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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신문사 편집국의 오후 한 시 반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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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회 이야기>
  • 한 대감의 집을 나선 한림은 황금정을 걷는다. 연말 저녁 거리는 전차와 자동차, 행인으로 분주하다. 명치정과 본정은 밤의 열기로 후끈해지고 조선은행 앞 광장은 오가는 인파로 가득하다. 귀족회관은 급조된 조선의 귀족들과 더불어 퇴락해가고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은 활기찬 새해를 준비하고 있다. 증권거래소는 각종 악재가 속출해 근년에 보기 드문 대폭락을 이어온 한 해를 마감했다. 올해의 마지막 신문을 찍어내는 저물 녘의 신문사에는 압수 통보가 하달되었다. 송년호 신문은 기사 검열로 버려지고 다시 제작해야 할 신세가 되었다.
(제4장)

한통의 전화에 평화는 깨어졌다.

“이런 제기, 또 압수야.”

“여보, 큰일 났소. 압수요 압수.”

웅성거림 속에 먼발치서 편집국장의 표정을 살피던 사회부장이 다가간다. 검열에 걸리는 빈도는 사회부가 가장 높다. 기자 수도 편집국 내 최대다. 무려 6명이나 된다. 정치부와 경제부는 각 1명이다. 부장 하나 기자 하나.



“야, 기계 멈춰라 기계.”

하루의 소란을 접고 마감 후의 고요로 접어들어야 할 편집국에 제2차 소란이 일어난다. 편집국장은 경무국 도서과 검열관과 통화 중이다.

“…윤전기 세웠습니다.”

-오늘 신문 펼쳐주십시오.

“오늘 기사는 어디가 나쁘다는 겁니까.”

- 제ㅇ면 ××제목의 기사 전부요. ㅇ단 ㅇ행부터 ㅇ행까지 삭제하세요.

짧은 통화를 마친 국장은 털썩 전화통을 내려 걸었다. 오후 내내 주고받은 수십 차례 전화 통화 모두를 합친 것만큼 피곤하다.

윤전기는 얼마간의 신문을 토해놓고 멈추었다. 곧 경찰이 들이닥칠 것이다. 이 시각 검열당국의 다급한 움직임은 총독부 경무국의 내부 기록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오후 4시부터 5시 사이 석간이 나올 무렵의 경무국 도서과. 그때쯤이면 검열계의 책상 위에는 백촉 전구가 휘황하게 켜져 있다. 사환이 한글 신문사로부터 신문을 갖고 달려와서 검열자에게 건네준다. 한 자 한 단어라도 등한히 할세라 검열자의 눈은 번득이고 있다. 붉은 줄이 그어진 신문이 관계자들에게 돌려지고 있다. 날 듯이 전화에 달려가 경기도 경찰부에다 “ㅇㅇ일보 제 ××××호 제 ㅇ면 ××제목의 기사는 치안방해로 차압되었으므로 수배해주십시오” 한다. 신문사에서는 관할 경찰서원의 출동으로 신문이 전부 압수된다.



갓 나온 신문은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그 일부가 이미 눈치껏 이곳저곳으로 배포되고 난 뒤일 수도 있다. 윤전기의 속도는 일취월장해 지난해 일본에서 도입한 최신형 기계는 시속 8만부를 찍어내고 있다. 시속 3만부 인쇄를 자랑하던 윤전기는 2년 만에 교체되었다. 5만부가 넘지 않는 전체 부수를 1시간 안에 찍어내고 남는 속도다. 윤전기 세우라는 통보를 받기까지 이미 상당 부수가 인쇄되었기 때문에 압수 전에 일부를 빼돌릴 수도 있는 것이다. 검열당국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삭제된 신문의 납본이 다시 도착해야만 이 일이 끝난다. 그러나 이 삭제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국이 신문발행자를 신뢰하는 것을 근본 전제로 한다. 가령 그 신문사가 “기계 세워요”의 명령이 있었는데도 태연히 그대로 윤전기를 돌리면서 말로만 “세웠습니다”하고 모두 찍어낸 뒤 마지막 한 장을 요구대로 기사삭제해 납본한다면 완전히 전 부수를 발송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문은 어렵사리 나왔다. 문제가 된 기사는 사회부 소관은 아니었다. 사설이었다. 정치부에 배속된 논설반원 2명이 오늘은 뒷마무리 행사를 치렀다.

평소 같으면 마감 후 신문 나올 때까지 숙직실에서 바둑 두고 있을 사회부장 현진건은 그 희고 맑은 얼굴이 황혼처럼 불콰해져 곧장 술집으로 나가기라도 할 태세다. 유명인사 현진건은 지난해 이맘때 잡지 ‘별건곤(別乾坤)’과의 인터뷰에서 하루 일과에 대해 “9시30분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집무. 그때부터 바둑 두다 황혼녘에 귀가”라고 답했다. 그 이후는 “식사 후 독서. 불면증으로 어떤 때는 새벽 3시까지 독서”라고 덧붙였다. 기상은 오전 5시. 독서하고 식전 산보한다고 했다. 술 마시는 얘기는 없다.

내일 아침 간부회의에서 영업국장은 구체적인 수치로 경영손실을 제시하며 감독 부실에 핀잔을 놓을 것이다. “지지리 말을 해도 또 그러느냐. 빈정대는 표현을 하지말래도.” 사장은 누구에게라 할 것이 없는 호통을 칠 것이다. 하루 생활 중 제일 반가운 때가 언제냐는 질문에 “신문을 다 만들어서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 들을 그때”라고 대답하는 사장이다.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1927년 신문사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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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석│unomono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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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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