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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환의 문화오디세이 ④

엽기적 카리스마에 매혹된 1930년대

황제의 은혜를 갚고 백성을 구할 영웅을 찾아라

  • 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icnunc@nate.com

엽기적 카리스마에 매혹된 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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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 카리스마에 매혹된 1930년대

한국에서 씌어진 잔 다르크 전기 ‘애국부인전’의 표지.

1900년대 한국 상황은 영웅대망론이 불가피했다. 500년을 이어온 한 나라가 망해가고 있었다. 퍼스트레이디가 사무라이들에게 처참히 살해됐고, 국가의 주요 개발사업 이권이 몽땅 외국인의 손에 들어갔다. 급기야 외교권이 없어졌고 군대는 무장해제당했다. 그래서 을사조약(1905년)에서 한일합방(1910년)에 이르는 시기에 영웅대망론이 급부상한 것이다. 문제는 힘이었고 무력이었으며 그것을 이끌 만한 지도자였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충신을 생각한다 하였으니 한국은 충신을 생각하는 시대요, 비상한 인물이 있은 연후에 비상한 사업을 성취한다 했으니 한국은 비상한 인물을 요구하는 시대로다. 슬프다. 우리 이천만 동포가 가장 사랑하는 한국아! 무슨 연고로 오늘날까지 황제의 은혜를 갚고 백성을 구하는 영웅이 나지 아니하느뇨.(최석하, ‘한국이 희망하는 인물’,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4일 논설)

우리가 꼽는 한국사와 세계사상의 영웅·위인들이 이때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았고 이들의 이야기가 역사와 동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영웅을 부르짖는 윗글은 “미국의 독립은 워싱턴을 기다려서 그 목적을 달성했고 독일의 통일은 비스마르크를 기다려 그 뜻을 성취하지 않았던가?”라는 구절과 잇대어 있다.

참으로 괴이하다. 저와 같은 생각의 구조란, 혹은 말하기(담론)의 방법이란 무엇인가. 당장의 상황이 너무나 급한데 만리 바깥에 있는 나라의 죽은 영웅을 불러내는 것이 제대로 된 지식인의 임무랄 수 있는가, 가진 것은 입밖에 없는 지식인의 허위의식인가. 아니면 전거(典據)에 기대어 생각하는 전통적 지식인의 습관인가.

애국에는 남녀가 없다



나폴레옹 외에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는 화성돈(워싱턴), ‘철혈’로 근대 독일을 만든 비사맥(비스마르크)이 일부 조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영웅이 됐다. 이들은 자기네 나라에서 근대 국가의 국부(國父)였기 때문이다. 그 수단이나 후과(後果)야 어떠했든 간에 일단 단결된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가리발디나 마치니, 미국의 링컨도 조선 사람이 기억하는 서양 이름이 되었다.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은 여성 영웅이다. 20세기 초 계몽주의자들은 나라를 구하거나 새로 세우는 일을 거들 존재를 찾아냈다. 바로 여성이다. 여성은 ‘애국’의 필요성 때문에 남성들에 의해 호출됐다. 그리하여 이 시기 한국사상 처음으로 여성 계몽과 양성 평등의 문제가 제기됐다.

이러한 새로운 생각을 구체화하고 대중적으로 선전하려면 적당한 대상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외국의 예를 들 수밖에 없었다. 조선 역사에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선 여성은 없었거나, 아직 보이지 않았다.

마침 프랑스에 적당한 두 여인이 있었다. 한 사람은 중세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를 구한 소녀 잔 다르크이고, 또 한 사람은 프랑스 대혁명기 지롱드당 지도자였던 잔 마리 롤랑(1754~93)이다. 잔 다르크는 약안(若安)이라는 이름으로, 잔 마리 롤랑은 라란(羅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한동안 애국자와 여학생들의 필독서였던 두 책의 주인공이 되었다. 바로 ‘애국부인전’(1908)과 ‘나란부인전’(1907)이다. 그래서 문예봉이 닮고 싶었던 ‘그 여자의 일생’의 여주인공 이금봉에게 동네 어른들은 커서 약안이나 라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했던 것이다.

특히 잔 다르크가 중요했던 듯하다. 알다시피 잔 다르크는 프랑스의 국가 영웅이다. 그녀는 1429년 이팔청춘 처녀의 몸으로 신의 부름을 듣고 프랑스를 침범한 영국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2년 뒤 신성모독, 우상숭배, 이단, 유혈선동, 남장 등의 혐의로 종교재판에 회부됐고 주교가 주재한 종교재판에서 ‘마녀’ 판정을 받아 결국 화형장의 재로 사라졌다.

잔 다르크는 그저 전설과 동화의 신비한 주인공이었다가 19세기 프랑스 혁명기에 이르러 국가적 영웅이 됐다. 이 시대에 잔 다르크는 못된 봉건군주와 귀족, 타락한 성직자 등에 대항한 공화주의적이며 민중적인 영웅으로 해석되었다. 수없이 많은 논쟁과 아전인수의 역사를 거친 잔 다르크는 오늘날 프랑스의 좌우파가 다 이용하고 싶어하는 ‘애국’의 상징이다(성백용, ‘잔 다르크-프랑스의 열정과 기억의 전투’, 역사비평 2004년 봄호 참고).

한국적 여인상에 꿰맞춘 잔 다르크

20세기 초 한국에서는 특히 ‘애국부인전’이 많이 읽힌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 나타난 잔 다르크의 면모는 자못 흥미롭다. 프랑스 처녀 잔 다르크가 한국화된 것이다. 비록 ‘약안’이라는 이름은 중국어 음차 그대로 두었지만, ‘애국부인전’의 저자는 능란하게 잔 다르크를 한국적인 여인으로 컨버전했다. 그래서 이 소설 또한 나폴레옹의 예처럼 대중적 상식이 창출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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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icnunc@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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