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은사의 조계종 직영사찰 전환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이 3월28일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열린 일요법회에 참석하고 있다.
대중연설에 능한 명진스님은 ‘운동권 스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이한 행적에 따른 일화도 많다. 안동의 재래시장에서 건강이 악화된 도반에게 먹이려고 쇠머리고기를 들고 다닌 이야기나 성철스님과 대면하여 당돌하게 법거량(法擧揚·불가의 스승이 제자의 수행 정도를 문답으로 점검하는 것)을 한 이야기 등은 꽤 알려져 있다.
명진스님은 1969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했다. 군대에 갔다 온 뒤 1974년 법주사 탄성스님에게서 사미계를 받고 혜정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975년부터 송광사 해인사 봉암사 상원사 망월사 용화사 등지에서 오랫동안 수행생활을 했다. 1987년에는 불교탄압대책위원회 위원장과 개운사 주지를 지냈고 이듬해 대승불교승가회장을 맡았다. 1994년 조계종 종단 개혁회의 상임위원을 지냈고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이듬해에는 본부장을 맡았다. 2005년 봉은사 선원장을 거쳐 다음해 주지를 맡았다. 민족문제연구소이사, 실업자지원센터 이사장, (재)윤이상평화재단 제2기 부이사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제2기 공동대표 등을 맡기도 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두 사람의 만남
이처럼 성격이나 행적이 판이한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인연에 대해서는 명진스님이 3월21일 일요법회에서 밝힌 적이 있다.
“걸망을 지고 이 선방 저 선방으로 돌아다니다가 1986년 해인사 승려대회를 계기로 사회와 종단의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그런 과정 속에서 지금의 총무원장인 자승스님과 인연이 남다르게 깊어졌습니다.”
이와 관련해 황찬익 봉은사 문화사업단장은 “1984년경 해인사 선방에서 두 분이 처음으로 만난 것으로 안다. 두 분이 모두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어서 서로 마음이 통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특히 명진스님은 가족과 친인척의 죽음을 고통스럽게 지켜본 것이 인생 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봉은사 일요법회에서 고백한 적이 있다.
“죽음 앞에서도 존재의 덧없음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죽음만한 스승이 없습니다. 저는 여섯 살 무렵에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봤습니다. 그 스산한 풍경들은 머릿속에 지울 길이 없이 각인되어 그때부터 제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저는 너무 빨리 죽음과 고통의 문제에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도 이어진 아버지와 외할머니, 삼촌들의 이른 죽음은 끊임없이 저를 삶과 죽음, 고통의 문제와 절박하게 맞서도록 했습니다.”
명진스님은 해군에 복무 중 탑승한 군함이 전복하면서 목숨을 잃은 동생으로 인한 충격도 컸다고 한다. 최근 일요법회에서 천안함 실종 해군들을 거론하며 동생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명진스님이 기거하는 봉은사 주지방에 들어서면 뒤편에 두 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하나는 스님이 출가한 직후의 앳된 얼굴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1987년 민주화운동 때 시위를 하다 전경들에게 저지당하는 모습이다. 죽음을 화두로 삼아 실존적 고민을 하던 명진스님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