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때 죽어라 공부만…학력고사 전국 여자수석
- 대학 시절 어릴 때 살던 산동네 철거에 충격 받아
- 동두천 기지촌 가본 이후 주한미군 문제 연구
- 노동현장 체험한 적 없어
- “엄마, 국회의원 그만하면 안 돼?”
- 국회에서 명패 집어던진 것 후회 안 해
- 北 연평도 도발 분노하지만, 해결책은 대화뿐
- 나는 투사가 아니라 현실주의자
●1969년 서울 출생<br>●서울대 법대 졸업<br>●1996년 사법시험 합격<br>●2000년 변호사 개업<br>●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공동대표<br>●2008년 18대 국회의원<br>●현 민주노동당 대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좋은 시다.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라는 구절이 바람처럼 가슴을 휘저어놓는다.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라는 대목에선 가슴이 미어진다. 다들 그렇게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정희(42) 민주노동당 대표는 이 시를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즐겨 읽었다고 했다. 20대 중반 사법시험 공부할 때도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되게 막막했어요.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5년, 10년씩 공부하다가 포기하는 분 많잖아요. 그런 길을 걷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그러면 어떻게 하지, 하는 막막함이 있었어요. 그때 자주 읽었죠. 위안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대표에게 사전에 보낸 질문지엔 정치 관련 질문이 많았다. 왜 종북(從北)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북한을 감싸는지, 안 맞을 것 같은 유시민씨의 국민참여당과 합치려는 이유가 뭔지, 범야권 통합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국익과 관련해서는 현 정권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지…. 의무방어전 같은 이런 공식 질문을 한 다음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가본다는 게 애초의 구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정치적 견해보다 삶을 더 궁금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단발머리의 앳된 여고생 이미지와 국회에서 거칠게 싸우는 투사 이미지 사이의 가늠할 수 없는 거리감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삶의 우연성에 대한 고민
그녀는 서울 토박이다. 봉천동에서 태어나 남현동, 사당동, 신림동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충북 청원이 고향인 부친이 청년 시절 상경해 자리 잡은 곳이 그 일대였다. 아버지는 30세 때부터 두부를 만들었다. 처음엔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나중엔 손수 두부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팔았다. 당시 아버지의 두부 배달 수단은 자전거였다. 자전거 뒤쪽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나무판이 있었다. 어린 딸은 달리는 자전거의 나무판에 올라타 있을 때 마냥 행복했다. 아버지는 지금도 두부 장사를 한다. 공장을 운영하는데, 그녀 말로는 “수금에 허덕이는” 영세한 규모다.
그녀의 집안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편도 아니었다.
“대학 갈 때까지 냉면을 먹은 적이 없어요. 부모님이 일하느라 바빠 외식이나 노는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요. 그런데 책은 많이 사주셨어요. 친구들이 과외하는 걸 보고 고민했는데 다행히 중학교 때 과외가 없어졌어요. 그 덕에 서울대 갔죠.(웃음)”
중학교 3학년 때.
“고1 때 사회 선생님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늘진 느낌을 주는 분이었어요. 그분이 법대를 나왔어요. 서울대는 아니지만. 그래서 법대를 생각했죠.”
어린 시절 그녀는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마음에 두는 몇몇 친구와는 깊이 사귀고 나머지 친구들과는 그저 그런 관계를 유지했다. 고등학교 들어가자 친구들 간에 ‘계층분화’가 일어났다. 여학생이 공부 좀 하면 살림밑천 해야 된다며 여상(女商) 가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인문계를 갔다. 공부 잘하면서 집안이 어려운 아이들은 다 그렇게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시장통이나 산동네 살던 아이들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철학적 고민에 빠졌다.
“이 우연은 어디서 오는 걸까, 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어요. 생활환경이란 건 부모님이 만들어준 거지 내가 가지고 태어난 건 아니지 않은가. 이 우연 속에 있지 않고 다른 우연 속에 있었던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삶의 우연성에 대한 고민은 대학교 2학년 때 겪은 일로 더욱 깊어졌다. 어릴 때 살았던 산동네가 철거된 것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사당동 총신대 근처였다.
“철거된 뒤에 가보니 폐허가 돼 있었어요. 겨울에 갈 곳 없어 방황하는 애기엄마들과 할머니들을 봤어요. 부모가 거기 거주하는 친구들도 있었지요. 어쩌면 저도 벗어나지 못했을 수 있던 곳에서.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 일을 겪으면서 ‘조금 더 쓸모 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죠.”
분노를 느꼈던 걸까.
“분노라기보다는 의문이었죠. 나는 어떻게 그 자리에 없고 다른 곳에 있었던 걸까, 라는. 이왕 사는 것,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고요.”
총여학생회장
중·고등학생 시절 그녀는 주로 부반장을 했다. 그녀 말대로라면 공부 잘하면서 사교적이지 않고 남 앞에 나서지 않는 성격의 학생에게 딱 맞는 게 부반장이었다. 일탈 한 번 없었다. 전형적인 ‘범생이’로 평탄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삶에 영향을 끼친 특별한 사건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게 있었다면 죽어라 공부만 하지 않았을 것”이란다. 왜 그렇게 죽어라 공부했을까.
“지금도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면 수첩에 적는 버릇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 수첩에 ‘정말 미쳤다 생각하고 공부하자’고 적었던 기억이 나요. 뭐랄까. 불타오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한번 모든 걸 집중해 뭔가 이루고 싶은.”
그 덕분에 학력고사 전국 여자수석을 차지했다. 법대에 진학해보니 자신보다 똑똑한 친구가 많았다. 그들은 세상 보는 눈이 달랐다. 공부밖에 몰랐던 그녀로서는 충격이었다. 뭔가 변화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녀를 도서관 밖으로 밀어냈다. 자아를 벗어나 더불어 사는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총여학생회장을 맡은 건 그러한 변신의 과정이었다.
“세상을 보는 눈,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 이런 문제에 제가 굉장히 미숙하더라고요. 부족한 걸 채우고 싶었죠. 그러다 여성문제에 눈을 뜨면서 총여학생회장까지 맡게 됐죠. 나를 둘러싼 비합리가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게 된 거죠. 성차별을 사회구조적으로 인식한 것이 세상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녀가 과격한 운동권이었을 거라는 나의 선입관은 교정돼야 했다. 그녀는 이분법적인 규정을 거부했다.
“과격과 온건을 가르는 기준이 뭘까요. 저는 감옥에도 안 가고 화염병도 안 던졌지만 그렇게 행동한 학생들을 과격한 동료로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화염병 만들고 새총 쏘는 철거민들을 과격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생존과 자기 방어 차원에서 이해할 소지가 있는 거죠.”
그럼 뭔가. 도대체 그녀의 노선은. 민주노동당 대표의 과거 경력치고는 뭔가 어색하거나 부족하다. 북(北)을 추종하는 주사파도 아니었나?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질문을 무력화했다.
“그런 분류에 동의하지 않으며 (대학가에) 그런 노선이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북한에 대해 호기심을 가질 수는 있지요. 당시 많은 대학생이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남북관계에 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그런 학생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가 대학생 시절 ‘투사’가 아니었다는 건 시위와 관련해 한 번도 사법처리 된 적이 없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지하도에서 한 남학생이 경찰에 맞는 걸 보고 항의했다가 경찰서로 끌려가 몇 시간 유치장 구경하고 나온 게 고작이다. 이때의 유치장 체험은 뒷날 유치장 화장실 개선 문제에 대해 헌법소원을 할 때 도움이 된다. 변호사가 돼 처음 맡은 인권사건이었다.
“요즘은 좀 나아졌는데, 당시만 해도 유치장 화장실 칸막이가 무릎 높이였어요. 용변을 볼 때 다 보이는 거예요. 감시카메라에는 당연히 잡히고. 2000년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직후 한 여성이 찾아왔어요. 2박3일 동안 유치장에 들어가 있었는데 수치스러워서 용변을 볼 수 없어 물도 못 마시고 거의 단식을 했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대학생 때 거기서 용변 볼 엄두를 못 냈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헌법소원을 냈습니다. 인용이 돼서 시설이 약간 개선됐죠.”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한 것은 대학 졸업 후다. 삶의 진로를 놓고 불면의 나날을 보낸 끝에 내린 선택이었다.
“지금도 후회할 때가 있어요.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여학생회) 활동을 한 건데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스스로 내린 겁니다.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좌절 끝에 내가 좀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생각해 사법시험을 선택했습니다. 그 길을 계속 가기가 두려웠던 거죠. 그때 조금 더 힘을 내서 감행했다면 인생의 두려움이나 고민, 흔들림이 적지 않았을까, 더 강인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이 들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해요.”
사법시험 도전은 세상을 바꾸는 일에 참여하겠다는 의지였을까. 그녀는 “기회”라는 표현을 썼다. 계기가 있었다. 여학생회 일을 할 때 동두천 기지촌을 가본 적이 있다. 그곳에 있는 여성들과 혼혈 아이들을 보면서 주한미군 문제와 성매매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됐다. 그래서 “아주 구체적인 문제를 푸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법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1996년 사시에 합격하자마자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를 찾아갔다. 그때부터 10여 년간 그 단체에서 일하면서 운영위원과 공동대표를 지냈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을 하면서 반미(反美) 성향을 갖게 됐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내젓는다. “반미가 아니라 현실적인 접근을 한 것”이라며.
“공정한 룰을 만들어 미국과 협상하자는 거였죠. 작은 회사도 계약 체결할 때 변호사 자문 받아 하나하나 따지잖아요. 미국과도 그렇게 하자는 거였죠.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법무부에서 (미국에) 재판권 포기 요청을 했습니다. 제가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일할 때인데, 법무부에 (미국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하라는 신청서를 냈어요. 미국만 우리에게 재판권 포기를 요청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알려준 거죠. 주한미군 범죄는 무조건 미군이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리는 손 못 댄다고 생각하고 있더군요. 있는 규정도 무시한 채.”
용산기지 이전협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미 정부 간 계약서를 작성하는 데 기본적인 법률 검토가 이뤄지지 않은 걸 보고 놀랐다. 한국과 미국을 대등한 국가로 보지 않는 관행 탓이었다.
“관련 서류들을 보고 나서 법률가로서 갖는 의문점을 말하니, ‘(미국을) 편하게 해줘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근본적으로는 협정이 바뀌어야 해요. 지난번에 고엽제 사건이 터졌잖아요. 한국 정부에 단독 조사권이 없어요. 미군이 거부하면 조사할 수도 없어요. (미군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배상을 청구하면 배상금의 25%를 한국 정부가 내야 해요. 아무런 책임이 없어도. 주한미군 지위협정에 그렇게 규정돼 있어요. 굉장히 불공정한 조항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죠.”
“스파크가 튀었다”
판사를 포기한 건 사시 성적 때문이었다. 판사 인사는 철저히 성적 순이다. 성적이 우수하면 첫 발령지가 재경지역이고 나쁘면 지방이다. 성적대로라면 지방으로 내려가야 했다. 서울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는 남편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남편 심재환 변호사와는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민변 동료다. “어떻게 만났느냐”고 묻자 “스파크가 튀었다”라는 예기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1996년 말 3차 면접시험을 보러 (사법)연수원에 갔어요. 멀리 한 남자가 서 있는데 굉장히 인상적이더라고요.”
내 입에서 거의 자동적으로 “잘생겼느냐”라는 질문이 튀어나갔다.
단란한 가족.
이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걸 보니 진짜 한눈에 반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다음 얘기에 비하면 이건 약과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요즘도 부부 사이가 뜨거우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아직도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나는 크게 웃으며 “졌다 졌어. 강적이다”라고 말했다.
“남편은 제가 국회의원 하면서도 집안일과 아이들을 잘 챙기고 중요한 일들을 잘해나가는 것에 대해 굉장히 기뻐해요. 저한테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모습을 많이 본다고 얘기해요. 그래서 새록새록 더 좋아진다고 해요.”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정말 못 말리는 부부다. 부부는 아들 둘을 뒀다. 큰애가 중1, 작은애가 초등 5학년이다. 둘 다 대안학교를 다닌다. 그래서 사교육이란 걸 모른다. 작은 규모의 대안학교라 학비가 많이 들지도 않는다. 일반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학원 다니는 걸 감안하면 교육비가 덜 드는 편이다. 영어 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외국 보낼 생각도 없다. 오로지 학교를 믿고 맡길 뿐이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근처에 사는 아이들 고모가 틈나는 대로 봐준다. 그나마 큰아이는 중학교에 입학한 후 기숙사에 들어가서 신경이 덜 쓰인다.
2009년 3월 그녀가 국회에서 명패를 던진 사건 때문에 검찰 소환장을 받았을 때 초등 5학년이던 큰아이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날 밤 울산에 내려가 있는 그녀에게 아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집에 못 들어간다고 하자 아이가 말했다. “국회의원 그만하면 안 돼?” “어머니 보고 싶은데 못 보잖아.”
한번은 둘째아이가 “9월4일에 시간 있느냐”고 자꾸 물었다. 진보신당 당대회를 하는 날이었다. 그런 걸 아이가 알 리가 없었다. 영문을 몰라 이유를 묻자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생일이야.”
“작은 학교라 선생님들과 학부모들 관계가 돈독해요. 저 대신 아이들 아빠가 학교에 자주 가보죠. 저는 일 년에 두 번 정도 가고. 미안하죠. 국회의원이 되면서 아이들 상실감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의정활동으로 바쁘다보니 문화활동이나 취미생활을 할 시간도 많지 않다. 그녀는 간간이 전시회에 참석하는 걸로 문화적 욕구를 달랜다. 사회현실을 반영한 미술작품을 즐기는데 특히 일리야 레핀을 좋아한다. 레핀은 제정 러시아 말기의 전설적인 사실주의 작가다. 대표작은 5년에 걸쳐 완성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해설을 들어보자.
“레핀은 러시아 농부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리죠.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그림이 있어요. 제정 러시아 시절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다 돌아온 남자를 가족이 맞는 장면이에요. 불쑥 집으로 들어오는 그 남자에 대해 아이들은 놀라워하고 어머니와 아내는 반기면서도 두려워하죠. 내 자식이, 내 남편이 돌아와 우리 가정에 어떤 고초가 생기지 않을까 하고. 돌아왔는데 아무도 열렬히 반기지 않는 그 상황이 떠났을 때보다 더 힘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일리야 레핀을 알게 된 것은 남편과 데이트할 때다. 자신이 무척 좋아하는 화가라면서 남편이 도록을 빌려준 것이 계기였다.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전시회에 갔을 때 그녀는 마음속에서 한 줄기 바람이 이는 걸 느꼈다.
이정희 대표는 눈물을 많이 흘린다. 2008년 8월 기륭전자 해고 노동자들의 단식농성에 동참하면서 울었고, 2009년 1월 용산참사와 그해 6월에 일어난 쌍용자동차 파업 현장에서 눈물을 쏟았다. 2009년 12월엔 한나라당의 예산안 날치기 시도에 항의해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하면서, 2010년 11월엔 연평도 도발로 전사한 해병대원들의 영결식장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변호사 시절엔 거의 안 울었어요. 일부러 냉정해지려고 애썼죠. 인권 관련 사건을 하다보면 참 힘들게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온 분들을 많이 만나요. 냉정한 태도를 유지해야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게 사건을 바라볼 수 있어요. 그런데 국회의원이 되고 나선 일부러 냉정해질 필요가 없어졌죠.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갖는지 함께 호흡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일부러 쳐놓았던 냉정의 벽을 허물고 나니 눈물이 많이 나더라고요.”
진짜 가슴이 아파서 운다고 했다. 그럴 땐 가슴이 꽉 조인다고 한다. 국회 들어와 처음 울었던 게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이 50일가량 단식농성을 벌일 때였다. 그녀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동조단식에 들어갔다. 기륭전자는 300명의 생산직 대부분을 파견직으로 고용해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사측은 벌금으로 때우고 파견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했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1000일 넘게 처절한 복직투쟁을 벌였다. 이때부터 이들은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이 됐다. 회사 측과 끝내 타협이 이뤄지지 않자 노동자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3년 동안 싸워 얻은 결과물이 겨우 ‘대화의 상대로 인정해준다’는 거예요. 그게 굉장히 속상하더라고요. 사업자가 처벌을 받아도 노동자들은 구제받지 못하는 거예요. 도대체 왜 이 사람들이 법의 구제를 못 받고 거리에서 싸워야 하는지. 가슴이 막 조여 오더라고요. 다른 해결방법이 있을 텐데,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왜 저렇게 방치해 저들에게 고통을 겪게 하는지.”
그녀는 “노동현장을 체험한 적은 없다”라고 덧붙였다. 이 부분도 나의 선입관을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었다. 민주노동당 대표라고 꼭 노동현장 투쟁 경력을 갖춰야 한다는 법은 없겠지만, 뜻밖이다.
“변호사 할 때도 노동사건은 거의 해본 적이 없어요. 민변에서 노동사건을 전담하는 변호사가 많아서였죠. 오히려 사측 변론을 맡은 적은 있죠.”
법률가로서의 자긍심
눈물을 많이 흘리는 따뜻하고 여린 성격의 그녀지만 단 하나의 사건이 그녀의 이미지를 정반대로 바꾸어놓았다. 바로 2008년 12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의 명패를 집어던져 깨뜨린 사건이다.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관련 법안을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일방 상정한 데 대한 항의 표시였다. 그녀는 공용물건 손상 혐의로 기소돼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았다. 혹시 후회하지는 않을까.
“제가 법률가잖아요. 법률가는 법전에 있는 조사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정말 신중하게 판단해요. 그런데 제가 그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법률을 만들면서 야당의원들을 아예 회의장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데에 정말 분노했어요. 법치주의의 근본을 어긴 거죠. 분노를 표출하는 게 법률가로서의 자긍심에 부합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일로 상처 받은 분에겐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행동 자체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2009년 7월 미디어법 강행 처리 때는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TV 카메라에 잡혔다. 한나라당의 덩치 큰 여성 의원이 작은 새 같은 이 대표를 질질 끌고 나갔다. 당시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의총에서 이 일을 두고 “국회의사당에서 남녀평등이 실현된 사례”라고 말했다니, 우리 국회의 수준을 알 만하다.
이제 딱딱한 얘기를 할 때다. 9월 초 이 대표가 그토록 공을 들였던 진보신당과의 통합이 실패로 끝났다. 그 책임을 지고 진보신당 조승수 대표가 사퇴했다. 이 대표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라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 진보신당과의 통합이 왜 이렇게 잘 안 되죠?
“민주노동당이 너무 양보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진보신당 요구를 거의 100% 받아들여 합의점을 만들었어요. 그것이 진보신당 당원들한테 거부당한 건 단결의 대의가 충분히 공감되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나 싶어요. 저희 당원들은 100% 찬성했는데.”
▼ 진보신당과 통합하려는 건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전술적인 차원인가요?
“전술적인 차원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진보운동을 함께 해왔던 사람들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당연한 목표 때문입니다. 일단 진보신당이 거절해 당대당 통합이 어렵겠지만 앞으로 통합의 계기가 계속 마련될 거라고 봅니다.”
▼ 유시민씨의 국민참여당과 같이 가는 것에 대해 저쪽에서 불만이 큰 거죠?
“같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상당히 많아요. 그런데 당장 휩쓸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죠. 사실 진보가 폭이 좁을 이유가 없거든요. 진보라는 건 변화를 갈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폭이 넓을 수밖에 없죠. 그런데 유시민 대표가 일정한 대선 지지도를 갖고 있으니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그쪽에 휩쓸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는 것 같아요. 그쪽 당원들과 우리 쪽 당원들이 정서적으로 비슷해요. 시국과 사회를 보는 눈도 다르지 않고. 실천적인 운동을 많이 합니다.”
“통합하면 민주당 지지율 뛰어넘는다”
2008년 6월 촛불시위 때 불법적인 시민체포에 항의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호송차에 실려가는 모습.
“그 충정은 이해해요. 당연히 저희도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야권이 승리하고 정권교체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통합이건 연대건 중요한 건 신뢰죠. 신뢰를 전제로 저는 아주 현실적인 토론을 제안했습니다. 예컨대 당원 구조를 어떻게 할 것이냐. 진보정당에는 이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직 답이 안 왔어요. 저희는 완전 상향식이거든요. 국회의원 출마자를 당원들이 직접 뽑죠. 공천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당원이 소환도 하고 총투표를 발의할 수도 있습니다.”
▼ 통합이 안 되더라도 연대는 가능한가요?
“그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민주당에서는 통합이 안 되면 연대도 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왔습니다. 그건 좀 부적절하지 않으냐. 통합과 연대의 가능성을 다 열어놓고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찾자고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 민주노동당의 집권플랜이란 게 있나요?
“내년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 구성 이상의 성과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영남과 호남에서 계속 지지기반을 쌓고 있기 때문에 진보정당들의 통합 없이 연대만으로도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대표는 한 여론조사 결과를 소개했다. 이 여론조사에 따르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세 당이 합치면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 지지율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다시 진보신당 얘기로 돌아갔다.
▼ 북한 핵 개발과 3대 세습에 반대한다는 게 진보신당 강령이고, 그게 민주노동당과 차이 나는 부분이죠? 북한 문제를 명쾌하게 정리할 용의는 없나요? 합의문에서도 어정쩡하게 봉합했던데….
“합의문에서 그 문제는 남북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면서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그게 새로운 통합 진보정당의 원칙이라고 정했죠. 6·15 공동선언의 정신이기도 하고. 권력승계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밝히지 않는 게 좋다는 의견이 있죠. 6·15 공동선언의 기본도 체제 인정이거든요. 민주노동당은 북의 조선사회민주당과 오래전부터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대화 상대방의 체제를 문제 삼는 건 적절치 않을 수도 있죠.”
▼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런 차원이죠. 사실 청와대도 직접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진 않잖아요. 대화해야 하기 때문에.”
▼ 일반 국민에게는 민주노동당의 그런 태도가 종북(從北) 내지 친북(親北)으로 비칩니다. 대화도 좋고 평화체제도 좋은데 북한의 잘못에 대해선 분명하게 선을 긋고 나가는 게 민노당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핵 문제는 역사적 관점에서 풀어야 합니다.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반대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봐야죠. 당연히 지향점은 비핵화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걸 어떤 순서로 풀어가느냐가 관건이죠. 핵 문제와 권력승계 문제에 대해 다른 의견도 있지만 비핵화를 원칙으로 삼아 앞으로 계속 토론해가자는 쪽으로 진보신당과 합의했던 겁니다.”
▼ 뜻은 좋으나 현존하는 북한의 적대적 위협과 숱한 잘못을 눈감아주는 게 아닌가요?
“연평도 사건 때 사실 굉장히 마음이 아팠어요. 어렵게 살던 평범한 사람들이 돌아가셨잖아요. 국민과 군 동료들이 분노하는 건 당연하죠. 그런데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거냐. 연평도에 무기를 더 늘리거나 국가 교류를 차단하는 방법도 있겠죠. 하지만 평화의 길은 결국 대화로밖에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고통스럽고 화가 나지만 참고 일어서야죠.”
▼ 대기업 노조가 귀족화됐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자기들 밥그릇만 챙기고 비정규직 보호하는 데는 소홀하다고.
“철도노조에서 외주회사 직원인 KTX 노조 여승무원들을 받아들였잖아요. 그게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이를 없애는 첫 번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몇 년 동안 법정싸움을 할 수 있도록 철도노조에서 생계를 도와주고 농성장소도 마련해줬죠.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5년 동안 싸운 끝에 사측과 합의가 이뤄져 이제 복귀할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동안 그분들이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정규직 노조가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7월 관악구에서 수해 주민들의 일손을 돕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데 대해선 민주개혁 진보진영 전체가 성찰할 점이 있다고 봐요. 한마디로 서로 신뢰가 없었던 거예요. 2013년 정권교체를 하면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하나 이뤄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지난해 지방선거 이후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미흡하나마 꾸준히 실천해가고 있습니다.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외주하청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바꿔가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가는 거죠. 그래서 참여정부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 참여정부의 공과(功過)를 평하신다면?
“권력기관을 동원하지 않는 청와대를 만들려는 시도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인권 분야에서 발전이 있었고 과거사 정리도 평가할 만합니다. 복지예산을 늘렸으나 사회 양극화를 막을 정도로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는 신뢰가 구축되지 않아 매우 불안정했지요.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는 유감스러웠고요. FTA에 대해선 지금 국회에서 성찰이 이뤄지고 있어요.”
현실주의자
이명박 정부를 평가해달라고 하자 이 대표는 “상상 이상의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사회가 후퇴할 줄은, 민주주의가 후퇴할 줄은 몰랐다”면서. 국익을 위한 일에는 전향적 자세로 협조할 생각이 없는지 물어봤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고, 민주주의가 보장되고, 평등가치가 뿌리내릴 공간이 마련된다면 여러 문제를 같이 논의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가슴에 꿈을 품고 산다. 불가능한 꿈이더라도, 꿈 없는 삶은 공허하고 메마르다. 그녀는 무슨 꿈을 안고 살아갈까.
“가장 정돈된 꿈은요. 평범하고 착한 사람 누구나 할 수 있는 정치를 만들고 싶어요. 서로 공격하고 숨기고 비난하는 게 정치의 기술처럼 인식돼 있잖아요. 평범한 노동자나 애 키우는 여성이 할 수 있는 정치를 만들고 싶어요.”
꿈도 참 반듯하다. 그런 것 말고 이기적이고 달콤한 꿈은 없나.
“입양이에요. 아주 오래전부터 꾸던 꿈인데 점점 현실성이 떨어지고 있어요. 아이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안 되니. 아이를 입양해 가족을 만들어주고 인생의 기반을 만들어주는 게 (사회에 대한) 최선의 기여라고 생각해요.”
역시 반듯하다. 그녀를 규정하자면 부드러운 투사다. 노동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만 해도 기존 노동운동권과 차이가 있다. 그녀는 거친 투쟁보다는 법률가답게 일반적인 정의 관념에 비춰 사회적 기본권과 시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헌법적 권리에 주목해 해법을 모색한다.
내가 “민주노동당 대표라는 현재의 모습과 노동현장 체험도 없는 과거의 온건한 운동권 이미지가 잘 연결되지 않는다. 뭐라고 규정짓기가 모호하다”라고 불만스러워하자 그녀가 한참 웃다가 말했다.
“제가 원래 그래요.(웃음) …굳이 말하자면 저는 현실주의자예요. 현재 우리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거냐, 어떻게 변화시킬 거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생활 문제에 대한 관심이죠. 주한미군 문제나 북한 문제, 환경 문제,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도 다 그런 차원이죠. 진보가 이런 현실 문제를 푸는 능력을 갖췄고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걸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게 제 목표입니다. 감성적인 공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