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조선의 아버지들

아들 김종직과 사림파 기틀 세우다

일상을 經典 가르침대로…김숙자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아들 김종직과 사림파 기틀 세우다

1/2
  • 15세기 성리학자 김숙자는 학문이 뛰어났지만 벼슬길이 오래 막혀 인생의 신산(辛酸)을 맛봤다. 청년 시절의 ‘불법 이혼’ 전력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학문의 연마와 실천에 힘썼고, 맡은 벼슬이면 무슨 자리든 최선을 다했다. 고난 속에서도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분투한 아버지였다.
아들 김종직과 사림파 기틀 세우다

김숙자,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 성리학의 뿌리를 같이한 7현(七賢)을 모신 사당 일원정(一源亭). 경남 거창군 소재.문화재청 홈페이지

우리 가족이 사는 아파트는 견고하다. 그러나 명색이 가장인 나의 입지는 불안하다. 우리 시대 아버지 중 상당수는 나와 처지가 비슷할 것이다. 왜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시대는 다르지만 아버지의 역할이야 크게 다를 리 없다.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과 집안의 명예를 지키며, 세상 일에 참여하는 것, 여기에 큰 차이가 있을 리 없다.
이런 생각을 하다 김숙자(金叔滋·1389~1456)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는 15세기 성리학자다. 고려 말의 대학자 길재(吉再·1353~1419)의 학통을 이었다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혀 인생의 신산(辛酸)을 맛봤다. 자연을 벗 삼아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라 그의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 되고 말았다.
청년 시절 김숙자는 ‘불법 이혼’을 했다. 이 때문에 기를 펴지 못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학문을 연마하고 실천하는 데 힘썼다. 또한 맡은 벼슬이면 무슨 자리든 최선을 다했다. 고난 속에서도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분투한 아버지였다. 최측근에서 이를 지켜본 아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아버지를 깊이 존경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일평생을 글로 적어 후세의 교훈으로 남겼다(김종직, ‘선공기년(先公紀年)’, ‘이존록(彝尊錄)’ 상).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 이황(李滉·1501~1570)에게 중국 사신이 물었다. “조선 성리학의 계통은 어떠합니까?” 이황의 대답은 이러했다. “정몽주는 길재에게 전하고, 길재는 김숙자에게 전하고, 김숙자는 그의 아들 김종직에게 전하고, 김종직은 김굉필에게, 김굉필은 조광조에게 전하였습니다.” 후세 학자들의 견해도 다르지 않았다.



인생의 굴레가 된 ‘이혼’

이황이 열거한 6명의 선유(先儒) 가운데 김숙자와 김종직은 부자지간이다. 얼마나 학문에 힘썼으면 부자가 도통(道統, 도학의 계통)을 주고받게 됐을까. 그들 집안엔 뜻밖의 사정이 있었다. 아버지의 불우함이 되레 그들의 학문을 채찍질했다. 벼랑 끝에서 기사회생한 그들의 이야기는 뜻을 잃고 좌절하는 오늘날의 아버지들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김숙자는 경학(經學)과 문장에 뛰어났고,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26세 되던 1414년(태종 14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5년 뒤인 1419년(세종 1년)엔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조정에선 청년 김숙자를 ‘사관(史官)’에 임명하기로 했다. 크게 출세할 조짐이었다.
그때 갑자기 김숙자를 태운 ‘벼슬의 배’가 풍랑을 만나 좌초했다. “김숙자는 자기 자식을 망령되게도 서얼이라 일컫고, 조강지처를 이유도 없이 내버렸습니다. 형법에 따라 그에게 곤장 80대를 치고, 이미 버린 아내를 데려다가 다시 가정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세종실록’, 세종 5년(1423) 7월 4일자) 사헌부로부터 이런 비난이 쏟아졌다. 세종은 사헌부의 말을 따랐다.
아들 김종직이 전한 말은 조금 달랐다. 언젠가 김숙자의 할아버지 김은유(金恩宥)에게 한 고을에 사는 한변(韓變)이 찾아왔다. 한씨는 자신에게 과년한 딸이 있는데, 결혼을 서두르지 않으면 곧 중국에 공녀(貢女)로 붙잡혀갈 것이라고 했다. 딱한 사정을 들은 김은유는 손자 김숙자와 한변의 딸을 결혼시켰다. 그런데 김은유가 세상을 뜬 후 중대한 문제가 드러났다. 한변이 신분상의 하자를 속였던 것이다. 김숙자의 부친 김관(金琯)은 집안의 장래를 망칠 수 없다고 판단해 이혼을 명령했다.
그러나 한변의 호소는 달랐다. 사위 김숙자가 과거에 급제하자 조강지처와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밀양의 부유한 집안으로 새 장가를 갔다는 것이다. 조정은 한변의 손을 들어줬다. 김숙자를 벼슬에서 내치는 한편, 부부가 재결합하라고 명령했다.



“관직이 德에 못 미쳤다”

하지만 김숙자는 재결합을 거부했다. 그는 새 아내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가 학문에 잠심(潛心)했다. 그렇게 13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김숙자의 학문적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마침내 조정에 복귀할 기회가 찾아왔다. 세자시강원, 즉 장차 임금이 될 세자(문종)를 가르치고 보좌하는 직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간원 관리들이 강력히 반발했다. “조강지처를 버릴 정도로 품행이 바르지 못하였다.”(‘세종실록’, 세종 20년(1438) 10월 26일자) 조정 관리들은 그의 이혼사건을 잊지 않았다. 1439년(세종 21년) 그는 동부학당(서울 소재 4부 학당의 하나)의 교수관(종6품)에 추천됐다. 그러나 그마저 사헌부의 반대로 물거품이 됐다. 김숙자의 일생에 드리운 이혼의 그림자는 짙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한참 뒤였다. 1454년(단종 2년) 4월 그는 66세로 성균관 사예(정4품)에 임명됐다. 이젠 누구도 그의 과거를 들먹이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성주교수관(星州敎授官, 경상도 성주의 교수)이란 한직을 얻어 시골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벼슬을 영영 사직하고 밀양으로 돌아갔다. 1456년 봄 그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그의 셋째 아들 김종직은 아버지가 평생 포부를 제대로 펴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며 한탄했다.

아, 선공(김숙자)의 평생은 그 관직이 그 덕(德)에 못 미쳤다. 31세로 문과에 급제한 뒤 13년 동안 시골에 묻혀 지내셨다. 벼슬은 참외(參外, 7~9품의 하급관리)로 시작해 대부(大夫, 4품 이상의 고위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28년 동안이었다. 그사이 6번 주부(主簿)의 벼슬을 했고, 부령(部令)은 2번, 현감이 3번, 교수관, 교리(校理), 부정(副正), 사예(司藝)가 각 1번씩이었다. 역임하신 관직은 모두 당대의 흔한 벼슬자리였을 뿐이다. (이혼 문제 때문에) 불우하고 영락하여 끝내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하셨다. (…) 아, 이것이 타고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고야 만 것인가.
-김종직, ‘선공기년’



평생 妾 안 둬

김숙자는 현달(顯達)하지 못했지만 노년에 성균관 사예를 지낸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조정이 그의 이혼 경력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게 됐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1423년 7월 이혼 문제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로 그는 불명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유교 경전에 기록된 예법을 지키며 성리학적 가족 윤리를 실천하느라 부심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일평생 단 한 명의 첩도 두지 않은 사실이다. 축첩은 당시 양반들의 일반적 관행이었다. 물론 그때도 남편이 첩을 두면 아내는 속을 끓였다. 김숙자의 아버지도 만년에 애첩을 두자 어머니 유씨 부인과 불화가 발생했다. 어머니는 그 일로 속을 태우다 작고했다. 김숙자는 “이를 가슴 아파하며 결코 첩을 두지 않았다.”(김종직, ‘선공기년’)
김숙자의 아우도 첩 문제로 한때 가정이 불화했다. 김숙자는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동생을 간절하게 타일렀다.” 마침내 아우는 스스로를 “몹시 부끄럽게 여기고 결국 부부의 도리를 처음과 같이 회복하였다.”(‘선공기년’)
김숙자는 실패로 끝난 자신의 첫 번째 결혼생활을 철저히 반성했다. 온 집안에 다시는 그런 비극이 재현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아들을 장가들이고 딸을 시집보낼 때면, 반드시 상대방이 세족(世族)인지, 그리고 가훈(家訓)이 있는 집안인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혼인 약속이 이미 결정된 다음에는 누구도 이간질하지 못하게 막았다.”(‘선공기년’)
김숙자는 불우한 친족과 이웃의 결혼도 적극 도왔다. 그에겐 기씨(奇氏) 집안에 시집간 누이가 있었다. 매부가 죽자 후처이던 누이는 전처의 아들로부터 모진 학대를 당했다. 김숙자는 앞장서 누이의 가정 문제를 해결하고, 가난으로 시집을 못 가게 된 조카딸의 결혼도 직접 주선했다. 그는 인륜의 출발점이 결혼에 있다는 성리학의 가르침을 철저히 신봉했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해둘 점이 있다. 15세기 초반만 해도 성리학적 가족 윤리는 아직 조선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축첩과 이혼 문제로 가정 불화에 빠진 양반들이 전국 어디에나 흔했다. 당시엔 김숙자의 경우처럼 집안 어른들이 이혼을 결정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또한 ‘병처(竝妻)’라고 하여, 정식으로 아내를 둘 이상 둔 양반들도 있었다.
이래저래 가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이가 많았다. 이것이 결국 전답과 노비 등의 상속 문제로 이어져 사회적 혼란이 야기됐다. 조정으로서는 방치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태종은 ‘병처’ 풍습을 금지하고, 오직 한 사람의 배우자만 ‘정처(正妻)’로 인정했다. 나머지는 ‘첩(妾)’으로 취급됐다. 이혼이 불가피할 경우엔 조정의 허락을 받게 했다. 그러나 조정의 이런 개혁 의지가 관철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보기에 따라 김숙자는 운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장인이던 한변이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던가, 조정 대신 중 한변을 적극 옹호하는 세력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현명한 김숙자는 자신의 비운을 받아들였고, 스스로를 채찍질해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꾀했다. 비록 시간은 걸렸으나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1/2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목록 닫기

아들 김종직과 사림파 기틀 세우다

댓글 창 닫기

2018/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