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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악마’ 5년! 뺨맞고 욕먹으며 우뚝선 7만 대군

‘붉은악마’ 5년! 뺨맞고 욕먹으며 우뚝선 7만 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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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여 명으로 시작한 아마추어 응원조직이 4억원의 종자돈과 회원수 6만7000명을 보유한 자생적인 거대조직으로 발전했다. 응원하다 뺨 맞고 장삿속에 휘둘리면서도 순수성을 잃지 않고 국가대표급 응원단으로 발전한 붉은악마. ‘해체를 목표’로 전국민이 붉은악마가 되는 날을 꿈구는 축구 마니아들의 세계.
겨울이 녹아들면서 2002년 월드컵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TV로만 보아오던 세계 축구 스타들이 한국과 일본에 넘쳐나고 액션 드라마 뺨치는 짜릿한 명승부가 펼쳐질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PC통신 동호회로 출발


킥오프 시간이 다가올수록 선수들의 가슴은 술렁이지만 이들보다 더욱더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한국 축구대표팀 응원단 ‘붉은악마’. 이젠 이들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마치 생활의 한 부분인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붉은악마의 광고를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으며, 축구경기 하면 동시에 붉은악마를 떠올리게 됐다.

이처럼 생활화한 붉은악마는 언제부터 우리 곁에 자리잡게 되었을까. 붉은악마의 초창기 모습은 통신동호회에서 출발한다. 1995년 하이텔 통신축구동호회 회원들이 모여 축구를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응원단이 조직됐다. 이들은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자극을 받아 한국축구의 전환적인 발전과 응원문화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 프로축구를 단체로 관람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처음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한국 프로축구의 응원 수준은 거의 원시적이었다. 각 구단들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치어리더를 동원, 막대기 풍선을 흔들며 야구식의 관중몰이 응원을 펼쳤다. 스피커에선 끊임없이 ‘남행열차’와 ‘건배’ 등 취기가 오르면 술상에서 금세 튀어나올 노래로 흥을 돋웠다.

하이텔동호회 초기 모임부터 붉은악마의 태동을 목격했던 이은호(현 스포탈아시아 기자)씨는 “경기에 지속적인 집중이 필요하지 않은 야구에서나 볼 수 있는 산만한 응원이 계속되었다”며 “선수들이 다쳐 넘어져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는데도 스피커를 통해선 관중들의 호응이 없는 ‘남행열차’ 음악이 장내를 한바탕 소란하게 울리고 지나가는 현실이 너무 서글펐다”고 밝혔다.

동호회 회원들은 맨처음 동대문운동장을 거점으로 유럽식의 응원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다른 응원방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뿔피리와 꽃가루를 준비하는 등 TV를 통해 본 여러가지 응원방식을 모방하는 것으로 첫 판을 장식했다. 당시 동대문운동장에서 주로 경기를 했던 부천축구팀이 집중적인 응원의 대상이 됐다.

1995년말 창단된 수원팀으로 응원단이 분산되면서 동호회 응원단이 확산 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당시 수원팀은 창단 이전에 이들 서포터스와 접촉, ‘치어리더를 고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좀더 발전된 형태의 응원단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호회 회원들은 수원팀의 진지한 태도에 만족을 표시하고 절반 정도가 수원의 서포터스로 옮겨갔고 이후 각 팀들의 서포터스가 조직,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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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준 < 스포츠투데이 기자 > toto@sports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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