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옥주씨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92년이었다. 다른 위안부가 모두 그랬듯 문씨도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받은 돈을 ‘군사우편저금’ 형식으로 일본 우정성에 강제 예치해야 했다. 광복이 된 뒤에도 일본 정부는 이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1992년 문씨는 일본 정부에 자신의 군사우편저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를 계기로 일본 정부는 태평양전쟁 당시 군인, 군속으로 일한 한국인들이 우정성 군사우편저금에 예치한 뒤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임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부인하면서도 유엔 인권위원회가 일본 정부의 범죄인정과 법적배상을 권고하자 피해자에게 1인당 200만엔의 보상금을 주는 ‘아시아평화국민기금’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정부 차원의 보상이 아닌, 민간기금으로 피해를 보상하는 것으로 책임회피라는 비판이 일었다. 문옥주씨는 이 기금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아시아 평화기금 안 받겠다”
1996년 9월 기자는 문옥주씨를 만난 적이 있다.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던 문씨는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생전에 부모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는데 추석에 차례도 지내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해 차례상을 차려줬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문씨는 숨졌다. 그의 미불(未拂) 임금은 지금도 일본 우정성에 그대로 남아 있다.
엄연히 자기 명의의 계좌에 예치돼 있는 그 돈을 문씨는 돌려받고 싶어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가여운 여인의 손때 묻은 돈을 움켜쥔 채 끝내 내놓지 않았다.
“일본을 ‘문화국가’로 인정못한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양순임 회장은 “일본을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자본주의국가’로, 보편적 양심을 가진 ‘문화국가’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장면 2 : 충남 논산 출신인 여운택은 20세 되던 해인 1943년 9월 ‘평양일보’에 난 광고를 봤다. (주)일본제철이 오사카 제철소에서 일할 근로자 100명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우도 좋고, 기술자 자격도 주는 데다 2년만 일하면 한국 황해도나 함경북도 청진의 제출소에서 지도원 자격으로 일할 수 있게 해준다는 조건이었다.
일자리를 찾던 여씨는 현해탄을 건넜다. 그러나 오사카 제철소에서의 생활은 광고와 딴판이었다. 임금은 공탁금으로 강제 예치됐다. 기숙사는 쇠창살이 설치된 감옥이었다.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강제노역이 이어졌다.
여씨는 광복과 함께 귀국했으나 강제 예치된 공탁금은 받지 못했다. 여씨처럼 일본의 민간기업에서 노역을 한 사람은 후생연금에 자동 가입된다. 후생연금은 한국의 국민연금과 비슷한 개념으로 근로자의 임금에서 매월 일정액을 공제해 적립하는 돈이다. 퇴직시 일시불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후생연금 역시 받지 못했다. 여씨가 받아야 할 임금은 당시 돈으로 495엔52전, 후생연금은 316엔이었다.
여씨는 미지급 임금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일본 재판소에 냈으나 패소했다. 그러자 여씨는 이번엔 후생연금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다시 제기했다. 2004년 11월17일 일본 재판소는 “일본 정부는 여씨에게 후생연금 316엔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위의 두 사례는 한일협정 문서 공개로 불붙기 시작한 ‘개인 재산 청구권’ 문제의 핵심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태평양전쟁 때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군인, 군속, 노무자로 끌려가 복무했다. 한일협정 문서엔 이들 강제 징병·징용자들의 수가 103만2684명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일부 시민단체나 학자들은 150만에서 800만명(당시 한국 인구의 3분의 1)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한일협정에 기록된 징병·징용자들의 수는 일본 정부가 관련 자료를 내놓지 않은 가운데 정확한 실태조사 없이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들 징병·징용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임금 및 후생연금을 공탁금으로 일본 정부에 예치했으나 해방 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단, 후생연금은 노무자에게만 해당된다. 징병·징용자들은 지금까지 주로 임금 공탁금에 대해 반환을 요구했다. 한 명 또는 수 명 단위로 일본 지방 재판소에 소송을 내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