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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독립군’ 김준엽을 기리며

조국 광복 위해 싸우고 군사정권에 맞선 시대의 참스승

‘마지막 독립군’ 김준엽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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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독립군’ 김준엽을 기리며

광복군 시절의 김준엽(가운데) 전 총장. 오른쪽은 고 장준하 선생.

나이 스물둘에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린 김준엽은 “당시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내 소신대로 움직인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생각이나 자세가 너무나 확고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대학 총장이 되어 학생들을 지도할 때 젊은이들의 정의에 불탄 당당한 태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유학기간 중 돌아가신 부친을 대신해 형들과 상의한 결과도 그의 소신과 같았다. 전쟁터에 끌려가면 죽을 확률이 대단히 높은 상황에서도 형들은 동생의 학병 입대와 탈출계획을 듣고 적극 찬성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부터 김준엽은 구체적인 탈출계획을 세우고 준비작업에 들어간다.

서울 부민관(시민회관)에서 학병들을 모아놓고 장행회를 할 때 김준엽은 몰래 빠져나와 명동으로 가 탈출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했다. 우선 나침반부터 샀다. 생소한 외국땅에서 부대를 탈출해 임시정부까지 찾아가려면 방향을 알려줄 나침반은 필수품이었다. 중국지도와 중국어 회화책도 챙겼다. 한밤에 탈출할 것에 대비해 야광 손목시계도 준비해야 했다. 탈출과정에서 중국군이나 연합군을 만났을 때 한국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게이오대학 모자를 쓰고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도 간직했다. 마지막으로 돈과 칼을 챙겼다. 돈은 탈출 이후에 필요할 것 같았고, 칼은 거사 전 탈출의도가 발각될 경우에 대비한 자살용이었다. 독약을 구하기 힘들어 아버지의 유품인 주머니칼을 가져가기로 한 것이다.

부적과 암호

문제는 이 모든 준비물품을 발각당하지 않고 무사히 징집절차를 거쳐 부대 안에까지 가져갈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한 가지 꾀를 냈다. 일본군에 입대하면 사물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지만 일종의 호신용 부적인 ‘오마모리후다’만큼은 휴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으로, 어머니가 치마를 찢어서 만들어주신 주머니에 물품들을 담았다. 오마모리후다를 많이 휴대한 것으로 가장한 것이다.



암호도 만들어 형들과 공유했다. 고향으로 보내는 서신은 반드시 엽서에 일본어로 쓰되, 편지 말미에 ‘경구(敬具)’라고 쓰면 중국에 있는 일본부대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고, ‘頓首(돈수)’라고 쓰면 중국에서 탈출기회를 얻지 못한 채 동남아로 전출된다는 뜻이고, ‘草草(초초)’라고 쓰면 곧 탈출한다는 뜻이었다. 이 암호들은 일본인이 편지 말미에 흔히 인사치레로 쓰는 용어이므로 의심받지 않고 상황을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도 김준엽은 예상했던 대로 중국전선으로 보내져 장쑤(江蘇)성 쉬저우(徐州)의 일본군 경비중대에 배속된다. 당시의 풍경을 김준엽은 유배돼가는 죄수로 묘사하고 있다.

“유배지인 徐州(서주)역에 내려 나흘 만에 비로소 땅을 밟게 되었다. 밖은 쌀쌀한 날씨인 데다가 바람이 심하여 황사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우리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황소들 모양으로 줄을 지어 시내를 지나 교외로 빠져나갔다.”(‘장정1’) 1944년 2월16일이었다.

탈출날짜를 정하려고 고심하던 중 꿈에 아버지가 하얀 모시옷을 입고 나타나 “달아나려거든 3월29일에 달아나라”는 말씀을 남기고 사라진다. 거사일이 정해지자 지체 없이 고향으로 엽서를 보냈다. 엽서 말미에 일군을 탈출한다는 ‘草草’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이 엽서를 받은 고향의 형님들은 경찰이 의심할 만한 서적 등을 모두 불살랐다. 일경의 수색과 심문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마침 3월29일은 달이 없는 날, 캄캄한 밤을 기다렸다. 이날도 김준엽의 치밀하게 준비하는 품성이 발휘된다. 맹장이 아프다고 꾀를 부려 부대에서 먼 곳으로 가는 행군에 불참한 것이다. 그리고 몰래 분대장의 수류탄을 훔친다. 자살용 칼을 준비했으나 아무래도 칼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지를 발휘해 빵도 3개를 확보했다. 결행시간인 29일 새벽 2시를 40분을 앞두고는 성벽을 넘어 탈출하다가 보초에게 발각될 것에 대비해 다음과 같은 편지를 교관 앞으로 남겼다.

“지금 새벽 1시가 넘었는데 맹장이 굉장히 아프다. 혼자 계신 어머니가 나를 군대에 보낼 때는 대일본제국의 장교가 되는 것이 희망이었는데, 만일 행군에 참가하지 못하면 나는 장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 혼자 죽더라도 대묘까지 행군 갔다 오겠다.”

보초한테 들킬 경우 자신이 가는 방향을 틀리게 판단하도록 조작해 다른 방향으로 추적게 할 목적에서 쓴 편지다. 실로 주도면밀한 탈출시도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 독립군’ 김준엽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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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세종대 초빙교수·전 동아일보 출판국장 hyp861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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