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우리당 승리의 원동력이었던 탄핵반대 열풍의 현장. 17대 총선은 2002년 대선의 보선이었나.
17대 총선도 그런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우리 국민은 현대 정치가 제도화한 내전(內戰)을 한바탕 치른 셈인데, 이제 개표가 끝난 지금 느끼는 비장(悲壯)이나 허망감은 실제로 한바탕 치열한 전투를 구경한 것보다 더 절실하다. 아마도 한나라당의 입후보자공천심사위원으로 한 80일 국회의사당을 들락거리며 보고 들은 게 실감을 더한 듯하다.
내가 공천심사위원으로 초빙 받아 타고 있던 한나라호(號)로부터 내린 것은 한나라호와 민주호의 연합 기습작전으로 정부여당의 기함(旗艦)이 격침되고 그 함대 사령관이 헌재(헌법 재판소)호로 옮겨간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로부터 한나라당의 임시 전당대회가 열릴 때까지 열흘, 나는 광란과도 같은 민심의 요동을 보았다.
그 기간 나는 매스컴의 선동조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종합적 사고보다는 비속한 단답형(短答型) 논리의 연쇄로 이루어진 정치적 궤변이 얼마나 논의를 황폐화하는지를 잘 보았다. 이미지와 디지털적 사고의 결합으로 급조된 군중이 얼마나 반이성적 특질을 잘 보여주는지도 섬뜩하게 경험했고, 촛불시위에서는 한반도 북쪽에만 남아있는 줄 알았던 개인숭배주의 망령까지 본 것 같아 몸을 떤 적도 있었다.
그러자 다른 때와는 달리 이번 총선은 내 삶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험처럼 다가왔다. 나는 35년 전 처음 투표권을 받은 이래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선거를 치러왔고, 작가로 등단해 25년 넘게 수천만의 독자와 거래해왔다. 거기서 나름으로 시대를 읽을 줄 알고 대중을 이해한다고 믿으면서 살았는데, 갑자기 그 안목과 이해력이 이번 선거로 시험대에 올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해하는 시대는 그래도 이미지보다는 본질에 무게를 두고, 감각보다는 관념이 진실을 파악하는 데 유효한 수단이라고 믿는 시대였다. 내가 이해하는 우리 대중은 자주 냄비니 깡통이니 하는 폄하를 듣지만, 중요한 결정 앞에서는 뜻밖으로 신중하고 사려 깊어지는 이들이었다. 나는 몇 가지 선거결과를 가정하고 그런 시대와 그런 대중이 선택할 법한 결과와 비교하여 내 안목과 이해력을 시험해보려 했다.
첫째 경우는 탄핵반대 분위기가 선거를 좌우해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한나라당을 비롯한 모든 야당이 비슷한 군소정당으로 전락하는 결과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 눈은 이미 이 시대를 읽어내지 못하며 내 정신은 동료대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된다. 내가 아는 시대와 이해하는 대중은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경우는 탄핵반대 분위기가 이어가도 우리 국민들의 균형과 견제 심리가 조금 살아나서 야당 중에 하나에게, 특히 한나라당에게 개헌 저지선 정도의 의석을 허용하는 경우이다. 내게는 여전히 불만스럽지만 그래도 내 안목과 이해력이 온전히 기능을 상실한 것은 아닌 것이 된다.
셋째는 조금 낙관적인 기대로, 시대의 이성과 대중의 균형 심리가 한층 회복되어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선두를 다투는 형태였다. 민주당, 자민련, 민노당 기타가 조금씩 기득권을 지켜 50석 가까이 빼내가고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125석 내외로 선두를 다투는 것인데, 125석을 기준으로 삼은 것은 이성적인 투표에서 두 당이 자력으로 얻을 수 있는 한계로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내 안목과 이해력에 믿음을 가지고 걸어본 기대에 가까운데, 탄핵이 그 원래의 의미대로 국회의원 투표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우이다. 다른 야당은 가졌던 의석을 그대로 지키고, 민노당만 약진하면 한나라당은 120석 내외로 한나라당이 원내 제1당을 지킨다. 적어도 삼권분립 제도 아래서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라면 내가 아는 시대와 내가 이해하는 대중은 그런 선택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최악으로 나왔다. 열린우리당이 의석 과반수를 넘는 제1당이 됨으로써 나는 시대를 읽는 내 안목과 내 시대의 대중을 알아보는 내 이해력을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그래도 한 가지 위로가 있다면 그 같은 결과가 한나라당의 무능 탓이 아니라, 민주당과 자민련의 처참한 몰락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특히 민주당의 몰락, 또는 호남 민심의 표변(豹變)은 충격 이상의, 어떤 무상감까지 느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