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MZ 155마일 관통 ‘평화고속도로’ 건설해야”
- “DMZ-민통선 사이 시범 국립공원 조성하자”
- 분쟁지역 30개국 탄피 녹여 만든 ‘평화의 종’
- 남북 자유 왕래하는 수달, 평화홍보대사 임명
치열한 留置경쟁
남북갈등 해결 방안의 하나로 박 대통령이 제시한 세계평화공원 구상을 지방정부가 저마다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 유치전을 벌이면서 과열, 혼탁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어느 지역은 배제됐다는 둥 어느 지역으로 낙점됐다는 둥 미확인 소문들이 떠돈다. ‘경기도는 파주, 강원도는 철원과 고성으로 평화공원 후보지가 정해졌다’는 설도 나돈다. 관련 부처는 “특정 지역으로 결정된 바 없다”며 “아직 초안을 마련하는 단계”라는 입장이다.
강원도 화천군은 10여 년 전부터 군(郡) 차원에서 다각도로 DMZ평화공원 조성을 추진해왔다. 정갑철(68) 화천군수는 이전투구 양상으로 전개되는 DMZ평화공원 유치전에 대해 “세계적인 평화공원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자체 간 이기주의에 매몰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정 군수를 8월 6일 ‘쪽배축제’가 한창인 화천군에서 만났다.
“DMZ세계평화공원은 정전 60주년을 맞아 분단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DMZ를 세계평화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려는 국가적 사업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업이 소지역주의로 빠져드는 것 같아 답답해요. 자치단체 처지에선 다들 유치하고픈 욕심이 있을 겁니다. 평화공원 조성을 둘러싼 논의가 ‘어디는 되고, 어디는 안 된다’는 식으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평화의 상징을 만들려다 지역 갈등과 반목만 키울 우려가 있어요.”
▼ 성공적으로 조성하려면 어떤 접근법이 필요할까요.
“미 의회에서 박 대통령이 밝힌 평화공원 구상은 접경지역 주민은 물론 남북한 국민 모두의 가슴에 와 닿는 얘기였어요. 대통령이 해외에서 밝힌 큰 생각이 국내에 들어와 좁은 틀에 묶여서야 되겠습니까. 평화공원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분들이 대통령의 큰 생각을 잘 헤아려야겠죠.”
각 지자체 고유 특성 살려야
평화의 댐 부근에 설치된 세계평화의 종.
“돌아보고 민심도 청취해서 조성 계획안을 짠다면 더 좋겠지요. 대통령이 어디는 되고, 어디는 안 된다는 생각을 미리 갖고 평화공원 조성 구상을 밝히지는 않았을 겁니다. DMZ와 접해 있는 자치단체가 강원도에 5곳, 경기도에 3곳, 인천에 2곳 등 모두 10곳이나 됩니다. 그런데 어느 한 곳을 정해 평화공원을 만들겠다고 하면 나머지 9곳이 다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DMZ가 어느 한 지역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조곤조곤 얘기하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경기도와 강원도가 경쟁하고, ‘철원이 맞다’ ‘고성이 좋다’ ‘파주, 연천이 더 낫다’는 식의 지엽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DMZ는 한반도를 동서로 관통합니다. 작은 지역으로 축소해 접근하면 DMZ평화공원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것 아닙니까. 평화공원을 지역 단위로 추진할 것이 아니라, DMZ가 있는 곳 어디라도 평화공원이 될 수 있도록 큰 틀에서 접근해야죠. 특정 지역을 중심에 놓고 사고를 하니까 저마다 자기에게 유리한 논리를 펴는 것이죠.”
▼ DMZ 155마일을 전부 공원으로 조성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듯합니다.
“우선 DMZ를 관통하는 평화고속도로를 만들어야죠. 그 고속도로를 따라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각자 보고 싶은 곳에 가서 관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세계평화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겠어요? DMZ 주변 지자체들은 강이 흐르거나, 호수가 많거나, 땅이 넓거나, 많은 역사 유적지를 보유하는 등 고유의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지역 특성을 살려 모두가 평화공원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 정부 차원에서 평화고속도로를 검토하고 있는 것 같진 않은데요.
“DMZ를 끼고 있는 10개 지방자치단체가 모여 ‘접경지역 시장·군수협의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인재 파주시장이 회장을 맡고 있는데, 이 회장이 주축이 돼서 평화고속도로 건립 필요성을 알아보는 연구 용역을 의뢰했습니다. 용역 결과가 나오면 정부에 공식 요청할 것입니다.”
▼ 군사분계선을 따라 고속도로를 닦는 것은 군사 안보 차원의 검토가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요.
“근시안적으로 보면 안보에 영향을 미치고 군사작전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세계적인 공원이 조성됐다고 생각해보세요. 국가 전체 관광산업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한다면 구태여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요.”
▼ 정 군수께서는 박 대통령이 밝힌 세계평화공원 구상에 앞서 일찌감치 ‘DMZ국립공원’ 건립을 주장했습니다.
“2009년에 DMZ국립공원을 제안했습니다. 국립공원이 만들어지면 사실 지역에는 큰 도움이 안 됩니다. 오히려 규제만 많아지고 인센티브는 적거든요. 그런데도 DMZ에 국립공원을 만들자고 한 것은 보존에 따른 효용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DMZ국립공원’과 화천
▼ DMZ국립공원을 어디에 만들자는 얘긴가요.
“DMZ 안에 평화공원을 만들려면 유엔군과 북한의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우리 노력만으로는 착공조차 어려워요. 그러니 민간인통제선(CCL)과 DMZ 남방한계선 사이를 우선 국립공원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유엔군과 북한의 동의와 협조를 얻어 DMZ평화공원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우리가 자체적으로 조성할 수 있는 곳부터 먼저 시범적으로 (평화공원을) 만들자는 얘기죠.”
▼ 화천이 그 적지(適地)인가요.
“DMZ를 끼고 있는 여러 지역 가운데 CCL과 남방한계선 사이에 넓게 포진한 곳이 화천입니다. 몇몇 지역의 경우 군사분계선과 CCL이 맞붙어 있어 공원을 조성할 여건이 안 돼요. 또 면적이 넓더라도 사유재산이 인정돼 국립공원을 지정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화천은 CCL과 남방한계선 사이 면적이 넓고 사유재산도 거의 없어 국립공원으로 보존할 수 있는 최적지입니다. 꼭 우리 지역에 평화공원을 만들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화천이 어떤 지역적 특성을 갖고 있는지 말씀드리는 거예요.”
평화의 댐이 자리한 화천은 평화를 상징하는 시설을 여럿 갖추고 ‘평화 전도사’ 노릇을 톡톡히 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평화의 댐 인근에 자리 잡은 ‘세계평화의 종’. 전 세계 분쟁지역 30개국에서 가져다 모은 탄피를 녹여 만든 것으로, 전쟁을 평화로 바꿔낸 상징물이다. 2009년 타종식 때는 동서 냉전시대를 종식시킨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참석해 타종했다. 평화의 종은 단순히 평화를 상징하는 조형물에 그치지 않는다. 평화의 종 공원 운영 수익금은 6·25전쟁에 참가했다 희생된 에티오피아 병사 후손들에게 장학금으로 지급되고 있다.
“평화의 종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60여 년 전 이역만리 대한민국에서 평화를 위해 싸우다 간 에티오피아군(軍)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화천군에 주둔한 우리 군부대 부사관들도 십시일반 장학금을 모아 더 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게 됐습니다. 부사관들이 박봉을 털어 모은 장학금이 1년에 3000만 원이나 됩니다. 또한 서울대와 한림대에서는 에티오피아 출신 대학원생이 학비 부담 없이 석사과정을 마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충북 충주에 있는 한 광학기계 제조회사는 에티오피아 학생을 채용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고요.”
평화 선순환의 모델이 된 평화의 종 사업은 ‘세계 병사 위령제’와 위령탑 건립으로 이어졌다. 7월 13일 화천군은 조계종과 함께 화천군 파로호와 백암산 주변에서 희생된 10만여 명의 외국 병사를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냈다.
남북평화홍보대사
화천군은 수달을 남북평화홍보대사에 임명했다.
“평화아트파크가 완성되면 인명과 재산을 파괴하던 살상무기들이 평화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2006년부터 화천군이 추진하고 있는 백암산 프로젝트도 평화와 관련돼 있다. 특구로 지정돼 추진 중인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평화의 댐은 물론 북한의 금강산댐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집중호우가 잦았던 올여름 북한은 임남댐(금강산댐) 수문을 열겠다고 통보해왔다. 그러나 백암산 전망대가 완공되면 망원경으로 금강산댐 수위를 알 수 있어 북한의 통보 없이도 자체적으로 수위 조절에 나설 수 있게 된다.
“평화는 구호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위험을 미리 대비할 수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습니다. 임남댐에서 많은 물이 내려오는 것을 지금은 북한 군부의 통보를 받아야 알 수 있지만, 백암산 전망대가 완공되면 우리 힘으로 파악해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런 노력이 곧 평화로 가는 길 아니겠습니까.”
정 군수의 말에서는 평화에 대한 확고한 소신이 묻어났다. 평화의 종, 평화아트파크, 백암산프로젝트 등 다양한 평화 관련 사업을 추진해온 뒷심이 자신감으로 작용한 듯했다. 화천군은 지난해 코리아DMZ협의회에 용역을 줘 평화생태호수공원 건립을 위한 검토를 끝냈다. 용역 보고서에는 평화의 댐과 금강산댐 사이를 ‘평화생태호수공원’으로 조성, 남북한이 평화·생태·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과 세계 최초로 댐을 활용한 문화공연장을 평화의 댐에 건립하는 방안 등이 담겨 있다.
일찌감치 DMZ평화공원 조성을 준비해온 정 군수는 하고픈 말을 다 하면서도 정작 ‘화천이야말로 DMZ세계평화공원의 최적지’라는 말은 끝내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만 화천군이 그동안 평화공원 조성을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해 담담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인터뷰 말미에 정 군수는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한 곳뿐인 수달연구센터에 대해 설명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수달은 자연보존 상태를 살펴볼 수 있는 지표 동물입니다. 학자들은 화천에 수달이 살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자연이 잘 보존됐기 때문이라고 해요. 생태학적으로 그만큼 완성도가 높은 곳이란 얘기죠. 2005년 화천에 수달연구센터를 만들면서 수달을 ‘남북평화홍보대사’로 임명했습니다. 사람은 DMZ 철조망에 막혀 남북을 왕래할 수 없지만 수달은 패스포트 없이도 북한강을 따라 남북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거든요. DMZ에 세계평화공원을 만들겠다는 것은 수달이 자유롭게 남북을 넘나들 듯, 사람들도 자유 왕래가 가능한 평화지대를 만들겠다는 뜻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