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금성, 고정간첩 속이기 위해 신용불량자로 위장
- 박기영씨 옆집으로 이사와 자연스럽게 동업 시작
- 北 보위부장 흑금성에게 “인공항문 좀 구해주시오” 부탁
- 北 조사부, 흑금성에게 “100만 달러 줄테니 함께 일하자” 제의
- 두부모처럼 쌓인 돈다발 김포공항 검색대 무사 통과
- YS, “아자의 대북사업 무조건 성공시켜라” 지시
- 흑금성, 북한 대표 접촉한 정치인 자료 안기부에 전달
- DJ 낙선 위해 아말렉 공작·오대산 공작 벌인 권영해
- 구명 위해 비밀파일 작성한 이대성
- 흑금성, “비밀녹음 자료 있다” 위협해 위기 탈출
- 신건 국정원 차장, 흑금성에게 조건 제시하며 녹음자료 반환 요구
김대중 정부와 현대그룹은 지난 5년간 쾌속으로 대북사업을 추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때는 큰 갈채를 받았지만 지금은 양쪽 모두 비난과 위기에 직면해 있다. 왜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까.
1998년 2월말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권영해 전 안기부장이 주도한 북풍사건을 수사했다. 이 수사는 남북관계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그런데 지금 이 경고가 부메랑처럼 정부 여당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소설 같은 공작의 세계
1998년 북풍사건 때 터져나온 또 하나의 사건이 ‘흑금성 사건’이다. 흑금성(黑金星)! 무협지에나 나올 듯한 이름이 안기부의 문서에 버젓이 올라가 있었고, 흑금성은 남과 북의 최고 정보기관을 오가며 첩보활동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흑금성의 정체는 박채서씨(朴采緖·48)인 것으로 밝혀졌다. 세상의 눈은 2중간첩일지도 모를 박채서씨에게 쏠렸다. 그러나 흑금성은 어느 틈엔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기자는 그때부터 흑금성이 어떤 일을 했는지 추적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흑금성의 실체를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설사 만난다고 해도 그가 모든 것을 털어놓을 리는 없었다.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데 한 해 한 해 세월만 흘러갔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흑금성이 관여했던 ‘아자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광고회사가 MBC 방송과 소송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MBC는 아자에 거액을 지불하고 북한에서 TV 프로그램을 찍으려고 했는데 무산됐다며 아자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
그러자 아자는 정부가 흑금성 박채서씨의 실체를 공개하는 바람에 대북사업이 무산되었다며, 1998년 정부를 상대로 77억원 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아자의 패소를 선고했다.
법원은 박채서씨가 구 안기부의 공작원으로 활동한 것은 사실로 보이나 안기부의 문서나 자료로 확증되지 않는다며 아자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는 논리인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안기부에서 작성한 흑금성 공작계획서를 갖고 오거나 당시 흑금성을 지휘했던 관계자를 불러올 것을 요구했으나 안기부는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고 관계자도 법정에 출두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아자는 엄상익씨(嚴相益)를 새로운 변호인으로 선임해 2심에 도전했다. 엄변호사는 박채서씨가 안기부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주력했다. 오랜 시간 박씨를 인터뷰 한 그는 과거 북풍사건 재판 자료까지 덧붙여 탐색한 후 박씨가 어떤 경로를 거쳐 공작원이 됐고 어떻게 공작을 했는지 알아내 방대한 분량의 준비서면을 작성했다. 기자는 이 서면을 입수했다.
기자는 아자커뮤니케이션의 사장을 지낸 박기영씨(朴起影·45)와 아자커뮤니케이션의 대주주였던 정진호씨(鄭鎭虎·47·미진아이디 대표)를 만나 보강 취재를 했다. 그리고 공개할 수 없는 몇몇 취재원의 도움도 받았다. 박채서씨에게는 여러 번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하지 못해 메시지를 남겼다. 그후 박씨는 단 한번 전화를 걸어와 ‘왜 내 기사를 써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미 공개된 공작
흑금성 기사를 쓰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흑금성의 정체가 드러남으로써 북한의 정보기관은 당시 안기부의 공작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여실히 알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정보기관은 흑금성과 비밀접촉을 했기에 여기서 “아” 소리만 질러도 대번에 “야, 어, 여, 오, 요”까지 알아들을 능력이 있다.
상대에게 이미 공개된 공작이라면 그 공작이 제대로 된 것인지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둘째는 흑금성 공작이 진행될 때의 상황이 4억달러 대북지원설이 터져 나온 지금 시점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북풍을 일으키면 뼈아픈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경험했는데도 정치권은 조심성 없이 유사한 실수를 반복했다.
공작은 국익을 위한 공작이어야 하는데, 정치인들은 이를 정치인을 위한 공작으로 바꿔놓으려 했다. 여기에 일부 정보기관장까지 가세해 마침내 국익까지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태가 반복되는 것을 막으려면 흑금성사건에서부터 북풍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연구해 차단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지금부터 기자가 입수한 흑금성 사건 자료를 토대로 그 어떤 잡지도 시도하지 못한 소설 같은 공작의 세계를 통과한다. 기사를 쓴 것은 기자지만 이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과 교훈은 독자 제위께서 스스로 구성했으면 한다.
◇ 제 1 부 발단 : 3인의 동업자와 편승공작 ”유에서 무를 창조하라”
지금부터 주인공은 ‘흑금성’ 박채서씨다. 박씨는 충청북도의 명문인 청주고를 거쳐 육군 3사관학교(14기)를 졸업하고 직업군인이 되었다. 갓 소령으로 진급한 장교는 육군대학에 입교하는데, 박씨는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국군정보사령부에 배치된 그는 1991년부터 정보사령부 공작단의 한미공작대 A-23팀에서 일하게 되었다. A-23팀은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미 CIA와 함께 대북 우회침투공작을 하는 비밀 조직이었다.
A-23팀은 조총련 조직원인 ‘서재호’라는 사람을 통해 대북 우회공작을 폈다. 서재호를 통한 공작이 마무리될 때쯤(1992년쯤으로 추정), 이 팀은 새로운 공작을 준비하게 되었다.
공작은, 공작을 담당하는 각 팀이 ‘이렇게 공작을 하면 좋은 결과가 있겠다’는 기획안을 만들어 상부에 올려 승인을 받으면, 그에 필요한 자금이 내려와 착수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북한 조선로동당의 대남 공작기관인 대외연락부와 조사부, 한국의 국가정보원과 유사한 국방위원회 직속의 국가안전보위부(이하 보위부)도 비슷한 방법으로 공작한다.
동구권과 소련이 붕괴된 1990년대 초 북한이 직면한 사정은 1997년말 한국이 처한 IMF 경제위기보다 더욱 심각했다. 이러한 경제위기는 북한의 공작기관에도 밀어닥쳤다(북한이 맞은 위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공작금을 지급하던 조선로동당은 “각 공작기관은 자체적으로 공작금을 마련해 공작하라”고 지시했다.
A-23팀의 공작, “고첩을 속여라”
정보의 세계에서는, 이상하게도 은밀히 주고받는 정보일수록 상대 정보기관에 재빨리 포착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상대 정보기관에 깊이 침투해 있는 고정간첩(고첩) 때문인데, 고첩의 활약은 생각 밖으로 대단하다고 한다.
보통의 한국인은 누가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이나 국군기무사 대공처, 그리고 경찰청 보안국 요원인지 알 방법이 없다. 이러한 요원들에 관한 정보는 주민등록 사항부터 거의 모든 것이 위장돼 있기 때문이다. 가족마저도 이들이 어떤 이름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북한의 공작기관에 근무하는 자들은 이를 훤히 꿰고 있다고 한다. 조총련에 포섭돼 대남공작 교육을 받았던 한 인사는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남한 각 정보기관에 근무하는 대공요원들의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슬라이드 사진을 수십 차례 보며 눈에 익혔다. 대공 요원들의 얼굴 사진을 정밀하게 찍을 정도로 북한 고첩망은 한국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고 말했다.
박소령 팀은 북한 공작조직이 당면한 자금난을 이용한 공작안을 마련했다. 이때부터 ‘엘리트’인 박소령은 무능하고 불평불만이 많은 장교가 되기 시작했다. 그는 동료 장교에게 수시로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아, 신용불량자로 찍히기 시작했다.
박소령의 이러한 행위는 감찰 파트에 체크되었다. 이 자료는 이후 박소령의 진급을 막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박소령이 중령 진급에 떨어진 것이다. 중령 진급을 1차에서 실패한 3사 출신은 어찌 어찌해서 2차나 3차에서 중령으로 진급한다 하더라도, 대령 진급은 언감생심 꿈도 꿔볼 수가 없다.
박소령의 군대 생활은 먹구름만 가득하게 된 것이다. 희망이 없는데 현실이 만족스러울 수 있겠는가? 자연 박소령은 군대 생활에 대해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신용 불량자에다 불평불만에 가득 찬 사람이 되었으니 그의 운명은 ‘예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3월 박채서씨는 3사 출신의 ‘그렇고 그런’ 소령 중의 한 명으로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박씨의 전역은 정보사에 침투해 있을 북한 고첩의 눈을 속이기 위한 ‘고도의 위장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랫동안 한국에 침투해 있는 고첩들은 맡은 분야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아주 냉철한 눈을 갖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보는 이들을 속여넘기려면, 공작관은 완벽하게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아야 한다. 자신의 운명까지도 바꿔가며 온몸을 던질 줄 알아야 진정한 공작관이다.
삼성 제품을 북한에서 찍는 광고사업비로 320만달러가 거론되고 있었으니 MBC의 250만달러를 더하면, 아자는 북한에 500만달러를 주고도 70만달러를 남기게 된다. 그리고 삼성과 계약이 끝난 다음에는 다른 회사를 선택해 북한에서 제품 광고를 찍을 터이니 아자의 미래는 더 없이 밝아 보였다.
1997년 5월26일 아자와 MBC는 북한을 방문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두 회사는 각각 통일원에 방북신청서를 제출했다. 통일원은 7월4일 아자에 방북허가를 통보했다. 그러나 7월30일 MBC에 대해서는 “언론사의 과당 경쟁이 우려된다”며 방북 보류를 통보했다. 이 일을 계기로 잘 나가던 사업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아자가 북한측에 순차적으로 지불하기로 한 첫번째 중도금 지불 날짜가 도래했다. 첫번째 중도금은 60만달러였는데, 아자와 MBC의 계약대로라면 두 회사는 이 돈을 절반씩 부담해야 한다.
그러나 MBC의 방북이 불투명해서 아자의 정진호 고문이 60만달러를 마련해 먼저 지불하기로 했다. 그해 8월9일 정진호 고문은 60만달러와 기타 비용 등을 준비해 베이징행 비행기에 탔다. 이때 정사장이 가장 염려한 것은 ‘이 많은 현금을 들고 김포공항 검색대를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였다. 이에 대해 박채서씨는 “염려말고 검색대를 통과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고문은 “검색대에 돈 가방을 올려놓으니 X-레이 화면에 두부모처럼 쌓인 돈 다발이 내 눈에도 보였다. 그런데 검색요원은 아무 말 없이 들어가라고 했다. 박씨의 능력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내 돈 다발을 찍은 X-레이 필름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아예 파쇄되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로써 정고문은 60만달러를 무사히 북한측에 전달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아자의 박기영-박채서씨와 촬영감독 변승우씨는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다. 8월17일 베이징에 도착한 이들은 리철을 만나 북한 고려항공 티켓을 받아 8월19일 평양에 들어갔다.
순안비행장에 도착한 이들은 번호판에 빨간 별을 붙인 벤츠승용차 석 대에 나눠 타고 제일 먼저 김일성 동상을 찾아가 헌화했다. 그리고 서재골초대소로 안내되어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이들은 보위부의 안내를 받아 평양 시내를 답사하며 촬영했는데, 이때 8월15일 밀입북했다는 전 천도교 교령 오익제(吳益濟)씨를 만났다(오익제씨는 15대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북풍을 주도한 핵심인물이 된다). 이후 개성과 백두산을 돌아보며 촬영 후보지를 촬영하고 베이징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서울은 기아사태를 계기로 경제가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15대 대선의 열기는 가일층 달아오르고 있었다.
YS의 친서 전달한 MBC(?)
그해 10월 통일부가 느닷없이 MBC측의 방북을 허가했다. 그러자 아자측과 접촉해온 MBC의 유흥렬(柳興烈) 전무가 “북한 방문 비자를 받아 달라”고 해, 아자는 베이징에 나와 있는 북한 대표단을 통해 황급히 비자를 마련해주었다.
유흥렬 전무와 김윤영 차장으로 편성된 MBC 방북단은 10월25일 베이징을 거쳐 북한에 들어갔다가 1주일 후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과당경쟁을 이유로 방송사의 방북을 허가하지 않던 통일부가 15대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MBC의 방북을 허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자 측의 핵심 인사는 “나중에 북측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의 친서를 북한에 전달하기 위해 MBC의 방북을 황급히 허가한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흥렬씨(대구MBC 사장을 지내고 퇴직)는 “친서는 없었다”고 말했다. 김윤영씨(현 MBC 홍보국장)는 “친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부서의 책임자였기에 정치와 무관한 자연·역사·인문지리 분야를 찍을 만한 곳을 주로 답사했다”고 말했다.
1997년 12월 한국은 IMF 외환위기를 맞고 크게 휘청거리는 가운데, 12월18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김대중 후보를 제15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런데 MBC측은 북한을 방문한 후에도 절반을 물기로 한 대금 지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98년 1월 아자가 MBC에 대해 “계약을 파기하고 다른 방송사와 계약을 준비하겠다”고 하자, MBC는 55만달러를 보내며 계약 유지를 요구했다.
55만달러는 아자가 북한에 지급한 65만달러(계약시 박기영씨가 지불한 5만달러에 정진호 고문이 전달한 60만달러)의 절반인 32만5000 달러와 곧 아자가 북한에 지불하게 될 50만달러의 절반인 22만5000달러를 더한 것이었다. 당시는 IMF 상황이라 환율이 1800원대로 치솟았으므로, 55만 달러는 10억원에 육박했다.
남은 것은 삼성과의 본계약. 삼성이 아자의 첫번째 광고주가 되면 아자의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이 진행된다. 삼성은 안성기씨 등을 모델로 북한에서 애니콜 광고를 찍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윤종용 삼성전자 사장 등의 북한방문을 추진했다.
3월12일 통일부는 윤사장 일행의 북한 방문을 승인했다. 윤사장 등은 3월30일 삼성그룹의 광고회사인 제일기획 직원 등과 함께 북한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이 방문이 끝나면 아자는 곧바로 안성기씨 등과 함께 북한에 들어가 광고를 찍을 계획이었다.
이 시기 삼성의 라이벌인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1989년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이 방북했고 1996년에는 비밀리에 북한에 밀가루를 보낸 바 있는 현대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조총련계 일본인인 요시다 다케시(吉田猛) 등을 동원해 북한과 접촉을 강화했다.
한편 이 시기 검찰은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안기부와 짜고 북풍을 획책했던 재미동포 윤홍준씨를 구속하고 이어 권영해씨를 비롯한 전직 안기부 간부들에 대한 조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3월17일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통해 한겨레신문을 읽던 박기영씨는 한겨레가 북풍관련 기사로 보도한 ‘이대성 파일’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이 파일에 나오는 흑금성의 행적이 박채서 전무의 행적과 똑같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를 프린트해 박채서 전무에게 준 그는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를 읽은 박채서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흑금성에 관한 보도가 나온 것도 충격인데 한겨레는 흑금성을 2중간첩으로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기자들이 아자 사무실과 박채서씨의 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날 이후 세간의 관심은 15대 대선에서 안기부가 벌인 북풍공작보다는 흑금성의 정체에 쏠리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아자의 대북사업은 올 스톱되었다. 정신없이 흑금성과 아자를 추적하던 언론은 4월10일 정주영 회장이 방북을 선언하고 6월15일 통일소 5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벌이자 일제히 그곳으로 이동해버렸다.
보위부는 말이 없다
광풍이 지나간 뒤 아자 앞에는 남은 게 없었다. 3월30일로 예정됐던 삼성전자 사장단과 아자의 방북은 공수표가 되었다. 박채서씨가 안기부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공개됐는데, 방북을 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형국이었다. 아자는 공중분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MBC가 지불한 돈 문제가 남은 것이다.
그해 5월22일 MBC는 그들이 추진했던 2차 방북을 자진 철회하고, 아자측에 그들이 지불한 55만달러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정진호씨는 “아자와 MBC는 비용을 절반씩 물기로 하지 않았나. 22만5000달러는 돌려줄 수 있어도 이미 북한에 65만달러를 지불했으니 MBC는 그 절반인 32만5000달러를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양측의 대립은 소송으로 비화해 2000년 3월 MBC는, 55만달러를 1998년 환율로 계산한 10억원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이 재판은 현재 진행되고 있다.
MBC로부터 소송을 당하기 전 아자는 정부가 흑금성 박채서씨의 실체를 공개했기 때문에 대북사업이 실패했다며 정부를 상대로 북한에 지급한 65만달러와 삼성의 광고 촬영이 무산됨으로 인해 소진된 비용 등 각종 경비를 더해 ‘77억원을 배상하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맡은 서울지법 제22 민사부는 아자측의 패소를 선고했다. 이에 불복한 아자는 엄상익 변호사에게 2심을 맡겨 서울고법에 항소를 준비하게 되었다.
아자에서 제공한 65만달러를 가져간 것은 한국의 국정원에 해당하는 보위부다. 베이징에 각종 위장 명함을 들고 나와 있는 보위부 직원들은 아자로부터 술값·밥값·숙박비는 물론이고 용돈까지 지급받았다. 그러나 65만달러는 정식 계약에 의한 것이라 손대지 못하고 고스란히 평양으로 보냈다. 보위부는 이 돈을 어디에 썼을까. 미끼를 따먹은 보위부는 말이 없다.
◇ 제 3 부 파국 : 공개된 비밀공작, 완패한 편승공작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남북 공작전과 남한에서 정치공작의 관계다. 흑금성의 공작과정은 전직 안기부 간부들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에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이 부분을 시차별로 추적해 들어가 보기로 한다.
15대 대선을 앞둔 1995년 여러 정당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북한과 접촉하기 시작했는데, 박채서씨는 북한과 접촉한 남한 정치인을 보위부를 통해 확인해 안기부에 보고했다. 그가 파악한 첫번째 정보는 이인제(李仁濟)씨와 관계된 것이었다. 박채서씨는 1997년 8월경 김정일이 자신보다 젊은 이인제씨가 남조선의 대통령에 당선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보고했다.
그해 10월 조평통 부위원장인 안병수(실제 직책은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와 참사인 강덕순(실제로는 보위부 과장으로 계급은 상장)이 베이징에서 이인제씨의 동서인 조철호(趙哲鎬) 동양일보 사장을 만났다.
대선 앞두고 북한 접촉하는 政黨들
북한측을 통해 이 사실은 물론이고 대화내용까지 알게 된 박채서씨는 안기부에 이를 보고하였다. 그때까지도 조철호씨는 통일원에 북한인 접촉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박채서씨가 국내 정치인의 북한 접촉과 관련해 안기부에 보고한 것에는 특히 김대중 대통령과 관계된 인물에 관한 첩보도 적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전 평민당 의원인 최봉구씨(崔鳳九)가 1997년 10월 베이징에서 안병수와 전금철을 만난 것이다.
박씨는 역시 북측을 통해 최씨가 한 말을 전해 듣고 안기부에 알렸다. 최씨 역시 그때까지 북한인 접촉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서울에 돌아온 후 안기부 요원들로부터 조사를 받게 되었다.
1997년 11월20일 한나라당의 정재문(鄭在文) 의원은 베이징 장성호텔에서 북한의 안병수와 강덕순·권민, 그리고 박채서씨를 만났다. 11월22일 박채서씨는 이 만남에서 정의원이 한 말 등을 안기부에 보고했다.
이 보고 때문에 서울에 돌아온 정의원은 서울 르네상스 호텔에서 안기부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어 박채서씨는 ‘정재문 의원을 만났던 북한의 강덕순이 갑자기 평양으로 소환되었다’는 첩보도 함께 보내왔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 세 사람은 모두 남북교류협력법 위반혐의로 기소돼 벌금 1000만원을 부과받았다.
각 정당이 북한과 비밀리에 접촉하는 것을 보면서 박채서씨는 스스로 한 정당을 선택하게 된다. 북한과 접촉하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북한은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박씨는 실제로 북한은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첩보를 안기부에 보냈다.
이러한 보고는 권영해 부장을 중심으로 한 안기부 세력이 북풍을 기획하는 단서가 되었다. 북한은 왜 김대중 후보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김정일이나 북한 최고 정보기관인 보위부의 간부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북한의 세 가지 대남전략 중 북한이 이 시기에 선택한 전술이 셋째 ‘대남 정치공작’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북한이 왜 김대중 후보의 낙선을 희망했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북한은 북한에 대해 유화적인 김대중 후보 세력이 야당으로 남아 계속해서 보수 여당을 흔드는 것이, 오히려 한국의 여러 정당으로 하여금 대북 접촉을 강화케 하는 요소가 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반대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 김대중 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과 정당은 반(反)북한으로 돌아 오히려 북한의 선택지가 줄어든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김대중 후보를 돕기로 한 박채서씨는 비밀리에 국민회의측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국민회의의 창구는 정동영(鄭東泳)·천용택(千容宅) 의원이었다. 박채서씨는 두 의원을 각각 10회·5회씩 만나 북풍 관련 첩보를 제공했다.
이러한 박채서씨의 협조는 오익제·윤흥준을 이용한 안기부의 북풍을 막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앞서 밝혔듯이 박기영·박채서씨 일행은 1997년 8월20일 평양에서 우연히 오익제씨를 만났다. 안기부는 흑금성의 보고를 통해 오익제씨가 평양에 와 있는 것을 알았다.
15대 대선의 파고가 높아가던 그해 11월20일 서울국제우체국은 10월31일 평양시 중구역에서 오익제씨가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해 안기부에 알렸다. 국과수가 필체를 조사한 결과 편지를 쓴 사람은 오익제씨로 판단되었다.
안기부는 이를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김대통령은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편지 내용은 공개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때 공개되지 못한 오익제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북에서는 후광(後廣: 김대중 대통령의 아호)의 대승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이북의 영도자와 합의하여 통일을 성취하겠다는 소신을 표명하였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후광 선생님이 집권하면 금세기 안에 반드시 통일 성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보낸 편지를 잘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흑금성의 보고와 오익제 편지를 통해 북한이 김대중 후보 당선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안 안기부는 바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 구사를 계획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의 반대로 편지 내용 공개가 좌절되는 바람에 제2안 마련에 들어갔다.
권영해 부장은 즉각 고성진(高星鎭) 대공수사실장(103실장)을 불러 ‘오익제가 미국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는가’ 등을 내용으로 하는, 김대중 후보에게 보내는 질의서를 작성케 했다. 그리고 12월2일 고실장으로 하여금 국민회의의 천용택(千容宅) 의원을 만나 오익제 편지 사본과 질의서를 건네주며 답변을 달라고 요구했다.
안기부에는 김대중 후보에게 강한 거부감을 갖는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누구보다도 소신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권영해 부장을 중심으로 한 이들은 YS의 제지를 무릅쓰고 오익제씨에 대한 수사를 하는 쪽으로 의견을 굳히고, 12월4일 오익제씨의 월북 경위를 수사하자는 압수수색영장을 만들어 올렸다. 권영해 부장은 이 영장에 김대중 후보가 오익제씨를 만나 찍은 사진 등에 관한 내용을 추가로 넣으라고 지시했다.
아말렉 공작과 윤홍준의 협박
12월5일 서울지법은 안기부에서 청구한 수색영장을 발부했는데,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대통령선거를 13일 앞두고 터진 이 사건에 정치권, 특히 국민회의측이 경악했다.
국민회의 조세형(趙世衡) 총재권한대행과 DJP 연대에 참여한 김종필(金鍾泌)씨는 즉각 “안기부가 북풍을 획책하고 있다”고 맹비난하고 나섰다. 언론 또한 안기부가 기대한 대로 움직이지 않고 매우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로써 안기부는 오히려 북풍을 획책하려는 세력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권부장은 김대중 후보와 오익제씨가 같이 찍은 사진과 오익제 편지를 각각 260매, 60매씩 복사해 각 공작팀으로 하여금 주요 기관에 뿌리게 했다. 이어 자유총연맹·재향군인회 등을 동원해 김대중 후보는 오익제 편지와 관련된 의혹을 해명하라는 성명을 발표케 했다.
그러나 이 공작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이 내용은 洪景植 부장이 이끄는 서울지검 공안1부 수사에서 이미 밝혀진 것이다). 그러자 안기부는 재미동포 윤홍준(尹泓俊·무역업자)을 이용한 제3차 공작에 착수하게 되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17장에는 이방인 ‘아말렉’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권부장은 윤홍준을 이용한 공작을 ‘아말렉 공작’으로 명명했다(권씨는 훗날 검찰에서 아말렉은 친북인사를 뜻한다고 밝혔다). 아말렉 공작은 해외 사항이므로, 12월6일 권영해 부장은 이대성 해외공작실장을 불러 윤홍준 기자회견 준비를 지시하였다.
재미동포인 윤홍준은 안기부의 협조자(에이전트)로 북한을 들락거리는 사람이다. 1997년 7월 그는 “조선족인 허동웅은 지난 2년간 중국에서 남북한 의류 임가공사업을 해왔는데, 그는 국민회의 조직1국장 조만진과 연결돼 있다. 허동웅은 연변대학 졸업자로 헤이룽장성 신문사를 거쳐 북한을 여덟 차례나 방문했다. 허동웅은 베이징에 북경북방태화경제무역유한책임공사란 회사를 차렸는데, 이 회사 사무실은 북한의 대외경제추진위원회 북경지사와 같은 건물에 있다”는 보고를 안기부에 보낸 바 있다.
권부장은 ‘조만진-허동웅을 매개로 한 국민회의와 북한의 연계를 폭로하라’고 지시했다. 이실장이 “윤홍준의 첩보는 불충분하다”며 반대 의견을 피력하자 권부장은 “윤홍준이 제 입으로 자기가 입수한 것을 발표케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회사는 무관하지 않은가”라며 못을 박았다. 그리고 권부장은 5만달러가 든 행정봉투를 공작금조로 이실장에게 건네주었다.
다음날 이대성 실장은 송봉선 단장과 김○상·이○일 직원 등을 불러 윤흥준 기자회견을 준비하라고 지시하며, 2만달러를 이○일에게 주었다. 이○일은 윤홍준과 통화해 기자회견을 하겠다는 동의를 받아냈다.
그리고 과거 윤홍준이 보내온 첩보를 토대로 윤홍준이 기자회견에서 발표할 내용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김대중 후보는 1971년 7대 대선부터 15대 대선까지 북한으로부터 선거자금을 받았고, 조만진과 허동웅을 통해 북한과 접촉했다. 1996년 8월15일 중국 인민대 상무위원 완리(萬里)의 아들은 허동웅과 함께 일산의 김대중씨 집을 방문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태 임동원 사무총장은 1995년 10월 베이징의 장성호텔에서 북한 아태의 고위 간부를 만났다.…’
12월9일 이○일은 서울 가든호텔 근처 커피숍에서 윤홍준을 만나 1만9000 달러를 주고 “권영해 부장이 당신 회사의 경영을 보장해주기로 했다”는 언질과 함께 기자회견문을 주었다. 12월11일 윤홍준은 베이징에서 한국 특파원을 불러놓고 기자회견을 열었으나, 국내 언론은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베이징 기자회견을 마치고 황급히 도쿄로 간 그는 다음날 또 기자회견을 가졌으나 마찬가지로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자 안기부는 윤홍준을 서울로 불러들여 16일 기자회견을 갖게 하고 바로 출국시켰다. 그러나 이것도 ‘약발’을 발휘하지 못했다.
15대 대선이 실시되기 직전 북한의 평양방송은 오익제가 “월북 직전 김대중 후보와 통일 문제를 자주 의논했다. … 김대중 후보는 자신의 3단계 연방제안이 북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일부 상통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발언했다고 보도했다. 아말렉 공작이 실패하자 권부장은 이러한 보도를 녹음해 각 방송사에 돌리는 ‘오대산 공작’을 지시했다.
안기부의 통제를 받는 내외통신사는 12월15일 오익제 방송 테이프를 보도하고 같은 날 안기부는 이 테이프를 각 방송사에 제공하였다. 그러나 방송사들은 이 테이프를 방영하지 않았다. 그러자 임경묵(林慶默) 102실장은 KBS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왜 방송을 내보내지 않느냐”고 강력히 항의했다.
이런 가운데 18일 치러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자, 윤홍준이 전화를 걸어와 “당신네가 꾸민 것을 폭로하겠다”며 거꾸로 안기부를 협박했다. 안기부 핵심 간부들이 크게 당황하였다. 그들이 낙선공작을 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것만 해도 크게 부담스러운데 윤홍준이 배신한다면 이들의 최후는 매우 비참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안기부는 급히 20만달러를 윤홍준에게 건네며, 기자회견은 안기부의 개입 없이 윤홍준 단독으로 한 것으로 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대성 파일 알고 있던 박채서
1998년 2월말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서울지검 공안부는 수사기획단을 만들고 윤홍준 기자회견 등 일련의 북풍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안기부에서도 이삼생 감찰실장의 주도하에 송봉선과 김은상씨 등을 소환해 조사에 들어갔다.
차츰 수사의 칼날이 다가오자 이대성 실장은 이종찬(李鍾贊) 신임 안기부장을 만나 권부장 시절에 있었던 북풍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했다. 이부장은 이실장을 안심시켰으나 검찰은 안기부 직원을 계속해서 구속했다. 이실장은 북풍 수사와 관련해 이종찬 부장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이실장은 ‘김대중 대통령 측근들의 대북접촉 사실을 알리면, 이종찬 부장은 적어도 안기부가 개입된 문제에 대해서는 힘을 쓸 수 있을 것(안기부 직원을 보호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훗날 ‘이대성 파일’로 불리게 된 일단의 문건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실장은 과거부터 안면이 있던 정대철(鄭大哲) 의원을 통하면 구명되리라 생각하고 3월8일 타워호텔에서 정의원을 만났다. 이실장은 ‘대선 전후 북한의 대남공작 기도와 전망’이라는 제목을 붙인 자료를 꺼내 설명했다.
이 자료에는 조철호 사장과 최봉구 전의원, 정재문 의원 등이 북한측 인사를 만나 이야기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자료를 설명하고 난 이실장은 “윤홍준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확대되면 이런 것도 노출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께 잘 말씀드려 배려해주시면 고맙겠다”고 부탁했다.
이실장은 문건을 주려고 하지 않았으나 정의원은 ‘여당을 협박하려는 공작일 수 있다’는 생각에, “세밀히 검토해야겠다”고 우겨 이 문건을 받아 들고 집으로 갔다.
이 문건을 꼼꼼히 읽어본 정의원은 3월14일 문희상(文喜相) 대통령 정무수석을 만나 “첩보인지 정보인지 모르겠으나, 수석께서 잘 판단하여 대통령께 전달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복사본을 전달했다. 얼마 후 문수석은 “그 문건을 대통령께서 다 읽으셨다”는 연락을 주었는데 며칠 후 이대성 실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3월15일 시사저널 김당 기자는 모처를 통해 이대성 파일 일부를 입수했다. 이 문서에 나오는 흑금성의 행적이 그가 아는 박채서씨의 행적과 똑같다는 것을 안 김기자는 박씨를 만나 이를 보여주었다. 이대성 파일을 살펴본 박채서씨는 “이 문건이 공개되면 안 되는데…”라고 중얼거렸다.
비슷한 시기 한겨레신문도 이대성 파일 일부를 입수해 3월17일자 인터넷 판에 이를 띄웠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던 박기영씨가 이를 발견해 박채서씨에게 알림으로써 박채서씨는 우려하던 사건이 터졌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날부터 도하 언론사 기자들이 아자 사무실과 박채서씨 집으로 들이닥치면서 흑금성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한겨레의 보도는 불행의 시작이었지만,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면도 있다. 김당 기자의 말이다.
“당시 우리는 3월30일 북한에 가려고 사전 소양교육까지 받은 상태였다. 만약 박채서씨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한겨레신문의 보도가 터져 나왔다면, 박채서씨는 간첩죄로 바로 북한의 보위부에 체포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행 중 다행이다’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권영해 자해 시도
이대성 파일이 공개되는 바람에 윤홍준과 오익제 그리고 김병식 등의 인물을 소재로 한 검찰의 북풍사건 수사는 김이 빠졌다. 검찰로서는 흑금성과 관련된 부분을 수사하지 않고는 북풍 사건을 제대로 수사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안기부 또한 이대성 파일이 공개됐으니 감찰실 이○우 수사관을 중심으로 이대성 파일 유출 경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조사에서 권영해 부장이 이대성 실장에게 정권이 바뀔 경우를 대비한 대책을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 밝혀졌다. 권부장의 지시를 받은 이실장은 송봉선 2단장에게 문건을 종합하라고 지시했고 송단장은 흑금성이 보낸 수많은 첩보 중에서 김대중 정권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을 추려 이대성 파일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실장은 이 자료를 네 부 만들었고 권영해 부장과 이병기(李丙琪) 해외담당 차장, 정대철 부총재 그리고 한 부는 본인이 가져간 사실도 확인되었다.
한겨레신문은 박채서씨를 2중간첩으로 보도했다. 세간의 여론도 이쪽으로 쏠렸다. 또 언론은 권영해씨가 6사단장을 할 때 박채서씨가 같은 부대에 있었음을 알고 두 사람을 연결시켰다. 신분이 공개되고 권영해씨와 관련 있는 인물로 낙인이 찍히자 이종찬씨의 안기부는 서서히 흑금성을 버리는 카드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박채서씨는 혼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대선때 박씨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던 천용택·정동영 의원은 박씨를 도와주지 않았다. 이들은 “흑금성 박채서씨가 안기부 프락치라, 접근해 오는데도 만나주지 않았다”고 기자들에게 주장했다.
안기부 조사를 받는 과정에 박씨는 수사관들을 위협했다고 한다. 박채서씨의 무기는 남과 북의 요인을 만날 때 비밀리에 녹음한 녹음자료였다. 그는 이 자료를 둘로 만들어 하나는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과 바로 통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 놓았고 하나는 국내에 숨겨 놓았다며, “나를 2중간첩으로 몰 경우 이를 공개하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여기서 안기부는 주춤하고 말았다. 한편 김당 기자는 시사저널 4월2일자에 박씨와 인터뷰한 기사를 싣고, 박씨가 김대중 정권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고 보도했다.
안기부와 검찰은 박채서씨에 대한 조사를 중단했다. 그리고 5월22일 검찰은 북풍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박씨를 “안기부의 4급 상당 공작원이다”라고 발표했다. 이로써 박씨는 2중간첩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후 박씨는 안기부로부터 퇴직금을 받았다.
이렇게 되자 정동영 의원이 박씨를 찾아와 “대통령을 만나 사실대로 다 전했다. 대통령께서는 흑금성과 박채서를 별개의 인물로 오해했다고 한다. 우리는 한 마음이고 오직 한 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편 권영해씨는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던 3월21일 검찰청사에서 문구용 칼로 배를 그어 자해를 시도했다. 권씨의 자해 시도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권씨의 자해는 ‘북풍을 주도한 공작 책임자로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비밀을 지키겠다’는 의미가 깔려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북풍 수사는 이렇게 많은 사건을 일으키며 5월22일 힘겹게 마무리되었다.
그후 흑금성은 빠르게 잊혀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정보의 세계에 있었다. 박채서씨는 그를 2중간첩으로 보도한 한겨레신문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승소했다. 한겨레의 정정보도가 있자 그는 손해배상 소송을 포기하고 조용히 ‘잠수’했다.
그러자 신건(辛建) 국정원 2차장이 그를 불러냈다. 신차장은 모종의 조건을 제시하며 그가 갖고 있는 녹음 자료 제공을 요구했으나 박씨는 거절했다.
2000년 MBC는 55만달러를 아자에 제공했는데 아무 결과물이 없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아자는 아자대로 정부를 상대로 77억원 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정보사가 주도한 편승공작의 끝은 어이없게도 소송으로 귀결된 것이다.
박채서씨는 훌륭한 공작원이었지만, 그의 행동에는 잘못된 점이 있다. 기자와 정치인을 몰래 만나 정보를 제공하며 별도의 인맥을 구축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맥이 있었기에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났지만, 기자와 정치인을 만나 정보를 제공한 것은 공작원으로서 옳지 못한 행동이다.
박기영씨는 박채서씨와의 만남을 통해 최고의 순간에 올라갔다가 최악의 자리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 것도 노하우다. 대북 광고사업에는 나만큼 경험을 쌓은 사람도 없다”며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대북 광고사업을 재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반면 정진호씨는 “대북사업을 한 기업이나 정권은 전부 뒤가 나빴다. 북한은 한마디로 돈만 빨아먹는 블랙홀이다. 다시는 대북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아들에게 한때 아버지는 이런 사업도 해봤다고 말할 수 있게 된 데 대해서는 만족한다”고 덧붙였다.
흑금성 공작은 북한의 보위부까지 뚫고 들어갔다는 점에서 한국 공작의 우수성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그 한계도 드러냈다.
情報, 정치로부터 독립하라
한국 정보기관의 공작은 정보수집이 전부이다 보니, 이따금 정보에 휘둘리는 운명을 맞는다. 정보는 도깨비와 같아서 끊임없이 사람을 유혹하고 현혹시킨다. 권영해씨처럼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 추려내 이용하고 싶다는 유혹도 받는다. 이 유혹에 걸려들면, 정치권 전체가 ‘북풍’이니 ‘총풍’이니 하는 함정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북한 정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곧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케 하는 요인이 된다. 그로 인해 정보맨들은 정치권에 예속되고, 정보기관은 정치인이 원하는 정보를 갖다 바치게 된다. 이것이 북풍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다.
북한이 한국 정치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하려면, ‘북한은 한국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주체가 아니라, 한국이 달성하려는 통일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이대성씨가 공작자료를 갖고 정대철 의원을 만난 것도 꼼꼼히 짚고 넘어갈 문제다. 해외공작실장이던 이대성씨는 살기 위해 자기가 관리한 공작원을 ‘결과적으로’ 공개했다. 흑금성 사건이 터진 후 안기부가 박채서씨를 2중간첩으로 조사하려고 한 것도 문제다. 이러한 토양에서는 공작원과 지휘자 사이에 신뢰가 쌓이지 않아, 제대로 된 공작을 할 수 없다. 지휘관은 끝까지 공작원을 지켜주어야 한다.
검찰이 박채서씨를 안기부 공작원으로 발표한 것도 문제다. 공작은 한마디로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국가목표를 이룰 수 없을 때 시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작을 하더라도 국가는 ‘공식적으로는’ 공작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여야 한다. 그런데 검찰은 박씨를 공작원으로 발표했으니, 대한민국은 스스로 불법을 저지르는 국가라고 선언한 셈이 되었다.
이러한 모든 사태는 정보가 정치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김은성 게이트도 정치에 예속된 정보의 현실을 보여준 사례다. 검찰과 경찰에 이어 국가정보기관까지 정치의 시녀가 된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정보는 정치로부터 진정으로 독립하여야 한다. 흑금성 사건은 5년이 지난 지금 이런 결론을 던져주고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이는 아자커뮤니케이션 사장인 박기영씨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재학중이던 1981년 청소년영화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던 박씨는 1983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홍기획에 입사했다.
광고PD가 된 그는 채시라씨를 발굴해 롯데제과 광고에 출연시키는 등 ‘쟁이’로 관록을 쌓아갔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기도 전인 1980년대 후반 ‘북한에서 한국산 제품의 광고를 찍어 방영하면 대박이 터질 것’으로 판단해, 이를 기안해 올렸다.
당시로는 ‘황당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기획안이었는데, 대홍기획의 남상조 사장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받아들여 “추진해 보라”고 지시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대북사업을 더더욱 은밀하게 진행해야 했다. 박씨는 소리소문 없이 회사 내의 대북사업 전담자가 되어 혼자서 ‘차 치고 포 치면서’ 새로운 일을 벌이게 되었다. 1990년 1월 그는 통일부 김호연 사무관을 비롯한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날아가, 중국의 신세계광고문화공사를 통해 북한과 접촉하려 했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정부 비서장인 문용길씨다. 문씨를 통해 그는 많은 북한인을 만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돈을 뿌렸다. 이렇게 사용되는 돈은 영수증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회사측에서 “이 돈, 접대비로 쓰지 않고 당신이 횡령했지”라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황’이 되고만다. 또 ‘눈에 불을 켜고’ 북한을 지켜보는 안기부와 통일부의 눈도 의식해야 한다. 회사와 정부와 북한을 의식하며 대북 접촉선을 뚫어야 하는 그는 무척 고단했다.
1993년의 한반도는 요즘만큼이나 복잡했다. 당시의 김영삼 정부는 지금의 김대중 정부처럼 북한과 대화를 해보겠다고 적극 나섰다. 그로 인해 현대·대우·삼성·LG·고합 등 대기업이 앞다퉈 북한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 북한의 핵 개발 가능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의심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그해 5월29일 북한은 국제사회를 ‘조롱하려는 듯’ 동해를 향해 노동1호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그로 인해 미국은 더더욱 북한에 채운 고삐를 조여나갔다. 한국은 북한을 이해하려고 하고, 미국은 북한을 압박하려고 하는 이상한 구도가 펼쳐진 것이다.
남북관계가 맑아질 것인지 흐려질 것인지 예상하기 힘든 상황에 대홍기획은 대북사업 철수를 결정했다. 이로써 ‘끈 떨어진’ 박씨는 직장생활을 계속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이 무렵 박씨는 회사에서 가입했던 주택조합이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새로 지은 계단식 아파트로 이주하게 되었다. 박씨는 1303호에 입주했는데, 이 집과 마주한 1304호에 원(原) 분양자와는 동서 관계라는 박채서씨네가 입주하게 되었다.
박채서와 박기영씨는 똑같이 딸만 둘인데, 두 집의 막내딸이 동갑이었다. 늦게 이사온 박채서씨는 둘째딸을 박기영씨 둘째딸이 다니는 유치원에 보냈다. 그로 인해 양쪽 집의 부인은 매일 아침 아이를 같은 유치원 차에 태우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두 딸도 매우 가까워졌는데, 초등학교 5년이 된 두 아이는 지금도 단짝이라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박채서씨와 박기영씨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박기영씨의 양력생일과 박채서씨의 음력생일이 똑같았다. 공통점이 자꾸 발견되자 두 사람은 서로 집을 방문해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때 박채서씨는 육군 소령으로 전역했다고 소개하면서 해안초소에 소·중대장으로 근무할 때 겪은 일을 정말 재미있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화답으로 박기영씨는 북한에서 광고를 촬영해 보려고 이리저리 중국을 뛰어다니다 실패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北 보위부장 속인 박채서
이야기를 들은 박채서씨는 “나는 정보 장교 출신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다녀온 적이 있다. 북한에서 나온 고려신덕샘물이 일본에서 팔리게 된 것도 내가 개입했기 때문이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이어 그는 “지금은 중국과 무역사업을 하는 친구를 돕고 있다. 친구 회사에 고용돼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상태에서 아이템별로 돕는다”고 말했다. 이러한 언급은 박기영씨와 동업할 수 있다는 우회적인 제시였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단순한 이웃에서 의기가 투합하는 관계로 사이가 깊어졌다.
박기영씨를 만나기 전 박채서씨는 이미 북한을 출입하고 있었다. 고려신덕샘물은 북한의 조선국제합영총회사와 일본의 조총련이 합작해서 만든 조선고려신덕산광천수합작공장에서 생산하는 것이다. 박씨가 고려신덕샘물 수출에 관여하게 된 것은 북한의 조선국제합영총회사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국제합영총회사는 1986년 8월 북한의 합영사업추진위원회와 일본의 조총련 합영사업추진위원회가 공동으로 설립한 것인데, 박씨는 조총련계인 서재호를 이용해 이 회사와 관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잠시 정리할 것이 있다. 남과 북의 최고 정보기관인 국정원(과거의 안기부)과 보위부(국가안전보위부)는 여간해서는 직접적으로 대북공작이나 대남공작을 펼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두 기관은 별도의 에이전트를 고용하거나 국군정보사(남)나 조선로동당 대외연락부(북) 등을 내세워 대북·대남공작을 한다. 남북 첩보세계에 밝은 소식통에 따르면 1990대 초반 국군 정보사는 정말로 활발하게 대북공작을 폈다고 한다.
박기영씨/박채서씨/정진호씨(왼쪽부터)
그래서 이들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현실을 직시하는 눈은 스스로 가리고, 혼자의 상상만으로 펼치는 일방적인 상사병(相思病)”이라고 통렬히 비판하는 것이다(김대중 정부 들어 붕괴된 대북 공작 현실에 대해서는 ‘신동아’ 2001년 8월호의 ‘흔들리는 햇볕정책, 무너지는 대북공작’ 참조).
박채서씨는 조총련을 통한 우회공작으로 이미 북한의 안기부라 할 국가안전보위부 핵심 간부와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박채서씨가 올린 보고 중에는, 그가 국가보위부의 부장 대리인 김명윤과 여러 차례 식사를 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박채서씨가 어떤 루트를 거쳐 국가보위부 부장 대리와 식사를 같이하는 사이가 되었는지는 명확지 않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김명윤은 박씨와 식사를 같이하기 전, 첩보망(고첩)을 동원해 박에 관한 뒷조사를 샅샅이 했다는 점이다.
고첩들은 박씨가 정보사 출신으로 신용불량자로 찍혀 전역했다는 것을 정확히 입수해 보고했다고 한다(사실은 완전히 속아넘어간 것이다). 정보기관은 상대의 고급 정보를 뽑아내는 것을 갈망한다. 고급정보를 뽑아내려면, 상대 정보기관에 근무하다 불만을 품고 떨어져나와 자발적으로 자기네에게 협조하는 사람이 최고다.
김명윤을 만나기 전 박채서씨는 당시 대통령 부인인 손명순(孫命順) 여사와 김덕룡(金德龍) 의원에 관한 자료를 국가보위부에 제공했다고 한다. 이러한 자료는 박채서씨가 정보사에 근무했고 남한의 핵심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자료이자 이들을 유혹하는 결정적인 ‘미끼’였다.
그러나 김명윤도 단순하지는 않았다.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는 불쑥 박씨에게 “6·25가 남침이요 북침이요” 하고 물었다. 박씨는 즉각 “남침 북침이 중요한 게 아니라 통일전쟁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북의 통일전쟁입니다. 그런데 외세 개입 때문에 통일이 안 되어 안타깝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프로끼리의 냉철한 기싸움에서는 한순간만 놓쳐도 속을 들키고 지배당하고 만다. 박씨는 이미 그러한 대답을 진심으로 할 수 있게 자발적으로 교육받은 공작원이었기 때문에, 프로(김명윤)의 마지막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었다.
“100만달러를 줄 테니…”
박씨가 남한의 고급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북한의 다른 정보기관들이 박씨를 넘보기 시작했다. 조선로동당 조사부는 박채서 소령팀이 조총련의 서재호를 통해 대북 우회침투 공작을 펼쳤듯이, 제3국을 우회해 대남공작을 펼친다.
조사부가 펼친 대표적인 테러 공작은 1986년 김현희(金賢姬) 등이 저지른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이다(로동당 조사부를 비롯한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에 대해서는 신동아 2001년 2월호 ‘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 vs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 참조).
박씨의 행적을 파악한 조사부 간부 김진은 박씨에게 “100만달러를 줄 테니 함께 일하자”고 회유했다. 이때 박채서씨가 흔들려 조사부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그는 보위부로부터 질시를 받게 되고, 그 질시는 의심으로 이어져 결국은 생명까지도 위태로워지는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씨는 철저하게 훈련된 공작원이었기에 유혹을 가볍게 뿌리쳤다. 이러한 거절도 국가보위부로 하여금 박씨를 신뢰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북한의 여러 공작기관 책임자급과 접촉하는 과정에 박씨는 북한의 내부 사정을 깊이 알게 됐다. 1988년 평양축전 때 밀입북한 임수경씨(林秀卿)가 북한의 대학생 모임에 나가 “남한에서는 거지도 이런 옷을 입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것, 김일성(金日成)을 만났을 때는 “통일을 하려면 남쪽 대통령하고 먼저 만나야 한다”고 말해 김일성을 코너에 몰았다는 것, 임수경의 예상치 못한 질문이 북한인들을 종종 당황케 했고 이러한 임씨에 대해 북한인들이 묘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1989년 이후 다섯 차례나 방북한 황석영(黃晳暎)씨와 역시 1989년 방북했던 고 문익환(文益煥) 목사의 북한 행적에 대해서도 자세히 듣게 되었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박씨는 ‘북한의 정보기관 사람들은 북한 사상에 동조하는 남한인보다는 반공이념을 갖고 있더라도 확고한 자기주장을 가진 인간에게 더 매력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을 상대하는 문제는 김정일(金正日)이 전담하고 있었다. 김정일에게 김일성이 “남한의 대기업을 상대할 때는 조심하라”고 충고한 것도 알았다. 이런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박채서씨는 아자 같은 작은 기업을 택해 대북 접근을 모색했던 것이다.
이렇게 박씨는 한국의 고급 정보는 보위부에 전하고 북한의 고급 정보는 한국의 정보사와 안기부 등에 알려주면서, 2중공작원 생활을 계속햇다. 그러나 보위부는 남쪽 정보기관 출신 박씨를 100% 신뢰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박씨가 군대에서 쫓겨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보위부는 ‘한번 배신한 인물은 또 배신한다’고 믿고 있었다.
국가보위부는 박씨가 그들을 배신하지 못하게 하려고 박씨에게 여자를 접근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박씨는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고 아주 단호하게 물리쳤다. 박씨가 보위부의 회유에 걸려들었다면 그는 약점을 잡히고 한편으로는 국가보위부로부터 충분한 신뢰를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박씨를 아는 사람들은 박씨는 평소에도 여자와 돈·술에 대해서는 지독할 정도로 결백했다고 말한다.
여러 차례 접촉에도 박씨가 흔들리지 않자 국가보위부는 국장급인 리철에게 ‘대외경제위원회 참사’라는 위장 타이틀을 주고, 베이징에서 수시로 박씨를 만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리철은 김일성대 경제학부를 수석 졸업한 사람으로 황장엽씨가 김일성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자본주의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의 부친은 상장 계급의 군인이고 장인은 양강도 당비서, 부인은 로동신문 기자였다. 아자와 접촉할 때는 리철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다른 기업을 상대할 때는 ‘리철운’으로 행세했다.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실력이 있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고 자신 있게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을 갖추고 보위부의 핵심간부와도 통할 수 있게 된 박채서씨는 ‘똑똑한’ 리철을 자신 있게 다루었다고 한다.
한국의 정당이나 정부 기관은 기업체를 운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당이나 군·내각 등에 속한 여러 기관이 기업체를 운영한다. 기업체가 벌어들이는 돈은 그 기관을 움직이는 비자금이 된다.
보위부는 ‘명성’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명성이 벌어들인 돈은 국가보위부의 비자금이나 공작금으로 활용된다. 명성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은 ‘스스로 공작금을 마련해 공작하라’는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다. 리철이 명성 직원으로도 일하고 있었기에, 박씨는 명성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위상을 확보한 상태에서 박채서씨는 박기영씨네 옆집으로 이사와, 마침내 대북 사업을 같이 해보자며 의기투합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미 대북사업을 펼칠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 접근해, 그 사업을 도와주는 방법으로 침투하는 공작을 전문용어로는 ‘편승공작(便乘工作)’이라고 한다. 보위부에는 그토록 목말라하는 공작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박기영씨에게는 북한에서 광고를 찍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윈-윈 전술’이야말로 편승공작을 펼 수 있는 최고의 무대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박채서씨가 북한에서 접촉할 수 있는 대상과 수집할 수 있는 정보는 더욱 넓고 깊어져서 마침내는 북한의 권력자들까지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북한의 권력자를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남북한 통일게임의 모양이 결정된다.
이러한 상황은 목숨을 걸고 공작의 세계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최고의 공작’이다. 그러나 이는 2중간첩을 자임하는 것이라, 잘못되면 남과 북 모두로부터 의심을 사 죽음을 자초할 수도 있는 위험한 도박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지금도 박채서씨가 한국보다는 북한의 정보기관에 더 많이 기울어 있었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박씨가 진정으로 생각하는 조국(祖國)이 남인지 북인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국가안전기획부법(지금은 국가정보원법) 제3조는 안기부의 직무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 조문의 제①항 제5호에는 ‘정보 및 보안 업무의 기획·조정’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 문구 때문에 안기부는 국내 모든 정보기관의 업무를 통제하는 대신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안기부의 업무조정은, 복수의 정보기관이나 여러 공작팀이 북한의 한 인물이나 한 기관을 상대로 동시에 공작하는 것을 예방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1997년 8월 27일 백두산 밑 베개봉 호텔에 묵은 박채서(오른쪽) 박기영(가운데) 변승우씨(왼쪽).
정보사령부 박채서씨 팀이 작성한, 박기영씨를 이용한 편승공작안을 검토한 이가 바로 이○복씨였다고 한다. 이씨는 이 공작안이 타당하다고 판단해 공작2단장 송봉선(宋鳳善), 해외공작실장 이대성(李大成), 그리고 국가안전기획부장 권영해(權寧海)씨로부터 승인을 받아 편승공작을 전개할 수 있게 했다.
첩보는 철저한 보안의 세계다. 안기부 내부의 비밀문서일지라도 박채서씨가 보내온 첩보를 ‘박채서로부터 입수했다’는 꼬리표를 달아 유통시키면, 이것이 언제 어디서 북한의 고첩에게 포착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안기부는 박채서씨에게 ‘흑금성’이라는 비밀명칭을 부여했다. 박채서씨가 보낸 첩보는 흑금성이라는 ‘상표’를 달고 고위 간부들에게만 유통되었다.
정보사 예비역 장교가 소개
때때로 정보기관에서는 내부에 침투한 고첩을 속이기 위해 ‘백금성’이라는 유령 첩보원을 만들어, 백금성이 보내온 ‘매우 그럴듯하지만 사실이 아닌 정보’를 함께 유통시키기도 한다.
흑금성과 백금성을 소스로 한 정보가 나열돼 있을 경우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지 못하는 고첩은 백금성을 소스로 한 정보도 보고하게 된다. 백금성 첩보가 북한에 넘어간 것이 포착되면, 안기부는 누가 북한의 고첩인지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역정보’라고 한다.
박기영씨와 박채서씨는 함께 사업하기로 동의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었다. ‘물주’를 찾던 이들은 2년 후 미진아이디(주) 사장인 정진호씨를 만나게 되었다.
정사장은 정석모(鄭石謨·6선) 전 국회의원의 아들이자 정진석(鄭鎭錫·자민련·충남 공주시) 현 국회의원의 형인데, 당시 그는 대북사업을 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정사장은 서울 강남에 22층 건물을 갖고 임대사업을 하며 한편으로는 미진양행이라는 무역업체도 운영하고 있었다. 미진양행은 베트남과 무역하는데 미진양행 베트남 지사장의 친구 중에 정보사 출신 예비역 소령인 ㅈ씨가 있었다. 정사장이 대북사업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안 지사장이 ㅈ예비역 소령을 통해 들은 박채서-박기영씨 이야기를 전함으로써(이것도 정보사 측의 교묘한 편승공작일 수 있다), 정사장은 박채서-박기영씨와 연결되었다.
아자커뮤니케이션 발족
의기가 투합한 세 사람은 각자의 직위와 책임을 나누었다. 사장은 박기영씨가 맡아 광고업무를 담당하고, 박채서씨는 전무로 대북 접촉을 담당했다. 정진호씨는 자신이 소유한 빌딩 일부를 사무실로 제공하는 등 자금 문제를 담당하며 고문이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지분은 정진호씨가 70%, 박기영과 박채서씨는 각각 15%씩 갖기로 합의하였다. 이로써 박채서씨는 안기부나 정보사의 돈을 쓰지 않고도 자유롭게 북한과 접촉해 공작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다.
여럿이 힘을 모아 함께 일할 때 종종 “아자 아자!”라는 구호를 외치는데, 아자(AZA)는 A에서 시작해 Z까지 갔다가, 다시 처음(A)으로 돌아온다는 의미도 있다.
박채서씨와 처음 동업을 시작하던 1995년 12월, 박기영씨는 ‘커뮤니케이션 아자’를 설립했다. 그리고 정진호씨가 참여한 후인 1997년 8월에는 회사명을 ‘아자커뮤니케이션’으로 바꿨다.
커뮤니케이션 아자를 설립한 후 박채서씨는 가공할 만한 대북 접촉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1990년대 초반, 아무런 끈도 없이 의지만 갖고 북한을 뚫기 위해 중국을 헤매고 다닌 박기영씨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여기서 분명히 정리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박채서씨의 편승공작 대상이 된 박기영씨 문제다. 박기영씨는 박채서씨가 대북공작을 위해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딸끼리는 물론이고 아내들도 친구가 됐는데, 그것이 공작이었다면 내 인생이 너무 허망하다. 내 젊음을 바쳐 추진했던 사업도 모두 틀린 것이 된다. 두 집의 아이가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는데 그것마저 공작이었다고는 절대로 믿고 싶지 않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는 박채서씨를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는 좋은 사업 파트너였다”고 말했다.
정보기관은 예민하다. 정보기관은 자기에게 접근하는 세력이 사용하는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본능적으로 체크한다. 편승공작은 안기부나 정보사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지 않기 때문에 어떤 공작보다도 수명이 길다는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이 공작이 성공하려면 편승한 사업이 잘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보기관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안기부와 정보사 등이 나서서 “아자가 하는 것은 분명하다”는 소문을 퍼뜨려, 주요 기업이 아자의 광고주가 되게 밀어주어야 한다.
해가 바뀐 1996년 1월 베이징으로 날아간 박채서씨는 그의 카운터파트인 리철을 만나 “북조선이 돈을 벌 수 있는 아이디어를 주겠다. 남조선의 광고회사가 북한에 가서 광고를 찍을 기회를 주면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한국의 촬영팀이 북한에 들어가 촬영하는 것은 김정일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항이었다.
리철은 국가보위부를 통해 그것이 가능한지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를 올려보겠다고 말했다. 공작을 하려면 때로는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에도 안테나는 바짝 세워놓고 있어야 한다. 그 사이 상대는 이쪽의 제의가 타당한지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고 검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던 1996년 9월18일 강릉시 안인진리로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이 침투하는 초대형 무장공비 사건이 터져 나왔다.
정찰국 소속 조선인민군이 탑승한 공격잠수함이 영해도 아닌 영토까지 들어와 좌초한 것은,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어머어마한 사건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남북문제를 놓고 보수와 진보간에 치열한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 세력은 ‘지방선거에서 이긴다’는 정치적인 목적 등을 갖고, 1995년 쌀15만t을 북한에 무상으로 지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 씨아펙스호 인공기 게양사건 등이 일어나자 그해 연말 YS는 외신 회견에서 “더 이상의 대북 지원은 없다”고 선언했다. 무조건적인 대북 지원을 전제로 한 ‘진보’에서 목적을 갖고 선택적으로 지원하는 ‘보수’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강릉 잠수함 사건으로 중단
그런데 1년 후 잠수함 사건이 터지자 ‘정치인’ YS는 KEDO의 북한 원전건설 사업을 중단시키는 등 보수성을 더욱 굳혔다. 한편 합참은 육군 제1야전군과 육군 특전사를 동원해 대대적인 공비 소탕작전에 돌입하였다.
이렇게 되자 남북 비밀채널이 일시에 휴지기(休止期)에 들어갔다. 50일간 계속된 대간(對間)작전은 11월6일 특전사가 안내조 두 명을 사살함으로써 종료되었다. 대간작전은 끝났지만 북한은 잠수함을 침투시킨 데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아 남북관계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이즈음인 11월19일 발매된 시사저널(1996년 11월28일자)은 ‘1996년 4월쯤 청와대는 월드컵 남북한 공동개최를 추진하기 위해 현대그룹이 제공한 100만 달러로 구입한 밀가루 5000t을 극비리에 북한에 제공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한나라당이 ‘현 정부는 현대상선을 통해 4억달러를 비밀리에 북한에 지원했다’고 터뜨린 것과 같은 큰 특종을 한 것이다. 기사를 쓴 사람은 이교관(李敎觀) 기자였다. 이 기사가 사실일 경우 1995년 쌀지원 후 “더 이상의 대북지원은 없다”고 공언한 YS의 선언은 허구가 된다.
예민한 주제를 다뤘기 때문에 이교란 기사는 시사저널 내에서도 게재 여부를 놓고 갈등을 겪었다. 시사저널 측은 처음에는 이 기사가 들어간 잡지를 인쇄해 배포에 들어갔다가, 도중에 경영진이 인쇄를 중단시키고 이미 배포된 잡지는 회수했다. 그리고 이 기사를 빼내고 다른 기사를 넣은 잡지를 인쇄해 재배포했다.
그런데 미처 회수되지 못한 잡지가 야당이던 국민회의 측에 제공됨으로써, 정치권에서는 일시에 여야가 격돌하는 정국이 만들어졌다.
이에 대해 김광일(金光一)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기자와 김훈(金薰) 시사저널 편집국장대행 등을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고소하였다. 이 와중에 정치권은 ‘북한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하고 밑으로는 비밀 지원한 정부를 성토’하는 국민회의 측과, “시사저널 보도는 허위”라고 주장하는 신한국당이 팽팽히 맞서, 국회가 공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이른바 밀가루 사건).
결론부터 말하면 현대그룹이 준비한 돈으로 중국에서 밀가루를 구입해 북한에 제공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현대그룹이 자체적으로 지원한 것인지, 김광일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측의 지시를 받고 지원한 것인지, 아니면 청와대 측에 “북한에 지원한다”고 통보한 후 밀가루를 지원했는지는 아직도 규명되지 않고 있다.
고소사건을 맡은 서울지검 형사5부는 이기자를 긴급구속한 후 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구속적부심에서 법원은 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이로써 이 사건은 끝나고 말았다. 기자로서는 대단한 정보를 입수해 진실에 가까운 보도를 내보내고도 긴급구속을 당해 큰 고생을 한 채 끝나버린 것이다.
1997년 2월 14일 베이징 캠핀스키호텔에서 있은 아자와 금강산 총회사 간의 북한내 광고촬영 사업 조인식.
박씨는 “밀가루가 북한에 제공된 것은 사실이다”며 뭔가 정보를 갖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이기자는 박채서씨가 의도를 갖고 접근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아, 박씨와 접촉을 피했다. 하지만 김기자는 박씨와 계속 접촉했다.
잠수함 침투 사건으로 고립된 북한은 1996년 12월29일, 북한 주민은 듣지 못하는 대남용 라디오방송인 ‘평양방송’을 통해 외교부 대변인이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정치나 외교에서 명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북한이 ‘어쨌든’ 사과를 했으니, YS 정부는 대북 채널을 재가동할 명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외교 세계에서의 사과는 ‘국익’을 전제로 한 것이라, 북한으로서는 사과를 전제로 새로운 대남공작을 펼쳐볼 수도 있다.
해가 바뀐 1997년 1월12일 아자는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산하의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총사장은 방종삼)로부터 ‘귀사와 광고사업을 하겠으니 2월에 베이징으로 사람을 보내달라’는 팩스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잠수함 침투사건 이후 북한이 처음으로 보내온 ‘청신호’였다. 그동안 현대·대우 등 여러 대기업이 북한에 진출하기 위해 ‘밀가루’를 보내주며 노력해왔는데, 김일성이 생전에 내린 지시 때문인지 북한은 ‘꼬마 기업’인 아자를 선택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박채서씨가 그 동안 보위부 측과 쌓아온 신뢰 때문이라고 말하나, 박씨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꽉 다물고 있다.
문제는 북한의 이러한 제의를 김영삼 정부가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이 팩스 내용은 권영해 안기부장을 통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됐는데, 김대통령은 “반드시 이 일을 성사시켜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1997년 2월9일 박기영 사장은 촬영감독인 변승우, 직원 황미용 그리고 그 사이 박채서씨를 통해 아자와 가까워진 김당 기자와 함께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베이징의 서우두(首都)공항에 도착한 이들을 맞이한 이는 리철과 미리 베이징에 가 있던 박채서씨였다.
김정일의 호가 ‘광명성’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보위부가 운영하는 명성총회사는 광명성에서 이름을 따왔다. 명성총회사는 총회장 없이(김정일이 총회장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영철이라는 인물이 부총회장을 맡고 있다.
캠핀스키호텔에 투숙한 이들은 곧 금강산 총회사의 방종삼 총사장과 김영철 명성 부총회장, 그리고 국가보위부 소속의 리철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박기영씨는 박채서씨로부터 “방종삼은 기자 출신이고 소장(한국군으로 치면 준장) 계급을 갖고 있다. 북한은 김정일의 생일인 2월16일 직전에는 여간해서는 새로운 사업에 착수하지 않는데 이 모임을 갖는 것은, 남한 정부와 비공식적인 채널을 뚫자는 사인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한 설명은 박채서씨가 북한과 아자 측의 접촉을 조정통제하는 공작의 주체가 되었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방종삼은 이날 “광고사업은 조국 통일에 공헌하는 일이다. 광고제작에는 원칙적으로 반대가 없다. 내용 문제는 견해를 조정해서 실현시켜 나가면 된다. 광고주 선정은 아자의 자주권에 속하니, 아자가 결정해서 통보하면 된다”며 매우 고무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1차 회식이 있은 후 2차로 노래방에 가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이때 방종삼은 평양에서 수시로 전화가 온다며 “2차에는 참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도 아자와의 접촉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견례를 거쳐 2월10일 양측은 실무회의를 가졌다. 북측에서는 방종삼 외에 행정담당이라는 60대의 박수일, 촬영과장이라는 40대의 류병욱, 촬영인이라는 40대의 장훈일, 광명성경제련합회 베이징 대표부 대표라는 리재철, 그리고 리철 등이 참석했다(광명성경제련합회는 북한에 진출하고 싶은 한국 기업을 만나 북한 기업을 소개해주는 기관이다. 그러나 아자는 바로 명성총회사와 접촉했기 때문에 광명성경제련합회는 형식적으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아자 측이 광고를 찍기 위해 북한을 방문할 시기와 계약금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계약금 부분이 쉽게 타결되지 못했다.
이후로도 계약금은 중요 쟁점이 됐는데, 방종삼은 무조건 전체 금액의 50%를 계약금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박기영씨는 “전체 금액도 정하지 못했는데 무슨 50%인가”라고 반발했다. 박기영씨는 방종삼이 김정일 생일을 앞두고 외화 마련에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북측의 주장이 어떻든 ‘지갑이 얇은’ 박기영씨는 어떤 대답도 줄 수가 없었다.
이 시기에 북한 진출을 검토하던 삼성그룹의 이필곤(李弼坤) 중국본부 회장과 박철원 부회장, 한행수 부사장 등이 리철·박채서 등과 회의를 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삼성그룹은 아자가 생각하고 있던 중요한 광고주였다.
2월12일 삼성의 이필곤 회장 등은 북한의 김영철 부총회장, 리철 등과 회담을 가졌다. 삼성은 “삼성이 금강산 개발과 북한 서한만의 석유를 개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제의했다. 이 모임에서 아자가 삼성측 광고를 북한에서 찍는 것이 거론됐는데, 삼성은 “아자에 광고를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삼성은 ‘아자가 북한에서 찍을 광고주로 삼성이 아니라 현대나 대우를 선정할까봐’ 걱정하던 차였기에 아자의 광고주가 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박채서씨를 통해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박기영씨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방종삼이 “북한에서 광고를 찍는 사업비는 1000만∼1500만 달러여야 하고, 지금 당장 받아서 평양으로 가져갈 계약금은 최소한 100만달러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논란 끝에 양측은 전체 사업비는 500만달러로 하고, 대금은 나눠서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박기영씨는 삼성측으로부터 장차 북한에서 광고를 찍으면 촬영비를 선(先)지급한 것으로 전환한다는 조건으로 5만달러를 빌리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날(2월12일) 베이징에서는 조선로동당 국제담당 비서인 황장엽씨(黃長燁)가 주중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망명하는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소식을 들은 박기영씨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북측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틀 후인 2월14일 양측은 세부 사항도 합의해 캠핀스키호텔에서 대북광고사업 조인식을 가졌다.
이 계약에는 북한에서 광고를 촬영하는 것은 물론이고, 북한에서 TV 프로그램을 찍는 것도 아자가 독점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때 대부분의 언론은 황씨 망명사건 취재에 정신을 뺏겼으나 MBC만은 대북광고 계약 사실을 알았고 이를 보도하였다.
그런데 계약 직후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아자 측은 계약금조로 우선 5만 달러를 북측에 제공키로 했는데, 5만 달러를 주기로 한 삼성측이 “삼성 체면상 현지(베이징)에서 줄 수는 없다”고 나온 것이다. 다급해진 박기영씨는 베이징에 있는 한국 기업을 찾아가 사정사정해 2만5000달러를 마련해 북측에 제공하고, 나머지는 서울로 가서 마련해 오겠다고 약속했다.
YS의 관심, 北의 의도
박씨가 서울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김영철 부총회장은 양측 대표인 박기영·방종삼씨 앞에서 “이 사업은 장군님(김정일)의 허가를 받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장군님은) 이 사업을 남측의 아자가 해야 하는 이유도 알고 계시다. 다른 곳에서는 이 사업을 하지 못한다”며 박기영씨를 격려·위로했다. 서울에 온 박기영씨는 급히 2만5000달러를 마련해 김포공항으로 나갔다.
한국 공항은 1만달러 이상의 현금은 갖고 나가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출국대에 이른 박씨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현금이 든 가방을 X-레이 검사기에 올렸는데, 보안요원은 ‘이상하게도’ 통과시켰다. 박기영씨는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던 박채서씨가 한국의 정보기관을 움직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박씨는 가까스로 김정일 생일(2월16일) 이전에 5만달러를 북측에 지급할 수 있었다(이때는 정진호씨가 아자에 참여하기 전이라 5만달러는 박기영씨가 지불했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권영해 안기부장을 중심으로 12명의 대북전략 특별팀이 가동되고 있었다. 이 팀은 아자가 하는 대북 광고사업에 삼성을 광고주로 붙이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은 “김일성의 3년상(喪)이 끝나는 7월8일 이전에 북한 관광사업을 비롯한 대북사업을 개시케 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YS는 “15대 대통령 선거가 본격 시작되는 11월 이전에 남북이산가족 면회를 성사시키고 남북 정상회담 일정을 잡아라. 가급적이면 15대 대선 직전에 김정일을 서울로 오게 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다.
북쪽에서는 김정일이 관심을 갖고, 남쪽에서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졌으니 아자의 광고사업은 날개를 달 수밖에 없었다. 최일선에서 양측을 연결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 박채서씨는 북한 핵심부와 접촉을 강화해 나갔다.
이 과정에 박씨는 1994년 3월 박영수의 서울 불바다 발언, 1995년 5월의 노동미사일 시험발사, 한국의 15대 총선을 앞둔 1996년 4월5일부터 사흘간 계속된 북한군의 판문점 돌입사건(1995년판 북풍), 1996년 4월19일 발생한 북한 해군함정의 서해 북방한계선 침범사건 등은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하나같이 북한의 도발로 해석되어, 반공의식을 강화하는 소재로 활용됐다. 북한은 한국의 언론보도를 통해서 그러한 사실을 손금보듯이 들여다봤을 텐데 왜 반복해서 도발을 하는 것일까.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남북관계를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북한의 대남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전쟁을 일으켜 강제로 통일하는 무력 통일. 둘째는 남조선에 지하당(공산당)을 세운 후 이를 합법정당화하고, 이어 여러 공작을 통해 이 정당이 집권하도록 한 후, 남북의 공산정부가 합치는 적화통일이다. 셋째는 남조선 내 여러 세력의 힘을 역이용해 그들끼리 치고 받고 싸우게 함으로써 남조선의 힘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이중에서 첫째인 무력통일은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힘들다. 둘째 적화통일을 목표로 한 대남공작은 조선로동당 대외연락부 등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둘째 방안은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어서 북한의 경제사정이 나빠지면서부터는 추진하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정치공작’에 가까운 제3안에 집중하게 되었다. 북한이 지속적으로 도발해 한국의 정치구도에 영향을 끼치게 되면, 한국의 정당은 북한이 한국 정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임을 인정해 자발적으로 북한과 접촉을 시도하게 된다.
이때 북한은 소정의 ‘면담료’를 받고 이들을 상대하면서 남조선의 각 정당이 계속해서 티격태격하게 만드는 공작을 펼치는 것이다. ‘뽕도 따고(돈도 벌고) 님도 보는(남한에서 정치적인 분쟁이 일어나게 하는)’ 이러한 공작은, 한국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아주 우세하고 북한은 훨씬 취약한 ‘방어기’ 때 주로 전개된다. 남한의 여러 기관(정당이나 기업 등)으로부터 받은 자금은 김정일 체제를 유지하는 운영비로 사용한다.
따라서 북한은 그들의 존재를 과시해야 할 때가 되면 한국 여론이 나빠지든 말든 주저하지 않고 도발을 반복하는 것이다. 북한은 ‘사람값’이 싼 나라라, 이 과정에 몇 사람이 희생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북 실력자의 개인적인 부탁
이러한 정치공작은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 경제권이 붕괴된 후 조선로동당이 북한의 각 정보기관에 내린 “각 공작기관은 자체적으로 공작금을 마련해 공작하라”는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기도 하다(박채서씨가 소속된 공작팀은 조선로동당이 내린 이러한 지시를 역이용하기 위해 편승공작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기관이 북한과 접촉하려고 하면 박씨의 가치는 떨어진다. 자발적으로 이쪽의 고급정보와 돈을 제공하는 등 상당한 출혈을 감수하며 추진하던 편승공작이 ‘미끼’만 떼이고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남측의 편승공작이 이기느냐 북측의 정치공작이 이기느냐. 남북 첩보전은 안개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이 시기 안기부는 북한을 상대로 고도의 머리싸움을 시도했다.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金敬姬·56)의 남편인 장성택(張成澤·56)은 조선로동당 조직1부부장이다. 그는 친조카를 시켜 중국에서 대남 사업을 하고 있었다. 조카가 하는 사업은 중국산 물건을 북한으로 수입한 후, 원산지를 북한으로 바꾸어 한국으로 다시 수출하는 것이었다.
한국은 북한산 물품에는 관세를 부과하지 않아 조카는 이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이것도 한국을 상대로 한 돈벌이에 해당한다). 장성택이 조카를 시켜 이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 안기부는 의도적으로 많은 물품을 사주었다. 그리고 한꺼번에 15만달러어치를 주문한 후, 물품이 도착하자 곧 “불량품이 많다”며 클레임을 제기하게 했다.
공작, 역공작
이렇게 해 15만달러를 주지 않자, 조카는 중국 측에 물품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중국 공안에 검거되었다. 이때 안기부는 박채서씨를 시켜 비밀리에 돈을 제공해 조카가 풀려나게 해주었다. 박채서씨가 능력을 보여주자, 북한의 실력자들은 체면을 버리고 개인적인 부탁을 해왔다.
국가보위부 부부장이 치질치료용 인공(人工)항문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등, 많은 실력자가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 ‘우수한’ 서방 약품을 구해달라고 은밀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때 박기영씨도 북한의 한 실력자가 부탁한 정신질환자용 주사제인 ‘코카북실라’를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이 시기 박기영씨는 리철로부터 구 소련에서 입수했다는 금속나트륨을 팔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샘플을 받았다. 박씨가 샘플 성분이 무엇인지 알아보니 한국에서는 전혀 소비처가 없는, 러시아식 원자로에 사용되는 부품이었다. 박씨는 북한의 원자력 사업에 문제가 있거나 북한의 핵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이런 부탁을 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평양 시내에 있는 주요 외화 상점에 외국산 물품을 공급해주는 것은 호위총국(한국의 경호실에 해당) 산하의 회사가 담당한다. 쉽게 말해서 호위총국은 외화상점을 운영해, 운영비와 비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외화상점 간에는 ‘재고(在庫)관리 시스템’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 때문에 ‘가’와 ‘나’ 상점에서는 A물품이 남아도는데도 ‘다’ 상점이 바닥났다고 보고하면, 호위총국은 중국에 나가 있는 직원을 통해 A 물품을 구매케 했다. 이런 지경이니 호위총국은 제대로 돈벌이를 할 수 없었다.
박채서씨는 호위총국에 재고관리 시스템을 도입하면 ‘바보 같은 사업’을 피할 수 있다고 제의해 호감을 샀다. 박채서씨와 박기영씨는 아자가 벌일 제2차 대북사업으로 이 시스템 공급을 검토했다.
북한 핵심부의 신뢰를 받게 된 박채서씨는 이 시기 김정일을 만났다는 보고를 안기부로 올렸다. 박씨는 몸속에 녹음기를 감추고 들어가 김정일과 나눈 대화를 녹음했다고 한다. 이렇게 박채서씨의 공작이 진행되는 한편으로 아자의 대북 광고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아자가 대북광고사업권을 따낸 사실을 보도했던 MBC는 아자가 북한에서 TV 프로그램을 찍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아자가 북한과 체결한 총금액(500만달러)의 절반(250만달러)을 MBC가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아자가 확보한 북한에서 TV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권리를 양도받기로 약속했다(1997년 4월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