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없이 연구책임자 마음대로 저자명 등재
연구 부정은 연구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유혹
위·변조, 표절, 중복 게재, 저자명 품앗이 만연
가짜 학회 참석 국민 혈세 축내
연구윤리 확보하려면 동료 간 평가 강화해야
[GettyImage]
“교수님이 제1저자로 안 올려주셔서요.”(제자)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한국병리학회 논문 ‘부정 저자 등재’ 의혹 제기 후 의학계에서 회자되는 블랙 유머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교수들끼리 종종 하는 농담이다. 교수 집 강아지가 시키는 대로 묵혀놓은 데이터를 이용해 논문을 대신 써주면 강아지한테 제1저자를 준다. 지나가던 고양이가 개를 즐겁게 했다면 고양이한테 제2저자를 준다.”
두 이야기 다 논문 저자명 등재가 원칙 없이 연구책임자 손에 좌우되는 현실을 비꼰다. 조국 장관 자녀 논문 저자 특혜 등재 논란은 2005년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논란에 이어 다시 한번 한국 학계의 연구윤리 실태와 문제점을 환기시켰다.
연구윤리 문제의 심각성을 뒷받침하는 실증 자료가 적지 않다. 10월 8일 교육부가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최근 5년간 전국 4년제 대학 연구윤리위원회 개최현황’에 따르면 2014~2018년 전국 214개 대학 중 99개 대학에서 총 382건의 연구윤리 관련 회의가 개최됐다. 이 회의들에서 제기된 연구윤리 위반 의혹은 표절(120건)에 이어 부당 저자 표기(81건), 논문 중복 게재(36건), 미성년 자녀 공저자 등재(15건), 부실(가짜) 학회 참석(13건), 기타 연구 부정 및 부적절(26건) 순으로 나타났다.
한국연구재단의 실태 조사 결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19년 4월 한국연구재단이 발표한 ‘2018년 대학 연구윤리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4~2018년 국내 176개 4년제 대학에서 332건의 연구 부정행위 판정이 이뤄졌다. 유형별로는 논문 표절 122건, 부당 저자 표기 86건, 부당 중복 게재 47건, 변조 17건, 위조 12건 순이다.
2014년 교육부가 제정·시행한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에 따른 연구 부정행위는 △위조 △변조 △표절 △부당 저자 표기 △부당 중복 게재 △연구 부정행위 조사 방해 △기타 등 7가지 범주로 요약할 수 있다. 부실(가짜) 학회 참석, 유령 학회 논문 게재도 대표적 연구 부정행위다.
논문 표절로 대표되는 연구 부정행위는 교수·연구원·대학원생 등 연구자들이 피해갈 수 없는 유혹이다. 그 실태는 어떠할까.
# 위조·변조
사립 H대 의과대학 A교수는 2016년 해외 저명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했다. 논문 요지는 ‘욕창이 있는 환자에게 주변 피부로만 수술하던 기존 방법과 달리 근육까지 함께 떼어 붙이는 게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논문을 두고 진위 논란이 일었고 해당 대학은 연구진실성위원회를 개최해 논문 검증에 착수했다. 예비조사, 본조사, 검증 3단계에 걸친 진상 조사 결과 지난해 2월 ‘위조’로 판정됐다. 해당 교수가 논문에서 제시한 데이터(수술 사례) 표본 수는 26건이었지만 실제 수술 기록은 6건에 불과했다.
대전 소재 K대 생명과학과 B교수는 2005년 ‘사이언스(Science)’에 인체 세포 내 약물을 자기장으로 유도해 특정 질병 치료에 필요한 약효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이른바 매직(Magic) 기술을 소개한 논문을 등재했다. 이듬해 그는 과학저널 ‘네이처 케미컬 바이올로지(Nature Chemical Biology)’에 인간 피부 상피 조직에서 추출한 노화 억제 물질 ‘CGK733’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논문에서는 임상실험을 근거로 ‘CGK733’을 인간 상피세포에 투입하면 세포 분열이 촉진돼 노화를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실체는 달랐다.
인간 노화 방지의 획기적 신기술로 포장됐던 매직 기술과 신물질 CGK733은 해당 대학의 조사 결과 존재하지 않는 실험으로 꾸며낸 가짜 결과물로 드러났다. 사이언스와 네이처 케미컬 바이올로지는 해당 논문 게재를 철회했고, 소속 대학은 B교수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해 정직 절차를 거친 후 최종 해임했다.
위조는 존재하지 않는 연구 원자료 또는 연구 자료, 연구 결과 등을 허위로 만들거나 기록 또는 보고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가상 인터뷰 대상, 가상 주제에 대한 설문지를 완성해 연구 결과를 날조하는 행위 △실제 수행한 적 없는 실험 및 연구 데이터를 날조하는 행위 △실제 수행한 실험·연구의 유효성을 추가하기 위해 허구의 자료를 첨가하는 행위다.
변조는 연구 재료·장비·과정 등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연구 원자료 또는 연구 자료를 임의로 변형·삭제함으로써 연구 내용 또는 결과를 왜곡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두 건은 과학 분야 대표적 논문 위·변조 사례다.
#표절
2016년 5월 국내 대표적 의생명과학 연구자 커뮤니티 브릭(BRIC·생물학연구정보센터) 게시판은 한 익명 제보자의 글로 달아올랐다. 지방 K대 소속 C교수 등 공저자 2명이 2008년 대한면역학회 학회지 ‘이뮨네트워크(Immune Netw)’에 게재한 영문 논문이 2006년 스페인 연구진이 국제 학술지 ‘어류·갑각류 면역학(Fish & Shellfish Immunology)’에 제출한 논문을 100% 가깝게 표절했다는 내용의 고발이었다.논란이 불거진 지 3년 후 논문 책임저자는 논문 표절을 인정하며 논문 철회를 요청했다. 도미를 대상으로 한 스페인 연구진의 면역 효과 실험 논문에서 도미를 무지개송어로 바꾸고 일부 표현과 주석을 수정한 것 외에 서론, 연구 방법, 결과, 참고문헌 부분까지 거의 비슷했다.
교육부의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에 따르면 표절 범주는 △타인의 연구 내용 전부 또는 일부를 출처 표시없이 그대로 활용하는 경우 △타인 저작물의 단어·문장 구조를 일부 변형해 사용하면서 출처 표시를 하지 않은 경우 △타인의 독창적인 생각 등을 활용하면서 출처를 표시하지 않은 경우 △타인의 저작물을 번역해 활용하면서 출처를 표시하지 않은 경우 등 4가지로 세분화할 수 있다.
각 대학, 학회 등에서는 턴잇인(Turnitin), 카피킬러(copykiller) 등 표절 검사 프로그램을 이용해 표절률 15~25%를 가이드라인으로 표절 여부를 판단하고 있지만 타인의 생각(idea)을 도용한 행위 등을 판별하는 명확한 기준은 없는 실정이다.
#부당 저자 표기
8월 24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열린 중앙윤리위원회에서 위원들이 회의실로 들어가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8월 21일 상임이사회를 열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이 고등학교 재학 중 영어 논문을 제출하고 제1저자(주저자)로 등재되는 과정을 지도한 단국대 의과대학 A교수의 심의를 중앙윤리위원회에 요청했다. [뉴스1]
지방 K교대는 총장의 논문 표절 논란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총장인 E교수가 제자의 석사학위 논문 주요 자료와 해석, 결론을 표절해 한국초등교육학회지에 게재했다는 것이다. 카피킬러 프로그램 표절 검사 결과 표절률 28%, 전체 126개 문장 가운데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동일 문장이 2개, 의심 문장이 62개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해당 대학 연구윤리위원회 조사 결과 7명의 위원 가운데 5명이 심각한 부당 저자 표기라는 데 손을 들었다.
부당 저자 표기 유형은 △연구 내용 또는 결과에 대한 공헌 또는 기여가 없음에도 저자 자격을 부여하는 경우 △연구 내용 또는 결과에 대한 공헌 또는 기여가 있음에도 저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은 경우 △지도 학생의 학위논문을 학술지 등에 지도교수의 단독 명의로 게재·발표하는 경우로 나눠볼 수 있다.
최근 논란이 된 ‘논문 저자명 품앗이’도 오래된 악행이다. 교수·연구원 신규 임용, 승급, 연구비 수령 등을 위해 필요한 연구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동료나 친분 있는 연구자끼리 논문에 이름을 서로 빌려주는 방식이다. 이는 대입 수시전형 확대 후 ‘스펙용 논문’에 자녀의 이름을 끼워 넣거나 동료 교수들끼리 자녀들의 이름을 돌아가며 끼워 넣는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2019년 5월 교육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07년 12월~2018년 3월 10년간 50개 대학 교수 87명이 139편의 논문에 미성년자 자녀를 공저자로 등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공식적인 혈연·학연 관계에서 드러나지 않는 연구자들끼리의 저자명 품앗이 사례는 규명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부당 중복 게재
3월 지방 I대 총장은 취임 2개월 만에 사퇴했다. 교수 시절 논문 중복 게재가 주원인이었다. 그는 한·중·일 삼국 다자 환경 협력을 주제로 한 논문을 1999년(지방정부연구), 2001년(21세기 정치학보), 2006년 상반기(한국환경과학회지), 2006년 하반기(국제정치연구) 중복 게재했다.논문 제목만 각각 동북아시아의 다자간 환경협약에 관한 연구(1999년), 한국·중국·일본의 다자간 환경 협력에 관한 연구(2001년), 동북아시아 환경협력 촉진에 관한 정책연구(2006년 상반기), 동북아시아의 다자간 환경협력에 관한 연구(2006년 하반기)로 바뀌었을 뿐 목차, 내용에서 차이점을 찾기 힘든 논문을 학회지에 중복 게재 후 교내 연구비 및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 국비 연구비를 수령했다. I대학 교수평의회는 ‘논문 유사성 검증표’를 제시하며 사퇴를 요구했고, 그는 총장에서 물러났다.
서울대 연구윤리지침,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 윤리규정에 따르면 이미 게재·출간된 자신의 논문·저서·보고서의 전부 혹은 일부를 정확한 출처 표시 및 인용 표시 없이 동일 언어 혹은 다른 언어로 중복 게재·출판해 마치 당해연도 연구에서 첫 발표하는 것처럼 사용하는 행위는 ‘부당 중복 게재’에 해당한다.
#유령 학회
노정혜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이 10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박대출 자유한국당 의원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 논문 관련 질의에 답하고 있다. [뉴스1]
e메일 내용은 F씨가 3년 전 국내 학회지에 발표한 외국 원자력발전소 건설 정책 관련 논문을 ‘American Journal of Management Science and Engineering(미국 관리 과학 및 기술 저널)’에 투고하라는 내용이었다. 해당 학회지 편집위원 및 심사위원으로 위촉하고 싶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e메일을 발신한 사이언스 퍼블리싱 그룹은 이른바 가짜 학술지 제작 업체다. 기 발표된 논문의 영어 번역본을 보내면 심사 수수료, 게재 비용, 발간 비용을 받고 유령 학술지에 게재해준다. F씨에게 논문 게재를 권유한 학술지는 물론 가짜다. 와셋(WASET·세계과학공학기술학회), 오믹스(OMICS·오픈 엑세스 과학 논문 출판사 및 학회)등이 대표적 유사 학회 혹은 해적 학회다.
2018년 12월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발간한 ‘연구진실성 제고를 위한 사례조사 연구’에서 박민아 한양대 교수는 “부실 학회, 부실 학술지 논란은 양적 지표 위주 평가 시스템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연구기관의 연구자 평가가 논문 출판 편수, 학회 참가 횟수 등 양적 지표를 기준으로 이뤄지는 반면, 질적 평가가 미흡한 현실을 그대로 악용한 사례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허술한 관련 규정도 문제다. BK21(두뇌한국21사업) 국제학술대회 인정 기준에 따르면, 한국을 포함한 4개국 이상의 학자들이 참가하고 발표 논문이 20건 이상이면서 외국인들이 발표한 논문이 50%가 넘으면 국제학술대회로 인정받을 수 있다. 외적 조건만 갖춰지면 학술대회의 질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된다.
2019년 5월 한국연구재단이 최근 5년간 와셋, 오믹스를 기준으로 국내대학 교수 참가 여부를 전수 조사한 결과, 90개 대학 교수 574명이 808회 참석한 것으로 조사됐다. 앞서 올해 1월 과기정통부는 4대 과학기술원(한국·울산·대구경북·광주)을 포함한 관할 출연 연구원 연구진 중 와셋, 오믹스 등 부실 학회에 참가한 4000명에 대해 출장비 회수 조치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