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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환희 대구의 한숨 인천의 눈물

한국축구, 기적의 현장을 가다

부산의 환희 대구의 한숨 인천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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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장에서 길거리에서 TV 앞에서…. 5000만 국민은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쳤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FIFA랭킹 40위인 한국이 5위인 포르투갈을 깨고 대망의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것이다. 전국의 거리는 붉은 물결로 뒤덮였고, 지구촌 축구팬들은 경악했다. 2002년 6월, 한국은 분명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 가슴 뭉클한 현장을 밀착 취재했다.
후반 25분. 이영표가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에서 반대쪽으로 크로스 센터링을 올렸다. 가슴으로 볼의 속도를 죽인 박지성은 오른발로 포르투갈 콘세이상의 키를 살짝 넘긴 뒤,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볼이 그라운드에 닿는가 싶더니 박지성의 왼발이 불을 뿜었다. 포르투갈 바이아 골키퍼의 다리 사이를 뚫는 골이었다. 감히 58스웨덴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의 펠레가 빚어낸 묘기와 94미국월드컵 준준결승에서 네덜란드의 베르캄프가 선보인 예술에 견줄 만한 그림 같은 슛이었다.

우승후보 포르투갈은 그렇게 무너졌다. 66잉글랜드월드컵에서 북한에 뼈아픈 3대5 역전패를 안겼고, 91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도 역대 최강의 남북단일팀을 울렸던 포르투갈. 한국축구는 바로 그들을 제물로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룩했다. 한국인들은 2002년 6월14일 밤의 감동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부산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인천으로 옮겨가며 한반도 전역을 들끓게 했던 ‘16강 신화’의 현장을 직접 취재했다.

부산에서 시작된 신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출발이었다. 일부 축구인들은 조심스럽게 98프랑스월드컵의 악몽을 떠올렸다. 황선홍의 부상, 선수단의 불화설, 첫 경기 역전패…. 생각만해도 끔찍한 4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한국팀은 여러 모로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거스 히딩크라는 명장이 있었다.

프랑스와 세네갈의 개막전이 벌어진 5월31일, 모 스포츠신문 1면에 ‘최용수의 부상이 히딩크 감독에 대한 항명일 수도 있다’는 폭로성 기사가 실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표팀의 경기력을 크게 해칠 만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히딩크 감독과 최용수는 보도내용을 강력히 부인하며 조기진화에 나섰다. 곧이어 살림꾼 이영표가 차두리와 부딪쳐 쓰러지는 바람에 첫 경기에 뛸 수 없다는 비보가 선수단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빨리 엔트리를 교체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는 와중에 히딩크는 “그대로 간다. 이영표는 꼭 필요하다”며 선수들의 동요를 막았다.



경주 훈련캠프를 떠나 부산으로 이동하면서 히딩크 감독은 폴란드전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싸움을 앞둔 장수가 승리를 장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히딩크의 여유는 여느 때와 달랐다. 그것은 한국대표팀이 부산에서 나이지리아와 스코틀랜드를 꺾었다는 역대 전적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히딩크감독은 이미 동구권의 강호 폴란드의 장단점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폴란드전을 하루 앞둔 6월3일 저녁부터 부산 사직동은 축구열기에 휩싸였다. 6월4일 아침부터 잔여 티켓을 팔겠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 전국에서 축구팬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광주에서 제주에서 달려온 사람들은 “한국축구가 이번에는 48년의 한을 풀 수 있을 것 같다”며 들뜬 모습으로 밤을 지새웠다.

6월4일 오전 기자가 사직동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야구장 주변은 장사진을 이루었다. 티켓 매진이 시시각각 다가오면서 선택받은 소수와 선택받지 못한 다수의 희비가 엇갈렸다. 10m 앞에서 티켓이 끊겼다는 김영진(45)씨는 “암표라도 구하려고 30만원이나 준비했는데” 라며 아쉬워했고, 이틀째 영업을 포기하고 줄을 섰다는 택시기사 우영범(38)씨는 “일찌감치 해운대에 가서 자리를 잡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축구팬들의 열기와는 다른 측면에서 기자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부산의 날씨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무더웠기 때문이다. 오전인데도 나무 그늘을 찾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좋은 징조가 보였다. 기상청은 6월4일 저녁 부산지방의 기온이 20℃를 약간 상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날 저녁 부산 경기장의 기온은 23.9℃(체감온도는 28℃ 안팎)까지 올라갔다. 게다가 습도는 70%. 한국으로서는 천혜의 요새에서 폴란드를 만난 셈이다. 마치 제갈공명과 주유가 적벽에서 조조의 백만대군을 유린했던 것처럼.

4일 오후 4시. 경기장 주변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10여 명씩 무리를 지은 폴란드 응원단이 잠시 기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금세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 악마의 함성에 묻혀 버렸다. 야구장 앞에서는 풍물패가 분위기를 돋우었고, 실내체육관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는 사회보험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붉은색 옷차림이어서 얼핏 ‘붉은 악마’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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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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