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부미방 사건과 이회창 문부식 김현장의 기묘한 인연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des@donga.com

    입력2005-04-06 15: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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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와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 얼핏 그다지 인연이 없어 보이는 인물과 사건이다. 그러나 양자는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이총재는 미문화원방화사건의 대법원 상고심 판결에 참여한 대법관이었다. 1982∼1983년 봄 이 사건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피고인으로, 검사로, 변호인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19년이 흐른 오늘, 당시의 관계자들은 다시 역사의 한복판에서 새로운 갈등관계로 만나고 있다. 1982년 초봄, 부산의 중심가를 뒤흔든 폭발음과 함께 시작돼 어지럽게 뒤섞여온 우리 현대사의 인맥군상을 추적해보았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1983년 3월8일 선고된 부산미문화원방화(부미방)사건 대법원 판결문(140쪽 참조)을 입수했다. 판결문은 첫머리에 판시사항, 판결요지, 참조조문, 참조판례 등이 기재돼 있었다. 본문격인 판시이유에는 ‘부미방’ 사건 당시의 사건정황과 피고인들의 개별적인 주장이 나열된 뒤 이에 대한 원심판결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논리들이 치밀하게 구성돼 있었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맺음말에 이어 마지막에 적혀 있는 대법원 대법관들의 이름. ‘대법관 이일규(재판장), 이성렬, 전상석, 이회창’.

    속사정이야 어떻든 이총재가 1980년대 초반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대법원 상고심 재판관이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그런데 판결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뜻밖에도 낯익은 이름들을 확인할 수 있다. 피고인들의 변호인으로 나선 이돈명 홍성우 황인철 김광일 이흥록 변호사, 또 피고의 한 사람으로 1, 2심 재판정에 섰던 이창복씨 등등. 이 가운데 사형제도반대 운동가로 유명한 황인철 변호사만 작고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 한켠에서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질문 하나. 도대체 ‘부미방’은 어떤 사건이었기에 당시의 명망가들이 총출동해 이렇듯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올린 것일까.

    사건 당시에도 그랬지만 부미방 사건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엇갈린다. 운동권 인사들은 부미방 사건을 “1980년대 초반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선명한 선도투쟁이요, 80년대 반미투쟁의 효시”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방화 당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점 때문에 방법상 지나친 테러였다는 비판도 ‘낙인’처럼 늘 따라다닌다.

    “200% 목표를 달성했다”



    사건에 대한 언론의 반응도 뜨거웠다. 국내 언론은 사건이 발생하고, 범인들이 검거되고, 사형이란 극형에 처해지기까지 이 사건보도에 총력을 쏟았다.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국시(國是)논쟁이 전개되기도 했다. 1982년 3월21일자 ‘조선일보’에는 ‘누구를 위한 방화인가-미문화원 소실과 민족적 수치’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양국간의 안보협력체제는 공고하고 긴밀한 형편이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더욱더 한미관계를 이간하려 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망상과 다름없다”며 당시까지는 누군지도 모르는 범인들의 행동을 비난했다.

    ‘동아일보’도 3월20일자에 ‘부산 미문화원 방화-어떤 경우에도 테러는 용납될 수 없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한미간의 오랜 우호관계가 이와 같은 일부 분자들의 폭력행위로 손상되지는 않을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는 내용이었다.

    ‘중앙일보’의 사설은 요즘 다시 읽어봐도 가히 충격적이다. 제목부터가 ‘반공(反共)과 친미(親美)는 헌법 이상의 국민적 합의’라는 것이다. 언론의 ‘호들갑’도 어느 정도 작용했지만 당시 부미방을 바라보는 국내외 시선이 얼마나 차가웠는지를 짐작케 하는 사례들이다.

    경찰도 사건 초기 전국에 걸쳐 수사본부를 설치해 범인검거에 나서는 등 물량을 총동원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이 잡듯 범인 검거에 나선 탓에 수년간 미제사건으로 방치돼 있던 다른 시국사건 관련자들이 경찰의 단속망에 걸려들어 옥고를 치르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한때 경찰은 당시 다른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박계동씨가 용의자라며 그의 사진을 수배전단 앞자리에 올려놓기도 했다.

    세계 언론도 한국의 남단 항구도시에서 벌어진 대담한 반미투쟁에 주목했다. 오죽했으면 범인 검거 이후 검사들마저 문부식 등 방화 주동자들에게 “너희 목표는 200% 달성됐다”고 평가를 했을까.

    부미방 이후 19년이 흐른 지금, 당시의 인간군상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변신했다. 피고인 변호사 검사 판사로 사건에 관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상상 밖의 정치적 선택을 해 주변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초지일관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과거의 적이 동지가 되고 과거 ‘대립각’을 세우던 당사자들이 한 정치세력에 포함돼 협조하는 사례도 목격된다.

    이런 다양한 군상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시계바늘을 1982년 3월 어느 날로 돌려볼 필요가 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지만 사건의 전과정에 소요된 시간은 불과 20여 분, 그 20여 분을 들여다봐야만 사건을 이해하고 그 후 이 사건 참여자들의 변신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2년 3월18일 오후 2시, 20대 초반의 여성 두 명이 부산시 대청동 부산미국문화원 건물 정문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또 다른 20대 초반의 여성 두 명이 각각 양손에 물통을 들고 문화원 정문 앞으로 접근했다. 물통에 들어 있는 것은 휘발유였다.

    휘발유통을 든 두 여인을 발견한 정문 옆의 두 여인은 문화원의 두꺼운 출입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곧이어 휘발유통을 든 여인들은 문화원 실내의 복도바닥에 휘발유를 쏟아붓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문을 열어준 두 여인은 곧바로 주머니에서 가스라이터와 나무젓가락에 알코올을 적신 솜뭉치를 매단 ‘방화봉’을 꺼내들어 불을 붙인 뒤 휘발유가 쏟아진 바닥에 던졌다.

    잠시 후 ‘펑’하는 폭발음과 함께 미문화원은 불길에 휩싸였다. 네 사람의 여성은 총총히 미문화원을 빠져나와 대신동 방향으로 사라졌다.

    미문화원에 불길이 치솟은 직후 미문화원으로부터 800m 가량 떨어진 국도극장 3층 복도 끝 창문이 열리면서 200여 장의 유인물이 거리로 쏟아졌다.

    유인물의 제목은 ‘살인마 전두환 북침준비 완료’였고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광주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 “최후발악으로 전두환 정권은 무기를 사들여 북침준비를 이미 완료하고 다시 동족상잔을 꿈꾸고 있다”는 등 9개의 구호가 거칠게 인쇄돼 있었다.

    문화원 건물에 인접한 유나백화점 6층에서도 또 다른 유인물이 허공을 가르며 뿌려졌다. 이 유인물에는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한국에서 물러가라’는 제목으로 미국의 한국 군사정권 지지를 비난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지금 들여다보면 다소 유치하기조차 한 주장도 여과없이 실려 있지만, 사건 당시만 해도 이런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받아든 시민들은 한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미문화원이 화염에 휩싸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소방차가 현장에 도착했다. 검은 화염에 휩싸인 건물에 소방관들이 물을 끼얹는 장면은 그 후 며칠간 텔레비전 화면을 장악했다. 뉴스마다 사건 관련 보도가 첫머리를 장식했다. 한국뿐 아니라 해외 언론에도 불타는 미문화원은 톱뉴스로 보도됐다.

    미문화원이 화염에 휩싸인 그 순간 미문화원 맞은편 건물 2층 창가에는 작달막한 키에 금테 안경을 낀 장발의 청년이 이 장면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이 청년이 바로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총지휘자 문부식, 사건 당시 23세의 고신대 신학과 4학년 휴학생이었다.

    미문화원에 휘발유가 든 물통을 들고 들어간 두 여인은 김은숙과 이미옥, 두 사람은 각각 고신대 교육학과와 고신대 의대에 재학중인 대학생이었다. 문을 열어주고 방화봉을 던진 두 여인은 최인순과 김지희로, 부산대 약대와 부산여대에 재학중인 학생들이었다.

    이들 외에 문부식과 함께 현장 근처까지 택시로 휘발유를 운반해준 뒤 유인물을 살포한 류승열은 부산대 학생이었고, 국도극장에서 유인물을 살포한 최충언과 박원식 역시 대학생들이었다.

    불타는 미문화원은 그날 이후 언론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연일 수사속보가 보도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범인들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문화원 방화 현장에 있던 범인들이 여학생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저놈들을 죽여라”

    사건발생 19일이 지난 1982년 4월5일 문부식 등 방화사건 관련 대학생들이 다시 미문화원 주변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남들 눈을 피해서가 아니라 50여 명의 경찰에 둘러싸여 포승줄에 묶인 채였다.

    검찰의 지휘하에 진행된 현장검증은 이날 아침 8시 반에 시작됐다. 식목일인데도 이들을 지켜보기 위해 2000여명의 부산시민이 미문화원 주변에 몰려들어 이 사건에 쏠린 국민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날 현장검증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부산지검 김두수 부장검사, 최병국, 장창호, 고영우 검사 등 네 명의 공안부 검사가 지휘하는 가운데 실시된 현장검증은 주범인 문부식이 휘발유통을 들고 택시에서 내리는 미문화원 근처 중앙성당 옆에서부터 시작됐다.

    양손에 수갑을 찬 채 두 경찰관의 호송 아래 경찰기동대 버스에 실려 현장에 도착한 문부식은 검거 당시 입고 있던 베이지색 골덴 잠바와 청바지 차림에 검은색 고무신을 신고 있었으며 곱슬머리 텁수룩한 모습에 얼굴은 표정을 잃었으나 고개는 꼿꼿이 세우고 범행을 재연했다.

    검증장면을 구경하러 몰려온 2000여 명의 시민들은 범인들이 물통을 들고 문화원 앞 큰길가에 나타나는 순간 ‘저놈들을 죽여라’고 고함을 질렀으며, 국도극장 3층 복도 끝 창문에서 최충언 등이 100여 장의 현장검증용 불온전단을 길바닥으로 떨어뜨리자 1000여 명의 구경꾼들이 입에선 ‘와’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저런 죽일 놈들’하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중략)

    이미옥과 김은숙은 양손에 휘발유가 담긴 물통 두 개씩을 들고 지하실을 빠져 나와 미문화원 뒤쪽 중앙교회를 돌아 대청로를 통해 문화원 정문으로 들어오는 장면까지 순순히 재연했다. 미문화원에 이르러 김과 이는 미리 문화원 안에 들어가 있던 김지희와 최인순이 밖으로 나오면서 문을 열어주자 휘발유를 붓고 뒤이어 김과 최가 작은 솜사탕 모양의 솜뭉치에 불을 붙여 던지는 장면을 태연히 재연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방화로 검게 탄 문화원 내부 곳곳을 쳐다보기도 했다.”

    당시 신문의 보도는 다소 객관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이 사건을 보는 국민의 여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현장검증 과정과 관련, 문부식씨는 “현장검증 현장에서 ‘저놈들 죽여라’ 하는 고함소리를 듣는 순간 알몸에 돌멩이를 맞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방화사건 직후 부산미문화원 방화를 사주한 혐의를 받던 김현장 문부식 등을 숨겨준 원주 천주교교육원 최기식 신부 등도 잇따라 구속됐다. 천주교 신부마저 사건에 연루됐다는 보도가 나가자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천주교 사제들은 최신부를 구속한 정부를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그리고 치열한 법정공방이 시작됐다. 법정에서는 피고인들이 수사과정에 가혹행위를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를 두고 검찰과 변호인 사이에 치열한 논란이 벌어졌다.

    1982년 12월13일 대구고검은 이번 사건의 주모자인 문부식씨와 김현장씨 등 두 피고인에게 1심 판결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나머지 방화 가담자와, 사건 직후 문부식씨 등을 은닉해준 혐의로 구속된 김영애, 문길환, 이창복씨, 최기식 신부 등도 각각 실형을 선고받았다.

    1983년 3월, 이 사건은 대법원의 최종 확정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법원 판결의 쟁점은 고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두 사람이 과연 사형판결을 확정받을 것인가였다.

    운명의 3월8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한다’며 고법의 판결을 확정했다. 문부식김현장 두 사람은 사형, 나머지 피고인들도 고등법원의 판결대로 수형 생활을 해야 할 처지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1983년 3월15일 두 사형수는 한밤중에 교도소 당직과장으로부터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무기로 감형한다”는 통보를 받는다.

    미문화원 방화와 검거, 그리고 법정투쟁에서 무기감형까지 두 사람의 목숨이 오락가락한 1년여의 유전은 여기서 멈춘다. 화염에 그을린 부산 미문화원 건물이 새단장으로 상처를 치유한 것처럼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격동의 80년대는 정신없이 흘러갔다.

    세월이 흘러 2001년 현재, 당시 사건 관련자들 가운데 감옥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없다. 광주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았고, 부미방 관련자들의 주장처럼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광주의 또 다른 피해자였던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어느덧 광주 문제는 ‘중심’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면 80년 광주 이후 최대의 국가적 화제였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도 여기서 끝난 것일까. 법적인 절차는 끝났지만 이 사건이 남긴 흔적들은 적지 않다. 사건의 발생과 수사과정, 그리고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재판의 전과정에 많은 사람이 이름을 남겼고 그들은 대부분 지금도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2년 일년 내내 진행된 방화사건 재판을 어느 자리에서 관전했느냐에 따라 당사자들의 현재 정치적 입지도 제각각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사람들

    뭐니뭐니해도 관심이 가는 인물은 문부식 김현장씨 등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건의 ‘주범’들이다. 또 이들과 함께 방화사건을 주도했던 나머지 사람들의 변화도 관심사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 대부분은 그날의 일을 가슴에 묻은 채 일상으로 돌아가 있다. 사건 당시 의대생이었던 최충언, 이미옥씨는 출소 후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한 뒤 모두 의사라는 처음의 꿈을 이뤘다.

    최인순씨는 약대를 졸업한 뒤 최근까지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회장으로 사회활동을 해왔다. 김은숙씨는 소설가로 데뷔해 장편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뜬다’를 시작으로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김지희씨와 부미방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방화예비음모로 구속됐던 박정미씨는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다. 박원석씨는 서울에서 개인사업을, 류승열씨는 무역업자로 각각 변신해 생업의 현장을 누비고 있다.

    문부식 김현장씨를 숨겨줘 구속된 최기식 신부는 원주에서 천주교사회복지재단의 지도신부로 지내고 있으며 최신부와 함께 범인들을 은닉한 혐의로 옥고를 치렀던 문길환씨는 지금도 최신부를 도와 원주교구 일을 보고 있다. 김영애씨는 김현장씨가 감옥에 있을 때인 1984년 그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있다. 김씨 부부는 광주에서 케이터링 사업을 하고 있다.

    문부식씨와 김현장씨를 연결해줬던 허진수씨는 지방선거 때 경남도의원에 도전해 당선된 바 있으며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우리야 이 사건으로 이름 석자 얻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정말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이름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문부식씨의 한숨 섞인 토로가 아니더라도 부미방 핵심 가담자들은 그 사건의 사회적 파장과 비교해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쉽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는 두 사형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부식씨는 1988년 12월 대통령 특사로 6년9개월 만에 풀려났으나 1989년 7월 한미문제연구소 설립과 관련,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다시 구속돼 1년6개월간 복역했다. 지금은 계간 ‘당대비평’의 주간 겸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씨는 사회활동 전면에 나서기보다 잡지를 만들고 글을 쓰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김현장씨는 1988년 대통령 특사로 풀려난 뒤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 전민련 국제협력위원장을 지내면서 1989년 5월 조선대생 이철규군 변사사건과 관련, 국가보안법상의 국가기밀누설혐의로 구속돼 7년형을 선고받는 등 그를 둘러싼 불운은 1990년대까지 그를 괴롭혔다. 1993년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난 뒤에는 줄곧 5·18관련단체에서 일하다가 1997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일본 유학을 떠났다. 지금은 도쿄대 연구원으로 지내고 있다.

    이들 부미방 관련자들이 대부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 반면, 법정에서 이 사건을 두고 공방을 벌였던 법조인들은 현재 대부분 정치권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이회창 총재다.

    이총재는 두 차례에 걸쳐 대법관을 지냈다. 첫 번째는 1981년 4월부터 1986년 4월까지였다. 두 번째는 1988년 7월부터 1993년 2월까지였는데 첫 번째 대법관 시절 부미방 사건의 상고심 판사로 판결에 참여했다.

    이 사건 변호인단은 사건 당시 “사상 가장 막강한 변호인단”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쟁쟁했다. 대표 변호사로 재판을 총지휘한 사람은 이돈명 변호사였다. 그리고 홍성우 황인철 김광일 이흥록 이순백 조성해 유봉묵 정차두 변호사 등 내로라하는 재야법조계의 명망가들이 이 재판에 힘을 보탰다. 이들 외에 당시 35세의 청년이었던 노무현 변호사도 부산에서 있었던 1심 재판 때 변호인단의 일원으로 맹활약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부미방 사건에 힘을 모았던 변호사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하며 정치권 전면에 모습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줄곧 재야 법조인으로 남아 있던 홍성우 변호사는 1995년 개혁신당 공동대표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 후 개혁신당과 민주당의 합당, 다시 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합당 등 정치적 이합집산을 거치면서 지난 1997년 한나라당 당무위원을 끝으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일선을 떠났지만 정가에서는 한나라당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홍변호사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지난해 4·13총선 때 홍변호사는 당외 공천심사위원으로 재야 출신 젊은 인사들을 적극 추천해 공천받게 했다. 한나라당이 그나마 개혁성향을 갖추는 데는 홍변호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추천한 후보들이 수도권에서 선전 했고 이들은 지금 당내에서 때로는 이총재를, 때로는 당의 보수노선을 비판하는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홍변호사는 경기고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고교, 대학 후배기도 하다. 정가에서는 홍변호사가 이총재에게는 정치 이외의 문제를 두고도 말이 통하는 몇 안 되는 가까운 인물로 평가한다.

    악명 높은 최병국 검사

    노무현 변호사는 부미방 재판 시절 치열한 법정다툼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부산에서 활동하던 탓에 노변호사는 부산지법의 1심 재판에만 관여했는데 검사들과 맞고함을 지르며 싸운 것은 물론, 판사에게도 따끔한 말을 주저없이 했다고 한다. 김현장씨는 자신의 회고록 ‘빈첸시오, 살아서 증언하라’에서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허진수 김화석을 변호하고 나선 노무현 변호사는 35세의 나이에 기라성 같은 선배 변호인들 속에 끼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변호인들의 반론에 무슨 불만이 그리 많은지 찡그리고 있는 판사를 향해 따끔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의 조상 중에 벼슬길에 올랐던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할아버님들보다는 옳은 말을 하시다가 귀양살이로 일생을 보낸 할아버님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존경심으로 흠모하고 있습니다. 본 사건의 성격상 심리하기에 벅차실 줄 믿습니다만, 후손들 손가락질보다는 칭송과 존경으로 우러러볼 수 있는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이때 부장판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노무현 변호사는 최병국 검사와도 법정에서 여러 차례 충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때로는 고성과 험한 말이 오가는 등 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도 있었다고 한다.

    변호인들 가운데 김광일 노무현씨는 그후 1988년 총선에서 야당 의원으로 당선,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현재 노무현씨는 민주당 상임고문으로, 김광일씨는 YS정권 시절 청와대비서실장을 거쳐 최근까지 민국당 최고위원으로 정치일선에서 활동했다.

    세계적 뉴스거리였던 만큼, 부미방 사건을 지휘한 검사 역시 당시로는 공안분야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포진했다. 공안부장 김두수 검사를 필두로 최병국 장창호 고영우 이영재 신광옥 검사 등이 이 사건을 맡아 조사했다.

    지난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으로 울산 남구에 출마해 국회에 진출한 최병국 의원이 공안검사로서 그 이름을 널리 알린 것도 이 사건이었다. 최검사는 문부식 김현장 김은숙씨 등 핵심 관련자들의 조사를 담당한 부미방 공안팀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그래서 문부식씨와 김현장씨도 최병국 검사와의 치열했던 논쟁을 기억하고 있다. 최검사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는 최근 문·김씨 등이 쓴 글에도 최검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다.

    문부식씨는 ‘당대비평’ 1999년 겨울호에 기고한 자신의 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에서 다음과 같이 1982년에 만난 최검사를 회고했다.

    “1995년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으로 5공 수사에 일조했던 최병국. 1982년 당시 부산지검 공안검사였던 그는 내가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구속돼 조사받는 과정에서 ‘전두환정권은 군사파쇼다’라고 말하자 ‘너는 왜 파쇼를 싫어하니? 나는 파쇼가 좋은데’하며 능청을 부리던 자다.”

    문씨는 “최검사와는 그 뒤로도 악연이 이어졌는데 1989년 한미문제연구소 사건으로 구속돼 검찰조사를 받을 때 그 사건 담당 부장검사가 바로 최병국 검사였다”고 말했다.

    “검찰 조사를 받으러 검사방에 들어섰는데 젊은 검사가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더라구요. 검사 말이 ‘우리 부장이 당신을 보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부장검사 방에 들어섰더니 검사석에 최병국 검사가 앉아 있는 겁니다. 당시 최검사는 내게로 와서는 손을 잡으면서 ‘왜 또 들어왔어’ 하더군요. 솔직히 왜 다시 들어왔는지는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지만, 그 말을 하는 최검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김현장씨도 최검사를 독특한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회고록 ‘빈첸시오…’에 등장하는 최검사에 대한 기억.

    “오후 늦게서야 검사실로 호송되었다. 내가 검사실에 첫발을 들여놓자 건너편에 앉아 있던 검사양반이 첫마디를 던졌다.

    ‘혁명가가 들어온다.’

    나를 맞이하는 비아냥거림이었다.(중략) 큰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자개 명판에는 검사 최병국이라고 쓰여 있었다. 검사라는 선입견에서가 아니라 첫인상이 도무지 남에게 호감을 주고 살아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중략) 최검사의 비아냥거림에 기분이 상한 내가 말 한마디 뻥긋하지 않은 채로 앉아 있자 최검사는 다시 내 속을 휘저었다.

    ‘아니 아직도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구나, 그자? 김현장이가 머리가 좋은 줄 안다마는…내도 말이다. 고등고시 패스한 머리 아이가.’”

    또 한사람 눈길을 끄는 인물이 신광옥 검사였다. 신검사는 사건 당시 마약사범 단속이 특기인 특수부 검사였으나 공안검사들의 일손이 모자라 특별 차출돼 수사에 참여했다. 부미방 사건 1심 재판이 끝난 뒤 서울지검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후 승승장구, 검찰내 요직을 거친 뒤 지난해 1월부터는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부미방 사건 조사 당시 신검사는 공안부 소속 검사들과 달리 비교적 피고인들에게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 호감을 샀던 것으로 전해진다.

    같은 부미방 담당 검사였지만 울산출신인 최검사가 야당인 한나라당을 택한 것과 달리 광주출신인 신검사는 현정권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하고 있다.

    이창복씨는 카톨릭신자로 역시 카톨릭 신자인 김현장씨의 대부다. 이런 끈끈한 인연 탓에 사건 발생 직후 김현장씨의 은닉처를 알아보는 등 적극적인 범인 은닉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창복씨는 지난해 4·13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강원도 원주에서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피고인 가운데 유일하게 현역정치인이 됐다. 이창복씨의 원내진입으로 당시 사건 재판 관련자 가운데 원내 인사는 이회창 총재, 최병국, 이창복 의원 등 세사람이 됐다.

    그런데 이렇게 얽히고 설킨 관계들 가운데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이회창 총재와 김현장씨의 별난 인연이다.

    지난 1997년 12월 중순, 대통령 선거를 1주일 앞둔 어느 날 김현장씨가 돌연 시사주간지 인터뷰 기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의 제목은 ‘그 분만이 지역감정 극복할 대안’. 인터뷰에서 김씨는 “지금은 지역감정으로 선거를 치를 때가 아니다. 완벽한 카드는 아니지만 세 분(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세 후보) 가운데서는 이회창 후보가 차선으로 적임자”라고 평가했다.

    김씨는 “이(회창)후보가 내게 준 것이라고는 ‘사약 사발’과 10여 년 옥살이를 하게 한 인연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국가안정이 절대 필요한 때입니다. 이후보가 그나마 지역감정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자 주변에 과거 국가위기를 극복한 현실적인 참모진이 포진해 있어 난국을 헤쳐나갈 적임자라는 게 제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김씨의 주장은 선거 막판 난무하는 보도에 묻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사형을 확정지은 대법원 판결에 참여한 전직 대법관을 지지하고 나선 김씨의 행동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전남 강진 출신인 김씨가 김대중 후보가 아닌 다른 선택을 한 것에 대해 광주지역에서는 비난여론이 일기도 했다.

    문부식과 김현장의 다른 선택

    김현장씨의 적극적인 이총재 지지 입장 표명과 달리, 또 다른 사형수였던 문부식씨는 이총재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편이다. 지난 1987년 대선 때 운동권이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자(비지파)와 사실상 YS를 지지하는 후보 단일화파(후단파)로 나누어졌는데 문씨는 한때 비지파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씨는 “어떤 식으로도 정치적 입장을 밝힌 바 없는데 비지론자로 알려져 곤혹스러웠다”고 말했다.

    김현장 문부식 두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과도 간접적으로 인연이 닿아있는 사람들이다. 부미방 사건이 일어나고 전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게 되면서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던 김대통령도 무기로 감형됐다. 그리고 부미방 사건 재판이 한창이던 1982년 12월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자신의 미국망명에 부미방 사건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을 안 DJ도 미국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부미방 관련자들의 구명운동과 모금활동을 벌였다. 그러니까 당사자들의 뜻과 무관하게 사건을 통해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구해준 관계인 셈이다.

    김영삼 전대통령도 부미방사건을 대선과정에 적절히 활용한 인물이다. 지난 1987년 대선때 지역 유세를 하던 YS는 청주에 들러서 당시 청주교도소에 있던 김현장씨를 거론하며 “청주교도소에 수감된 민주투사 김현장씨도 나를 지지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그런데 대권주자들과의 다양한 인연과 달리 김현장과 문부식 두 사람 사이는 냉랭하기만 하다. 부미방 이후 정견의 차이로 다른 길을 걸어오면서 틈이 벌어졌다는 것. 지금도 두 사람 사이에 꼭 필요한 연락은 제3자를 거쳐서 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부미방 사건 관련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삶을 선택했고, 그 길대로 살아가고 있다. 당시 피고들은 대부분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반면, 법정에서 맞섰던 법조인들은 여당과 야당, 보수와 개혁 등 가까운 정치성향에 따라 선택을 반복했다.

    이렇듯 당사자들이 흩어진 지금, 부미방은 종결된 사건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걸까.

    그렇지 않다는 얘기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당시 부미방의 투사들이 외쳤던 반미구호는 보편화됐을 지언정 주류의 주장으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부미방의 역사적 의미가 격하된 것도 아니다. 아직까지 밑바닥 에서는 그 날의 사건을 두고 갈등과 반목이 계속되고 있다.

    문부식씨는 이와 관련, 일화를 털어놓았다.

    “1998년 초봄 어느 날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부산지역 일간지 기자로부터 전화 인터뷰를 요청 받았습니다. 그 기자 말이 머지않아 부산 미문화원이 한국 정부에 반환될 예정인데 소감이 어떠냐는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어떤 용도로 사용됐으면 좋겠느냐고 묻더군요. 그런데 당시 부산시내 시민단체 등에서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역사박물관을 만들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던 터라 나도 그게 좋겠다고 했죠.

    미문화원이 어떤 건물입니까.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수행하던 동양척식회사의 건물이었다가, 1949년 미국이 인수하여 지난 50년 간 무상으로 사용한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정부에 반환된다는 소식을 들으니 어쨌든 반가웠습니다. 다음날 내 얘기가 실린 신문에는 미문화원을 돌려받는 것을 ‘쾌거’라고 표현했더군요.

    그런데 박물관으로 하자는 내 얘기가 보도된 직후 미문화원 건물 주변에 현수막이 나붙었다고 하더군요. ‘빨갱이들이 불지른 건물을 박물관으로 할 수는 없다’는 그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부미방이 있은 지 20년이 다 돼가지만 그 사건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극과 극인 거죠.”

    아무튼 1년 이상의 논란 끝에 부산시는 지난 4월 다수 시민의 여론에 따라 미문화원 건물을 역사문화관으로 조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부산시는 내년 6월 개관을 목표로 개·보수 작업을 벌이고 있다.

    부미방과 관련, 별도의 기념행사는 없다. 다만 그 사건 관련자들이 자신들의 ‘거사’를 기념해 매년 3월18일 원주 최기식 신부의 교육원에 모여 식사를 함께 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정도다.

    공개적으로 기념하기에는 아직 사건 관련자들의 마음에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부미방 당시 의도하지 않았지만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사망한 대학생 부분. 문부식씨는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방화라는 극한 방식 밖에는 우리의 주장을 펼 방법이 없었는지…. 그런 고민을 안고 살고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 대법관으로 부미방 사건을 이적행위로 규정하고 방화 주범들에게 사형을 확정하는 판결을 내리는 데 참여했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생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총재의 의견을 듣기 위해 신동아(新東亞)는 측근을 통해 당시 판결문과 몇 가지 질문을 담은 질의서를 보내고자 했다. 그런데 처음 이 측근 인사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사건이고 이총재가 대법관으로 내린 판결이 무수히 많은데 그에 대해 일일이 답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판결문에서 유죄판결의 근거로 내세운 국가보안법은 현재 정치권에서 개폐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만큼, 이 사건 판결에 적용된 국보법 제7조 1항에 대한 이총재의 현재 의견이 궁금하다고 하자, 이 측근 인사는 “국가보안법 문제에 관한 한, 법해석의 문제이지 법률의 문제는 아니라는 게 이총재의 변함없는 생각”이라고 일축했다. 나아가 이 인사는 또 “새삼 과거 사건을 거론함으로써 이총재를 ‘보수’ 색깔로 몰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고도 말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이 인사는 다시 전화를 걸어와 이총재의 ‘공식 멘트’임을 강조한 뒤 “이회창 총재는 당시 재판의 재판장도 주심판사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통상 재판의 책임은 재판장이, 재판진행과 판결문 작성은 주심판사가 하는 것이므로 부미방 사건 판결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는 얘기였다.

    한편 문부식씨는 부미방이 ‘현재진행형’인 이유를 부미방 사건 이후 더욱 심각해진 미국에 대한 경제·문화종속 현상에서 찾는다.

    “지난해 9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이 부미방 사건을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방송직후 MBC인터넷 게시판에는 찬반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고 합니다. 아직은 반미투쟁에 대한 이해가 약하다는 것이 드러난 결과였죠. 물론 1982년 우리가 반미투쟁을 시작할 때와 비교하면 시민사회가 성장했고 특히 미국과 경제적 문제로 충돌하는 농민, 일부노동자들 사이에서 반미의식이 확산되기는 했지만 상당수 국민에게 반미는 낯선 구호입니다.”

    문씨는 “IMF 이후 미국중심의 국제금융자본이 밀려들어오면서 우리사회의 미국종속화가 심화되고 있다. 영어공부 열풍이 그렇고 심지어 대중음악의 리듬마저 미국화 하는 분위기”라고 개탄했다.

    문씨 주장대로라면 부미방은 끝나지 않았다.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부미방 투사와 1980년대 운동권 투사들의 증오의 대상이었던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도 자유롭게 살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한편에서는 부미방 재판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화해하고 정치적으로 이합집산하고 있다. 그래서 대다수 국민들의 눈에 부미방은 역사의 사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올해 5월 21주년을 맞은 5·18이 ‘어색한’ 축제로 치뤄진 것처럼 내년 3월 다가올 부미방 20주년도 그렇게 마무리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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