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와 한국 선불교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경허.
- 두 사람은 모두 전통을 중시하되 그 전통을 근대적 사상으로 발전시킨 공통점을 갖고 있다. 최제우의 동학은 전통사상과 외래사상, 엘리트주의와 민중주의를 융합한 통섭의 사상이었다. 조선 후기 최고의 선승인 경허는 개인적 구도에 머물지 않고 중생과 더불어 사는 삶을 택했다.
모더니티론은 기본적으로 진화론적 발상에 기반을 둔다. 전통에서 현대로의 변화가 그 기본 가정을 이룬다. 물론 최근 모더니티론에서는 진화론적 발상과 서구중심주의적 발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이뤄져왔지만, 그럼에도 이 이론이 진화론 및 서구중심주의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다. 모더니티의 중핵을 이루는 자본주의라는 물질문명은 본디 서구 근대의 산물이며, 비서구사회에서는 이 물질문명을 수용해왔다.
모더니티가 이러한 과정으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그 수용 과정에는 전통과의 격렬한 갈등이 내재하게 된다. 전통이란 다름 아닌 모더니티의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한다. 나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특히 동아시아 사회에서 전통이란 모더니티 이전의 민족문화 또는 민족사회를 지칭한다.
문제는 모더니티론에 내재된 진화론적 발상이 전통을 모더니티보다는 열등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과연 전통은 모더니티에 비해 열등한, 다시 말해 낡고 덜 발전된 것일까. 이와 관련해 먼저 떠오른 것은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 /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모더니스트 시인 김수영은 1964년 우리 삶의 거대한 뿌리로서의 전통을 이렇게 노래한다. 서구의 계몽주의는 진화와 발전의 당위성을 특권화하지만, 기실 우리 인간이 갖는 인식의 지평은 우리 삶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 전통의 구속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강조하듯이 전통과 모더니티는 잘못된 이분법일 수도 있다. 전통과 모더니티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는 이 글의 후반부에서 다시 돌아와 살펴보기로 하겠다.
유교에 평등사상을 융합하다
모더니티를 향한 시대정신의 탐구에서 전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두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최제우와 경허가 바로 그들이다. 최제우는 토착적 사상이자 한국적 종교라 할 수 있는 동학을 창시했으며, 경허는 기존 불교를 혁신하고 한국 선종(禪宗)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주목할 것은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이 당대 지식인들과 사뭇 다르다는 데 있다. 전통을 중시하는 당대의 지식인들로는 위정척사파를 꼽을 수 있다. 위정척사파는 전통의 주자학적 질서를 옹호하고 외세에 맞서 이를 지켜내고자 했다. 위정척사라는 말에는 ‘바른 것을 지키고(衛正) 사악한 것을 물리치자(斥邪)’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여기서 바른 것은 성리학적 질서이며 사악한 것은 일본을 포함한 서양 문물이다. 이러한 위정척사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먼저 위정척사운동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16세기 이래로 전 지구로 확장되기 시작한 서구의 식민주의는 19세기에 그 마지막 지역인 동아시아에 진출했다. 서구의 압박 아래 중국과 일본은 문호를 개방했으며, 조선사회 역시 1878년 개항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성리학을 숭상하던 당시 재야 지식사회는 이러한 흐름에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됐으며, 그것은 통상 수교 요구를 거부하고 서구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자는 위정척사파의 척화주전론으로 구체화됐다.
울산시 유곡동에 있는 최제우의 유허지. 최제우는 6년간 이곳에 머물며 동학의 기본 교리를 터득했다.
전통을 보존하려 했다는 점에서 동학은 위정척사운동과 유사하다. 하지만 동학은 유교만을 배타적으로 지지한 사상이 아니다. 동학은 유교 이외에도 불교와 전래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사상들을 종합적이고 생산적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동학사상은 전통사상과 더불어 평등사상을 전면에 내걺으로써 모더니티로 향하는 흐름을 거역하지 않았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보면, 동학은 모더니티를 지지하거나 거부하는 이분법을 넘어선 ‘제3의 위치’를, 모더니티에 대한 시대정신 탐색에서 매우 이채로운 거점을 차지하고 있다. 동학의 역사적 기원은 개항 이전 세도정치 시대로 되돌아간다.
폭정을 없애 백성을 구하다
최제우(崔濟愚)는 1824년(순조 24년) 경상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최옥이며, 어머니는 곡산 한씨다. 초명은 제선(濟宣)이고,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우다 열여섯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울산의 박씨 부인과 결혼했으며, 스무 살쯤 화재로 집을 잃은 후 1844년 세상을 구할 도를 찾고자 길을 나섰다.
1854년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그는 거처를 처가가 있는 울산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이인(異人)으로부터 천서(天瑞)를 받는 신비체험을 하고 수행을 연마했고, 1856년 경주 용담으로 돌아와 이름을 제선에서 제우로 고치고 수련을 이어갔다. 1860년 그는 종교체험을 통해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았으며, 가사 ‘용담가’와 ‘안심가’, 그리고 단가 ‘검결’ 등을 지었다.
최제우의 본격적인 포교활동은 이 시기부터 시작됐다. 1861년 ‘포덕문’을 지었고 용담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포덕 활동을 벌였으며, 11월에는 관의 눈을 피해 남원 은적암에서 은거생활을 시작했다. 은적암에 머물며 그는 ‘논학문’을 지어 동학사상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1862년 그는 경주로 돌아왔는데, 이 시기에 동학의 입도자가 크게 증가했다. 9월에 체포됐으나 이내 풀려났고, 이후 거처를 흥해로 옮겼다. 그해 12월에 그는 동학의 조직으로 접을 구성하고 접주를 임명했다. 1863년에는 용담으로 다시 돌아와 더욱 왕성한 포덕 활동을 벌였으며, 8월에는 수제자 해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바로 이해 12월 최제우는 제자들과 함께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가 철종의 승하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됐다. 1864년 1월부터 심문을 받았으며, 조정의 명에 의해 대구 관덕당에서 결국 참형을 당했다. 고종 1년 3월이었다.
최제우의 삶과 사상이 우리 역사에서 주목받은 것은 그의 사상인 동학이 동학농민운동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개항 이전 쇠락해가는 조선사회에서는 농민운동이 이어졌는데,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그 절정을 이뤘다. 동학농민운동은 호남을 중심으로 지역적 규모가 대단히 컸고, 무엇보다 왕조를 대상으로 한 전면적인 사회운동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농민운동과 성격을 달리했다.
동방의 도
무릇 어떤 사회운동이라 하더라도 그 운동을 이끌어가는 이념적 토대와 조직적 기반이 필요하다. 동학농민운동의 이념적 기초는 다름 아닌 최제우가 펼친 민중지향적 평등사상에 있었으며, 그 조직적 기반은 동학의 교단 조직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이 내건 제폭구민(除暴救民·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과 보국안민(輔國安民·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의 사상은 동학이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상으로서 동학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동경대전’의 초간본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상황 아래서 동학이 배태됐다. ‘동경대전(東經大全)’의 ‘논학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묻기를, “서양의 도와 도가 같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렇다면 선생님의 도를 서학(西學)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으니라. 나 또한 동쪽 나라 조선에서 태어나 동쪽에서 도를 받았으니 도는 비록 하늘의 도라 할 수 있지만 학문으로 말하면 동학(東學)이라 해야 하느니라.”
동방의 도, 만유의 근원이 되는 천도, 그 천도에 이른 학이 다름 아닌 동학이다. 최제우가 참형을 당한 16년 후인 1880년 최시형을 포함한 제자들은 강원도 인제에서 한문으로 된 유저인 ‘동경대전’을, 1881년 충청도 단양에서 한글로 된 유저인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했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동학의 양대 경전이다. 용담유사가 민중을 위해 쓰인 것이라면, 동경대전은 지식인을 위해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동경대전’은 포덕문(布德文), 논학문(論學文), 수덕문(修德文), 불연기연(不然其然)의 경전과 축문, 입춘시, 강시 등 기타 작품들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앞의 네 경전은 사상으로서 동학의 핵심 내용을 보여준다. 포덕문이 동학의 창도 이유를 밝히고 있다면, 논학문은 동학의 핵심 사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한다. 수덕문은 수도 자세를 제시하고 있으며, 불연기연은 동학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다루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동학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제법 활발히 이뤄져왔다. 한편에서는 유·불·선 사상과 전래사상을 통합하고 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융합을 넘어선 독창적인 사상이자 종교라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 어떻게 평가하든 동학은 전통사상과 외래사상, 엘리트 사상과 민중 사상을 융합함으로써 위기에 빠진 세계를 구원하고자 했던 통섭(統攝)의 사상임은 분명해 보인다.
‘모심’의 사상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동학이 갖는 의미는 앞서 지적했듯이 위정척사파나 개화파와는 다른 제3의 사상적 거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이러한 거점을 잘 보여준다.
최제우는 동학의 도를 익히는 방법과 순서를 21자 주문으로 요약하고 있는데,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천주를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된다’라는 의미의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특히 ‘시천주’는 동학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동경대전’의 ‘논학문’을 보면, “모심[侍]이란 안으로 신령함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으며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옮기지 못할 것임을 안다는 뜻”이며, 주(主)란 한울님을 “부모처럼 섬긴다는 뜻”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한울님을 진심으로 모시고자 하는 이 시천주 사상은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과 의암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발전했으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천도교 사상의 출발점을 이뤘다.
동학사상에는 민족주의와 민중주의가 숨 쉬고 있다. 동방의 학을 자처했듯이 동학은 서학을 포함한 서양의 물질적, 정신적 팽창에 맞서려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시천주에서 인내천에 이르는 흐름에서 볼 수 있듯이 동학은 평등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보여주는데, 이 평등주의는 토착적 민중사상의 한 전형을 이뤘다. 이러한 민족주의와 민중주의가 사회운동으로 외화한 것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었다.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 1960년 4월 / 역사를 짓눌렀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
하늘 물 한 아름 떠다, / 1919년 우리는 / 우리 얼굴 닦아 놓았다.
1894년쯤엔, / 돌에도 나무등걸에도 /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시인 신동엽의 작품 ‘금강’(1967)이다. 신동엽이 말한 하늘, 즉 1894년 동학농민운동, 1919년 3·1운동, 1960년 4월혁명에서 본 하늘은 다름 아닌 ‘용담유사’의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에 나오는, 하원갑(下元甲)의 시대가 가고 상원갑(上元甲)의 시대를 맞이하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그 하늘이다. 이렇듯 동학사상에는 인간해방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현재적 시점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단순하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뛰어난 사회사상의 의미는 그 복합성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성에 있는바, 최제우가 추구한 민족주의, 민중주의, 그리고 생명주의는 모더니티 문명의 한 순환에 도달한 현재 여전히 작지 않은 울림을 안겨준다. 무엇보다 최제우의 후천개벽 사상은 이후 강일순의 증산교, 박중빈의 원불교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20세기 전반에 이뤄진 이러한 일련의 사상운동은 서구적 모더니티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결코 작지 않은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온 것으로 보인다.
나병 걸린 여인을 돌보다
이 기획에서 나는 앞서 두 명의 승려를 다뤘다. 신라시대 원효와 고려시대 일연이 그들이다. 물론 일연은 승려라기보다는 역사가로서 접근했지만, 불교가 일연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이 기획에서 그 세 번째 승려로 경허를 다루고자 한다. 경허는 지난 200년간 우리 역사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승려이자 문제적 지식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경허는 쇠락해 있던 한국 불교를 중흥시킨 승려다. 원효, 지눌, 휴정의 반열에 당당히 오를 정도로 경허의 업적은 탁월하며, 그 영향은 심원하다. 둘째, 경허는 시대정신 탐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인물이다. 그가 활동해온 곳은 역사적 지평을 초월한 영역이었으며, 초시간적 삶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주목할 만한 답변을 제시했다.
경허는 사건사, 국면사, 구조사를 벗어나 일찍이 페르낭 브로델이 말한 ‘현명한 사람들의 시간’의 지평 속에 놓여 있던 지식인이다. 하지만 존재의 본질에 대한 경허의 탐구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관념의 영역에서 이뤄진 게 아니며, 언제나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한 일화를 통해 경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경허가 팔만대장경이 봉안돼 있던 해인사 조실로 있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경허는 눈 속에 쓰러져 얼어 죽어가는 여인을 발견해 업고 절로 들어와 조실방에서 숙식을 함께 했다. 당시 경허를 모시던 수제자 만공은 경허의 이러한 행동에 걱정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는 알리지도 못한 채 혼자 속으로 끙끙 앓았다.
어느 날 만공은 몰래 조실방에 들어가서야 이 여인이 나병 환자임을 알게 됐다. 경허는 나병에 걸린 여인의 언 몸을 체온으로 녹여주며 밥을 먹여주고 피고름을 닦아줬다. 만공은 비로소 인간에 대한 스승 경허의 더없는 자비에 한없는 무서움과 심원한 깨달음을 동시에 얻게 됐다. 널리 알려진 이 일화는 경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내친김에 다른 일화를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1904년 2월 경허는 북녘 땅으로 화광동진(和光同塵)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서산 천장암으로 가서 만공을 만났다. 경허는 그동안의 공부를 점검하고 전법게와 만공이라는 시호를 줬다. 한중광의 ‘경허: 길 위의 큰 스님’을 보면, 이때 만공은 며칠 전 장터에서 사온 담뱃대와 쌈지를 경허에게 마지막 선물로 건넸다고 한다. 젊은 제자에게 후래불법을 부촉한 스승과 그 스승에게 담뱃대와 쌈지를 선물하는 제자의 모습은 더없이 암울했던 1904년이란 시대적 상황을 생각할 때 말로 전달하기 어려운 애틋한 울림을 안겨준다.
원효의 길을 걷다
경허는 그로부터 8년 후 평안도 갑산 웅이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스승의 열반 소식을 들은 수제자 혜월과 만공은 충청도에서 멀리 웅이방까지 찾아가 묘지에서 시신을 꺼내 다비식을 거행했다. 이때 경허의 시신임을 입증한 것은 바로 경허가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한 담뱃대와 쌈지였다고 한다. 우리 불교를 일대 중흥시킨 경허와 스승의 뒤를 이어 덕숭문중을 확립한 만공이 남긴 이 더없이 인간적인 이야기에는 일상과 영원을 연결하는 그 어떤 진정한 사랑과 심원한 깨달음이 담겨 있다.
경허(鏡虛)는 1846년(헌종 19년)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두옥,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며, 초명은 동욱이다. 1854년 의왕시 청계사에서 계허선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1859년 계룡산 동학사로 와 당시 대강백이던 만화보선에게 소승·대승 경전을 배우고 유가 및 도가사상 또한 익혔으며, 이후 강사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다.
경허의 삶에서 첫 번째 전환은 1879년부터 1881년 사이에 이뤄졌다. 1879년 여름 어느 날 옛 은사인 계허선사를 찾아가다가 천안 근처 콜레라가 창궐한 한 마을에서 비참한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곧바로 동학사로 돌아온 그는 강원을 폐쇄한 다음 백척간두의 수행에 들어갔다. 이해 11월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어 그는 서산 연암산에 있는 천장암으로 가서 수행을 이어갔으며, 1881년 6월 아래와 같은 ‘오도가’를 불렀다.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 몰록 삼천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 들사람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이후 경허는 호서 지방에서 선풍을 일으켰고, 1898년에는 부산 금정산에 있는 범어사로 가서 영남 최초의 선원을 열었다. 이후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을 포함해 그는 영남과 호남의 선풍을 크게 진작함으로써 불교의 중흥을 이끌었다.
경허의 삶에서 두 번째 전환은 1904년에 이뤄졌다. 이해에 해인사 인경불사를 매듭지은 다음 그는 천장암으로 돌아와 앞서 말했듯이 만공에게 전법게를 주고 후래불법을 부촉했다. 그가 새롭게 향한 곳은 북녘 땅이었다. 안변 석왕사를 거쳐 평안도로 들어간 그는 박난주(朴蘭洲)라고 이름을 바꾸고 머리를 기르며 선비의 옷차림으로 서당을 여는 등 중생교화의 세계로 들어갔다. 원효를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무애행을 경허는 1912년 4월 평안도 갑산군 웅이방에서 입적하기 전까지 계속했다. 그는 중국 당나라의 선사 반산보적의 게송을 자신의 열반송으로 삼았다.
“마음달이 외로이 둥그니 /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 다시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경허가 남긴 글들은 만공을 포함한 그의 제자들에 의해 1943년 ‘경허집(鏡虛集)’으로 간행됐는데, 당시 생존해 있던 만해 한용운이 서문을 썼다. ‘경허집’은 1990년에 명정스님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으며, 이후 명정스님은 경허의 글들을 편집해 출간하기도 했다. 인물 경허를 다룬 대표적인 글 또는 책으로는 1931년 제자 한암에 의해 쓰인 ‘선사 경허화상 행장’과 한중광이 저술한 ‘경허: 길 위의 큰 스님’, 그리고 소설가 최인호가 발표한 ‘길 없는 길’ 등이 있다.
참된 무애의 경지를 찾아
여기 짧은 지면에서 경허의 사상을 상세히 다루기 어렵다. 게다가 그동안 불교에 대해 책을 더러 읽어왔지만 제대로 알고 있지도 못하다. 다만 인식·존재론의 철학적 관점과 사회심리학적 관점에서 불교, 특히 동아시아 선종이 갖는 의미를 이따금 생각해 본 적은 있다. 이 가운데 나를 특히 매료시킨 것은 우리 근대 불교를 중흥시킨 경허의 삶과 사상이다.
태진스님의 저작 ‘경허와 만공의 선사상’에 따르면, 경허의 선수행은 간화선(看話禪)의 수행이며, 그 사상의 핵심은 자기의 참된 본래심을 되찾는 견성대오(見性大悟)에 있다. 경허의 사상은 오(悟)와 수(修)로 요약되는데, ‘오’가 자기 자신에게 본래 구족돼 있는 본래 면목을 깨닫는 것이라면, ‘수’는 치열한 공안참구 간화선이라고 볼 수 있다. 경허는 자신의 깨달음을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대승적인 중생교화로 연결시켰다. 삶의 후반부에 그가 보여준 일련의 무애행은 그 구체적인 증거다.
오대산 월정사를 이끌었던 제자 한암은 스승 경허의 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한 편안히 지냄에 밥은 겨우 기운 차릴 수 있을 정도로 먹고 하루 종일 문을 걸어 잠그고 침묵하고 말이 적으며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누가 큰 도시로 나가서 교화하기를 권하면 이르기를 ‘나에게 서원(誓願)이 있는데 경성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 하니 그 탁월하고 특출함이 대개 이러하였다”는 것이다. 그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는 진정한 자유를 얻었지만, 경허의 자유가 향한 곳은 언제나 저 낮은 곳, 다름 아닌 민중이 울고 웃는 저잣거리의 세계였음을 알리는 이야기다.
경허의 삶과 사상은 시대정신의 시각에서 볼 때 시간의 구속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반(反)시간적이다. 시간의 누적은 역사를 이루지만 동시에 속도를 강제하기도 한다. 오늘날 문제의 핵심 중 하나는 속도 과잉경쟁에 있는바, 그것은 우리 삶을 결과적으로 황량하게 만든다. 삶의 본원적 의미는 무엇인가. 불교의 진정한 메시지는 삶과 존재의 무상을 넘어서 진정한 자아와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부정 속의 긍정’에 있으며, 경허의 삶과 사상은 이러한 삶과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성찰적으로 계몽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는 결코 단일한 지층으로 이뤄져 있지 않다. 지난번에 다뤘던 이건창과 서재필이 살아간 공간과 경허가 살아간 공간은 사뭇 다른 지층이다. 나라가 무너지고 패망해가는 과정 속에서, 전염병이 창궐하고 삶의 터전이 황폐해지는 과정 속에서 지식인이 선택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할 길이 결코 하나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유마경에서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 있다고 말하듯이 인간의 삶은 실로 복잡다단한 것이며, 이러한 삶에 대한 근원적 해명을 모색하는 것은 지식인의 또 다른 사명이다. 경허는 바로 이러한 해명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지식인이다.
경허의 3대 제자로는 흔히 수월(水月), 혜월(慧月), 월면(月面, 만공)의 세 달이 꼽힌다. 수월은 북녘 하늘(만주 지방)에 뜬 상현달이 되고, 혜월은 남녘 하늘(영남 지방)에 뜬 하현달이 됐으며, 만공은 그 가운데(호서 지방) 뜬 보름달이 됐다고 한다.
이들 중 만공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수월과 혜월의 삶 또한 주목할 만하다. 수월은 20여 년 동안 북간도에서 나라를 잃고 그곳을 찾은 우리 민중에게 짚신을 삼아주고 주먹밥을 해먹였다고 한다. 혜월은 1910년 영남지방에서 선풍을 일으켰는데 가는 절마다 개간 사업을 벌일 만큼 이론과 실천을 모두 중시했다고 한다. 특히 1937년 당시 땔감으로 쓰이던 솔방울이 가득한 자루를 어깨에 메고 선 채 그대로 열반에 든 혜월의 마지막은 내가 아는 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지상과의 이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더니티를 치유하는 전통사상
최제우와 경허의 사상을 돌아볼 때 시대정신 탐구에서 전통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전통이란 앞선 시대로부터 계승되는 사상, 관습, 행동 등을 포괄한다. 사회학적으로 전통은 모더니티에 맞서는 말이다.
근대사회의 형성은 이러한 전통에서 모더니티로 진행되는 일련의 사회변동을 지칭한다. 주목할 것은 전통에서 모더니티로 가는 변동 과정에서 전통과 모더니티가 공존하는 시기가 결코 짧지 않으며, 상황과 국면에 따라서는 전통이 강화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통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하는가. 사회학자 임희섭에 따르면, 전통에서 전통문화(traditional culture)와 문화전통(cultural tradition)은 구별돼야 한다. 전통문화가 과거 전통사회의 문화를 말한다면, 문화전통은 과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문화양식으로서 현재의 사회 환경 속에서도 유지되는 문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전통문화는 과거에 속하는 우리의 고유문화이며, 문화전통은 현재에 속하는 우리의 고유문화라 할 수 있다. 사회학적으로 이러한 구분은 한 나라에서 발생하는 문화 정체성의 변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문화 정체성은 문화전통이 단절될 때 위협받게 되는데, 임희섭은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 의해 식민화됐을 때 자신의 문화전통과 단절되고 외래문화에 동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제우와 경허의 사상이 갖는 함의는 전통과 모더니티를 가르는 이분법에 대한 새로운 성찰에 있다. 일반적으로 전통은 지나간 것, 낡은 것, 열등한 것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저류에는 서구중심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한편에서 보면 집단주의, 권위주의, 가부장주의가 우리 전통문화를 특징짓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인본주의, 공동체주의, 생명주의가 문화전통에 살아 있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성장주의, 경쟁주의, 물질주의가 모더니티의 그늘을 이루고 있다면, 우리 문화전통에 내재한 인본주의, 공동체주의, 생명주의는 이러한 그늘을 치유할 수 있는 사상적, 실천적 실마리를 제공한다.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비서구사회에서 문화전통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계승할 것인지는 중대한 과제 가운데 하나이며, 이러한 과제는 특히 문화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앞서 살펴봤듯이, 최제우와 경허의 사상은 전통을 그대로 답습한 게 아니라 기존의 전통을 생산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전통을 단지 낡은 것으로 폐기한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주의, 민주주의, 평등주의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창조하고자 했다는 점이 두 사람의 지적 모험을 이뤘다. ‘전통의 창조’를 통해 자기 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모더니티의 전통을 만들어가는 것이 오늘날 지식인에게 부여된 또 하나의 시대적 사명이라면, 최제우와 경허의 사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작지 않은 함의를 안겨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용운의 심우장에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찾은 곳은 만해 한용운의 마지막 거처였던 서울 성북동 심우장이었다. 한용운은 최제우와 경허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출가하기 전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며, ‘경허집’의 서문을 쓰기도 한 승려였다. 무엇보다 그는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장마가 소강상태인 7월 초 성북동을 찾았다. 돈암동에 있는 용문중학교를 다닌 내게 이곳은 익숙한 동네다. 삼선교 사거리에서 삼청터널로 가는 도중에 내려 좁은 골목길을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심우장이 있었다. 열린 대문으로 들어가 심우장을 둘러봤다. 방 두 칸에 부엌 하나로 이뤄진 심우장은 특이하게도 동북향으로 지어진 집인데, 조선 총독부를 마주하지 않겠다는 한용운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한용운 사진과 이런저런 작품들을 둘러보니 새삼 그의 시집 ‘님의 침묵’(1926) 맨 앞에 실린 ‘군말’이 떠올랐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 (…)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만해가 말하는 님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일 수도 있고, 해탈일 수도 있고, 아니면 특정한 개인일 수도 있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뭐라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님은 이 세계 속에 살아 있는, 아니 죽어 있는 것들까지를 포함한 삼라만상 그 자체다.
만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리운 모든 것은 님이고, 그 님은 바로 자기 자신(그림자)이며, 그리고 그것은 다시 삶이라는 우주 속을 헤매는 어린 양으로 외화하는, 다시 말해 타자에서 자아로, 그리고 다시 또 다른 타자로 전화하는 주체와 객체의 통일로서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이 점에서 만해의 정신은 마음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자 하는 최제우의 사상과 마음 본래의 면목을 깨닫고자 하는 경허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타자와의 동일성을 모색하고 그 동일성을 바탕으로 민중과 중생의 세계로 나가고자 했던 최제우와 경허의 사상은 우리 모더니티의 초창기에 만날 수 있는 진정한 인간주의에 다름 아니며, 전통의 생산적인 창조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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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을 지키는 분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 골목길을 내려오다 조그만 공터에서 잠시 쉬었다. 건너편에는 상류계층의 거주지인 고급 주택들이 눈에 들고, 이편에는 평범한 시민들의 거주지인 산동네가 펼쳐 있었다. 두 주택단지의 묘한 대조를 지켜보니, 바로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의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사람 사는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우리 사회의 님은 누구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평범한 시민, 다시 말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 이 땅의 뭇 생명이지 않은가. 점차 따가워지는 7월의 햇볕 아래 삼선교 사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아직 장마가 끝나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일없이’ 이른 매미 울음소리가 들렸다.
최제우는 누구인가 1824년 경상도 경주에서 출생. 1864년 사망. 동학을 창도한 그는 전통과 모더니티의 경계에 서 있던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음. 민족 사상이자 종교인 동학은 동학농민운동에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이후 천도교로 발전되었음. 주요 저서로는 ‘동경대전’ ‘용담유사’가 있음. 경허는 누구인가 1846년 전라도 전주에서 출생. 1912년 사망. 조선 후기 쇠락해 있던 불교를 중흥시킨 그는 조선 중기 휴정 이래 가장 탁월한 승려로 평가되고 있음. 조계종에 큰 영향을 미친 혜월, 만공, 한암 등의 뛰어난 제자들을 키웠음. 주요 저서로는 ‘경허집’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