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결 선고 날 아침 법정으로 걸어갈 때면 검은 서류 폴더 속에 판결문이 아니라 비수를 품고 가는 기분이 든다. 몽둥이일지도 모르겠다. 재판을 받는 사람도 판사가 징역 3년을 ‘때렸다’고 하지 않는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상처를 준 만큼 판사가 가해자에게 상처를 주어야 한다. 그들의 상처 크기에 감히 비할 수는 없지만 이로써 판사도 상처를 받는다.
선고일에 법관 전용문으로 법정에 들어서면 피고인과 그 가족이 법정을 가득 메우고 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나는 우리 가족이 사소한 응모에 당첨됐는지를 확인할 때도 떨리는데, 판결에 따라 피고인이 유죄일지 무죄일지, 감옥에 갈지 풀려날지 결정되니 피고인과 그 가족이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판사가 피고인을 부르면 피고인이 법대 앞으로 나와서 선다. 판사와 피고인 사이 거리는 서너 걸음밖에 안 되지만 심리적 거리는 서로 반대편 강가에 서 있는 것처럼 멀다. 판사에게 법정은 일상의 일터지만 피고인에게 법정은 북극만큼 춥거나 사막처럼 뜨거운 곳이다. 판사는 피고인에게 판결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해준다. 판결문 한 대목을 읽어주기도 한다. 규정에는 적절히 훈계할 수 있다고 돼 있지만 나는 일절 훈계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모범적으로 산다고 생각지 않고 어떤 삶이 옳은지 확신을 갖지 못하는데 누가 누구를 훈계하겠는가.
산타클로스 판사를 꿈꾸며
판사는 판결 이유를 먼저 간략히 설명한 다음 주문을 선고한다. 그동안 재판장을 빤히 쳐다보는 피고인도 적지 않지만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피고인이 더 많다. 판결문 주문은 ‘피고인을 징역 1년에 처한다’는 식으로 천천히 또박또박 낭독한다.법정 영화나 드라마 속 판사들은 판결을 선고한 뒤 반드시 ‘망치질’을 한다. 탕. 탕. 탕.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세 번씩 친다. 그러나 진짜 법정에는 ‘망치’가 없다. 진짜 검사에게 권총이 없는 것과 같다. 굳이 ‘망치질’을 하지 않아도 판사가 판결을 낭독하면 그 자체로 법적 효력이 생긴다. 심지어 판결문에 적힌 형량과 판사가 낭독한 형량이 다를 때는 판사가 낭독한 형량이 법적으로 유효하다. 판결문에 징역 10년을 적어놓았는데 판사가 실수로 징역 1년을 선고하면 징역 1년이 되는 것이다. 판사도 사람이다 보니 이런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나 피고인이 너무 좋아할 일은 아니다. 검사가 반드시 항소하기 때문이다.
집행유예를 선고할 때는 ‘피고인을 징역 1년에 처한다’고 한 다음 ‘다만, 이 판결 확정일로부터 2년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고 덧붙인다. 징역 1년형에 처해야 하지만 2년 동안 다른 범죄를 추가로 저지르는 등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실제로 집행을 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실형을 받을까봐 마음 졸이고 있던 피고인은 ‘집행을 유예한다’는 선고를 들으면 기뻐한다. 특히 구속돼 있던 피고인은 그 자리에서 석방되기 때문에 기쁨이 더하다. 집행유예는 징역형 선고 다음에 ‘다만…’ 하면서 이어지기 때문에 피고인들은 판사 입에서 ‘다만’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를 학수고대한다.
무죄판결을 선고하면 피고인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하다. 거의 예외 없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고개를 꾸벅 숙인다. 죄가 없어서 무죄판결을 해준 것이니 사실 피고인 처지에서는 본전인 셈이다. 아니 죄가 없는데도 그동안 몸과 마음 고생을 하고 변호사비까지 쓴 것을 생각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도 무죄를 선고해 혐의를 벗겨주면 그렇게 좋아하고 판사에게 감사해한다.
내가 징역형을 선고했는데도 유난히 감사해하는 피고인들도 있다. 감사 인사를 한 번만 하면 ‘피고인이 예의가 바르구나, 자존감이 높구나’ 싶지만 두 번, 세 번 하면 ‘내가 형량을 너무 경미하게 책정한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든다.
법정구속의 부담감
[동아DB]
재판을 하다 보면 막무가내로 폭언을 하거나 감정을 분출하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그렇다고 판사가 맞서서 화를 내며 싸우면 안 된다. 더 젊었을 때는 나도 억울하고 화가 나서 일일이 반박했다. 그러나 점점 그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대등한 위치에 있으면 맞서서 말다툼을 벌여도 무방하겠지만 법정에서 판사는 압도적으로 강한 위치에 있다. 인간의 품위는 약하지만 비굴하지 않거나 강하지만 힘으로 약자를 짓누르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반대로 약하다고 비굴해지고 강하다고 약자를 짓누르면 추해진다.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역시 법정구속이다. 이미 구속 상태인 피고인은 별도로 법정구속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구속 피고인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면서 집행유예를 하지 않으면 법정구속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재판장이 지금부터 법정구속을 하겠다고 하고, 변호인선임권 등을 고지하고, 구속 사실을 누구에게 통보할지를 물어본 뒤 구속영장을 검사에게 주고 집행을 하도록 한다. 그러면 법정에 나온 교도관이 데리고 간다.
언젠가 젊은 남성 피고인을 법정구속하는데 방청석에 있는 젊은 여성 임산부가 “판사님, 한 번만 살려주세요”라면서 오열한 적이 있다. 갓 결혼한 아내였다. 남성 피고인도 법정에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나로서는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경위와 교도관이 구속을 집행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내 자신이 정말 무정한 사람이 되는구나 싶었다. 10년 전 일인데도 아직 잊히지 않는다.
법정구속을 준비하고 구속영장까지 만들어 갔는데 차마 구속을 못 하고 돌아선 때도 있었다. 그 여성 피고인은 보험 영업을 하면서 수십 군데 빚을 지고 있었는데 정상적인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겁을 먹어 벌벌 떠는 상태였다. 평소에도 사리 판단이 명확하지 않은 편이었다. 자신이 구속될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런 상황인지조차 잘 몰랐다. 차마 구속하지 못하고 한 달 기회를 더 주었는데 그 뒤에도 사정의 변경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는데 선고 직후 “꺅!”하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교도관이 등을 툭툭 두들기면서 “괜찮아요, 괜찮아요”라고 하며 겨우 데리고 들어갔다. 구금실에 들어가자마자 통곡 소리가 법정을 가득 채웠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선고는 내 처지에서는 피고인과 작별하는 시간이다. 작별 인사를 하고 싶고 애도하고 싶다. ‘미안하다. 유감이다. 기죽지 말고 살아라. 당신을 나쁜 사람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피해자가 훨씬 더 아프다. 피해자에게 충분히 미안해했으면 좋겠다. 잘 살아요. 잘 가세요.’ 물론 그런 말을 마음속으로만 외칠 뿐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한다.
내가 판사직을 사직하기 사흘 전 마지막 선고를 한 날이었다. 보통은 선고를 하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당사자보다 먼저 법정을 떠나는데 이날은 마지막 날인 만큼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피고인과 그 가족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법대 위에 앉아 기다렸다. 그랬더니 돌아가던 피고인 가족 중에서 한 명이 돌아서서는 법대 앞으로 다가와서 나를 향해 항의했다.
“내 아들은 아무 잘못 없어요. 저놈(공범) 때문에 인생을 조진 거예요.”
나는 일어선 채로 그 말을 들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미 선고가 끝나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형식적인 반응뿐이었다. 나중에 돌아오면서 “어찌 되었건 어머님이 속이 많이 상하셨겠네요”라는 말 한마디할 것을 그랬나 하고 후회했다.
그 아주머니가 가고 나자 이번에는 또 다른 피고인 어머니가 법대 앞으로 다가왔다. 내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면서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아 머리를 한껏 숙이셨다. 자기 아들이 구속될 줄 알았는데 집행유예로 나오게 해주어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사실 집행유예도 유죄 판결이므로 내심 나는 젊은 아들을 전과자로 만든 것 자체가 미안했다.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드님이 인물이 좋던데 결국 잘될 겁니다”라고 했다. 그 역시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생각해보니 “마음고생 많으셨겠습니다”라는 말부터 했어야 하는데 하며 후회가 됐다.
그로부터 한 주 전에는 마약범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자 피고인의 어머니가 내게 아들을 풀어달라며 면담 신청을 했다. 이미 끝난 사건에 판사가 당사자를 만나면 오해와 문제가 생길 수 있어 통례에 따라 거부했다. 그 어머니는 그 추운 날씨에 세 시간 동안 법원 문 앞에서 울다 가셨다고 들었다. ‘그때 몸을 사리지 말고 그냥 법정으로 불러 말씀이나 들어드릴걸’ 하는 후회도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들었다.
작별의 시간
그렇게 평소보다 많은 후회가 생긴 것은 역시 그것이 마지막 재판이었기 때문이리라. 마지막에 등장한 세 분의 어머니 덕분에 문득 잊고 있던 내 어머니가 떠올랐다. 나를 판사로 만든, 내가 판사가 된 것을 못 보고 떠나신 내 어머니. 한때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길로 밀어주기보다는 당신 욕심에 지극히 세속적이고 재미없는 길로 자식 등을 떠미는 것 같아 어머니를 원망한 적도 있다. 이런저런 집안 형편 때문에 내가 속수무책으로 내 길이 아니라 부모님이 원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도 자식을 키우면서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이 세상이 아름답고 평화롭고 안전해서 마음껏 뛰어놀아도 되는 초원이 아니라 독초와 독사와 사나운 짐승이 수시로 출몰하는 야생의 밀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나도 내 자식에게 아무데나 가서 아무렇게나 뛰어놀라고 장려할 수 없게 됐다. 실로 판사직은 내게 분에 넘치도록 좋은 자리였다. 판사라는 이유로 나이와 깜냥에 비해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세계문학전집보다 더 생생한 삶의 비밀을 들을 수 있었다.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사건의 최종 운명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부모님 덕분이다.
그때 법관 전용문이 열리더니 동료 판사들이 법복을 입고 법대 위로 올라왔다. 우리는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법복을 입은 채 법정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어서 참여관, 실무관, 속기사, 경위와 함께 찍었다. 법정이라는 공간에서 동료들과 마지막 사진을 찍고 있으니, 10여 년 판사 생활과 나의 30대가 고스란히 동결되어 사진 속에 박제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내 마지막 재판의 마지막 순간이자,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 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