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대 총선 개표결과 원내 1당이 확실해지자 열린우리당 당선자들이 손을 맞잡고 기뻐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지형 변화는 향후 정국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남아 있지만,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점유함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문제가 정치적으로 해결돼 정부와 여당은 정국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한편 제2당으로 추락한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견제력이 상당히 약화될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결과는 민주노동당의 약진이다. 기존 정당들과 전혀 다른 성격의 진보정당이 원내에 진출한다는 것만으로도 정치사적으로 의미가 있는데 두 자릿수 의석을 확보, 제3당이 됨으로써 보수 독점 구도였던 한국 의회정치에 적지 않은, 그리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제17대 총선에서는 이러한 정치지형 변화뿐 아니라 선거 과정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가 관찰됐다. 조직과 돈이 아니라 참신성과 투명성이 무기가 되는 새로운 게임의 룰이 적용된 것이다. 우선 기존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감으로 인해 후보 공천과정에서부터 이른바 물갈이 바람이 불었다. 이러한 바람은 정치개혁에 대한 강한 압박으로 이어져 선거법 규정이 한층 엄격하게 개정·적용됐다. 결과적으로 물갈이 바람은 현역 의원 공천율을 크게 낮춤으로써 젊고 참신한 인물을 대거 원내에 진출시켰다.
정책 대결보다 이미지 대결
하지만 이번 총선이 정당체제의 재편을 초래하는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로 평가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정치지형과 선거과정에서의 변화가 정당체제의 재편, 즉 지역정당체제의 해소로 이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선거가 중대선거로 평가되려면 첫째 유권자의 재정렬(realignment)을 야기해야 하고, 둘째 그러한 재정렬이 이후 선거에서도 지속돼야 한다. 따라서 영남과 호남지역에서 각각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이번 17대 총선을 중대선거로 평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번 총선의 특징을 선거 과정과 투표 행태로 나누어 살펴보고, 주요 선거결과를 분석한 뒤 이를 바탕으로 총선 이후 한국 정치의 과제를 논의할 것이다.
이번 총선은 불법 대선자금 논란과 대통령 측근비리 등으로 기존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의 실망과 분노가 매우 높았다. 때문에 정당들의 총선후보 공천과정에서부터 이른바 물갈이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 결과 현역 의원 약 36%가 공천에서 탈락, 사상 최대의 ‘현역 물갈이’가 이루어졌다. 젊고 참신한 인물에 대한 유권자 선호도가 높아져 공천자의 평균 연령은 지난 총선 당시 52.6세보다 2.8세 낮아진 49.8세로 나타났다.
또한 선거직전 통과된 새 선거법은 불법 선거의 기준과 선거법 위반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됐다. 이처럼 강화된 선거법이 적용됨에 따라 이번 선거에서는 금권선거가 사라지고 선거비용이 축소돼 이전 선거보다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에서는 선거법 위반사례가 지난 선거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하는 등 선거판이 여전히 혼탁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선거법 규정이 더욱 엄격해졌고, 선거법 위반자에 대한 단속이 훨씬 강화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엄격해진 선거법은 부작용도 드러냈다. 무엇보다 선거법이 거리유세를 제한하고 정당 합동연설회를 금지하는 등 규제 위주여서 유권자가 후보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다.
인터넷 이용률의 폭발적인 증가와 선거법 개정에 힘입어 미디어와 인터넷을 이용한 선거운동이 크게 활성화됐다. 이는 금권선거의 고리를 차단하고 선거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지만, 정책과 인물 대결이 실종되고 감성과 이미지에 호소하는 정치경쟁으로 흐르는 부정적인 효과도 있다.
특히 정책 차이가 뚜렷하지 않은 보수 지역정당체제하에서 도입된 미디어 정치로 인해 각 정당은 상대당과의 정책적 차별성을 부각시키기보다는 도덕성 부각과 이미지 연출을 유권자 동원의 주된 수단으로 이용했다. 이는 현재의 지역대결 구도를 정책 혹은 이념대결 구도로 전환시키는 데 있어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