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보·수사기관인 기무사가 민간인 구속과정에 개입한 의혹이 제기됐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민간인으로서 군검찰의 병무비리수사팀에서 활약하다 지난해 4월 박노항 원사 체포에 앞서 구속된 김대업(41)씨 관련 검찰수사기록에서 확인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기무사가 민간인을 지속적으로 내사해온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들 만하다.
검찰 수사기록에 왜 기무사 문서가?
법적으로 민간인 내사가 금지돼 있는 기무사가 이처럼 김씨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은 병무비리수사를 둘러싸고 김씨와 기무사가 맺은 ‘악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수사 여파로 창군 이래 처음으로 군검찰에 의해 일부 부대가 압수수색 당하고 일부 요원이 구속되는 등 군 최대파워기관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기무사는 병무비리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김씨를 군검찰 수사팀에서 배제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런 사실은 그간 일부 언론의 보도로 밝혀진 바 있다.
사기 혐의로 구속돼 1년 실형을 살고 지난 4월 출소한 김씨는 모 시민단체를 찾아가 자신의 구속사건에 기무사가 관련됐다는 의혹을 제보했다. 이 단체는 김씨 주장에 대해 사실 확인과정을 거쳐 조만간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김씨는 ‘병무비리 족집게’로 불릴 만큼 병무비리수사에 관한 한 국내 최고 전문가로 통하는 인물. 민간인으로는 유일하게 군검찰 수사팀에 참여, 1998년 12월 제1차 병역비리 군·검합동수사반 발족 이후 세 차례에 걸쳐 3년 가까이 진행된 병역비리수사에서 상당한 공을 세웠다.
반면 그에게는 ‘전과자’ ‘사기꾼’이라는 꼬리표도 따라다녔다. 그의 수사참여를 두고 군검찰 주변에서는 잡음이 일었다. 특히 기무사에서는 불미스러운 사생활 전력을 내세워 그의 수사 참여를 공공연히 반대했다. 민간인이 군에서, 그것도 병무비리 전과자가 병무비리수사에서 수사관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기무사의 시각이었다.
비밀정보원인 김씨에게는 공식직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특수수사관’ 노릇을 했다는 게 군검찰 주변의 얘기다. 병무비리수사 초기 군검찰은 그의 정보수집과 자료분석에 크게 의존했다. 1차 수사 당시 국방부 검찰부 수석검찰관으로서 병무비리수사의 기본 틀을 마련했던 이명현 중령 같은 이는 “김대업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건군 이래 최대의 병무비리수사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김씨는 1999년 7월 기무·헌병요원의 병무비리를 전담수사한 특별수사팀에서도 활약했다. 2000년 2월 반부패국민연대의 기자회견으로 촉발된 제3차 병역비리 군·검합동수사 당시 군검찰쪽 팀장을 맡았던 국방부 검찰단장 서영득(현재 국방대학원 소속) 대령도 김씨의 능력을 인정해 그를 수사에 참여시켰다. 다만 서대령은 김씨를 둘러싼 잡음과 군검찰 내 불화를 감안해 그의 역할을 ‘수사보조원’에 국한시켰다.
김씨가 이토록 ‘중용’된 것은 의정하사관 출신으로 기본적인 의학지식을 갖추고 있는 데다 신검규정 등 병무행정에 밝고 그 자신이 한때 병무비리세계에 몸담은 적이 있어 어떤 과정을 거쳐 비리가 발생하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가 구속된 사건은 병무비리수사 과정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돈 대신 처벌 요구
김씨의 구속은 평소 알고 지내던 조아무개(60·여)씨의 고소에서 비롯됐다. 최초 조사를 맡았던 서울 서초경찰서에 따르면 조씨는 김씨가 체포되기 3개월쯤 전인 2000년 12월말 김씨를 사기혐의로 고소했다. 1998년 10월경부터 2000년 2월까지 수회에 걸쳐 3억7700만원을 빌려가 갚지 않았다는 것이 조씨의 주장이다.
서초경찰서는 2001년 3월초 김씨를 지명수배했다. 담당자인 용아무개 경사는 그 이유에 대해 “김씨의 주민등록상 주소지(대구)로 출두요구서를 보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는 데다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당시 김씨는 제3차 병역비리 군·검합동수사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김씨 변호를 맡았던 안병희 변호사는 “합수반에서 활동하던 사람의 소재를 몰라 조사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며 수배 경위에 의문을 나타냈다. 수배된 시점이 합수반이 해체된 직후라는 점도 의혹을 낳았다. 말하자면 김씨의 ‘보호막’이 걷힌 직후 수배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런 까닭에 김씨는 체포 당시 수배사실은 물론 고소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체포 직후 김씨는 조씨로부터 돈을 빌린 사실은 시인했지만 사기혐의는 부인했다. 액수도 다르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검찰로 송치되기 전 서초경찰서에서 조씨와 합의를 시도했다. 애초 조씨쪽에서도 돈만 받으면 고소는 취하하겠다는 의사를 비췄다.
실제로 두 사람은 합의서를 작성했다. 김씨는 우선 자신의 현금카드에서 8000만원을 인출, 조씨에게 건넸다. 나머지 2억9700만원은 제3자의 보증하에 그해 6월4일까지 갚기로 합의했다. 김씨의 보증인으로 나선 이 제3자는 김씨가 병무비리수사 당시 인연을 맺은 군의관 출신 의사다. 양측은 법원제출용 합의서 외에 이면합의서를 작성해 공증까지 받았다. 이면합의서는 5가지 조항을 담고 있다. 이면합의서에 따르면 조씨는 ‘합의 이후 고소를 취하하며 이 건과 관련해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안병희 변호사에 따르면 합의서 작성 직후 조씨는 마음을 바꿔 고소를 취하하지 않았고 오히려 처벌을 요구했다. 그에 따라 합의는 깨졌고, 김씨는 법원의 구속적부심에서도 구제받지 못했다. 그해 4월13일, 서울지검 형사1부 김아무개 검사는 김씨를 사기혐의로 기소했다. 안변호사는 조씨의 태도가 바뀐 경위에 강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기무사 개입의 증거는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수사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검찰 수사기록에 첨부된 기무사 자료가 그것이다. 관련기록에 따르면 이 문서는 김씨가 기소되기 4일 전인 4월9일 기무사측에서 검찰에 넘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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