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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문명의 길목에서 종교를 건설하다

사도 바울 문명의 길목에서 종교를 건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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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은 이동하는 허브(hub)였다.
  • 교차로에 서서 예수를 ‘모든 것 위에 있는’ 진리의 이름으로 알렸다.
  •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한국이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사도 바울 문명의 길목에서 종교를 건설하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 바울은 기독교를 누구나 말 걸 수 있는 보편 종교로 키워냈다.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는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난 것,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 이민족이 아닌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을 튀케(운명의 여신)에게 감사했다”고 전해온다. 그런가 하면 2세기경 한 유대교 랍비는 사람들은 매일 다음 세 가지를 찬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를 여인으로 창조하지 않으신 하느님을 찬양하라, 나를 무지한 자로 창조하지 않으신 하느님을 찬양하라, 나를 비유대인으로 창조하지 않으신 하느님을 찬양하라.” 그리스인들이 ‘바르바로이’라고 부른 이민족과의 대립을 통해 탁월하고 자유로운 그리스인이라는 자의식을 만들어갔다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과 세상 민족들, 즉 이방인(Gojim)과의 날카로운 구별을 통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했다. 유대인에게 이방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주는 타자였다. 이방인을 부정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정결하고 가치 있는 유대민족이라는 표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통념을 깨뜨리는 소리 이방인의 사도

이와 같은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자명하고 마땅한 세계에 사뭇 도전적인 출사표를 던진 인물이 있다.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예수 추종자들을 핍박하다가 갑자기 그 운동에 투신한, 바로 사도 바울이다. 이방인의 사도! 극적인 회심 이후 스스로 사도가 된 이 예외적인 인물은 자신을 그렇게 규정하며 등장했다. ‘이방인의 사도’라는 바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천명은 이미 자기-타자, 중심-주변이라는 고대 세계의 정체성의 문법을 깨뜨리는 파격이었다. 그는 또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노예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누구나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확언했다. 어느 모로 보나 낯선 선언이었다. 그것이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대다수의 유대인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 집단을 특정한 땅과 그 땅의 신, 그 신을 예배하는 종교와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정체성에 대한 당대의 어법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의 통념으로 보면 쓸모없는 존재였던 이방인들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유대인의 고유한 유산을 그들과 공유하고, 이방인과 유대인 위에 새로운 공동체 원리를 세우고자 했다.

사도 바울 문명의 길목에서 종교를 건설하다

바울은 문명이 교차하는 대도시를 오가면서 기독교를 전파했다.

아주 익숙해서 견고한 정체성의 문법을 깨뜨린 바울의 이러한 급진성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목소리(비전)의 힘이라고 흔히 말한다. 틀리지 않을 거다. 그러나 그러한 급진적 비전을 활성화한 개방성과 탄력성은 그가 속했던 헬레니즘 세계의 정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바울은 유대 땅을 떠난 유대인이며, 헬레니즘 문화가 공기처럼 꽉 차 있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그리스어로 말하고 상당히 능숙한 수사학을 구사하며, 동시에 히브리인들의 성서를 자유자재로 인용할 줄 알았다. 편지 글에서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하면 약하고 말주변이 변변치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바울은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들이 삐걱거리며 공존하던 자기 세계와 닮았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 그 세계와 제대로 싸울 줄 알았다.

바울의 다문화적 배경과 새로운 공동체 실험이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세계가 우리 시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이래 우리는 자본주의적 세계체제가 근대 국가들과 여러 지역을 잠식해가는 강압적이고 도도한 흐름을 목도하고 있다.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편승하려는 욕망과 지역의 저항적인 문화 전략들이 충돌하고 공모하는 가운데 다양한 이민 공동체, 이주 노동자, 정치 망명객, 난민 등 각양각색의 이방인들이 공존하는 다문화, 다민족 사회가 늘어가지만 폭력과 차별, 편견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연대를 확립해 더욱 정의롭고 더욱 나은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 우리 시대가 아직도 씨름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다. 바울의 행보는 유사한 상황들과 그 해법에 대한 고대 말기 버전처럼 보인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고, 때론 깊은 울림을 준다. 바울과 그의 세계를 좀 더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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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연희 서울대 박사과정·종교학 chjang1204@hanmail.net
연재

신동아 ·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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