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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글라이스틴 “‘2등 시민’ 전라 도민의 지역주의가 폭동 불렀다 ”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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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어느 구석을 들춰봐도 미국의 흔적은 또렷하다. 5·18의 광주도 예외가 아니다. 1989년 6월 미 국무부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미국 정부 성명서’를 내놓았다. 1988년 국회 광주특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이었다. 한국에서 광주를 직접 겪은 미 행정부의 두 고위 관리인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와 위컴 주한미군사령관도 각각 비망록 형식의 저서를 통해 나름대로 광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는 귀한 자료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광주가 흘린 피의 진실을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1980년 5월 주한 미 대사관은 한 달 동안 매일 평균 3∼4건의 비밀 전문(電文)을 워싱턴으로 타전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이 ‘광주 보고’ 전문 가운데 일부는 그의 저서에도 실려 있고, 한국 학계나 언론계에 일부 내용이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12·12 쿠데타에서부터 5·18의 발단과 전개, 그 이후 상황을 미 행정부의 비밀문서만을 통해 시간대와 날짜순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신동아’는 이번 호부터 미 행정부의 비밀문서 발굴과 분석 작업을 하고 있는 KISON(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 한반도 정보서비스넷)과 공동 작업으로 5·18 관련 미 비밀문서를 통해 1980년 5월을 재구성하는 특집 연재물을 싣는다. 새로 발굴된 800매 가량의 광주 관련 미 비밀문서 가운데 가려 뽑은 1차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초기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의 오판, 5·18을 전후한 미국의 침묵과 분노, 진압군 특전사 병력의 이동 상황, 12·12로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 신군부와의 세(勢) 겨루기, 정보 공백 상태에서 판단마저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글라이스틴 대사가 ‘가장 균형 잡힌 광주 보고’라고 평가한 광주 체류 미 선교사의 현장보고 등이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첫 회는 ‘글라이스틴의 오판’ 편이다. 집필을 맡은 KISON의 이흥환 편집위원은 ‘미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2002년)을 발간한 바 있다(편집자).》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24년이 지난 1980년 5월 광주의 참극을 되짚어본다. 1980년 봄, 미국의 역할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미국이 한국 국내문제라는 이유로 아무리 거리를 두려고 해도 미국과 광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좁혀질 수 없다. 오히려 이 거리를 제대로 측정하지 않고서는 1980년 봄은 물론 광주 비극의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기 어렵다.

5월18일 광주에서 시작된 평화로운 시위가 유혈 참극으로 막을 내리는 과정에서 미국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미국은 무슨 일을 했고 무슨 일을 하지 않았나? 이는 미국이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한 물음일 뿐이다. 미국이 마땅히 취했어야 할 행동이나 취하지 말았어야 할 태도에 대해 묻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1988년 여름 한국 국회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해 겨울 외무부를 통해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 대사와 존 위컴 전 미 8군사령관에게 광주특위 출석 증언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해 12월2일 미 국무부는 이들의 특위 출석 증언을 거부하고 성명서로 답변을 대체했다. 국무부가 ‘배경 설명(Background er)’이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이 성명서와 이를 보충해 발간한 ‘광주 백서’가 지금까지 미 행정부가 보여준 공식 입장의 전부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장군이 각각 자신들의 저서에서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고 ‘광주사태’라는 용어 사용이 신군부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이 글에서는 1980년 5월 당시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광주사태’라는 표현을 쓴다 해서 과거사를 잘못 인식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해 ‘광주사태’로 표기함 : 필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국무부의 공식 문건인 ‘배경 설명’ 및 ‘광주 백서’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일부 민감한 부분은 사용한 어휘까지 똑같다.



미 정부 입장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귀한 기록을 남긴 글라이스틴 대사나 위컴 장군도 하고 싶었던 말은 하되 불필요한 ‘잡음’을 일으킬 만한 구석은 피해갔다. 그들의 글은 국무부의 ‘배경 설명’이나 ‘광주 백서’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서울은 예전처럼 조용하다’

개인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게 마련인 관련 당사자들의 증언만으로는 광주의 진실을 드러내기에 한계가 많다. 당시 상황을 기록해놓은 미 비밀문서들은 왜 이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수단들 가운데 하나다. 주한 미 대사관과 워싱턴의 국무부 사이에 오간 비밀 전문, 국방정보국(DIA) 보고서 및 백악관 상황실의 회의록 등을 통해 피비린내 나는 한국 현대사에 한미관계가 어떤 모습으로 삽입되어 있는지 들추어본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99년에 발간된 ‘뒤얽힌 관계, 영향력의 한계(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라는 저서에서 광주사태를 ‘한국에 영원한 상처를 남긴 사건으로, 한국전 이후 한국사에서 평화로운 시기에 발생한 가장 심각했던 위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상당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표현이다. 사태 발생의 주체,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언급은 모두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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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흥환 美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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