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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논픽션 다큐멘터리 - 남북 현대사의 10대 비화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 오세영│역사작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저자│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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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전쟁 발발 60주년, 그 사이 남과 북은 수많은 험난한 사건과 곡절을 넘어서 왔다. 뿌리를 함께하는 한 민족인 동시에 일촉즉발의 대치를 이어가야 하는 상대. 그 세월 동안 남과 북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 가운데 일부는 그 실체와 함의가 충분히 기록되지 못한 채 쓸쓸히 묻혀갔다. 역사의 이면에 남아 있는 이들 사건을 논픽션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정리한 역사작가 오세영의 연재를 시작하는 것은, 이 작업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나갈 남북관계의 길에 필요한 새로운 교훈을 얻고자 함이다. 작가는 해당 사건들의 관련 자료를 찾고 흩어진 기록을 모아 사실을 확인했고, 일부 자료가 부족한 부분은 객관적 정황을 유추했다고 밝혔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소설적 스토리텔링 기법을 일부 사용하기도 했다. 각각의 사건에 담긴 역사적 함의가 작가 특유의 내러티브를 통해 독자에게 더욱 생생히 전달될 것이라 믿는다. <편집자>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북파 20여 년 만에 호림부대 생존자들이 국방부로부터 정식으로 동료들의 전사통지서를 받았다고 전한 ‘동아일보’ 1970년 7월25일자.

1949년 6월29일.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산자락을 한 무리의 무장군인들이 소리를 죽이고 전진하고 있었다. 250여 명에 달하는 적지 않은 인원이다. 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꽤나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북한 인민군 복장에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어둠 속을 조심스레 전진하는 사이에 먼동이 텄고 비도 그치면서 산봉우리의 윤곽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산봉이군.”

일행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고산봉은 38선 너머 300m 지점에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38선을 넘었다는 말이 된다. 무장군인들의 얼굴에 일제히 긴장의 빛이 서렸다.

“정지! 잠시 휴식한다!”

지휘관이 지시를 내리자 38선 이북으로 침투한 무장군인들은 되는대로 주저앉으며 휴식에 들어갔다.

북파공작원들을 소재로 한 영화가 상영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었던 북파공작원들의 실상이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공작원이라면 흔히 북쪽에서 파견한 간첩이나 무장공비가 연상되지만, 오는 사람이 있으면 가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어서 남쪽에서 북파했던 공작원도 상당수 있었다.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실미도 북파 특공대는 청와대 기습을 노리고 남파됐던 북한의 124부대에 대항해 조직된 부대였다.

북파공작대의 뿌리는 의외로 깊다. 6·25전쟁 중에는 미군 정보기관이 주도한 켈로부대(KLO)와 북한의 반공인사들이 주축이 된 구월산유격대 등이 북한에 침투해 후방을 교란했고, 휴전 후에는 육군첩보부대에서 관할하는 HID가 대북공작을 주도했다. 그렇지만 최초의 북파공작대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 6월29일 38선을 넘은 호림부대(虎林部隊)다. 격전 끝에 대원 대다수를 잃은 채 세인의 기억에서 잊혀간 호림부대. 그들은 무엇 때문에 위험한 임무를 띠고 38선을 넘었을까.

‘너희가 내려오면 우린 올라간다’

6·25전쟁의 공식적인 시작은 1950년이지만, 전쟁은 사실상 1949년에 이미 시작됐다. 광복은 분단을 낳았고 남과 북은 끝내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1948년에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완전히 갈라서고 말았다. 이후 남과 북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자주 벌어졌다.

남한은 북한이 1949년 1월부터 10월까지 563회에 걸쳐서 모두 7만명의 병력을 남파시켰다고 발표했다. 그중 4214명을 사살했고 국군은 320명이 전사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북한도 선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같은 기간에 남한이 432회에 걸쳐 4만9000명을 북파하는 도발을 자행했고, 남한 비행기가 71회나 북한 영공을 침입했으며, 남한의 해군 함정도 42차례에 걸쳐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양쪽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남과 북은 매일 평균 1.5회가량 교전을 벌였고 날마다 3.7명이 전사한 셈이다. 가히 전시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는 상황이었다.

남과 북은 그렇게 극렬하게 대립했지만 내부 문제에서는 차이를 보였다. 북한은 일사천리로 노동당의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해갔지만 대한민국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남로당은 여전히 활개를 쳤고, 군대도 반란에 동조하는 형편이었다. 과연 신생 대한민국은 안팎의 위기를 무사히 극복할 수 있을지,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수·순천10·19사건이 진압되면서 사태는 조금씩 수습되기 시작했다. 남로당은 와해됐고 지리산과 태백산 일대에서 준동하던 빨치산도 대부분 토벌됐다. 여기에 유엔이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하면서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도 탄탄해졌다. 신생 대한민국은 한 고비를 넘긴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반대로 주변 정세는 북한에도 고무적이었다. 국민당이 대만으로 밀려나고 중국대륙이 공산화되면서 배후가 든든해진 것이다.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핵무기는 이제 더 이상 미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칼을 뽑으면 휘두르고 싶고, 말을 타면 경마를 잡히고 싶은 법이다. 최악의 상황을 극복한 남과 주변 여건이 유리해진 북은 서로 상대방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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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역사작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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