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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 정재민|전 판사·소설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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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영국 드라마 ‘셜록’의 한 장면.

집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아들과 딸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둘이서 누가 먼저 젓가락으로 메뉴판을 들어올리느냐는 시합에서 동생이 오빠를 이긴 모양이었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 중인 딸 옆에서 아들은 울상을 지으며 “반칙이야”를 외쳤다. 딸이 게임 시작 전에 메뉴판을 가운데 지점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깝게 뒀다는 것이었다. 딸은 메뉴판이 가운데 있었다고 항변했고 급기야 아들이 날더러 반칙이 있었는지 판정을 내려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순간 직업병 때문에 내 마음속에서 그 자리가 법정으로 변해버렸다. 아들이 고소인, 딸이 피고인, 아내가 증인, 내가 재판장. 판사를 그만뒀는데도 집에선 아직 판사 노릇을 해야 하다니. 난처했다. 아들 말이 맞다 하면 딸이 삐치고, 딸 손을 들어주면 아들이 서운해할 게 뻔했다.

무엇보다도 판사 때 빈번하게 그러했듯이 진상은 나도 잘 모른다. 당시 나는 동태찌개에 코를 박고 흡입하느라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다. 아이들에 의해 목격자로 지목된 아내는 당시 메뉴판을 힐끔 보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메뉴를 보려고 본 것이지 메뉴판의 위치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어린 딸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보면 거짓말을 대놓고 할 용기는 없는 아이라 실토를 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식으로 ‘신문’을 하고 싶진 않았다. 판결 대신 밥을 다 먹으면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하자 둘 다 “꺄!” 소리를 지르며 언제 다투었냐는 듯 그저 싱글벙글이다.

실제 재판에서는 판사가 입장이 난처하고 진상을 잘 모르겠다고 해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고 어물쩍 넘어갈 수 없다. 누가 어떤 법적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법적책임을 따지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 사실관계를 확정해야 한다. 그 당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소상히 밝혀내야 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의 머리를 한 번 때렸는지 두 번 때렸는지, 누가 지하철에서 누구의 엉덩이를 만졌는지 안 만졌는지, 누가 누구로부터 돈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누가 누구를 어떤 이유로 해고한 것인지 따위를 확정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법률가들은 ‘사실확정(Fact Finding)’이라 한다.



법리 논쟁보다 어려운 사실확정

판사가 되기 전에는 판사의 일이 대부분 법 위반을 판단하는 일인 줄 알았다. 이런 짓은 위법해, 이런 짓은 괜찮아, 그건 청구할 수 있어, 그럴 권리는 없어,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판사가 되고 보니 실제 재판에서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법리 논쟁이 아니라 사실확정이었다. 재판의 핵심이라고 앞선 연재에서 소개했던 증거조사 절차도 사실확정을 위한 것이다.

법리가 문제가 될 때에는 먼저 법조문을 찾아서 적용해보고, 법조문이 애매하면 판례를 찾아보고, 판례가 없으면 교과서나 논문을 찾아보고, 국내 자료가 없으면 외국 자료를 찾아보고, 그래도 안 되면 똑똑하다고 소문난 동료 판사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해결되었다. 그래도 답이 불확실할 때에는 그냥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택하면 된다. 그쯤 되면 어차피 하나의 정답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확정에는 정답이 있다. 그런 사실이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게다가 당사자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제아무리 똑똑한 판사라 해도 사실관계를 당사자보다 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판사가 판결문에 실상과 다른 사실인정을 하면 거짓말을 한 사람은 몰래 웃고 참말을 한 사람은 억울해서 피눈물이 난다.

판사가 되기 전에는 증거조사를 통해 차분하게 따져보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드라마 속 셜록 홈스나 CSI(범죄현장과학수사팀)처럼 명쾌한 논리적 추리가 가능한 줄 알았다. 순진한 착각이자 오만이었다. 증거조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기록을 여러 번 본다고 해서, 내가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는 도피성 위안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진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증거조사를 통한 사실확정을 퍼즐 맞추기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적절한 비유라 생각한다. 다만 실전의 퍼즐은 조각조각이 꼭 들어맞는 그림퍼즐이 아니다. 실전의 퍼즐 맞추기는 누군가 던진 벽돌에 와장창 깨어진 유리창을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들을 들고 복구하는 작업과 같다. 유리 조각의 절반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남은 조각은 그야말로 산산조각나서 복구 자체가 어렵고, 그럴듯한 조각을 집어 들어봤자 그것이 있던 제자리가 어딘지 알기 어렵고,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손을 베이는 피해자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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