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세균 대표를 중심으로…”라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훈(遺訓)은 민주당의 ‘포스트 DJ’ 논란에 불을 댕겼다. 포스트 DJ의 재목은 누굴까. 실제로 있을까. 거대한 태양이 사라진 이후 민주당의 운명을 조명해봤다.
박지원 민주당 정책위의장(위), 정세균 민주당 대표.
이를 겨냥해 박 최고위원은 “통합을 하는데 선택과 단계가 있을 수 있느냐. 통합의 대상은 모든 정치세력이 망라돼야 한다”고 공박했다. 그는 또 “분열과 분립은 반드시 공멸한다. 조건 없는 통합을 위해 제3지대에 ‘민주개혁세력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당내에 통합기구를 둘 게 아니라 민주세력이 모두 동참할 수 있도록 당 밖에서 원탁회의를 열어 통합을 논의하자는 주장이다. 이른바 ‘제3지대 창당론’이다.
박 최고위원의 발언이 나오자 정 대표는 “통합은 민주당을 리모델링하는 방향이 돼야 한다. 박 최고위원의 주장이 너무 나가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박 최고위원도 “통합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개혁세력을 한 울타리 안으로 모으기 위해선 우리부터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며 날을 세웠다.
박주선 민주당 최고위원.
정 대표가 확전을 피하는 바람에 최고위원회의에서는 논쟁이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9월3일 당 소속 의원 워크숍에서 통합 문제를 둘러싼 주류-비주류 간 충돌이 다시 불거졌다. 친(親)정동영계인 문학진 의원은 “정 대표가 친노 세력부터 영입하겠다는 단계적 통합을 말했는데, 동시적 대통합이 필요하다. 당론 결정 과정도 투명하지 않고 당직도 대표 친위세력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고 성토했다. 비주류 일각에선 이 시점을 전후해 지도부 교체를 위한 조기 전당대회론을 은근히 흘리고 나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정 대표는 9월4일 김원기 전 국회의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통합과 혁신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민주당 중심의 대통합을 위한 사전 길 닦기 작업이 시작된 셈이다. 우상호 대변인은 “통합과 혁신위원회가 통합·혁신에 관한 주요 방침과 추진 일정 등을 모두 준비하고 집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박주선 최고위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통합과 혁신위원회는 당내의 (외부인사) 영입기구에 불과하다. 무조건 기득권을 포기하고 창당에 버금가는 통합이 이뤄져야 명분이 있다. (지도부와) 일단 접촉해보고 의견을 교환하겠지만 민주개혁세력을 한 울타리 안에 모아 대통합을 논의해야 한다는 소신에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통합한다며 왜 특정인 빼나”
현재 민주당 내부의 대통합 논의는 백가쟁명식이다. 가령, 정 대표가 우선 통합대상으로 꼽고 있는 노 전 대통령 세력 중에서도 ‘친노 신당’ 창당에 부정적인 안희정 최고위원은 민주당과 민주당 밖의 민주개혁세력들이 연대하는 큰 틀의 통합을 주창한다. 민주노동당과의 ‘당 대 당’ 통합도 염두에 둔다. 그는 “시민운동 진영, 풀뿌리 조직인 네티즌, 민주당 밖 참여정부 세력, 노동계 등 민주개혁세력들과 폭넓게 연대해야 한다”며 ‘광폭 통합론’을 제기하고 있다.
정 대표가 부정적인 입장을 거듭 밝힌 정동영 의원 복당 문제도 다시 불거지고 있다. 대통합론과 맞물려 비주류와 호남권 출신 의원들이 다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박주선 최고위원은 “대동단결과 통합을 주장하면서 특정인 복당은 안 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다. 추미애 의원도 “통 크게 받아들이고 평가는 국민에게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고 거들었다. 그러나 호남 출신과 비주류 측은 친노 세력과의 통합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정 대표에게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친노 세력과 다시 하나가 된다면 실패한 열린우리당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로 당내 기득권을 지키려는 모습도 엿보인다. 한 당직자는 “크게 보면 대통합을 위한 공론화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솔직히 당내 각 계파가 동상이몽(同床異夢)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민주당에서 이처럼 대통합론이 화두가 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가 계기가 됐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친노 신당 창당 움직임과 동시에 민주당 밖의 친노 세력과 민주당이 합쳐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통합 논의에 불을 붙인 결정적 사건은 DJ의 서거다. 특히 DJ의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DJ 유훈’을 공식회의 석상에서 전하면서 통합론은 단번에 야권의 최대 내부 현안이 돼버렸다.
박 의장은 김 전 대통령 국장이 끝난 다음날인 8월24일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통령께서는 생전에도 그러하셨지만 저에게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기셔서 한 것이 최후의 말씀인 것 같다”며 운을 뗐다.
“민주당은 정세균 대표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야4당과 단합하라. 모든 민주시민사회와 연합해서 반드시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 문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승리하라는 그런 말씀이 계셨다. 이런 말을 저에게 하신 것이 유언 중에 하나라고 정 대표께 보고했다. 그런 의미에서 국장 중에 민주당사를 경유하시면서 이희호 여사가 하차해 대표께 감사의 말씀과 이런 말을 하기로 했는데, 민주당 의원과 당원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울컥해 눈물이 나서 말씀을 못하고 그냥 승차했다. 그래서 (서울광장) 문화제에 참석해 국민에게 감사와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하신 것이다.”
박 의장은 다음 날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에게 영결식 참석 감사 전화를 하는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전 ‘민주당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민주노동당과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나가야 한다’고 당부하셨다”고 말한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DJ가 ‘민주대연합론’을 처음 강조한 것은 지난해 11월27일 강 대표가 동교동 자택을 방문했을 때다. 박 의장은 이를 다시 강조한 DJ의 마지막 말을 강 대표에게 전한 셈이다.
8월20일 연세세브란스 병원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관식이 진행되는 동안 박지원 의원 등 비서진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포스트 DJ’, 즉 DJ의 정치적 유산을 누가 이어받느냐는 문제로 야권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나온 박 의장의 발언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장 정 대표의 강력한 반대로 민주당 복당 길이 막힌 정동영 의원 측이 발끈했다. 정 의원 지지자 모임인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정통들)’의 홍성룡 대표는 8월27일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정 대표 중심으로 단결하라’는 발언은 박 의장이 지어낸 말일 것이라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김 전 대통령께서 민주개혁진영 단합을 유언으로 남기면서 ‘특정인 중심으로’라는 문구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며 “과대 아전인수 격 해석이거나 민주당 정책위의장 임명에 대한 ‘보은의 선물’로 그런 표현이 나온 것 같아 측은해 보인다”고 거세게 비난했다. (나중에 그는 ‘정통들’ 게시판에 해명 글을 올려 ‘김 전 대통령께서 누가 대표이든 간에 그 대표를 중심으로 민주당이 단결하라는 말을 늘 해왔는데, 미처 이런 여러 가지 정보를 확인하지 못하고 지어낸 것으로 이야기해버렸다. 박지원 의원에게 누가 된 발언을 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반면 민주당에선 박 의장이 처음 DJ의 유언을 공개했을 때 누구도 공개석상에서 반론을 펼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르자 동교동계 출신을 중심으로 “DJ의 마지막을 배타적으로 지켜본 박 의장이 독점적 유훈정치를 하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나아가 “실제로 DJ가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도 의문”이라며 일종의 ‘조작설’까지 퍼졌다. 동교동계 출신 가운데 박 의장의 발언을 가장 먼저 문제 삼고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 전 의원이다.
‘동교동계 막내’로 불리기도 했던 장 전 의원은 9월1일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작심한 듯 박 의장을 비판했다. 그는 먼저 애도 기간에 논쟁적 이슈를 만들어 사회적 파장을 만든 자체가 모시던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박지원 의원이 공개한 확인되지 않은 김 전 대통령의 유언은 평소 그분의 정치철학과 맞지 않으며 박 의원의 발언에 대해 동교동계 민주화 선배들, 동지들 모두 우려하고 있다. 또한 서거하신 김 전 대통령에게 매우 불충한 것이며 유가족은 물론,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함께 40년 동고동락해온 동지 선배들에게 매우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장 전 의원은 박 의장의 발언 자체뿐만 아니라 그 진위에도 의구심을 표시했다.
“DJ는 정치인 중에 거짓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DJ의 유지를 이어가는 일에 사심이 개입돼선 안 된다. 권노갑 고문이나 한화갑 전 대표 등 동교동계 핵심 측근들로부터도 (그런 말을) 들은 바 없으며, 이러한 엄중하고 중차대한 문제를 박지원 의원이 그렇게 함부로 가볍게 발언을 할 리가 없다. 만약, 그 발언이 사실이라면 40년 동안 김 전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해온 민주화 동지들과 협의하고 상의하고 또 동의를 구했어야 할 문제였다.”
“유훈 남겼는지 모르겠다”
장 전 의원의 문제 제기에도 침묵을 지키던 권 고문은 며칠 뒤 언론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이 그런 유언을 남겼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박 의원이 내게 그런 얘기를 한 적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또 “박 의원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사실일 것으로 믿고 싶다”면서도 “김 전 대통령은 평소 ‘누가 도와주거나 밀어준다고 해서 큰 인물이 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덧붙였다. 박 의장이 전한 ‘정 대표 중심 단결론’의 진위에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한 셈이다.
박주선 최고위원도 “실제로 DJ가 정 대표를 중심으로 단결하란 유언을 남겼는지는 잘 모르겠다”며 “만일 그런 말을 했더라도 영원히 정 대표 체제로 움직이란 뜻은 아니고 현재의 민주당 대표가 중심이 되는 게 통합과정에서 분열을 예방하는 길이란 의미 아니겠느냐”고 해석했다. 박 의장의 전언이 사실이더라도 정 대표를 전적으로 신임한다는 메시지가 아니란 주장이다.
이와 관련, DJ의 스타일과 동교동 사정에 밝은 한 정치권 인사는 “김 전 대통령의 평소 어법으로 볼 때 조금 단정적으로 얘기한 측면은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박 의장이 유언을 지어내 전한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은 실제로 마지막까지 민주당의 앞날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면서 민주세력대통합을 구상했었다”며 “이를 추진하자면 정 대표가 현실적으로 기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독주한다?
다만 그는 박 의장이 DJ의 유훈을 민주당 회의석상에서 거론한 데 대해선 어떤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는 것으로 오해받을 여지가 충분하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그런 말을 들었더라도 국장 다음날 최고위원회의에서 그런 말을 하면 ‘이것은 DJ의 지침이다.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가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한 것뿐이 더 되느냐. 가뜩이나 옛 동교동계 내부에서조차 ‘박지원이 김 전 대통령 곁에서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고 독주했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데, 결국 통합이 아니라 분열의 요소만 보탠 결과를 낳지 않을지 우려스럽다.”
이처럼 DJ 유훈의 실체와 내용을 놓고 일종의 진실게임이 벌어지는 양상이지만 박 의장은 말을 아끼고 있다. 그는 ‘DJ의 정치적 유언 내용을 공개한 것은 잘못’이라거나 심지어 ‘유언이 조작됐다’는 주장에 대해 “그런 말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다.
다만 박 의장은 “나는 최소한 김 전 대통령의 말씀을 한 번도 왜곡해본 적이 없다. 현재 민주당 대표는 정 대표다. 과거 손학규 대표 시절에도 김 전 대통령의 똑같은 말씀을 전했다”고 설명했다. 또 그가 김 전 대통령의 유언이나 일기를 독점하면서 선택적으로 공개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선 “그렇지 않다. 서거 후에 2009년도 일기 공개는 전부 비서관들과 협의해서 이희호 여사의 허락을 받고 하는 것이지 제가 독단적으로 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어쨌든 박 의장의 DJ 유훈 전격 공개는 민주당에 민주개혁세력 대통합의 화두를 던지는 동시에 DJ의 정치적 적통(嫡統)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을 촉발시켰다. 대통합 문제는 어느 계파든 필요성을 인정한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야당 역사상 최악’이라는 비판에 직면한 민주당 내에서 이 상태로는 차기는 물론, 앞으로 몇 대에 걸쳐 정권을 잡는 것은 요원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며 “돌파구는 반(反)MB(이명박 대통령) 진영이 하나로 뭉쳐 일사불란한 대오를 형성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그 길이 쉽지 않다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2008년 5월6일 고 박경리씨의 빈소에서 손학규 당시 통합민주당 대표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인사하고 있다.
여기에 여권에서는 차기 대권 경쟁구도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최근 들어 행정부에 정운찬 국무총리, 여당인 한나라당에 정몽준 대표 체제가 들어서면서 독보적 대권주자로 자리매김했던 박근혜 전 대표가 견제를 받는 것도 차기 대선 전반을 감안하면 긍정적 요소다. 2007년 대선을 앞둔 한나라당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박근혜 두 유력 후보가 치열한 경쟁을 펼치면서 흥행에 성공한 것이 정권창출의 한 요인이 됐다는 평가를 감안할 때 그렇다.
고만고만한 후보들
반면 민주당은 지금 상태로만 보면 차기 대선에서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고만고만한 후보 여러 사람이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곧 흥행 실패로 이어져 대선이 본선보다는 예선(후보경선)에서 일찌감치 승패가 갈릴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야권 대통합에 의한 유력 주자의 부상이 필요하지만 적어도 현 단계에선 기대하기 어렵다. 통합의 주체를 놓고 민주당 중심론과 제3지대 창당론이 대립하고 있는 까닭이다.
박주선 최고위원은 ‘민주당의 기득권 포기’를 해법으로 거듭 제시했다. 그는 “지금 민주당의 행태는 시대정신에도 맞지 않고 정강정책이나 시스템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입당하지 않고 밖에서 비판하는 세력들을 모두 끌어들이려면 개인의 입신과 영달을 포기하고 제3지대에서 대통합을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의 한 비주류 측 인사는 “장성민 전 의원이 박지원 의장을 공격한 것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며 “주류 측과 결탁해 기득권을 지키려고 DJ의 유훈을 정략적으로 활용해선 안 된다는 제3지대 통합론자들의 공통된 경고”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정 대표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제3지대 통합논의에 반대한다는 증거(?)가 있다”며 2007년 열린우리당 의장이던 정 대표가 ‘대선후보 중심의 제3지대 신당론’을 강하게 외쳤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당시 정 의장은 민주당·통합신당모임·국민중심당의 ‘중도세력 통합론’에 맞서 ‘후보 중심의 제3지대 신당론’을 제시하며 평화개혁세력 전체의 결집을 호소한 바 있다. 그때는 정 대표가 정치권에 큰 세력이 없어 욕심을 내지 않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 차기 대권경쟁에 나서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DJ의 유훈을 공개함으로써 정 대표의 손을 들어준 결과를 낳은 박 의장도 내년 6월 지방선거 이전 완전한 야권통합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만 그는 “이념의 차이가 별로 없는 야권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통합돼야 한다는 지론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야든 여든 통합은 선거 직전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며 “내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지금부터 계속 노력해 지방선거 공천 전에 통합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물론 박 의장도 ‘정 대표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말에 대해 “통합의 주체가 민주당이 돼야 하고, 지금 민주당을 이끌고 있는 것은 정 대표이기 때문에 대표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라며 “민주당이 야권통합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지 특정인에 대한 개인적 의미는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렇더라도 이번 DJ 유훈 논란은 결국 ‘포스트 DJ’를 겨냥한 야권 내 각 정파의 경쟁을 촉발시킨 의미가 있음은 분명하다. 박 의장은 “적통을 이어가는 지도자는 자기 노력과 국민의 지지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누가 어떻게 하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고 원론적인 견해를 내놓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이미 DJ 적통을 물려받기 위한 피 말리는 싸움이 시작됐다.
일단은 노 전 대통령과 DJ의 잇단 서거를 계기로 야권에 ‘화해와 통합’이 화두가 돼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론 분열의 요소가 더 많다. 하나뿐인 ‘포스트 DJ’ 자리를 놓고 정세균 대표, 정동영 의원, 호남 출신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옛 동교동계와 진보정당이 대치하고, 여기에 친노 진영이 독자적으로 야권의 대체세력화를 노리고 있는 까닭이다.
박지원, 기자단에 만찬 베풀어
정 대표와 박 의장은 DJ 서거 정국에서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하지만 두 사람도 포스트 DJ를 놓고 보면 경쟁자다. 특히 박 의장의 도약이 돋보인다. 그는 7월에 열린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에서 천성관 후보자를 낙마시키며 두각을 나타낸 데 이어 8월에는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맡으면서 ‘정책통’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의 입원과 서거, 그리고 국장을 치르는 과정에서 옛 동교동계 인사들을 제치고 독보적 ‘DJ맨’임을 과시했다. 그는 국장이 끝난 직후인 8월27일 기자들과 서울 신촌의 한 음식점에서 만찬을 함께하며 그 과정에서의 뒷얘기를 장시간 들려줬다. 그는 이때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주관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 의장은 민주당 안에서 지지그룹이 그다지 없다. 특히 옛 동교동계 출신 의원들에게는 꽤 밉보인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DJ마저 서거하면서 정 대표의 필요성이 더 커졌다는 분석이다. DJ 서거 뒤 고립무원에 선 것이나 다름없는데, 당내에 단단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정 대표가 자신의 버팀목이 돼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 ‘정 대표 중심 통합’이란 DJ의 유훈을 공개회의 석상에서 전격 공개했을 것이란 관측이다.
정 대표도 DJ의 후계자를 자처한다. 그는 내년 6월 전당대회에서 한 차례 더 대표 경선에 출마한 뒤 2012년 대선에 출마한다는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민주당 측 한 인사는 “오래 전부터 대권 도전에 강한 의욕을 갖고 준비해온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정 대표 역시 박 의장을 필요로 한다. DJ 서거 전 정 대표가 박 의장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한 것은 박 의장이 DJ의 복심(腹心)이란 점을 감안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두 사람은 ‘민주당 중심론’에선 호흡을 맞추겠지만 결정적인 순간 경쟁관계로 변할 수 있는 숙명에 처해 있다.
민주세력 대통합의 ‘불투명성’
민주당 내에서는 손학규 전 대표와 김근태 고문도 일정한 세(勢)가 있다. 두 사람이 10월이나 내년 4월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를 통해 여의도에 재입성한 뒤 야권의 지도자 반열에 올라설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최근 민주당에 복당한 한화갑 전 대표 등 옛 동교동계 인사들도 당내에서 ‘DJ이즘’을 주창하며 별도의 목소리를 낼 전망이다.
당 밖에는 무소속 정동영 의원, ‘노무현의 남자’ 이해찬 전 총리,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있다. 정 의원은 국장 기간 DJ를 “정치적 아버지”라고 부르며 적자(嫡子) 논쟁에 끼어들었다.
친노 세력은 현재 ‘두 트랙’으로 정치세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병완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천호선 전 비서관 등이 추진하고 있는 ‘친노 신당’과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를 공동 대표로 9월2일 출범한 ‘시민주권모임’(가칭)이 그것이다. 민주세력대통합이 본격 논의단계에 접어들면 두 모임은 단일대오를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이 전 실장은 시민주권모임의 운영위원도 맡고 있다.
친노 신당 추진 세력은 민주당 중심의 통합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실장은 “민주당은 우리와 DNA가 다른 정당”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민주당 내에서도 친노 신당을 경쟁상대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이처럼 민주개혁세력의 대통합은 DJ의 유훈 공개 이후 당위론 측면에선 대세가 됐지만, 한 꺼풀만 벗겨봐도 역학관계가 얽혀 있고 복잡한 변수가 많다. 더구나 이를 풀어낼 리더나 해결사도 부각되지 않고 있다. 결국 민주당은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에 따른 추모물결로 반짝 지지를 받았지만 지금은 그나마 다 까먹었다. 그리고 돌파구인 민주개혁세력 대통합에 목을 걸고 있지만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상황이다. 누가 이 혼란을 수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