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성' 1932년 3월호에 실린 박희도의 캐리커쳐.
“영자와 나는 오늘 밤이 마지막이다! 오늘은 자자! 내일은 헤어지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일을 당한 아내는 독자에게 하소연한다.
‘그날 밤 나의 심경은 어떠하였겠습니까? 독자 여러분! 그 몹쓸(?) ‘에로교장 Y선생 사건’ 때문에 난데없는 가정풍파가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옛날의 사은(師恩)이 도리어 오늘의 원수 같습니다. 그 한밤을 나는 전전반측하였습니다.’
소설보다 황당한
도발적인 도입부와 달리 이야기의 결말은 밋밋하다. 남편이 아침밥상도 받지 않고 출근하자 아내 ‘영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학교선배 ‘은숙’을 찾아간다. 자초지종을 들은 은숙은 자신도 어젯밤 똑같은 일을 당했지만 묘안을 찾아 잘 해결했노라고 말한다. 영자가 그 묘안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자 은숙은 쪽지에다 여덟 글자를 써줄 뿐이다. 하루 종일 여덟 글자의 의미를 연구한 영자는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온 남편에게 ‘에로교장 Y선생 사건’ 때문에 자신의 정조를 믿지 못하겠거든 그만 갈라서자고 말하고,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고 말한다.
“무슨 청이야?”
“그놈의 키스내기 화투가 무엇인지 그것 때문에 우리들의 행복하고 달콤한 결혼생활도 깨지고 부서지고 했으니…. 당장에 그것이나 한번 쳐보지요! 영원히 서로 갈라선 후에 어느 때 어느 곳에서 그것이 한이 될지 알겠어요?”
“그까짓 소원이야 못 들어줄까?”
이야기는 밤 깊도록 키스내기 화투를 친 부부가 다시 사랑을 회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은숙이 적어준 여덟 글자는 ‘이열치열 전화위복’이었다.
교장이 제자와 화투를 치는 것도 충분히 패륜적인데, 키스내기로 쳤다니 가히 엽기적이다. 키스내기 화투가 무엇일까. 승자가 키스를 받고, 패자가 키스를 줘서 키스내기 화투였을까. 이기거나 지거나 키스하기는 마찬가진데, 힘쓰고 머리 써서 화투는 왜 쳤을까. 이아부라는 무명작가가 과연 이런 해괴망측한 상황을 오로지 자신의 상상력만 가지고 꾸며낼 수 있었을까. 지금부터 소설보다 더 황당한 실화를 알아보자.
한밤의 활극
1934년 3월12일, 평양 백선행기념관에서는 박희도 교장이 이끄는 중앙보육학교 순회음악단의 음악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오늘날의 창춘)까지 방문해 열릴 순회음악단의 첫 번째 연주회였다. 평양부 남정(南町)에 사는 노원우는 음악회가 열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객석에 앉아 음악을 들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직 인솔자 박희도와의 만남을 기다릴 뿐이었다. 만나서 담판을 지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회가 열리던 밤, 평양거리에는 때늦은 눈송이가 흩뿌리고 있었다. 노원우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백선행기념관을 찾았다. 그의 가슴은 격분에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되도록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다.
“그대가 과거의 비리를 깨닫고 뉘우치면 침묵을 지켜 어느 정도까지 용서할 수 있다.”
노원우는 오랜 동지요 친구이던 박희도에게 이 한마디를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박희도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만나기는커녕 노원우란 사람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음악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허둥지둥 몸을 감췄다. ‘설마 음악회에야 나오겠지.’ 노원우는 음악회가 열리기까지 분노를 삭이며 기다렸다. ‘말로 타일러서 과오를 뉘우칠 인물이 아니다.’ 박희도의 출현을 기다리면서 노원우는 문제를 조용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접었다. 대신 많은 청중 앞에서 박희도의 비행을 폭로하고 시비를 가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박희도는 아예 음악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피해 다니는 것만 봐도 그의 행위는 여실히 입증된다.’ 한층 격분한 노원우는 흉기를 품고 음악회를 후원한 동아일보 평양지국이며 근처 여관을 밤늦게까지 찾아다녔다. 그러나 박희도는 밤새 숨어 있다가 다음날 아침 몰래 10여 명의 단원을 빼돌리고 북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박희도가 줄행랑을 놓자 노원우는 한층 격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제가 피하면 얼마나 피할 터인가? 나는 이미 내친 몸이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일개 부녀자를 위하여 일신을 희생한다고 비웃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생각지 않는다. 모름지기 그냥 내버려둔다면 장래 얼마나 많은 여자의 정조와 행복을 깨뜨리고 가정을 파열시키고 추한 영향을 끼칠는지 모르는 이 사나이의 비리를 세상에 널리 폭로하여 경고하는 것은 위대한 사회적 의의를 가지는 일일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위해 나의 한 몸을 희생할 작정이다.” (‘조선중앙일보’ 1934년 3월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