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호

정재민의 리걸 에세이

횡단보도 위의 정의를 꿈꾸며

  • |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

    입력2018-09-3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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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년 가을부터 ‘신동아’에 에세이를 썼다. 10여 년간 판사로 일하며 꾹꾹 눌러 담아놓았던 감정과 생각을 지면에 털어냈고, 비로소 법정, 판사실 그리고 괜히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재판 중에 만난 모든 분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드린다.
    이번 달까지 꼬박 2년간 ‘신동아’에 리걸 에세이를 연재했다. 2년 전 어느 가을날 ‘신동아’의 한 기자에게서 일회성 에세이 한 편을 써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받았다. 마감 기한이 짧았다. 아마도 기존에 쓰기로 한 필자가 약속을 어겨 ‘대타’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창간된 국내 최고령 월간지가 나처럼 변변찮은 작가에게 원고를 청탁해주니 기분이 좋기도 했고, 한 번 정도 쓰는 것은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아서 썼다. 법정에 나가기 전 10분 동안 판사가 하는 일에 대한 글이었다. 

    그 글이 나가고 난 뒤 ‘신동아’로부터 재판에 관한 에세이를 연재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한 번 글을 쓰는 것과 계속 연재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매달 원고 마감 기한이 다가올 때마다 빚쟁이에게 쫓기는 기분이 들 것이 뻔했다. 내가 판사를 계속할 생각이었다면 그 제안을 거절했겠지만 조만간 법복을 벗을 예정이기에 승낙했다.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고 해서 지난 10여 년 법정에서 꾹꾹 눌러담아 놓았던 감정과 생각을 털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월간지 필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출처 불명의 근사한 이미지(중절모를 쓰고 줄무늬 양복을 입고 머리에 포마드를 바른 채 앤티크 책상 위에서 구식 타자기를 치는)도 한몫했다. 

    그러나 막상 연재를 시작하니 글쓰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누가 에세이는 그냥 펜이 가는 대로 적으면 된다고 했나. 그동안 주로 판결문을 썼고 간간이 소설과 논문도 발표했지만 에세이 쓰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돌아보면 내가 자꾸만 근사한 글을 써보려고 용을 썼기 때문이다. 판결문을 쓸 때는 법과 판례 뒤에 숨을 수 있고, 소설을 쓸 때는 허구라는 모자이크 뒤에 숨을 수 있지만 에세이에는 저자의 알몸과 밑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런저런 잔기술로 분칠해봐도 싸구려 가발처럼 티가 나는 법이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판사로서 나는 세상을 발전시킨 판결을 내놓지 못했고, 정의의 투사였던 것도 아니며, 빛나는 자리에 오른 적 없고, 인품이 고매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의라 착각한 치기 어린 독선이나 오판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울분의 화상을 남긴 일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법복 속의 한 인간으로서 내 민낯은 더 내세울 것이 없다. 아직도 미성숙한 성정과 유치한 욕망에 휘둘려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곤 한다. 그러니 어찌 글만 좋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안착되자 글쓰기가 한결 편해졌다. 

    사실 내가 꿈꾸는 정의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가령 나는 우리 사회가 횡단보도 질서만 바로잡혀도 훨씬 더 성숙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나라 도로교통법상으로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우선이다. 자동차는 보행자보다 강자다. ‘갑을’로 따지면 갑이다. 힘으로 밀고 들어가면, 다시 말해서 ‘갑질’을 하면, 보행자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물러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은 횡단보도에서는 약자인 보행자를 우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자동차가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설 때 법치주의라는 인류의 멋진 관념적 발명품이 작동한다. 법이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도 이런 차원에서다. 누구나 약자의 입장에 처할 수 있는데 그때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마구 짓누르지 못하도록 장치를 설정해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횡단보도 위 현실은 어떤가. 횡단보도 앞에서 스스로 멈춰 서는 운전사가 그리 많지 않다. 불안감을 느끼면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나는 내 아이들의 안전이 불안해진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아온 알림장에 1순위로 적힌 글이 ‘차조심’이다. 왜 아이들이 차를 조심해야 하는가. 차가 아이들을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횡단보도에서조차 보행자가 존중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갑질’이 사라지고, 약자가 보호받고, 법치주의가 확립될 수 있을까. 내가 이 사회에서 각종 개혁들보다 가장 우선적으로 바라는 것은 횡단보도 앞에서 자동차들이 스스로 멈추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이다.

    사는 듯 사는 삶

    이 글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법과 정의와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해왔지만 그 이면에서 내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사는 듯 사는 삶이다. 인간 본성의 보편성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법정에도, 감옥에도, 법복 속에도 사는 듯 살아보려는 사람이 있더라는 증언을 세상에 하고 싶었다. 

    매일 아침 아파트 입구를 나설 때, 뜨거운 음식이 식기를 기다릴 때, 창밖 풍경을 내다보다가 초점이 흐려질 때 습관처럼 ‘나는 사는 듯 살고 있는가’라며 질문한다. 자동차로 금방 갈 수 있는 출퇴근길을 자전거를 타고 느릿느릿 오가거나, 햇볕 따뜻한 날 창가에 팔뚝을 쭉 내밀고 그 위에 쏟아지는 햇볕의 감촉에 집중하거나, 욕실에 넣어두는 수건을 정성 들여 각을 맞추어 갠 다음 돌돌 말아놓거나, 잠을 깬 뒤에도 한참 동안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거나,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 두꺼운 소설책을 몇 주에 걸쳐서 읽어내거나, 냉면집에서 비빔냉면을 먹을지 물냉면을 먹을지를 종업원이 다가오기 직전까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도 모두 사는 듯 사는 삶을 위해서다. 

    판사의 길을 걸을 때 처음부터 내가 설정한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도 사는 듯 사는 삶이었다. 법정에서 피고인을 만날 때마다 저분은 어떠한 사는 듯 사는 삶을 지향하다가 어느 대목에서 왜 난관에 부딪혔는지 반드시 가늠해보곤 했다. 사는 듯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다가 좌절된 사람들의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마치 내가 좌절된 것처럼 괜히 의기소침해지곤 했다. 

    훌륭한 판사라는 관점에서는 후회나 아쉬움이 가득하지만, 사는 듯 사는 삶의 관점에서는 지난 판사 생활에서 별 후회도, 아쉬움도 없다. 내 미련과 무지 때문에 오판을 내렸을지언정 판결문에 내 뜻에 반하는 문장을 적지 않고, 다수와 윗사람이 나와 의견이 다를 때도 내 소신을 숨기지 않으려 애썼다. 가끔씩은 기존 관행을 깨고 내 스스로 더 낫다고 믿는 방식으로 판결을 해보기도 했다. 판사나 변호사로서의 성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국제법을 재미와 의미에 따라 전공했고, 그 덕에 판사로서는 드물게 국방부와 외교부와 국제재판소에서 국익과 국제법질서를 위한 일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나의 단점과 한계를 발견할 때마다 오히려 내 자신이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재판을 할수록 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과 인생과 세상의 고상함에 대한 기대치는 점점 낮아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나는 덜 우울해지고, 덜 분노하며, 더 편안하고, 더 농담이 늘고, 더 행복해졌다. 나의 여정이 당초 계획한 삶의 궤도에서 멀어질수록 ‘에라 모르겠다’ 식의 홀가분한 체념과 무모한 용기가 생겼고, 주저하던 무엇인가를 기어코 저지를 때마다 나를 둘러싼 세계의 지평이 확장됐다.

    프록시마 켄타우루스

    판사 때 야근을 하다가 도저히 정답을 알 수 없을 때면 나는 등 뒤에 있는 창문 앞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별을 찾았다. 과학책을 읽어 보면 태양과 가장 가까운 별인 ‘프록시마 켄타우루스’에 가려면 시속 6만km가 넘는 우주선을 타고 가더라도 2만5000년이나 걸린다고 한다. 태양과 가장 가까운 별까지 거리가 그 정도인데 우리 은하계에만 해도 1000억 개의 별이 있고, 우주에는 그런 은하계가 다시 1000억 개 넘게 존재한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눈동자 하나만 해도 그 안에 우주의 별보다 많은 수의 원자가 들어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타인은 고사하고 내 자신을 이해하는 것조차 쉬울 리 없다. 

    그런 복잡한 인간을 놓고 유죄와 무죄, 실형과 집행유예, 징역 2년과 1년 같은 단선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으면 때로 내가 프로크루스테스가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침대에 묶어놓고 몸이 침대보다 길면 자르고 짧으면 늘여 죽이던 인물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떠나고 싶어졌다. 침대 밖으로, 세상을 말과 글로만 배우는 좁은 법정 밖으로 나아가 세상 속으로 직접 나아가보고 싶었다. 허공에 머물며 세상을 멀찍이서 내려다보는 새의 삶이 아니라 온몸으로 대지를 뒹구는 뱀의 삶을 한 토막이라도 살아보고 싶었다. 그것이 사는 듯 사는 삶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법복을 벗었다. 

    지난 판사 생활에도, 판사를 그만둔 것에도 후회가 없지만 재판 이야기를 2년 동안이나 글로 붙잡고 있었던 것을 보면 내 마음은 아직 법조계를 떠날 준비를 못 했던 것 같다. 연재 마지막에 이르니 비로소 떠날 준비가 되었음을 느낀다. 사는 듯 살고자 하던 사람들로 가득했던 법정을, 무거운 책임으로 짓누르던 법복을, 수만 건 기록을 넘긴 골무를, 적법과 위법의 이분법을, 옮음과 그름을 따지는 강박을, 고결하지 못함에 대한 자격지심을, 온통 법이었던 나의 스물과 서른의 모든 날들을, 그리고 괜히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재판 중에 만난 모든 분을.

    법대 위에 음식을 준비하는 마음

    재판은 상처로 시작해 상처로 끝난다. 시작하는 상처는 당사자끼리 주고받은 것이지만 마지막 상처는 판사가 준다. 남의 치부를 드러내고, 잘못을 지적하고, 처벌해야 한다. 그럴 때마다 실은 판사도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인지 재판하다 보면 불현듯 울적해질 때가 적지 않다. 

    그렇게 울적해질 때면 나는 혼자서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곤 했다. 따뜻하고 정갈한 밥 한 끼, 뜨끈한 탕 한 그릇, 쫄깃한 냉면이나 얼큰한 라면 한 사발, 달달한 빵 한 조각을 천천히 먹고 있으면 그 누구가 위로하는 말보다 더 위로가 됐다. 입안에 들어온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음식을 오물오물 씹다가 목구멍으로 꿀꺽 넘기면 울적함의 조각이 커피 속 각설탕처럼 스르륵 녹아버리곤 했다. 

    ‘심야식당’이라는 일본 드라마를 즐겨 본 적이 있다. 드라마 속 식당에는 사는 듯 살아보려다가 상처받은 손님들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얼굴에 깊은 칼자국이 난 주인장은 값싼 위로의 말 대신 묵묵히 작은 음식을 내놓는다. 나도 때로는 법대 위에 차가운 판결 대신 그 주인장처럼 따뜻한 음식을 내놓고 싶었다. 자잘한 파가 촘촘히 박힌 따뜻한 계란말이나, 돼지고기를 굵게 잘라 듬뿍 넣은 묵은지 김치찌개나, 부추를 가득 넣되 전은 얇게 부친 부추전이나, 뭉클뭉클하고 하얀 속살이 혀에 감기자마자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물곰탕을 내놓고 싶었다. 나와 재판에 함께한 모든 사람 앞에, 사는 듯 사는 삶을 위해 힘겹게 오늘을 버티는 모든 사람 앞에. 그런 음식을 만드는 마음으로 지난 2년간 글을 연재했다. 독자께서 맛있게 드셔주셨다면 더없이 감사하고 행복하겠다.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 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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