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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우, 절집 숲에서 놀다 ④

봄을 부르는 선암사 고매(古梅)

  • 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봄을 부르는 선암사 고매(古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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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의 독기가 빠질 무렵 사람들의 관심은 남녘으로 옮아간다. 남보다 먼저 봄을 누리려고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기만 기다린다. 탐매꾼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호남오매(湖南五梅) 중 으뜸인 선암사의 늙은 매화는 올해도 상춘객을 들뜨게 한다. 600년 묵은 매화와 더불어 야생차밭과 편백숲도 선암사의 자랑이다.
봄을 부르는 선암사 고매(古梅)

선암사 팔상전 뒤편의 600년생 선암매(천연기념물 488호).

우수 경칩을 지나면 탐매(探梅)꾼들의 마음이 바빠진다. 봄을 여는 향기를 남보다 먼저 즐기고자 언제 어디로 걸음을 나설지 궁리하느라 말이다. 너무 일찍 서두르면 꽃망울 맺힌 매화를 만날 뿐이고, 너무 늦게 나서면 수많은 상춘객의 소음으로 때 묻은 매화를 만나게 마련. 탐매꾼들은 한매(寒梅), 동매(冬梅), 설중매(雪中梅)를 더 귀하게 여기는지 모른다. 덜 풀린 날씨 때문에 번잡하지 않을 때 눈 속에서 인동(忍冬)의 세월을 지나 꽃을 피운 봄의 전령 매화를 오롯이 독차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탐매나 심매(尋梅) 행각은 예부터 격조 높은 봄맞이 행사(迎春)였다. 혹한의 세월을 견뎌내고, 은은한 향기와 고아한 아름다움으로 누구보다 먼저 봄소식을 전하기에 매화는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탐매에 빠진 애호가들은 취향에 따라 각기 백매, 청매, 홍매의 아름다움을 최고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산속이나 물가에서 자라는 야매(野梅), 굽은 가지에 내려앉은 푸른 이끼가 감싸고 있는 고매(古梅), 달밤에 핀 월매(月梅)는 물론이고 시로 보고 그림으로 읽는 매화를 통해서 봄의 향기를 감상하기도 했다.

오늘날도 산청삼매(山淸三梅)나 호남오매(湖南五梅)가 탐매꾼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산청삼매란 지리산 자락의 산청을 중심으로 자라는 세 종류의 매화를 가리킨다. 고려 말의 세도가 원정공 하즙이 심었다는 원정매(元正梅), 강희안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며 심었다는 정당매(政堂梅), 남명 조식의 남명매(南冥梅)가 여기에 속한다. 호남오매는 백양사의 고불매, 선암사의 선암매, 가사문학관 뒤편 지실마을의 계당매, 전남대의 대명매, 소록도 중앙공원의 수양매를 일컫는다.

정보통신 혁명의 광풍이 숨 가쁘게 몰아치는 바쁜 세태 속에서도 탐매 행각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마치 느리게 사는 삶의 전형인 양 속도전의 치열한 경쟁에 초연한 듯, 매화를 찾는 즐거움으로 마음의 풍요를 얻는다.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지리산 자락의 산청을 먼저 찾기도 하고, 정자골인 담양 소쇄원 백매와 식영정 홍매가 꽃눈을 터뜨릴 때만 애타게 기다리는 탐매꾼도 있다. 국가에서 자연유산으로 지정한 매화 중에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천연기념물 484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남녘의 절집에 터를 잡고 있다. 바로 화엄사 길상전 앞의 백매(천연기념물 485호),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천연기념물 486호), 선암사의 선암매(仙巖梅·천연기념물 488호)가 그것들로, 절집과 매화 사이에 얽힌 사연도 예사롭지 않다.

20여 그루의 늙은 매화

봄을 부르는 선암사 고매(古梅)

선암사의 무우전 고매들.

지난 수백 년 동안 봄의 전령 노릇을 해온 선암사의 600년 묵은 늙은 매화는 올해도 변함없이 꽃을 피웠다. 이즈음 각황전에 모셔둔 철불(鐵佛)의 미소가 더욱 정겨운 까닭은 무우전(無憂殿) 돌담길을 따라 무리지어 핀 고매(古梅)의 꽃망울이 터지는 합창에 취한 덕분일 것이다. 아니면 백매화가 내뿜는 암향(暗香) 때문일 것이다. 선암사의 매화가 전국의 탐매꾼들에게 무우전매로 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우전은 선암사에서 가장 외진 곳이랄 수 있는 대웅전의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 뒷마당에 철불이 봉안된 각황전이 있고 그 옆 마당에 달마선원이 있다.

선암사의 매화가 탐매꾼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또 있다. 무우전매가 한두 그루가 아닌 20여 그루를 칭하기 때문이다. 늙은 매화 한 그루만 있어도 그 향취와 자태를 즐기려는 탐매꾼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데, 수백 년 묵은 고매가 20여 그루나 있으니 이 좋은 기회를 탐매꾼들이 놓칠 리 없다.

옛 문인들은 가지에 붙은 꽃이 많지 않고(稀), 나이를 먹어(老), 줄기와 가지는 마른(瘦) 매화의 꽃봉오리 형상(?)으로 등위를 매겼다. 무우전 돌담 곁에서 400~500년 묵은 매화들은 고매가 지녀야 할 이런 품격을 간직하고 있다. 늙은 등걸에서 용틀임하듯 기이하게 구부러지고 뒤틀린 가지가 힘차게 뻗어 나와 점점이 붉은 꽃과 흰 꽃을 피워내는 자태는 탐매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중 2007년 11월에 천연기념물 488호로 지정된 매화는 무우전 건너편 호남제일선원과 팔상전 사이의 통로에 있는 600여 년 묵은 백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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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우│국민대 산림자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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