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호

정재민의 리걸 에세이

주관적 구성요건의 판단

범죄 현장에 멍하니 있으면 ‘묵시적’ 동의?

  • |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

    입력2018-08-1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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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에서는 미필적고의나 공모가 너무 쉽게 인정되는 경향이 있다.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한 사람이 ‘사기죄’를 저지른 형사범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법리 취지를 생각해보면 문제가 있다.
    ‘정의(正義)’라고 하면 정당의 권력투쟁이나 정치권력의 권한 남용을 쉽게 떠올리지만 사실 판사가 다루는 정의는 일상의 작은 것들이다. 그것은 국민이 부딪히는 정의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의의 문제는 ‘일상의 정의’ ‘생활형 정의’ ‘풀뿌리 정의’다. 작은 정의가 바로 세워져야 국민이 억울할 일이 줄어든다. 

    법에 정해놓은 범죄를 성립시키는 요건을 법조계에서는 ‘구성요건’이라 한다. 구성요건에는 객관적 구성요건과 주관적 구성요건이 있다. 객관적 구성요건은 눈에 보이는 행동을 말하고 주관적 구성요건은 고의나 과실같이 행위자의 내면에 관한 것이다. 

    사람을 때렸는지 여부와 같은 객관적 구성요건을 판단하는 것은 그나마 덜 어렵다. 더 어려운 건 주관적 구성요건을 판단하는 것이다. 나는 내 마음도 잘 모를 때가 많다. 심지어 마음이 시시각각 변한다. 중국음식점에 가면 아직도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하물며 남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미필적고의의 무서움

    누가 지나가다 테이블에 놓인 컵을 툭 쳐서 떨어뜨렸는데 고의로 그랬는지, 과실인지 판단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고의와 과실 사이에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가 있다. 미필적고의는 고의와 과실 사이에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고의로 분류되는 것이다. 그 정의부터 논란이 많다. 대법원은 ‘미필적고의라 함은 결과의 발생이 불확실한 경우 즉 행위자에 있어서 그 결과 발생에 대한 확실한 예견은 없으나 그 가능성은 인정하는 것으로, 이러한 미필적고의가 있었다고 하려면 결과 발생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있음은 물론 나아가 결과 발생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가 있음을 요한다’고 판시한다. 그런데 이런 기준을 실제로 적용하자면 모호할 때가 매우 많다. 그래서 미필적고의를 인정할 때는 특별히 더 신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살이 많이 쪄서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천명했다. 물론 진심이었다. 체중이 무겁다면 누가 살을 빼고 싶지 않겠는가. 헬스장도 비싼 돈 내고 등록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퍼스널트레이닝도 받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식 때 마지못해 상사가 주는 술을 마신 뒤 집에 들어와 해장도 할 겸 야밤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판검사가 이렇게 따져 묻는다고 해보자.



    직접 라면을 먹은 자, 유죄

    “라면을 먹으면 살이 찌는 것은 상식이지요?” 

    “네.” 

    “특히 밤에 먹으면 살이 더 찌겠지요?” 

    “네.” 

    “그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 라면을 먹었지요?” 

    “아, 그 당시에는 일단 해장을 하는 것이 우선이어서 먹었습니다만….” 

    “다시 처음부터 합시다. 밤에 라면을 먹으면 살이 찐다는 것은 원래 알고 있었지요?” 

    “네.” 

    “그럼에도 그날 밤 라면을 먹었지요?” 

    “네.” 

    “라면을 누가 억지로 먹였나요?” 

    “아니요.” 

    “스스로 젓가락질해가면서, 후루룩 냠냠 맛있게 드셨지요?” 

    “네.” 

    “그럼 살을 뺄 생각이 없었던 것 아닌가요?” 

    “네???” 

    “당신은 라면을 먹으면 살이 찐다는 ‘결과 발생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있음은 물론 나아가 결과 발생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살이 찌겠다는 미필적고의가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당신이 살을 빼겠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로 보입니다.” 

    “????????” 

    이 에피소드에서 라면을 범죄로 치환하면 유죄가 맞다고 생각하는 판검사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을 지나치게 왜곡하는 것이고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모순된 것이 공존할 수 있다. 나도 이랬다저랬다 갈피를 못 잡을 때가 허다하다. 사람은 어이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멍하니 아무 생각 없이 하던 일을 계속 반복하기도 한다. 사람은 때때로 모순적인 생각이나 말,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고의와 관련해 또 한 가지 늘 의문을 품고 있는 법리가 있다. 판례에 따르면 돈을 빌릴 당시에 갚을 의사‘나’ 능력이 없으면 사기죄의 고의가 인정된다.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함으로써 야기되는 이런 유형의 사기죄를 실무상 ‘차용금 사기’라 한다. 

    판례에 따르면 변제할 ‘의사’와 ‘능력’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사기죄가 인정된다. ‘and’ 조건이 아니라 ‘or’ 조건이다. 그런데 피고인이 나중에 돈을 못 갚으면 그가 돈을 빌릴 당시에도 변제할 의사나 능력이 없었다고 인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때 변제할 의사와 능력이 있었다면 왜 못 갚았겠느냐는 식의 논리 때문이다. 

    그러나 돈 많은 사람이 왜 굳이 돈을 빌리겠는가. 돈을 빌리는 사람은 다 당시에 돈이 궁했던 것이다. 돈을 마련할 능력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돈이 부족한 사람이 나중에 돈이 생길 것이라는 점을 100% 확신할 수 있을까. 돈이라는 것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인데. 특히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상황이 더욱 변화무쌍하다. 그런데 나중에 결과적으로 돈을 갚지 못하게 되면 현재 수사기관에서는 피의자가 애초부터 돈을 갚을 의사나 능력이 없었다고 간주하기 십상이다. 여기다 미필적고의까지 동원하면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사기죄가 성립될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진다. 

    돈을 못 갚는 것은 일종의 민사상 채무불이행이다. 빌려주는 사람은 돈을 빌려줄 때 담보를 잡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무모하게 빌려줄 경우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위험을 채권자가 부담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돈을 빌려주고 못 받으면 경찰서로 직행해 채무자를 고소하는 경우가 많다. 구속을 지렛대로 채무자를 압박하는 것이다. 실무상 1억 원을 못 갚으면 대략 징역 1년이라 계산한다. 큰 도시일수록 같은 금액을 변제하지 못해도 형량이 낮아 채권자는 채무자를 지방경찰서에 고소하려 하고 채무자는 서울 경찰서에서 수사를 받으려고 한다. 

    이런 현상을 ‘민사사건이 형사사건화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사기죄 전과자가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건 이 문제 때문이다. 사기죄 수사에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다. 즉 실질적으로 민사사건인 이런 사기죄를 해결하느라 경찰 인력이 허비되고 있다. 나는 감히 변제 당시 의사‘나’ 능력이 없다면 사기죄가 인정된다는 식의 판례가 폐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사’와 ‘능력’이 같은 선상에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의사’는 사람 마음속에 있는 주관적 구성요건이지만 ‘능력’의 존부는 객관적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것이다.

    공동정범 판정 기준

    우리나라에서는 ‘공모’ 또한 너무 쉽게 인정되는 경향이 있다. 여러 명이 함께 있다가 돌연 한 명이 폭행 등 어떤 범행을 저지르는데 그것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고 해서 같이 있던 모두를 공동정범으로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범이 그 범행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면 같이 있던 사람은 방조범이 될 것이다. 방조범은 정범에 비해 죄질이 덜 나쁘기 때문에 형을 감형한다. 그런데 방조한 것도 아닌데 그저 옆에 멍하니 있다가 수사기관이나 재판에서 공동정범으로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 따지자면 겨우 방조범이 될 사안이거나 방조범조차 되기 어려운 사안인데 처음부터 같이 범행할 ‘묵시적’ 의사가 있었다면서 공동정범으로 여기는 것이다. 

    사람은 돌발적인 상황에서 어쩔 줄 몰라 멍하니 있을 때가 있다. 물론 훌륭한 사람은 그 짧은 시간에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처신이 가장 적절한지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순발력이 좋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정도로 결단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훌륭한 소수의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면 주범이 아주 심한 죄를 저지르려고 할 때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과 같이 있던 사람이 누군가에게 어떤 행동을 돌발적으로 저지를 때, 저것이 범죄인지 아닌지조차 애매할 때, 주변에 있던 사람은 보통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자기가 그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하는 일이나 이해득실을 따지다 보면 굳이 나서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할 수 있다. 정범과의 관계가 곤란해질까봐서, 정범에게 자신도 똑같은 괴롭힘을 당할까봐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을 비겁한 사람이라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나쁜 놈’이라고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다고 해서 당연히 ‘공동정범’이라고 판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잉크 한두 방울

    고의를 인정할 때는 사람의 심리를 전체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면 미필적고의도, 공동정범도 지금보다 인정되는 경우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법리 취지를 생각해보면 미필적고의를 지금처럼 광범위하고 쉽게 인정하는 실무는 문제가 있다.
    이인복 전 대법관도 2011년 5월 전직 안산시장이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돼 1·2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상고한 사건에서 유죄판결을 파기하면서 이렇게 판시했다. 

    ‘검사의 공소사실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에서 보이는 여러 불일치, 모순, 의문에는 애써 눈감으면서, 오히려 피고인의 주장과 증거에는 불신의 전제에서 현미경의 잣대를 들이대며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형사법원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이렇게 고의를 쉽게 인정하려는 경향이 생긴 이유에 대해 나는 사람들이 선한 마음보다 나쁜 마음을 진심이라 믿는 경향을 가진 게 한몫한다고 믿는다. 남 앞에서 선한 척을 하면 이익이 생기지만 악한 척을 하면 이익을 얻을 수 없다. 그 불이익을 감수하고 하는 나쁜 언행이 더 진심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점이라도 나쁜 마음이 드러나면 다른 100점, 1000점의 마음까지 다 위선이고 가식이라고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맑은 물에 흙이나 잉크 한두 방울 들어가면 흙탕물 내지 검은 물이라고 해버리는 것처럼. 한 점이라도 좋은 마음이 드러나면 나머지 나쁜 마음을 다 본심이 아니라고 보지는 않으면서.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 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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