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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냐 민주화 운동이냐

암울했던 80년대의 단상

축구냐 민주화 운동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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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어느날 전 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와 벨기에의 개막전으로 스페인월드컵이 시작됐다. 개막전은 저녁에 TV 녹화중계가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은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아닌가. 나는 고민했다. 대학을 위해 축구를 포기하느냐, 아니면 신나게 축구를 보고 더 열심히 공부하느냐. 몇 시간에 걸친 고뇌 끝에 결단을 내렸다. 축구를 보자! 나의 꿈, 나의 사랑, 아르헨티나 축구를 보지 않고서 학력고사 점수 몇 점 더 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 한 경기만 보고 내일부터 열심히 공부하면 되는 거 아닌가.

짝꿍과 함께 자율학습에 불참했다. 핑계는 ‘몸살’과 ‘두통’이었다. 자율학습이라 담임 선생님도 쉽게 허락했다. 내 짝은 축구에 별로 관심이 없던 녀석이었는데 내가 워낙 아르헨티나에 대해 환상적으로 이야기를 해놓은 데다 TV에서 월드컵 분위기까지 띄우다보니 마음이 동했다.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와 8시쯤부터 시작되는 개막전을 보았다. 기대했던 대로 아르헨티나팀은 환상적인 경기를 펼쳤다. 특히 이날 월드컵 무대에 첫선을 보인 마라도나는 화려한 개인기를 뽐내며 벨기에 진영을 헤집고 다녔다. 10만 관중도 아나운서도 해설자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옆에서 같이 보시던 아버지도 “허허, 그놈 참 콩알만한 녀석이 잘하네” 하며 연방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사실 마라도나의 플레이는 1986년 멕시코대회에서 완숙의 경지에 다다랐지만, 재기발랄함이나 파워, 탄력 면에서는 오히려 22세였던 1982년 스페인대회 때 더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특히 예선 두 번째 경기인 헝가리전에서 공을 오른쪽에 놓은 다음 왼발을 오른발 뒤로 옮겨 센터링하던 장면은 신기의 극치였다.

아르헨티나는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기습골을 허용하면서 벨기에에 0대1로 졌다. 개막전에서 전대회 우승팀이 고전한다는 징크스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르헨티나의 경기를 보면서 잠시나마 입시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짝꿍 녀석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자율학습 팽개치고 축구 보길 정말 잘했다”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자기도 마라도나와 아르헨티나의 팬이 되기로 했다면서 “다음에도 또 땡땡이 치자”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번 유혹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법이다. 한동안 축구를 잊고 공부에 몰입했지만, 개막전만 보고 열심히 공부하겠다던 결심이 와장창 흔들렸다. 게다가 최강의 전력으로 꼽히던 서독이 약체 알제리에 1대2로 지는 이변이 연출되면서 내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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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룡 < 대한축구협회 홍보차장 > skr0814@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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