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호

대학가, ‘계층 세습’ 서막이 되다

2000만원 무담보 대출과 2000원 로또 사이

  • 손민규 동아일보 대학생 인턴기자 lugali@naver.com

    입력2008-03-07 18:2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부모의 재력이 사교육 수준을 결정하고, 사교육이 대학 입학을결정하는 시대. 대학의 간판은 다시 아르바이트 수입과 재정적 여유의 폭을 결정짓고, 나아가 졸업 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차이로, 결국은 수입과 계층의 차이로 연결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옛 신화가 사라진 자리, 누구는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2000만원을 벌어들이고 누구는 2000원짜리 로또에 유일한 희망을 거는 2008년 대학가의 회색 풍경.
    대학가, ‘계층 세습’ 서막이 되다

    2007년 10월 한 지방대 캠퍼스에서 열린 채용박람회장에서 취업 지원자들이 지원 회사를 꼼꼼히 살펴보며 면접을 기다리고 있다.

    김모(24)씨와 권모(24)씨는 모두 1984년생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대학생이며 남자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이들 사이에 공통점은 없다.

    김씨의 아버지는 서울대 출신 대학교수다. 어릴 때부터 줄곧 1등을 놓치지 않던 김씨는 주변의 예상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울대에 합격했다. 전공은 경영학이지만, 법을 공부해 기업 간 M&A 전문가가 되고 싶어 사법시험을 치렀다. 현재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그간 미뤄둔 학업에 매진하고 있다. 사법연수원과 군 복무 기간을 고려하면 그가 사회에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미 상위계층이 될 초석은 마련한 셈이다.

    김씨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바로 그해에 지방대 학생인 권씨는 군에서 제대했다. 사회의 따스한 환대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앞에 놓인 현실은 생각보다 더 냉혹했다. 부모의 사업이 망해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막연히 복학을 생각하고 있던 권씨는 등록금을 대줄 수 없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휴학 기간을 연장했다. 집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의대생은 등록금 걱정 안 한다?

    매일같이 인터넷을 검색하고 여기저기 발품도 팔았지만, 자격증이나 특별한 기술 없는 대학 휴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전에는 술집에서 서빙을 했고 지금은 사설경비업체에서 일한다. 야근이 잦고 근무도 힘들지만 시급은 고작 3500원. 자기 계발은커녕 먹고살기도 벅차다. 또래 친구들은 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스펙(취업 준비생들의 학점·이력·영어시험 점수 등을 일컫는 은어)’을 쌓고 있지만 권씨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개천에서 용 난다고요? 용은 고사하고 지렁이 한 마리도 못 나오는 게 요즘 현실입니다.”

    지방 국립대에 재학 중인 차승호(23)씨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니에요. 그냥 당연한 거죠. 요즘처럼 사교육비가 대학 입학을 좌우하는 시대에는 돈 많은 집안 아들딸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또 명문대생은 과외로 손쉽게 돈 벌어서 어학연수도 다녀와 스펙도 쌓고, 결국 좋은 직장 들어가고, 그러잖아요. 그에 반해 돈 없는 집안 사람들은 대부분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되죠.”

    언뜻 들어도 차씨의 말은 사회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다. 사회계층은 전적으로 경제적 자원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 사회적 명예 등 복합적인 요소들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는 대학생 사회의 계층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생의 계층화에 대해 성지훈(25·한국외대 2년)씨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사회에나 계층 분화는 존재하고 대학사회도 예외일 수는 없죠. 다만 대학생이라는 집단이 가지는 특수성은 있겠죠. 학교 간판의 차이 정도? 그 밖에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나 성별은 일반 사회에서나 대학사회에서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대학가, ‘계층 세습’ 서막이 되다

    밤 11시, 수업을 마친 학생들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는 경기도 일산 학원가의 버스들.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의대가 가장 인기 있는 학과로 자리 잡은 것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고소득이 안정적으로 보장되는 의대의 경쟁률은 해마다 살인적인 수준. 2008년 대입 수시 2학기에서 고려대 의예과는 무려 16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근래 대부분의 의대가 의학대학원으로 바뀌면서 학부과정에 의대를 남겨놓은 대학이 줄었기 때문에 문은 더욱 좁아졌다. 당연히 의대에 입학한 학생들은 수재 중에서도 수재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들 의대생은 사회적으로 어떤 계층에 속할까.

    “까마득한 선배들은 주말에 막노동을 해서 등록금을 벌었다는 ‘전설’도 얘기하지만, 그건 정말 옛날 일이죠. 올해로 5년째 학교를 다니고 있어도 그런 경우는 못 봤는데요.”

    올해 본과 3학년으로 올라가는 방종욱(24·인제대 의대)씨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성적은 좋은데 등록금 마련할 형편이 안 되는 학생은 애초에 의대에 오질 않아요. 학비가 싼 국립대나 교대로 가죠. 의대 등록금이 다른 학과보다 비싸잖아요. 더구나 요즘엔 잘사는 애들이 공부도 더 잘 하는 것 같아요. 뉴스에도 나오잖아요. 강남 출신 학생들이 타 지역에 비해 서울대에 더 많이 들어간다고요. 실제로 주변 의대생들 보면 대부분 등록금 걱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잘살아요.

    특히 의대는 본과 3학년에 올라가기 석 달 전부터 은행에서 2000만원쯤 마이너스 통장을 발급받을 수 있어요. 그러니 돈 때문에 휴학하는 일은 거의 없죠.”

    실제로 치의대 본과 3학년부터는 하나은행으로부터 2000만원 한도의 마이너스 통장을 발급받을 수 있다. 신한은행은 본과 4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비슷한 상품을 판다. 방씨는 “거의 모든 의대생이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한다”며 “만들어서 손해 볼 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발급받은 마이너스 통장으로 등록금을 대출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 그런 사례는 극소수라는 게 학생들의 말이다. 대부분은 술값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흥비로 사용된다는 것. 방씨는 “주변을 보면 생일처럼 특별한 날에는 술값으로 100만원, 200만원씩 쓰는 이들이 있다”며 “이럴 때 마이너스 통장을 쓴다”고 말했다.

    무담보 대출이긴 하지만 결국 빚이 아니냐는 질문에 방씨는 이렇게 답했다.

    “학생 시절에 빌린 돈을 못 갚는 경우는 없습니다. 인턴, 레지던트 끝나고 개인병원을 개설하는 과정에서 진 빚은 못 갚는 경우도 간혹 있다지만, 그건 차후의 문제죠. 의대생들이 대개 유복한 가정 출신이고 학교를 다닐 때도 경제적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건 분명합니다. 마이너스 통장이 있으니 디지털 카메라나 DVD 같은 전자기기를 사거나 여행을 갈 때도 부담 없잖아요. 의대생들은 높은 점수로 대학에 진학했고 학업 과정도 타 전공에 비해 힘들기 때문에 보상도 많은 거라고 생각하고요.

    요즘 의대 졸업생이 많아져서 벌이가 예전만 못하다고들 하는데요, 그렇지만 선배들 말 들어보면 전문의 따서 사회에 나가면 기본적으로 연봉 6000~7000만원은 보장된다고 하네요. 학부 때 마이너스 통장으로 빌린 돈이나 학자금 대출받은 것은 그때 다 갚을 수 있는 거죠. 다른 과 대학생들은 이자가 부담되서 학자금 대출도 선뜻 못 받는다고 하지만, 의대생은 그런 부담이 없습니다.”

    입시와 돈의 상관관계

    지난해 서울대에 입학한 양진환(20)씨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사교육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도 그 어렵다는 서울대 입시 관문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입학 후에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동기들을 보며 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언론에서 수능 만점자들을 인터뷰하면 꼭 ‘교과서 위주로, 학원은 안 다녔다’고 말했잖아요. 제가 꼭 그런 경우였거든요. 근데 주위 친구들은 학원도 많이 다녔고 과외도 많이 받았어요. 특히 영어 실력은 사교육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에 따라 차이가 크더라고요. 저를 비롯해 학교 공부만 충실히 했던 학생들은 수능 문제를 풀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이죠. 하지만 동기 중에는 어릴 때 영어권 국가에서 1년쯤 살다 온 경우도 많아요. 물론 대부분 집이 잘살죠. 어쩌겠어요. 이제부터 따라잡아야죠.”

    대학가, ‘계층 세습’ 서막이 되다

    52.9대 1의 실질 경쟁률을 기록한 서울시 지방공무원 시험이 치러진 지난해 7월8일 서울역 에스컬레이터가 지방에서 올라온 응시생들로 빽빽하다. 전날과 이날 서울행 열차표가 매진되자 코레일은 임시열차를 운행했다.

    사교육이 대학입시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2007년 8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사교육의 효과, 수요 및 영향요인에 관한 연구’는 사교육 효과가 미미하거나 오히려 역효과가 있다고 지적한다. 올해 대학 신입생이 되는 박소영(19·아주대 사회과학대학 입학 예정)씨는 “과외 선생님에게 개별 교습을 받거나 보습학원을 다니는 학생이 주변에 많지만 성적은 개인의 노력에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교육이 성적 향상에 필수적인지 여부는 차치한다 해도, 그간 사교육 시장이 엄청나게 팽창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앞의 KDI 보고서는 연간 25%의 비율로 가계별 사교육비가 급증했다고 지적했다. 주목할 점은 소비지출 상위 10%의 한 달 사교육비가 하위 10%의 8배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교육의 계층화 현상이 통계숫자로 명확히 입증된 것이다.

    교과서만을 공부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시대는 지나갔고, 개인과외, 보습학원, 조기유학까지 엄청난 사교육비가 필요하며, 이를 감당하려면 무엇보다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제 한국 사회의 정설이다. 사교육비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녀 뒷바라지에 만신창이가 된 학부모를 기다리는 것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대학 등록금 고지서다. 부산대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정재웅(24)씨의 말을 들어보자.

    같은 ‘88만원 세대’라지만…

    “평균적인 가정을 생각해봅시다. 자녀가 두 명 정도 있겠죠. 한국에는 국립대가 적으니까 자녀가 모두 사립대를 가는 경우가 많을 거고, 그러면 두 자녀 한 학기 등록금만 1000만원입니다. 장학금 제도가 잘 되어 있는 학교는 드무니 수혜자가 되는 경우는 예외로 봐야겠죠. 요즘은 어학연수도 가야 하고요. 이 정도 경제적 부담을 견뎌낼 수 있는 부모가 한국에 많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학생이 학비나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하지만, 과외라는 ‘황금 알바’는 오로지 스카이(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명문대생 차지죠. 지방대생이 한 달 내내 서빙해야 벌 수 있는 돈을 그 친구들은 과외 두 건으로 손에 넣죠. 명문대생들은 과외로 돈을 벌면서도 토익이나 자격증 시험을 볼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게 안 됩니다. 같은 88만원 세대라도 노동시간이 다르죠.”

    역시 지방대에 재학 중인 정가람(24)씨는 군 복무를 마친 후 지난 가을에 복학할 수 있었지만 다시 휴학했다. 등록금이라도 벌겠다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학교를 다니면서 돈을 벌까도 생각했지만 쉽게 돈이 모이지 않았다. 학기 중에는 시간대가 맞는 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설사 구하더라도 생활비밖에 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주변을 보면 다섯 명 중 한 명은 돈을 벌려고 휴학해요. 이유는 다 다르겠죠. 어학연수를 가려는 학생도 있고, 저처럼 등록금 벌려고 휴학하는 학생도 있죠. 그런데 이렇게 휴학을 하다 보면 사회에 진출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더 길어져요. 별다른 기술이 없는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 뻔해 경력에 도움이 안 되니까요. 결국은 시간만 빼앗기는 거죠.”

    반면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김모(25)씨의 경우를 보자. 대학 입학 후 꾸준히 중고생 과외 지도를 해온 그는 대학원에 진학한 지금도 한 달에 한두 건의 과외지도를 한다. 두 건을 하면 생활비를 제하고도 저축할 여유까지 생긴다. 무엇보다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고 돈을 벌 수 있어 좋다. 대개 주 2회, 월 30만~40만원. 시급으로 환산하면 2만원 내외다. 2008년 새로 책정된 최저임금 3770원보다 네 배 이상 많다. 이보다 많이 받는 경우도 있다.

    “주변에서 등록금 때문에 휴학하는 친구는 찾기 어려워요. 서울대 학생들은 과외만 해도 등록금 마련에 문제가 없거든요. 물론 예전보다 과외 구하기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구하게 되더라고요.”

    1989년 노태우 정부가 대학생 과외를 허용한 이후 이전까지 비밀리에 행해지던 대학생 과외는 이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물가는 올랐지만 ‘시세’는 10년째 거의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과외를 꼭 부잣집 아이들만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과외 비용이 여전히 보습학원보다 더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학부모들이 과외교사를 구할 때 신경을 더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학교 ‘명판’은 학부모들이 과외 선생을 구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요소다. 당연히 명문대 재학생이 유리하다. 서울의 유명 사립대에 재학 중인 이모(24)씨는 “우리 학교도 명문대에 속하지만, 학부모들은 ‘스카이’를 선호한다. 인맥이 아니라 중개업소를 통해 과외교사 자리를 구한다면 스카이가 아니고서는 어렵다”고 귀띔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른바 ‘과외재벌’도 생겨났다. 올해 스물넷인 H씨가 대표적이다. 서울의 명문대 재학생인 그는 현재 월 2000만원이 넘는 수입을 올린다. 연봉으로 따지면 2억원이 넘는 셈이다.

    “과외 덕분이죠. 처음에는 이렇게 많이 벌 수 있을 거라 생각 못했어요. 제가 상근예비역으로 군 생활을 했는데, 퇴근 후에 시간이 나잖아요. 그때부터 과외를 시작했는데 규모가 커져서 제대할 때쯤에는 40명 정도를 가르치게 됐어요.”

    현재 H씨는 과외로 모은 돈을 자본금 삼아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인수하는 등 ‘사업 다각화’를 꾀하고 있다.

    “제가 잘 가르쳐서 소문이 난 덕도 있겠지만, 그래도 시작은 학교 명판 덕이었죠. 솔직히 말해 제가 지방대 학생이었다면 과연 그렇게 많은 부모가 저를 믿고 자식을 맡겼을까요?”

    공무원 시험 열풍의 진짜 이유

    물론 H씨 사례는 극소수에 속한다. 그 사이 대부분의 20대들은 공무원 시험으로 몰려든다. 총 2888명을 선발한 지난해 9급 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무려 64.6대 1이었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노동이 유연화하면서 정년이 보장되고 보수도 괜찮은 공무원에 대한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지난해 경쟁률을 근거로 추산하면 올해 3357명을 모집할 예정인 9급 공채에는 20만명이 몰릴 것으로 보인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자가 폭증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안정적인 직장이기 때문이다. 외환위기를 맞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할 당시 넥타이 부대들의 퇴출과 자영업자들의 몰락을 지켜보며 사춘기를 보낸 요즘 대학생들은 ‘공무원이야말로 최고의 직장’이라는 생각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현실적인 이유 또한 만만찮게 작용한다. 현재 7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김모(24·상명대)씨의 말이다.

    “대기업에 취직하려면 스펙을 쌓아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영어가 제일 문제죠. 어학연수를 다녀와야 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까요. 그에 비해 공무원 시험은 초기에 학원비랑 교재비 빼면 돈 들어갈 일이 별로 없어요.”

    지난해 전역한 후 공무원 시험 준비에 매진하고 있는 강모(23)씨는 또 다른 이유를 들려줬다.

    “주요 대기업이 서울에 몰려 있다 보니, 지방대생이 취업에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방대 재학생은 서류전형을 통과하기도 어려워요. 공유할 정보도 부족합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채용과정이 투명한 공무원 시험에 지방대생들이 몰리는 게 당연하죠.”

    지방과 서울의 차이는 서울 소재 대학을 다니는 지방 출신 학생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한국외대에 재학 중인 감모(24)씨는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제가 고교 재학 때 이미 부산대나 경북대 같은 상위권 지방 국립대에 가는 것보다 서울소재 중하위권 대학을 나오는 게 낫다는 말이 있었어요. 지방 국립대를 졸업하면 공무원밖에 할 게 없다는 얘기도 하고. 그러니까 돈이 좀 더 들더라도 무리해서 서울소재 대학에 지원한 거죠.”

    요즘 고등학생들은 지방 출신 학생이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인(in)서울’이라고 표현한다. 인서울 여부가 대입의 성패를 가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감씨는 인서울에 성공했지만 연고 없이 대학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등록금에 집세며 생활비가 버겁기만 했다. 그는 학교에서 행정을 돕는 일과 번역 아르바이트, 과외를 하며 월 80만원 정도를 벌고 있다.

    “아비투스가 달라요”

    “고시생은 아니지만 고시원에서 살아요. 학교 앞 원룸은 월세가 40만~50만원이나 하잖아요. 웬만큼 넉넉한 형편이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죠. 지금 살고 있는 방은 책상 하나에 저 혼자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전부지만, 그것도 방세가 달마다 23만원이에요. 상경해서 느낀 건데, 서울에 집을 가진 사람이 제일 부럽더라고요. 빨리 졸업해서 돈 벌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지방에 있는 친구들은 서울서 학교 다닌다고 부러워하지만, 전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잘 수 있는 그네들이 오히려 부럽죠.”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에 진학한 채모(25)씨. 지난해 대기업 취업에 고배를 마시고 지금은 중간 규모의 컨설팅 회사에 다니고 있다. 채씨는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지방에서 성장한 학생과 서울에서 성장한 학생은 ‘아비투스’가 다르다”고 말했다. 아비투스(habitus)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사용한 개념으로, 개인마다 성장하면서 지니게 되는 계층적 권력 차이를 일컫는다.

    “개인의 아비투스는 세 가지로 구성됩니다. 경제적 자본,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 한국의 경우 중앙과 지방의 차이가 굉장히 심한 편이죠. 권력의 집중도가 다른 곳에서 성장한다면 개인의 아비투스도 달라질 수밖에 없죠.

    취업을 준비하면서 보니 서울 출신은 취업도 비교적 잘해요. 거기엔 사회적 인맥 차이가 작용할 겁니다. 서울에 터전을 가진 이들은 친척 중에 대기업 간부나 정부 고위관료가 꼭 한 명씩 있더라고요. 인맥이 당락을 좌우한다는 게 아니라, 그런 인맥이 정보의 양에서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취업이 더 쉽다는 의미예요.”

    요컨대, 지방과 서울의 차이는 단순한 ‘다름’이 아니라 위계적 질서를 가진 ‘차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생 한 방의 꿈

    서두에 등장한 권씨. 어젯밤 야근을 했는지 목이 잠긴 채 전화를 받았다.

    “희망이 있느냐고요? 당연히 없죠. 그렇다고 절망하지도 않아요. 희망과 절망이 모두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러니 인생에 감동도 없고요. 그냥 살아가는 거죠.”

    이유를 물었다. 이런 답이 돌아온다.

    “저를 포함해 사람들은 모두 ‘위’를 향한 욕구를 갖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안 돼요. 된다 된다 말들은 하는데, 사실은 안 돼요. TV에 나오는 훌륭한 사람은 그런 사례가 드무니까 나오는 거죠. 저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로 못 올라갈 거란 말입니다. 계층이 구조적으로 고착화되어 있거든요.

    집에 돈도 없고 학교 이름도 별로 안 좋은 저로서는 ‘인생 한 방’을 되뇔 수밖에요. 오늘도 로또 2000원치를 사는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