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 장향숙 “天國의 위로보다 현실의 시련이 낫다”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4-04-29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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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물 같이 여린 손, 망가진 하반신. 장향숙 의원의 등장은 정상적인 손과 비틀어진 손, 부자와 빈자, 도시와 시골, 남자와 여자라는 그 멀었던 거리를 축지법 쓰듯 줄여버렸다. 소아마비로 두 돌에 주저앉아 스물둘에 처음 세상 구경을 하고 마흔여섯에 국회의원이 된 불꽃 같은 그 여자.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 장향숙 “天國의 위로보다 현실의 시련이 낫다”
    삶에 등급을 매길 수 있을까. 성공을 숫자로 계량하는 것이 가능할까. 혹 거기 긍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생의 오묘한 켯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가치 단일적이고 경직된 사고의 소유자일 것이다.

    고3 학생들이 받는 수능 성적표도 아닐진대 4000만 중 3%, 혹은 55% 하는 식의 인간 서열화가 도무지 가당키나 한가. 그러나 그렇게 발끈하는 한편으로 우리는 슬며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은 무리를 이루어 사는 종족이고 무리란 서로 경쟁하게 마련이며 경쟁사회에선 개인의 성취를 재빨리 백분율로 환산하는 장치가 은밀히 작동되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 제도교육의 긴 과정을 거쳐 오면서 우리 각자의 뇌에는 그런 자동 채점기가 절로 하나씩 들어박힌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불교의 법화경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은 능동적, 주체적인 자기 선택으로 이 세상에 온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분명한 자기 메시지를 가지고 탄생한다. 그 우주의 메시지를 인간이 가늠해서 순번을 정한다는 것은 얼음으로 뜨거운 물을 젓는 것과 같은 용렬한 짓일 뿐이다….”

    이 반복되는 논의의 끝에 장향숙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이 서 있다.

    최근 나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목격했다. 벚꽃이 난분분한 여의도의 창 너른 찻집 안에서 휠체어를 탄 장향숙 후보가 우연히 은발의 같은 당 소속 김한길 의원과 마주쳤다. 장 후보가 장애인 특유의 나물같이 여린 손을 김 의원에게 당당하게 내밀었다. 그 손을 잡기 위해 김 의원은 깊이 허리를 숙여야 했고 두 사람은 마주 웃으며 악수했다. 알다시피 악수는 서로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드는 동작이다.



    나는 이만치 떨어져서 그 두 사람의 손가락이 포개졌다 떨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의 양 극에 서 있었을 두 사람의 정상적인 손과 비틀어진 손. 부자와 빈자, 도시와 시골, 남자와 여자, 처음 얘기한 대로라면 수능 1등급과 9등급, 그 멀었던 거리가 축지법을 쓰듯, 아코디언을 접듯, 악수를 매개로 나란히 모아지는 모양을 나는 벅찬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흐드러진 벚꽃이 둘의 어깨 위에 환한 후광을 둘러주어 그 장면은 더욱 빛났고 잊혀지지 않았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1번

    부산 여성장애인연대 회장 장향숙이 열린우리당의 중앙위원이 된 건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소외계층과 여성을 대변할 사람으로 장향숙만한 인물이 없다는 평가는 늘 있어왔다. 그러나 여당의 비례대표 1번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번호 배정은 당내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정해진 것이라고 했다.

    장향숙 의원의 등장은 위에 늘어놓은 삶의 등급 운운하는 어정쩡한 질문들을, 우리 안에 숨은 그 해묵은 이중성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말의 유희들을 통쾌하게 깨버렸다. 장향숙과 악수하면서 김 의원의 눈에 떠오르던 모종의 외경, 그 표정이 내게 그날의 풍경을 유독 강렬하게 각인시켰고 또 이런 잡다한 수사를 늘어놓게 하는 이유가 된 것 같다

    비례대표 1번 후보가 된 후 그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지역구 후보의 유세에 당의장과 나란히 선(아니 휠체어를 타고 앉은) 그의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자주 비춰졌다. 이제 그는 카메라 앞에 서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단련이 됐고 숱한 악수에도 익숙해졌다. 손을 들어 여러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포즈도 썩 자연스럽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전국을 뛰어다니는 그를 만나러 숙소로 찾아갔다. 침대만 커다랗고 나머지 공간은 좁은 방이었다. 거기 엎드려 그가 9시 뉴스를 보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모습만 봐서 그의 장애 정도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소아마비를 앓은 것이 한 살 반때였으니 양다리가 제대로 발육하지 못해 몸 안에 어른과 아이가 혼재한 듯한 느낌, 그래서 씩씩하고 당차지만 동시에 소녀 같은 청순감이 풍겼다. 카메라가 잡아내지 못하는 그 청순함으로 인해 그와 이야기하는 동안 내 마음은 시종 향그러웠다.

    밤 깊도록 그는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가며 온갖 이야기를 했다. 장향숙은 달변이었다. 능란한 말솜씨의 달변이 아니라 정확한 단어를 풍부한 비유에 섞어 부드럽게 전달한다는 의미에서의 달변이었다.

    명상, 철학, 역사, 영화 이야기들이 대화 중에 자꾸 튀어나와 시간이 도둑맞은 듯 빨리 흘러갔고 낮에 고단했던 최경숙 실장(오랫동안 그의 곁에서 장애인 인권운동을 함께해 온 건축공학 전공의 지체장애 여성. 논리적이고 명석하고 얼굴이 눈에 띄게 고운 사람이다)은 딸기를 씻어 종이컵에 담아주더니 어느새 풋잠이 들었다.

    이렇게 강행군인데 건강에는 무리가 없나? 비례대표 1번이 된 소감은? 의례적인 질문 몇 마디에 벌써 그의 세계관과 철학이, 그간 다져온 내공의 힘이 환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워낙 내가 깡다구가 있어요. 일부러 건강에 신경 쓰는 건 아닌데 몸이 알아서 조절을 해줘요. 무엇보다 잠을 잘 자는 기술을 익혀둔 게 큰 힘입니다. 차든 비행기든 앉았다 하면 잠이 드는데 한 10분 자고 나면 웬만한 피로는 회복이 되거든요. 그래서 뭐, 체력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활달하고 시원하고 도통 엄살을 부리지 않는다.

    “원래 부산지역 여성장애인 단체장을 오래 했으니 열린우리당 입당이 새삼스러울 건 없었습니다. 여연(여성단체연합)의 최대 화두가 여성의 정치진출이었거든요. 지은희, 한명숙 장관이 다 여연 출신 아닙니까. 이 나라 여성운동사에서 여성장애인연합이 담당한 역할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고, 여성의 정치 진출을 논할 때 소외계층의 대표가 함께 가야 한다는 공감대는 진작부터 형성돼 있었어요. 여연의 이경숙 대표가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장으로 갔으니까 소외계층 대표로 제가 영입대상이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제안을 받았을 때 물론 단숨에 오케이하지는 못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사고형 인간이다. 충분히 생각한 후 자기 확신에 찬 해답이 내려져야 다음 행동을 시작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장애인 필드에 더 남아 있어야 할지 주류무대에 나서야 할지를 여러 번 자신에게 되물었다. ‘단체장은 이제 그만’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마침 신문에 실린 야구선수 베이비 루스의 은퇴선언에 관한 기사를 봤다 .

    “‘나는 2루로 가기 위해 1루를 떠난다’는 그 말이 마치 나를 향한 메시지처럼 들렸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 마음이 머무는 자리는 언제나 필드지만 지금은 2루로 가기 위해 1루를 떠나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변정리를 했지요. 이미 틀이 짜여진 기성정당이었다면 더 오래 고민했을 텐데, 열린우리당이 신생정당이라 아직 조직도 정체성도 굳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함께 만들어갈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나는 인생이 두렵지 않다

    그를 만나러 가기 전 장향숙씨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장문의 자기소개서를 읽었다.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힘찬 글이었다.

    “이제 나는 천당이나 무릉도원 아닌 이 땅에, 이 사회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누가 가져다주지 않았다. 내 자신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때로는 내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내 속에 두려움이 없는 것을 발견한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인생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즉 나는 인생을 믿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내 위치가 또 다른 우리 사회의 딸들과 아들들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내 역사의식(歷史意識)이다.”

    정치입문이 아니라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망가진 하반신으로, 남의 도움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이가, 이력서에 단 한 줄 기록할 학력도 재산도 없는 이가 어떤 경우에도 인생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고 외칠 수 있는 힘, 그 파워의 정체에 대해 묻고 싶었다.

    단련이었던가, 천부적 능력인가, 아니면 독서의 힘인가. 어찌하여 그대는 인생이 두렵지 않은가라고 물었을 때 그가 정확하게 대답했다.

    “큰 산을 여러 개 넘어온 단련 때문이 아니라 서서히 나를 알아가면서 생긴 힘입니다.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어디에선가 온 힘이지요. 그러니 그걸 내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신에게서 주어졌다고 말하는 대신 나는 자연이나 우주라는 말을 쓰기를 더 좋아합니다. 영화 ‘아마데우스’ 보셨지요? 모차르트의 재능을 지켜보는 샬리에르의 절망, 그러나 모차르트의 그 재능이 모차르트 개인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우스울지 모르지만 우주가 그에게 화음을 준 거지요. 자연이 그를 통해 피리를 분 거죠. 인간의 영혼을 울리고 각성하는 음악이 필요해서, 거기서 위안과 안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시공간을 통틀어 수두룩하게 기다리고 있어서, 그렇게 우주에 의해 신임받는 모차르트라는 존재가 나타났던 겁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나 또한 그런 천재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모차르트 같은 천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 여성 장애인들을 위해 내 존재가 쓰여지도록 부름을 받은 겁니다. 교만이 아니라, 그런 걸 알게 되면 두려움이 없어져요. 겁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말도 다 기록해야 한다. 힘차고 결연하고 진정성으로 가득 찬 말들, 어느 정치가가 이렇게 자기 사명에 대해, 어깨에 진 짐에 대해, 정확하고 맹렬하고 확고한 신념과 투지를 가졌던가. 그의 말을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으면 행여 장향숙이 과대망상의 소유자로 전달될까 두렵다. 그의 진심에 주의 깊게 귀기울여야 장향숙의 말이 자신에 대한 과신이나 교만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 장향숙 “天國의 위로보다 현실의 시련이 낫다”

    “이 시대, 여성장애인들을 위해 내 존재가 쓰여지도록 부름을 받은 겁니다.” 지지자들과 만난 장향숙씨.

    “지금까지 여성장애인은 사랑받지 못하면서 살아왔어요. 투자할 가치가 없었던 거지요. 성(性)적으로 상품 가치가 없으니 상품성도 생산성도 떨어지는 그들은 그저 짐짝처럼 뒷방 구석에 밀려나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의 원죄가 되어서 말이지요. 남자는 씨라도 받을 수 있다고 여겨서 그나마 대접을 받았지요. 여성장애인도 교육을 시키면 제 몫이 있다는 것을 사회가 보여줬다면 어느 부모가 제 자식을 버리겠어요. 결국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아니까 팽개치는 거란 말입니다.

    누군들 사랑받고 싶지 않을까요. 평생 사랑이 오기를 기다리지만 매번 비껴가버리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세요. 누구는 너무 많이 받아 차버리기 급급한 사랑을 평생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들을요. 이제까지 여성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대접은 어머니의 한숨과 아버지의 화뿐이었어요. 부모가 전생에 죄가 많아 그렇다는 신화화된 미신과 편견이 언제나 그들을 따라다녔어요. 학대와 은폐와 체념말고 길이 뭐가 있었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엔 등록된 여성장애인만 56만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숨어 사는 사람은 더 많습니다. 그들의 인권을 어디서 찾습니까?”

    열정적으로 얘기하다 말고 그는 비례대표 1번이 되어 얼굴이 알려지고 사람들에 둘러싸여 가장 불편하게 된 것이 “욕을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필요할 때 적절하게 욕을 섞어야 뜻이 제대로, 속시원하게 전달되는데 점잖은 말만을 써야 해서 “씨발” 불편하기 짝없다고 하하하 웃었다. 통 크게 웃긴 하지만 상처와 내성의 그림자가 아프게 깃들인 웃음이었다.

    정치쇼 아닌 진정성의 문제

    “장애인에 대한 이런 태도는 우리 현대사의 불행한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독재가 배제의 논리를 키웠어요. 일제가 한센병 환자들을 소록도에 유폐시킨 것과 같은 논리죠. 생산성이 없는 사람은 한데 모아 폐기하는 겁니다. 독일인이 유대인을 죽인 논리, 그게 바로 배제의 논리 아닙니까. 지금 내가 사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면 국민소득 1만달러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제 세상이 변하고 있어요. 여성장애인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휠체어 밀고 국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이미 변화의 시작 아닙니까.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나오면 재수 없다고 텔레비전 끄던 사람들인데 그보다 더 재수 없는 여자인 내가 국회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쇼가 아니라 진정성입니다.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도 중요하지만 사회의 소수자가, 장애인이, 함께 더불어 잘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약속이라고 봐줬으면 합니다. 그게 내가 비례대표 1번이 된 상징이지요. 난들 이게 선거를 노린 전략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만큼 순진했겠습니까? 이제 날 지켜봐주세요. 얼빵하게 굴면 무섭게 질책을 해주세요. 이것이 내 개인의 능력 때문에 주어진 임무가 아니란 걸 알아요. 수많은 여성장애인이 이 시점에서 나를 쓰기를 원했고 그 지점에 장향숙이라는 사람이 서 있었던 겁니다. 그걸 아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거침없이 터져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 천재’의 여리고 고운 식물성 발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예수의 발을 향유로 닦아주던 사람들의 간절한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듯도 했다.

    장향숙은 올해 마흔여섯. 경북 영주군 평은면의 자그만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5남매 중 셋째였다. 위로 언니가 둘,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었다. 살림은 그저 평범한 농가였지만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집안에 기도와 찬송이 늘 있었다. 병에 걸린 건 두 돌이 채 되기 전이었다. 말과 걸음을 유독 일찍 배웠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제가 일곱 달에 하마 걸었답니다. 하도 작아 마당을 걷고 있으면 솔개가 병아리인 줄 알고 채갈까봐 늘 걱정을 했답니다. 하늘에 솔개가 빙빙 돌면 이웃집 할머니가 ‘숙이 에미야, 솔개 온다. 향숙이 얼른 치워라’ 그랬다고. 그 시골집은 내 영혼에 최고의 자양분이었죠.”

    소아마비였다. 그후 그의 다리는 뇌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돼버렸다. 오른손에도 마비가 왔다. 집안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두 살 아래 남동생이 태어났다. 그 동생이 태어나던 날을 장향숙은 지금 강렬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엄마의 비명 속에 태어난 그 남동생은 셋째누나의 충실한 심부름꾼이 되어줬다. 교과서를 보여주고 만화책을 빌려다주고 덜렁 업고 도랑가까지 옮겨놔줬다.

    “어릴 때 기억이요? 아버지 한숨소리가 생각나요. 자다 깨서 보면 아버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계셨어요.”

    병에 걸린 건 5월이었는데 아버지는 그해가 다 가도록 집안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축담 위에 가마니를 깔고 그대로 쓰러져 주무시곤 했다. 상심을 달랠 길이 없어, 가슴이 너무 타서, 방안에 들어와 잘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답답증이 그만큼 컸던 것을 나중에 어머니에게서 전해 들었다.

    “우스운 애기 해줄까요? 제 남동생은 쌀 여덟 가마니를 주고 독일에서 소아마비 백신을 구해다가 예방주사를 맞혔대요. 우리 아버지가.” 나도 장향숙에게 왼팔의 커다란 우두자국을 내보였다. “순서가 거꾸로 됐네요. 내게는 천연두를 앓다 죽은 오빠가 있었대요. 그래서 우두를 이렇게 요란하게 맞혔다지요.” 지금 천연두와 소아마비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지난 세기의 병이 됐다. 삶과 죽음이, 장애와 비장애가 실은 이처럼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을.

    그는 꽃신이 그렇게 갖고 싶었다. 고무신에 꽃그림이 알록달록 그려진 신발, 하도 조르니 아버지가 장에 가서 사 가지고 오셨다. 물론 신을 수 없는 꽃신이었다. 그걸 언제나 만지작거리며 품에 안고 잤다.

    “부모님이 내게 사주신 처음이자 마지막 신발이었어요. 그걸 꽃 빛깔이 다 바랠 때까지, 신어서 낡는 게 아니라 만져서 낡을 때까지 늘 품에 안고 있었어요.”

    그래도 어린시절은 풍성했다. 방안에 꼼짝 않고 누워 있어도 한번도 심심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그를 보면 곧잘 ‘심심해서 어예겠노?’하며 걱정을 했다. 그게 늘 이상했다. 심심한 게 뭐지, 어른들은 왜 자꾸 날더러 심심하지 않냐고 물어보지?

    하루의 대부분을 문지방을 목침삼아 베고 누워 보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오동나무가, 오른쪽으로 돌리면 뽕나무와 감나무가 보였다. 그 위로 펼쳐진 하늘은 파랑의 원색이었다. 나무 그림자가 마당에 말할 수 없이 황홀한 무늬를 만들었다. 그 무늬는 시간에 따라 자꾸만 변했다.

    “그런데 거기 잠자리와 나비와 벌이 날아와요. 노란색 점이 박힌 커다란 검정호랑나비를 처음 봤을 때의 경이로움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 나비가 사라질 때까지, 내 눈 밖으로 벗어날 때까지, 끝까지 지켜보는 거지요. 그러면서 ‘사념비행’이란 것을 배웠어요.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얼마든지 먼 곳으로, 다른 곳으로 비행할 수 있는 법을….”

    겨울엔 처마까지 눈이 쌓였다. 폭설에 소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안온한 방안에서 듣곤 했다.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부족함이 없었다. 자신의 어린시절에 비춰봐서 그는 조기교육 한답시고 요란을 떠는 것에 절대 반대다.

    “난 교육에서 슈타이너 박사 이론을 철저하게 믿어요. 아이에게 억지로 문자를 가르치는 것은 영혼을 망치는 한 일이라는 거지요. 연극배우 추송웅이 말이 있어요. 당신은 어떻게 그토록 연기를 잘하냐고 기자가 묻자 ‘어려서 하도 못생겼다고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이것저것 공상하며 혼자 노느라고 상상력이 커졌던 겁니다’라고 대답했지요. 아이에게는 영혼의 공간이 필요하지 지식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래야 혼자 상상하고 혼자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아직 어린 애들을 달달 볶아가며 왜들 지랄(앗, 하며 그가 날 향해 활짝 웃었다)을 떠는지 알 수가 없다니깐요.”

    독서 1만권

    여덟 살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문지방을 베고 누워 있었다. 남동생이 가끔 도랑가에 업어다주는 것 외에는 외출도 없었다. 세월은 그냥 흘러갔다. 학교는 4km나 떨어져 있었고 가깝다 해도 거기까지 움직일 방법이 없었다. 다만 동생이 학교에서 받아오는 새 책의 잉크냄새만을 깊이 들이켰다.

    “고립돼 누워 있던 내가 문맹을 면한 건 우연이고 또 행운이었어요.” 예수를 믿었으니 집에 성경책이 있었다. 가족들이 빙 둘러앉아 성경책을 읽었다. 한 구절씩 짚어가며 따라 읽었다. 그러는 동안 절로 글자를 깨쳤다. “우리집은 증조부대부터 기독교 집안이었어요. 안동의 초기 기독교가 영주로 흘러들어왔거든요. 학교는 못 가도 하느님의 말씀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셨죠.”

    글자를 깨쳤어도 교과서 외엔 읽을 책이 마땅치 않았다. 성경만 읽고 또 읽었다.

    “10대에 신구약 성경을 서른 번도 넘게 읽었어요. 그 안에 찬란한 세계 하나가 들어 있었어요. 수많은 은유가 있고 역사가 있고 시가 있고 잠언과 철학이 있고.”

    동생에게 부탁해 학교도서관의 얼마 안 되는 책들은 진작에 독파했다. 한번 읽으면 이야기의 디테일이 머리에 생생하게 각인됐다. 그는 즐겨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읽으면 단 한 줄도 빠뜨리지 않고 동네 애들에게 이야기해주곤 했어요. 첨에 아이들은 기어다닌다고 뱀이니 지렁이니 하며 심술궂게 놀렸지만 곧 이야기를 들으러 우리집으로 몰려왔죠. 그때 난 팔꿈치에 피가 나도록 방안을 기었어요. 내 몸은 방안을 기어다녔지만 내 영혼은 산과 들 그리고 시냇물과 동네 아이들이 말해준 학교 교실과 운동장 속에 있었지요.”

    그리고 주변에서 구해지는 책이란 책-교과서, 동화, 반공도서, 만화책 등-은 모두 읽어대는 잡식성 독서광이 되어갔다. 장향숙의 가족은 그가 열여섯 살 때 부산으로 이사를 한다. 아버지가 농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문지방 베고 누워 지낸 황홀한 시절은 끝이 났다. 영주에 살 때가 황홀했다는 것은 떠나오고 나서야 알게 됐다. 부산의 좁은 집에서는 문지방 너머에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종일 똑같은 시멘트 담벼락뿐이었다.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 장향숙 “天國의 위로보다 현실의 시련이 낫다”

    유세 현장에서 환한 미소로 지지를 부탁하는 장향숙씨(앞줄 왼쪽).

    장향숙의 본격적인 독서는 이때 시작된다. 부산에선 책 구하기가 영주보다 훨씬 쉬웠다. 그의 자기소개서 맨 뒤편에 괄호를 치고 써놓았던 “그 동안 종교, 문학, 철학, 역사, 심리학, 천문학을 중심으로 1만권 가량의 책을 읽었다. 이것은 내게 시간이 많았다는 의미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언제나 책을 끼고 살았다. 그 무렵 코피를 자주 흘렸다. 책에 늘 코피가 묻어 있었다. 피를 흘리며 고개를 드는 순간, 보랏빛으로 아침이 찾아오는 순간을 숱하게 겪었다. 책 안에서 모든 것을 얻고자 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잘되어 원하는 만큼 책을 살 수도 있었다.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나 (책 아닌) 무엇인가가 더 필요했다. 내가 누군지 경험하고 알 수 있는 가족 이외의 환경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비롯해서 부모도 형제들도 내가 방안에 있는 것 이외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내게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해야 한다고 방향을 잡을 수 있는 말을 해주는 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아버지와 형제들은 점점 말이 없고 우울한 나와 말하기를 어려워했고, 어머니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기도하라고만 했다. 가족 이외에 내가 만난 몇 안되는 사람인 교회 분들도 목사님을 비롯하여 모두 똑같은 말만 했다. ‘천당의 위로를 받고 기도하고 찬송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분들의 말대로 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말하는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그분들은 자꾸만 ‘천당의 위로’를 받으라고 하니…. 나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가? 내가 인간이기는 한데 여잔지, 남잔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아무튼 ‘천당의 위로’는 더 이상 내게 진정한 위로가 되지도, 통(通)하지도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책에 빠져들었다. 일종의 도피였고 무엇인가 찾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렇게 6년 동안 밤낮으로 내 손에는 늘 코피가 묻은 책이 들려 있었다. 감옥에 있는 사람처럼 수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중병을 앓은 사람이 생명을 다시 얻은 것처럼 서서히 자존감과 천당의 믿음이 아닌 이 세상에서의 실존의 믿음을 자신 속에서 발견해갔다. 나는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온 것이다. 당시 내가 진정으로 믿었던 것은 내 자신이 아프락사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독서를 통해 아프락사스가 된, 한 번에 그치는 게 아니라 여러 번 의식의 허물을 벗고 또 벗은 장향숙은 그새 스물두 살이 됐다. 우울하고 길었으나 철저히 인식을 위해 바친, ‘영혼의 어두운 방’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6년이 지나갔다. 스물둘의 봄날, 난생 처음으로 그는 집 바깥으로 나섰다.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이 남이 쓰다버린 헌 휠체어 하나를 구해주신 것이다. 몸이 세 개는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것이었지만 크기 따위가 상관일 리 없었다. 눈이 부셨다. 항상 잿빛이라고만 생각했던 햇살이 왜 그렇게 찬란하던지.

    그러나 그에게 더 눈부신 건 그를 동물원의 원숭이 바라보듯 하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당혹과 혐오가 혼합된 그 시선! 그는 그렇게 바깥으로 나온 이후 아무리 햇살과 사람들의 시선이 눈부셔도 다시는 방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에게 필요한 게 바로 그 시선이라는 것도 알았다.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훨체어를 밀어달라고 요구했다. 언제까지나 가족이 밀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또 쓴다.

    “다른 이의 시선을 통해 내가 나를 볼 수 있을 때 내 위치가 사회 속 어느 지점에 놓여 있는 것인지 현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더욱 거리에 있어야 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거리에 있는 것이 곧 열린사회의 척도가 된다. 바깥으로 처음 나왔던 그날부터 나는 항상 거리에 살고 있다고 느낀다. 이 세상으로 하여금 나를 잊지 않도록 다시는 방안으로 돌아가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그 생각의 연장선 위에 지금 비례대표 1번이 놓이게 된 것이다.

    그는 거리에서 처음으로 다른 장애인을 만났다. 무서울 정도의 경악이고 충격이었다.

    “바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었죠. 내 자신을 찾아가는 작업, 그게 장애인 운동이었어요. 영화 ‘엘리펀트맨’을 보세요. 그를 잘 아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가 신사라고 생각하질 않잖아요. 불구란 그런 거예요. 병이 그 사람의 인격과 개성을 빼앗아가버리는. 그러나 그 사람의 본질은 어디가지 않고 오롯하게 그 사람 안에 들어 있거든요. 그런데 거리에서 장애인끼리 부딪치면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아요. 외면하고 지나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의 모습을 마주보기가 괴로운 거지요.”

    오랜 독서로 단련한 사색가답게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장애인은 무얼 의미하지. 단순히 몸이 찌그러진 사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그게 뭐지. 그것을 알고 싶다, 그러나 나 혼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니 다른 장애인들을 만나야겠다.’

    그게 바로 장애인운동의 시작이었다. 다른 장애인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당시 기독교청소년서클 지도교사를 맡고 있었다. 아이들이 순번을 짜서 그의 휠체어를 밀어주러 왔다. 아이들과 얘기하며 거리를 산책하는 것이 행복했다. 이제 장향숙은 문지방을 베고 누운 사람이 아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 두드리면 열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의 정답이다. 해답은 우연처럼 오기도 한다.

    하루는 이웃 성당의 수녀님이 그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자신이 지역의 장애인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모임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참석해줄 수 있겠느냐고. 그는 놀라서 우리 동네에 장애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수녀는 환하게 웃으며 “자매님 집 바로 윗골목 초등학교 앞에도 장애인 부부가 살고, 목욕탕 옆에도 뇌성마비 아가씨가 살고, 성당 건너편 한 집에는 몸이 아주 작은 남자가 포대기에 싸여 눕혀져 있는데 엄마가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말했다.

    더 들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그 모임에 참여했고 수많은 장애인 친구들과 동생들을 만나 함께 모임을 이끌었다. 모임 이름은 ‘사랑의 샘’. 당시 부산의 유명한 장애인모임이었고, 이것이 부산장애인가톨릭선교회의 전신이 됐으며 성분도에서 ‘사랑의 고리’라는 가톨릭 교회내 전국장애인공동체운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그 모임을 통해 그는 많은 것을 배웠다. 진정한 소속감과 보람도 느꼈다. 문맹 친구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장애인 자신들의 이야기로 시화전을 열었고, 여러 방법으로 모금을 해서 어려운 친구들을 도왔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장애인 자조(自助)운동이었고 그 맨 앞엔 언제나 명석하고 힘찬 장향숙이 있었다.

    인생대학에서 만난 장애우들

    그러다 수녀님의 권유로 그는 경기도의 한 장애인직업재활원에 가게 된다. ‘사랑의 샘’ 이상의 경험과 체험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던 시기였고 자신이 정말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를 알고 싶었다. 집을 떠나보고도 싶었다.

    그의 나이 삼십대 초반, 이불과 책 몇 권을 싸서 어머니의 염려하는 눈빛을 뒤로하고 처음으로 집을 훌훌 떠났다. 무학(無學)인 그는 컴퓨터과도 기계설계과도 아니고, 또 몸이 너무 부실하니 도자기과도 아닌, 실을 만지는 직조과에 배정되었다.

    그곳은 그에게 인생대학이었다. 전국에서 몰려온 온갖 유형의 장애인들과 만나는 장(場)이 됐다. 특히 여성장애인들의 수많은 사연을 만났다. 집안에서 폐기되는 그들의 아픔이 장향숙 앞에 처연하게 펼쳐졌다. 앞으로 여성장애인을 위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결심했다. 곁에 잠든 최경숙 실장을 만난 것도 거기서였다.

    그는 서른 넘어 사랑도 경험한다. 그래서 이젠 스스로 연애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에서 진정 자유로워지려면 치열하게 경험을 해봐야 하거든요.” 연애 또한 끝없는 자기응시, 자기분석이었고 벗어날 때도 타인과 나와의 관계라기보다는 자기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더라고 고백한다.

    아기를 가지고 싶지는 않았냐고 물어봤다. 자매애 비슷한 심사에서 나온 질문이었는데 국회의원 되려면 그런 것도 대답해야 하냐고 정색을 한다. 얼른 손을 젓는다. 그럴 리야 없다.

    “내가 냉정하고 단호한 면이 있어서요. 말 나온 김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장애인 딸을 가진 부모들은 일쑤 딸이 연애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해요. 그런데 두려워할 게 아니라 연애하도록 내버려둬야 해요. 상처를 받든 좌절을 하든 자신이 겪어내야 하는 몫이에요.”

    그 상처가 치명적이 될까봐 걱정하는 것이라고 했더니 그는 “세상에 치명적인 상처란 없어요” 한다. “성경에도 그런 말이 나와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은 주어지지 않는다’라고.”

    직업 재활교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예전의 장향숙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울며 반겼으나 이제 가족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곧 수원의 전자부품 업체에 취직한다. S자로 휜 등을 하고 휠체어에 앉아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힘들었으나 노동은 즐거웠다. 석 달 일했다. 한 달 월급 8만원씩 24만원. 그가 최초로 번 현금이었다.

    석 달 후 그는 아쉬움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기분으로 돌아왔다. 다시 책을 들었고 이제는 제법 큰 동호회가 된 ‘사랑의 샘’ 모임에서 봉사하며 방문자가 찾아오면 산책을 나가곤 했다. 변화의 차원은 신이 아니라 바로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다짐하면서 살았다. 그러면서 한줄기 빛을 보았다. 마침내 안개가 걷히듯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깨달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40년 걸렸다

    “마음 한구석에 늘 언제 죽어도 좋다는 체념이 있었어요. 어쩔 수 없는 아웃사이더였던 거지요. 세상을 저만치 밀어놓고 불꽃놀이 바라보듯 살 것인지, 아니면 아무도 내게 일자리를 주지 않고, 오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 사회에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인생을 살 것인지 양자택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 지점까지 오는 데 40년이 걸렸다. 그는 이제 이 땅의 절대다수의 직업 없고 빈곤하고 몸 아픈 여성장애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줄 알게 됐다. 사회에다 당당하게 동화 ‘왕자와 거지’처럼 입장을 바꿔보자고 요구할 줄 알게 되었다. 그는 부산시 장전구의 단칸방에서 혼자 산다. 11평짜리 장애인 임대주택에 입주하지 않았다.

    “그렇게 장애인끼리 ‘게토’를 만들어 고립되어서는 안 되지요. 비닐봉지에 똥오줌을 받아버리는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나는 아파트 입주를 사양했어요. 장애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장애인을 소외시키는 건 장애가 아니라 사회가 우리에게 교육과 직업, 사회활동과 자립생활을 위한 열린 사회를 적극적으로 제공하지 않는 데 있는 겁니다.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와 삶의 주기를 체험하고 공유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고요.”

    그는 이제 휠체어를 밀고 국회로 들어가 장애인 관련 입법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차별금지법, 연금법, 이동권 보장, 자립생활권 문제 전반을. 물론 한꺼번에 다 이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버진 헤어(파마나 염색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장향숙 의원이 저기 훨체어에 앉아서 웃고 있다. 여러 사람을 위해 ‘준비된 천재’라고 스스로의 ‘오메가 포인트’를 정한 채.

    국회의원 된다고 양복 한 벌을 새로 맞췄다. “참배 갈 일이 자꾸 생겨서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안에 이런 맑고 깊은 눈동자가 입성하다니, 그것만으로도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게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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