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넘어 바울 보기
신약성서와 기독교 외경들에서 바울은 예수의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베드로와 맞먹거나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럴 법도 한 것이 4세기 무렵 확정된 기독교 정경(신약성서)의 거의 절반을 바울의 편지들이 차지했다. 기독교 운동을 ‘예수는 부활하셨다’라는 하나의 선언으로 집중시킨 바울의 신학이 복수의 기독교 운동 가운데 확고하게 주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예수가 새로운 집의 청사진을 제시했다면, 바울은 그 집의 주춧돌을 놓고 골격을 세웠다고 하겠다.
그러나 당대에 바울은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예수처럼 바울도 온존하는 세상과 불화했다. 사람들을 선동해 새로운 대열로 이끌었으며, 오래된 관습에 저항하고 위선과 단호히 맞섰기 때문이다. 으레 그렇듯이 거센 반발, 물리적 공격, 집요한 의심이 그를 괴롭혔다. 유대인들과 로마 당국, 기독교 내부의 만만찮은 적수들도 자주 걸림돌이 됐다. 역사적으로도 바울은 누구에게나 복음의 사도, 즉 ‘좋은 소식의 전달자’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예수의 소박하고 순수한 복음을 가부장적이고 제국주의적 체제에 순치시키고 나약한 죄의식으로 타락시킨 장본인이 바로 바울이라는 식의 비판이 이어졌다. 이러한 혐의는 바울이야말로 “나쁜 소식의 전달자(the Dysangelist)”라는 니체의 전복적 표현에서 절정에 이르기도 했다.
가부장적 도덕과 여성에 대한 편견, 노예제도에 대한 보수적 태도, 반유대주의 등 기독교 역사의 권위적이고 부정적 측면들을 모두 바울 탓으로 돌리는 상투적인 담론은 여전히 통용된다. 그것은 기독교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바울에게 투사하고, 예수를 순수한 원형으로 복원하려는 하나의 신화적 작업이다. 한편 최근의 연구들은 부정적 바울의 근거가 되는 부분들이 바울이 직접 쓴 편지보다는 후대 교회 상황에 맞게 각색한 바울 전승에 있다고 보는 편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직접 쓴 편지의 모순적이고 애매한 태도까지 다 문제 삼을 까닭은 없다. 기독교 역사와 거의 등치된 바울이나 완전무결한 바울이나 모두 구체적 시공간을 살았던 인간 바울을 보기 어렵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바울은 기독교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흥미로우며, 기독교 역사의 무게를 덜고 그 자신의 시대로 되돌려놓을 때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대략 기원후 50년 전후에 쓰여진 것으로 기록된 바울의 편지들은 막 태동하던 기독교 공동체의 성격과 생생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자, 그 시대와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서다. 학계에서 대체로 합의하는 바울의 친서들(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은 자기 시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바울로 안내하는 길잡이다(전거를 밝히지 않았지만 앞으로 이야기의 대부분은 바울 사후에 기록된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이름을 빌린 편지들보다는 주로 바울의 친서를 토대로 한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바울은 그가 살았던 헬레니즘 세계의 다문화적 지평에 뿌리박고 있다.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과 새로운 정신사적 흐름, 유대인들의 오랜 디아스포라적 삶과 종교가 바울이라는 한 인간 안에 맞물려 있는 것이다. 바울이 헬레니즘 세계의 전형적 인물로서 어떻게 자기 시대의 언어로 문화의 창조자가 됐는지 보자.
헬레니즘 세계와 디아스포라 유대인
헬레니즘 시대는 정치사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기원전 334년 혹은 323년 알렉산드로스의 사후)에서 악티움 해전(기원전 31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문화사적으로 헬레니즘 세계는 다문화 상황이 지속되고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의 헤게모니가 유지된 로마제정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복을 통해 갑자기 출현한 이 ‘하나의 세계’는 당시 지중해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체감한 세계의 크기와 그들이 경험한 세계의 이미지를 바꾸어놓았다. 세계는 더 이상 예측가능하고 질서정연하며 동질적인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서로 다른 도시(국가)에서 각자의 언어와 관습, 저마다의 법에 따라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도 바뀌어갔다.
헬레니즘 세계의 도시들은 모델이 된 그리스 도시들과 겉보기에는 비슷했지만, 자세한 경관은 훨씬 복잡하고 더 개방적이었다. 그 속에는 강제이주를 당한 피정복민, 기회를 찾아 식민도시에 정착한 이민자, 정복전쟁에 고용되어 떠도는 용병, 부역에 동원된 노동자, 유랑하는 배우, 정치 망명객, 멀리서 끌려온 노예들, 도망친 노예, 떠돌이 예언자, 철학교사 등 다양한 배경과 사정, 이질적 욕망을 가진 뿌리 뽑힌 존재들이 뒤엉켜 있었다. 특히 제국주의 전쟁이나 정복에 의해 고향땅과 가족 형제, 신전과 종교로부터 유리된 사람들에게는 폭압적이고 변덕스러우며 불안한 세계였다. 각 도시의 신과 도시의 질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옛 관념들은 더 이상 그 질서가 유지되지 못하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갑자기 확대된 세계 속에서 엄습하는 불안과 절망에 빠지거나, 더 확장된 새로운 삶의 지도와 틀을 갈구했다. 마치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떠난 사람들과 같았다. 이제 돌아갈 고향땅이 아니라 새로운 목적지, 새로운 고향땅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그 세계는 고대의 어느 때보다 개방적이고 다원적이었으며, 이따금 절호의 기회도 되었다. 예수와 바울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하느님 나라와 예수를 통한 만인의 구원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세계 속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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