엇보다 아버지를 기념하는 문학관이 생겼다는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지요.”
이육사문학관 지킴이
처음엔 일어통역관의 자격으로 문학관 식구가 됐고, 요즘은 상임이사의 직함을 갖고 있다. 예약을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겐 직접 나서서 아버지의 삶과 정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 내려올 때 미리 동박이한테 양해를 구했어요. 문학관에서 오라고 하는데 내가 가도 네 마음이 섭섭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봤지요. 동박이는 아버지의 양자입니다. 실제 어머니를 모시기도 했고, 지금도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아들이지요.”
오래되고 사연 많은 가문이니 이야기는 돌돌 흐르는 강물처럼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베이징 감옥에서 아버지 시신을 인수한 사람이 이병희 선생이에요. 고향이 부포이고 저희 집안이신데 백부가 백농 이동하 어른이고 부친이 이경식 어른으로 모두 독립운동을 하셨지요. 이병희 선생은 아버지와 최후를 함께한 동지로 같은 일로 같은 감옥에 갇혔다가 며칠 먼저 풀려나와 있었대요. 매우 미인이시고 아버지와 베이징 주소가 같이 돼 있어 나중 독립운동사 공부하는 이들은 둘 사이에 뭔가 있는 줄 알지만 안동에서 집안끼리 그런 일이 가당키나 해요? 이병희 선생은 그날 아버지가 소개해준 군사간부학교 후배와 선을 보기로 돼 있었대요. 그런데 감옥에서 안면이 있는 간수로부터 ‘육사가 죽었으니 시신을 인수해가라’고 연락이 왔대요. 달려가 봤더니 옷이 피로 낭자하게 젖었더래요. 눈을 못 감고 계시더래요! 불과 며칠 전에 사람을 소개해줄 테니 시집을 가라고 권하던 사람이!”
그날 이병희 선생은 베이징 근처 화장장으로 육사를 실어 날랐다. 가진 돈이 없어, 멀쩡한 사람을 이렇게 죽여놨으니 가만두지 않겠다고 간수를 협박해 화장장비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 일본인 간수는 평소 아버지를 존경하던 사람이었대요. 시체를 그냥 없애버려도 무방했겠지만 자기 딴에는 아버지의 죽음이 하도 애통해서 이병희씨에게 연락했던 거겠지요. 그러나 이병희 선생은 화장해서 유골함을 받아 안았지만 막상 갈 데가 없었대요. 독립운동을 같이 하던 동지이고 친척인 이귀례씨가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마침 그 며칠 전에 해산을 했대요. 그 집으로 유골을 안고 가서는 신생아의 머리맡에 아버지 유골을 두고 둘이서 통곡을 했답니다. 이귀례씨는 소설가 임화의 부인이지요.”
독립운동가 양산한 땅
한편 소식을 들은 서울에서는 동생들이 모여 다섯째 집 원창의 셋째아들 ‘이동박’을 육사의 양자로 삼자는 논의를 끝내고 유골을 모시러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유골은 수유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가 나중에 이곳 원촌의 고향 뒷산에 모셔진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히는, 청포도가 익어가는 고향으로. 옥비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다. 소복을 입으라고 해서 입긴 했지만 아버지의 이장보다는 산천에 가득 핀 진달래가 아름다워 탄성을 질러대던 소녀였다.
원촌은 특별한 땅이다. 앞에 강이 흐르고 뒤에 산이 둘러쳐진, 전형적인 풍수적 길지로 퇴계의 후손들이 대대로 ‘군자 되기’를 염원하며 살아왔다. 육사는 퇴계의 14세손이다. 성리학의 경지가 높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족’과 ‘지조’일 것이다. 자족은 문학이 되고 지조는 저항이 된 것 같다. 안동은 돌뿌리 하나에까지 퇴계학맥이 흐르던 곳이다. 독립운동사의 첫 장이 여기서 열렸다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가 없다.
“안동 1개 시가 320명이라는 독립유공자를 배출했어요. 1910년 국치를 전후해 자결 순국한 90명 중 10명이 안동 사람이지요. 거기다 이곳 원촌과 이웃마을 하계는 독립운동가를 양산한 곳이에요. 일제강점 이후 비분강개해서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치암 이만현이 바로 이웃에 살았고 아버지와는 8촌이었죠. 단식으로 목숨을 끊은 하계의 향산 이만도도 집안 어른이셨어요. 그러니 그 어른의 동생, 아들, 딸, 며느리 손자들이 모조리 항일 투쟁의 대열에 나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이곳에서 항일은 나라를 찾으려는 애국이라기보다 차라리 가문의 자존심이었고 가족 간의 단합에 가까웠다. 아무도 눈앞의 사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육사의 외가 역시 이름난 의병장 집안이었다. 외조부 허형도, 외종조부 왕산 허위도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던 의병장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육사의 어머니 허길이 여섯 아들을 어떻게 길렀을지 손에 훤히 잡힌다. 늘 “내 죽거든 울지 마라. 나라 잃은 백성은 부모 죽음에 눈물 흘릴 자격이 없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안중근에게 옥에서 죽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어머니가 있었듯 육사에게도 일경에 붙잡혀가는 아들을 응원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육사의 외숙들도 모조리 독립운동에 나섰다. 특히 육사에게 영향을 미친 이는 외삼촌 허규였다고 한다.
“우리 진외가인 허왕산의 후손들은 독립운동 하느라 모조리 만주나 소련으로 떠나버렸어요. 지금 국내에 남아 있지 않아 산소를 돌볼 사람조차 없어요. 아버지의 외사촌 여동생 허은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냈던 석주 이상룡의 손부가 됐지요. 그 시어머니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영감집 이만유 어른의 따님이시고! 안동 독립운동의 중심인 임청각(석주 이상용의 본가)이 아버지에겐 외사촌집이고 재종고모가였어요. 아버지는 폐가 안 좋으셨는데 요양하느라 한때 임청각에 머물고 계셨대요. 그때 서울에서 나운규 선생이 내려와 영어를 가르쳤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이육사문학관과 탐방객을 맞이한 이옥비 여사(오른쪽).
▼ 아버지를 구체적으로 기억하세요?
“두 가지가 기억나요. 토종 계란빛이 나는 양복을 입으시고 가운데 가르마를 타신 모습! 꿈결처럼 그런 영상만 남아 있었는데 나중에 신석초 선생이 가져온 사진을 보니까 아버지가 실제로 그런 양복을 입고 계시데요. 또 하나는 포승에 묶여 용수 같은 걸 쓰신 모습이었어요. 전에는 죄수를 이감할 때 얼굴에 길쭉하게 생긴 통을 씌웠거든요. 중학교 2학년 때인데 그날은 잊히지도 않아요. 삼덕동 집 앞에 나갔는데 죄수들이 한 무리 포승줄에 묶여 용수를 쓰고 지나가는 거예요. 정신이 아득해져서 허둥지둥 집으로 달려왔어요. 그 죄수들의 모습이 어려서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와 똑같았거든요. 어머니한테 말했더니 니가 그걸 기억하는구나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셔요. 이감된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이라도 보자고 어머니가 형무소 앞으로 달려 나갔는데 이웃에 살던 종조부가 ‘옥비도 데려가라. 마지막 길일지도 모르는데 애비 얼굴이라도 보게’ 하셨대요. 그래서 세 살 난 나를 업고 가셨대요.”
그게 뇌리에 남아 있다가 십수 년 후 용수 쓴 죄수를 보자 돌연 살아난 것이다. 아버지는 딸의 현실에서 사라졌지만 아예 흔적도 없어진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수시로 집안을 들락거리며 육사에 관해 온갖 얘기를 했다.
“신석초 선생이 문단에선 아버지와 제일 친했대요. ‘너 아버지는 말술을 마시는 호주가였는데도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밤에 불을 끄고 15분 만에 권총 6자루를 조립했다는 말도 들었어요. 아버지는 난징 근처에 설립한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 1기 졸업생이었어요. 그때 학교에서 백발백중 소문난 명사수였대요. 체포되기 직전에 베이징에 가셨던 건 아마도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반입해서 누군가를 암살할 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이병희 선생을 만나 아버지 이야기를 특히 많이 들었어요. 일본대학 전문부에서 공부하실 때는 그곳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곧잘 독립선언문을 낭송하셨대요. 선언문이 선동적이고 치열하잖아요. 학생들의 애국의식을 북돋우려고 애쓰셨던 거지요.”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그렇게 신화가 되어갔지만 머리 한번 쓰다듬어줄 수도, 용돈을 줄 수도 없었다.
“남들은 아버지가 시인이고 독립운동가라서 좋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속으로 늘 지게꾼이라도 좋으니, 아버지가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죠.”
옥비 여사는 제일여중과 대구여고를 다녔다. 해마다 국어 선생님이 바뀌면 ‘네가 육사의 딸이냐’고 묻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눈에 띄지 않게 살고 싶었다. 늘 입을 꽉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다.
“아이들은 내가 서울서 전학 온 줄 알았대요. 하도 말을 안 해서! 1학년 때 공민선생이 시를 읽게 하고 친구를 만들어줬어요. 그분 덕분에 저도 모르게 성품이 밝아졌어요.”
▼ 어머니와 단 두 식구뿐이니 외로우셨겠어요?
“웬걸요. 우리 집은 밥 먹는 식구가 언제나 스물이 넘었어요. 대구 살 때 주소가 삼덕동 88번지였는데, 우리 집을 다들 88여관이라고 불렀지요. 어머니 생업이 하숙 치는 일이었는데, 친척이 시골에서 올라오면 무조건 우리 집으로 왔거든요. 어머니는 13남매의 맏딸입니다. 큰 집안의 맏딸답게 배포가 크셨어요. 아마도 가을에 쌀을 사뒀다가 봄에 파는 일도 한 것 같은데 방에 쌀가마니가 가득했어요. 그래서 난 우리가 부자인 줄 알고 이웃집에 그걸 몰래 퍼다주곤 했지요. 어머니 윗대 외할아버지 형제도 13남매였으니 이모와 이종들이 다 모이면 외가는 식구가 100명도 넘었어요.”
강철 무지개 같은 삶
가족이 지금보다 훨씬 확장된 개념이었고 씨족이 집단적 힘을 가질 때였다. 형제와 사촌과 육촌, 심지어 팔촌까지가 한 지붕 아래 자라는 게 자연스러웠다. “어머니는 집안에 계셨으나 돈을 모르는 분은 아니었어요. 하숙도 치고 삯바느질도 하고! 그래도 늘 ‘여자 벌이는 쥐벌이고 남자 벌이는 소벌이’라고 하셨어요. 여자가 버는 돈은 모이지가 않는다는 거지요.”
어머니 안일양씨는 15세에 육사와 혼인했다. 영천 화북면 오동에서 과수원을 경영하고 대구에서 백화점도 운영하는 부잣집 딸이었다. 원촌 양반과 영천 부자의 결합이었던 것 같다. 육사는 처가에서 설립한 백학학원에도 잠시 다니고 한때 그곳의 교사 노릇도 한다. 그러나 뜻을 멀리 둔 남편이었다. 잃은 나라를 찾겠다고 평생 바깥을 떠돌았으니 알콩달콩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친정 집안을 우습게 여겼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큰외삼촌이 아버지와 군사간부학교 1회 동기생이에요. 그런데 외삼촌이 일경에 잡혀가서 고문에 못 이겨선지 겁이 나서인지 동지들의 명단을 불었고, 외삼촌 검거 후에 독립운동가들이 줄줄이 잡혀갔대요. 아버지는 이걸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나 봐요. 장인과 처삼촌에게 ‘봉장, 소장 보시오’라고 편지를 써서 ‘비겁한 핏줄과는 함께 살 수 없으니 안일양을 데려가시오’ 했대요. 어머니는 이때 하도 수치스러워서 여러 번 목숨을 끊으려고 했답니다. 할머니가 말리지 않았으면 살 수가 없었대요. 어머니는 할머니를 ‘시어머니가 아니라 스승이었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나중엔 결국 할머니 때문에 두 분이 화합하셨지요.”
육사는 1904년생이다. 1944년 옥사했으니 딱 마흔 해를 살았고 그동안 무려 17차례나 일경에 검거된다. 시가 그렇듯 삶도 ‘강철로 만든 무지개’같을 수밖에 없다. 육사의 시 ‘절정’을 읽으면 나는 몸에 온통 소름이 돋는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절정’이 쓰여진 곳이 원촌 마을 앞에 높이 솟은 바위벼랑 칼선대라고도 하지만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할지,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던 그의 쫓기는 심상이 선연해서 머리칼이 곤두선다. 그랬으니 허튼 처남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 나이가 서른여덟이었어요. 그 후 어머니는 평생 백의만 입고 사셨어요. 비단도 걸치지 않고 무명만 입으셨죠. 내가 자꾸 색옷을 권해드려서 환갑 지내신 이후 처음 무색옷을 입으셨어요. 처음엔 회색 옷을 입다가 나중엔 차츰 옥색도 걸치시긴 했지요.”
남의 옷을 바느질해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으니 옷은 물론 손수 지어 입으셨다.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빼어나기로 이름이 자자했다.
“대구의 김태원씨라고 교남학교를 설립했던 부잣집에 잠시 침모로 들어가신 적도 있어요. 비단 두루마기를 한 달에 40~50벌 지으셨대요. 나 어렸을 때 몇 번은 만주에도 왔다갔다 하신 것 같아요. 외삼촌이 거기서 사업을 벌이고 있었거든요. 아버지가 옥비 주라고 사 오신 빨강색 비단 원피스가 있었어요. 분홍색 모자하고! 그 옷을 입고 만주 가는 기차를 탔던 기억이 있어요. 눈 아래로 두만강 황토물이 출렁출렁 흘러가던 것도 기억나고! 중국거리에서 수박장수가 ‘시괄러’(수박 사려)하면서 지나가던 것은 지금도 생생해요. 기차 안에서 어머니는 순사가 다가오면 나 혼자 앉혀두고 얼른 화장실로 피신해버려요. 기차 천장 아래 짐칸에는 어머니가 올려놓은 짐들이 하나가 아니라 아주 여러 개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 그게 어찌나 걱정되던지! 더구나 내 바지 허리춤엔 어머니가 바늘로 꿰매어 놓은 돈이 들어 있었거든요. 그때 하도 가슴을 졸여놔서 나중에도 경찰만 보면 늘 가슴이 졸아붙곤 했어요.”
6형제의 육우당
어머니는 그렇게 번 돈으로 방이 10칸인 대구의 삼덕동 집을 샀다고 한다. 어머니의 큰 집안 장녀다운 기질은 전쟁 중에 여실히 드러났다.
“할머니 셋에 외사촌, 이종해서 모두 25명이 함께 피난을 갔어요. 어머니는 미리 헝겊으로 수건을 만들어 미숫가루와 주소 쓴 쪽지와 수건을 넣어 한사람이 하나씩 매게 하셨어요. 어머니가 엄하니까 아이들은 아무도 징징거리지 않고 비행기가 뜨면 부엌바닥에 깔아둔 양단이불 속으로 일사불란하게 숨었어요! 덕분에 전쟁이 끝날 때 25명이 다 무사했지요.”
육사 6형제의 우애는 안동 인근에서 소문난 것이었다. 여섯 형제의 우의를 잊지 말자고 집 이름도 육우당(六友堂)이라고 붙였을 정도다. 원래 원촌에 있던 육우당은 안동댐으로 수몰돼 시내로 옮겨졌고 지금 육사문학관 뒤쪽의 육우당은 나중에 그걸 본떠 새로 지은 집이다. 여섯 형제는 하나같이 재주가 빼어났다. 맏형 원기는 이름난 한학자로 장진홍 의거에 연루돼 옥살이를 했고 둘째 원록이 바로 육사였고 셋째 원일은 빼어난 서화가로 역시 여러 차례 투옥된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넷째 원조는 도쿄 법대 불문과를 졸업한 평론가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를 지냈으며 다섯째 원창도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했고 막내 원룡은 전국 미술경연에서 일등을 하던 날 형제들과 축하잔치를 벌인 후 아깝게 요절한다.
그러다가 육사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져버렸으니 형제들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삼촌들은 어린 옥비를 만나기만 하면 끌어안고 울었다.
“그때는 전화가 없을 때잖아요. 서울서 삼촌이 내려온다고 편지나 전보를 쳐요. 요즘처럼 교통이 편리할 때도 아닌데 어머니와 저를 보러 걸핏하면 내려왔어요. 마음을 붙일 데가 없었겠지요. 그러면 나는 삼촌들이 끌어안고 우는 것이 싫어서 미리 이웃으로 도망을 쳐버리곤 했어요.”
이육사 여섯 형제들의 우애를 기리는 집 육우당(六友堂).
“셋째 집은 사촌이 둘이었는데 부모가 행방불명된 후 우리 집에 와 있었어요. 사촌언니는 당시 아홉 살이었는데 한지로 두루마리를 만들어 가사를 줄줄 지어내곤 했어요. 그 두루마리를 보관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까워요. 그 언니는 어려서 죽고 그 아래 동선이란 오빠는 아버지를 찾아서 나중에 북으로 올라갔어요. 동선오빠가 김일성대학을 나와 평양시장이 됐다는 말도 한때 들렸어요. 거기서는 독립운동 했던 이력을 우대해주니까 본인이 육사의 아들이라고 말했던 모양이에요. 육사의 아들이 북한에 있다는 말을 추적했더니 동선 오빠더래요. 물론 정확하게 밝힐 수 있는 얘기가 아니지요. 큰집 사촌오빠가 부산대학의 이동녕 교수예요. 그 오빠가 우리 집 내력을 제일 많이 알지요.”
바느질과 궁중음식 전문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옥비 여사는 옛이야기를 디테일을 정교하게 살려가며 옮겨놓는 재주가 있다. 원촌의 밤은 깊어가는데 지치지도 않고 도란도란 오래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나도 원래 글을 쓰고 싶었어요.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느질을 배워 시집가라고 재봉틀을 사주셨어요. 콩단지에 돈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걸 훔쳐서 서울로 올라가 이화여대에 갈까 말까 망설이기만 했지요. 내가 그런 배짱이 없어요. 어머니가 걱정되기도 하고! 대신 2년제 경북여대에 갔어요. 돈이 없으니 장학금을 주는 학교를 찾았던 거지요.”
그러다 시청에 다니던 외사촌 오빠가 소개해준 남자를 만나 혼인한다. 경산 자인 사람이었다. 어머니도 신랑감을 맘에 들어 하셨다.
신부 옥비에겐 혼인 조건이 있었다.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 당시만 해도 처부모를 모시는 것이 생소할 때였다. 그러나 신랑 양진호는 쾌히 승낙했고 평생 장모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았다.
“우리 남편은 장모를 통해 인생을 새로 발견했다고 말하곤 했어요. 원래 집에 누가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어머니 사시는 모습을 보면서 차츰 마음을 열어가더라고요. 나 어릴 때 어머니가 그러셨듯이 우리 집에도 늘 친척들이 서너 명씩 같이 살았어요. 처음엔 그걸 불편해하던 사람이 나중엔 마음을 넓게 쓰게 됐지요. 여행을 좋아하던 사람인데 휴가를 가도 꼭 이종언니들과 같이 다니면서 즐거워했어요. 처음엔 시청 공무원이었는데 당시 도로공사가 처음으로 공채를 했어요. 1300명이 응시해서 3명을 뽑았는데 남편이 거기 합격했지요. 그래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됐고 나중엔 건설회사로 옮겨 사장까지 하고 퇴직했습니다.”
옥비 여사는 어머니의 바느질과 음식 솜씨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래서 한때 청담동에서 ‘옥비당’이란 상호로 폐백음식을 만드는 가게를 연 적도 있다.
“장사가 곧잘 됐지요. 그랬는데 남편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아무것도 손에 잡을 수가 없데요. 비자가 나오자마자 일본으로 떠났으니까. 우리 어머니는 음식을 엄상궁에게서 배웠대요. 넷째 숙모는 덕혜옹주의 6촌 동생이었어요. 궁에서 자랐지요. 당시 궁중에선 음식 먹을 때 입는 수라복이 따로 있었다고 하대요. 숙모 집에 엄상궁이 자주 와서 음식을 만들었는데 우리도 명륜동에 살아서 눈썰미 있는 어머니가 곁에서 거들며 궁중음식을 배우셨대요. 나중엔 어머니 솜씨를 내가 물려받아 신선로니 구절판이니 문어오림 같은 궁중요리를 모조리 할 줄 알게 됐지요.”
다시 발견한 고향
일본에 있을 때 옥비 여사는 구약과 신약을 꼼꼼하게 세 번을 필사했다. 두 번을 베껴 쓴 노트를 덮을 때 비로소 헤매 돌던 마음이 안으로 차분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고 한다. 삶과 죽음이 한 덩어리로 녹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이 들어 고향에 돌아오니 새롭게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 같다고 했다. 전에는 불편하고 원망스럽기만 했던 아버지의 위대성을 재발견하게 됐다. 요즘 옥비 여사는 육사문학관 주변에 꽃을 가꾸고 시비(詩碑)와 동상을 돌보며 화평과 자족을 맛본다.
“어려서 그토록 아쉽던 아버지의 사랑을 뒤늦게 듬뿍 받고 있어요. 육사문학관에 오시는 분들이 아버지의 시와 삶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이 내게로 흘러오는 것을 느껴요. 이제 비로소 육사의 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욕심 없이 남을 배려하며 간디처럼 살라고 지어준 이름이 옥비잖아요.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엔 어림없지만 그 뜻을 잊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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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문학관이 놓인 원촌은 안동댐 수몰지역이다. 즐비하던 기와집들은 사라지고 고지대의 몇 집만 남아 있다. 그런데 막상 댐을 만들고 보니 원촌 들이 잠길 만큼 댐 수위가 높지는 않았다. ‘모든 산맥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고 육사가 노래했던 바로 그 들이다.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목놓아 울 ‘광야’이기도 한 그 들을 태연하게 수몰해버리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왔다. 뒤늦게 반성이 일었다. 지금 안동시는 마을앞 쪽으로 제방을 찾아 그 땅을 되살려낼 계획이라 한다. 더디겠지만 회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역사도 이렇게 실수를 회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