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국가인권위원회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안경환 당시 인권위원장(앞줄 왼쪽)이 행사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출범한 인권위는 정권교체와 함께 여러 차례 부침을 겪었다.
참여연대에 적을 두고 있던 시절에도 내가 조선일보에 글 쓰는 것을 비판하는 젊은이가 많았다. 간사 회의에서 비공식 안건으로 제기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나는 조선일보 문화면에 고정칼럼을 쓰고 있었는데 원칙론자들은 문화 칼럼조차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공부한 한 진지한 인문학도는 나를 붙들고 성을 내다 못해 울먹거리며 호소하기도 했다. 내 선의와는 무관하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곡필(曲筆)의 희생양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주제와 내용이 문제지 매체 그 자체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운동가보다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내게는 적개심보다 균형감이 더욱 중요한 미덕이었다. 특히 자신과 성향이 다른 독자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할 자료를 제공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지식인의 역할 아니겠는가. 흑백논리가 팽배한 세상에서 흑도 백도 아닌, 회색이라는 의식의 중립지대를 구축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굳이 따지자면 지식인의 원색은 회색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조선일보만이 아니었다. 초임교수 시절부터 나는 거의 모든 일간지에 시론 내지는 칼럼을 썼다. 그 신문의 기조에 따라 내 생각이나 글의 논조가 바뀐 예는 없었다. 내 글을 읽고 동조하거나 반박하는 독자의 반응은 있었지만 매체가 미리 내 글의 내용을 문제 삼은 일은 거의 없었다. 한때 한겨레신문에도 고정필자로 칼럼을 썼다. 그중 한 칼럼이 시빗거리가 됐다. 2005년 5월의 일이다. 고려대 학생회 간부들에 대해 학교가 중징계 방침을 세웠다.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에서는 학교의 처사를 비난하는 성명을 초안해 회람했다. 나는 이렇게 썼다.
“… 고려대학교가 진통을 겪고 있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를 수여한 학교 당국의 결정을 학생회가 물리력으로 항의, 저지한 것이다. 일반 학생들은 총학의 탄핵에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실로 당혹스러운 일은 전국의 민교협 교수들이 학생 징계에 반대하는 성명을 초안하여 교수들의 동참을 촉구하며 나선 것이다. 초안이기는 하지만 성명서는 심히 균형을 잃었다. 물리력을 행사한 학생들에 대한 꾸짖음은 전혀 없고 학교 당국에 대한 비난만 담겨 있다. … 선생의 역할이 무엇인가? 학생의 폭력을 품어 감싸기에 앞서 강한 질책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게 아닌가. 연전에 오도된 ‘민주학생 감싸기’의 예를 듣고 크게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학생운동에 주력하느라 단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과목에 A 학점을 내준 선생의 큰 ‘정의감’을 찬양하는 학생에게서 심각한 대학의 위기를 느꼈다. 민교협의 성명서가 제기한 내용에도 이의가 있을 수 있다. 이 회장에게 명예 철학박사학위를 수여하는 것은 ‘대학과 자본의 유착’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한다. 모두가 권장하는 ‘산학협동’과 어떻게 다를까? … 삼성의 기업 경영방식에 철학적 이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 없이도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한 후에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경영방식도 있을 것이다. 이 회장의 재산 상속 과정이나 삼성그룹의 노조 정책에 불법이 있었다면 합당한 응징을 법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 (한겨레 2005년 5월 24일 칼럼 ‘학생운동과 선생의 역할’ 중에서)
균형감각의 소유자 vs 기회주의자
당시 나는 연구년을 얻어 외국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국외에 체류하고 있었다. 현장감이 떨어지니 칼럼을 중단하자고 했으나 신문사 측에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계속 써달라고 해서 붓을 놓지 않고 있었다. 국내 소식은 전적으로 인터넷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원고를 보내며 행여나 신문의 편집방향과 어긋날 경우에는 싣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한겨레 편집진은 논의 끝에 내 글을 실었다. 난리가 따랐다고 한다. 신문사 내부에서는 물론 한겨레를 지지하고 의지하던 많은 독자가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민교협과 한겨레는 협의 끝에 나를 반박하는 글을 게재했다. 나도 민교협 회원이었기에, 제명하자는 논의도 있었다고 한다. 평소 나와 면식이 전혀 없던 지방의 한 젊은 교수가 집필했다. 그는 나에게 자본의 앞잡이인 ‘자용교수’라는 레테르를 붙여주었다. 이 소동 이후로도 한 차례 더 칼럼을 쓰고 내 스스로 기고를 중단하는 것으로 해 마감했다. 중단 사유를 알리는 기사가 나갔다. 방학 중에 오지여행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도 같은 생각이지만 분명히 내가 크게 잘못한 점이 있다. 민교협 성명은 회람한 초안대로 발표됐지만 초안은 어디까지나 초안에 불과하다. 회원 사이에 주고받는 내부 문건인 것이다. 초안에 이견이 있으면 내부에서 토의해야 할 것이지 그 절차를 생략하고 바로 바깥으로 가져간 것이 나의 잘못이다. 내가 단순히 회비만 내는 수동적인 회원이라거나 외국에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변명이 될 수 없다. 어쨌든 이러한 나의 전력을 아는지 언론사에 따라 나의 성향을 ‘온건한 중도’ 또는 ‘균형감각의 소유자’ 등으로 호의적으로 평하거나, 이슈에 따라 진보와 보수 사이를 줄타기하는 기회주의자로 폄하하기도 했다.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 언론사마다 인권위와 나에 대한 관심사가 제각기 달랐다. 통과의례로 던지는 질문이 있는가 하면 내부사정을 비교적 잘 알고 파고드는 질문도 있었다. 모든 매체가 두 가지 공통된 질문을 던졌다. 첫째, 내부갈등을 어떻게 조정해 기관을 이끌고 갈 것인가. 둘째, 북한 인권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였다. 첫 번째 질문은 전직 위원장이 전격적으로 사퇴한 이유가 내부갈등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언론은 갈등을 부추기거나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만 기사가 된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다소 외교적인 모범 답안이 준비돼 있었다. 즉 전임 위원장이 사임한 이유는 오로지 건강과 일신상의 문제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인권위에 들어와서 보니 내부갈등은 심히 과장된 것이었다. 인적구성의 다원화가 법적 요구사항인 만큼 인권위에서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의 있는 토론을 통해 공동의 지혜를 찾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