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봉균(58)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경제수석 재경부장관을 맡아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주요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과정에 깊숙이 참여했다. 그는 최근 21세기 경영인클럽 강연회에서 “올 4분기(10∼12월) 경제회복도 물 건너갔다, 동아시아 경제가 외환위기 직후보다 더 어렵다”고 발언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 기자가 기사를 키우기 위해 ‘동아시아’ 대신 ‘한국’을 집어넣는 바람에 파문이 커졌다. 야당과 언론은 ‘거 봐라, 강원장도 그렇게 말하지 않느냐’며 정부를 질타하는 재료로 썼고 몇몇 경제 각료들은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다.
전윤철 기획예산처 장관은 “전세계 경제가 도미노 현상을 보이는데 유독 한국만 외환위기보다 더한 위기가 온다니 말이 되느냐”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화낼 일만은 아니다. 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강원장이 정부를 일부러 곤경에 빠뜨리려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한국경제는 사면초가에 처해 있다. 대우자동차와 하이닉스라는 뇌관이 해체되지 않고 남아 있고, 세계경제의 3대 축인 미국·유럽·일본 경제가 싱크로나이즈드 싱킹(동시 침몰)하면서 수출의존도가 높은 동아시아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경제회복을 위해서는 정치 안정이 필수적이나 공조붕괴로 정부 여당은 소수파로 전락했고, 대통령의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상황에서 정책 집행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사면초가에 빠진 한국경제
여기에 미국을 공격한 인류 최악의 테러는 세계 금융시장과 미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예측하기조차 어렵다. 미국 시장의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한국에는 태풍이 일어난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의 기능마비로 심리적 공황에 빠진 세계 금융시장은 언제쯤 안정을 되찾을 것인가.
정부 경제팀의 구석구석을 섭렵하고 30여 년 만에 모처럼 현업에서 한 발 비켜서 있는 그에게 김대중 정부의 3년 반을 평가하고 앞날을 조망하는 의견을 들어보았다.
―외환위기 때보다 어렵다고 하니까 ‘자기가 경제수석이나 재경부장관 할 때는 잘 된다고 하다가 다른 사람이 맡으니까 그러느냐’고 힐난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한국도 동아시아에 포함되니 걱정스럽군요.
“한국경제를 둘러싼 대외환경이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뜻이었습니다. 미국·일본·유럽연합의 경기가 동시에 침체되고 있어 글로벌 리세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미국 불황의 충격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가장 크게 받습니다. 싱가포르와 대만이 2분기(4∼6월)부터 마이너스 성장으로 떨어졌어요. 외국 경제전문가와 기관들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 때보다 경제 성장에 더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한국경제는 2분기에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2.7%로 예상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었지만 3분기(7∼9월)에는 더 나빠질 것 같습니다. 4분기(10∼12월)에 어떻게 될지는 10월에 판가름나는 미국 경기 회복 가능성에 달렸지요.
분명히 말하건대 한국경제 상황이 외환위기 때처럼 나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는 경제성장률이 -6%, 실업률이 9%, 실업자 수가 180만명이었습니다. 그때보다 더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죠.
다만 대외환경이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기 때문에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수출감소에 따른 경기 침체 국면을 우리 힘만으로 역전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구조조정을 신속히 진행하면서 내수경기 진작책을 적극적으로 병행하면 어려운 여건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위기 대처방안을 놓고 국론이 분열돼 어려운 국면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국민의 에너지가 약화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전윤철 기획예산처장관과는 경제기획원에서 같이 일하셨죠?
“내가 기획원 차관 때 기획관리실장이었어요.”
―아랫사람이었군요. 경제가 극히 어렵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강원장 이름 뒤에 존칭도 안 붙이고 화를 냈더군요.
“실제로 화를 낸 게 아니라는데 신문에서 그렇게 쓴 것 같던데….”
정치인이나 관료들은 발언이 파문을 빚으면 신문 핑계를 대는 습관이 있다. 물론 기사를 짧게 압축하다 보면 화자의 뜻이 잘 전달되지 않을 때도 더러 있다. 아카데미즘의 특징은 부연이고 저널리즘의 특징은 생략이니 어쩌면 태생적 한계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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