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선고 20시간만에 사형시킨 정권 안보 조작극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관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추적기

  • 글: 유보인 의문사위 조사1과 조사관 ybi@choi.com

    입력2002-11-04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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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민혁명당 재건위’. 1975년 4월9일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판결 20시간 만에 사형에 처해진 여덟 명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사건에 대해 지난 9월12일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는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의문사위 담당조사관을 통해 27년간 은폐됐던 진실이 드러나기까지의 과정을 들어본다.
    선고 20시간만에 사형시킨 정권 안보 조작극

    ‘인혁당 재건위 사건’재판광경(위)과 피의자들에게 가한 ‘통닭구이 고문’(아래)

    세칭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법적인 절차가 진행된 시점을 기준으로 볼 때는 1974년 사건이지만 실제로는 1964년에 이미 시작되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논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선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망각 속에 묻혀있었던 이유와 그 메커니즘, 관련자들에게 가해진 고문의 실상과 그로 인해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 나아가서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입은 상처를 살펴보고, 당시 사법부가 채택했던 증거들이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그 증거는 무엇인지 또한 제시해 보겠다.

    마지막으로는 이 사건을 기획한 집단과 이 기획에 근거해 실제로 조직사건으로 만들어낸 집단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부딪혔던 장벽 등에 대해 때로는 사실적 근거를, 때로는 느낀 바를 서술하려 한다.

    발표는 있었으나 실체는 없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잘못된 기억과 고정관념 그리고 망각에 대한 저항이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한가지는, 사건을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가급적 이 사건에 등장하는 ‘인민’이나 ‘혁명’ 같은 단어들이 갖는 고정관념에서 비켜서달라는 것이다. 이제 사건에 대한 기억을 하나하나 되살리며 27년 전의 사건 속으로 들어가보자.



    기억 1. 1964년 8월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부장은 1차 인혁당 사건을 발표한다. 그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인민혁명당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전국에 수배했으며 이들은 데모 주도학생을 포섭하여 -(중략)- 지령하는 동시 현정권이 타도될 때까지 학생 데모를 계속 조종함으로써 북괴가 주장하는 노선에 따라 남북평화통일을 성취할 것을 목표로 암약해왔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64년 8월14일 기사 참조).

    기억 2. 1974년 4월25일과 5월27일 두 차례에 걸쳐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발표된다. 그 내용은 “민청학련의 배후에는 과거 공산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와 일본 공산당 등이 개입되어 있으며 - (중략) - 이들은 공산비밀지하 조직을 결성하여 학생 데모를 조종하여 폭동을 야기하고 이를 통해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974년 4월25일, 5월27일 기사 참조).

    1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었지만 발표 내용은 매우 흡사하다. 직급은 달라졌지만 핵심인물인 신직수씨(전 중정 부장)와 이용택씨(전 중정 6국장)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하지만 두 발표가 ‘진실’이란 이름으로 통용된 기간은 큰 차이가 있다. 전자의 유통기한은 8개월에 불과했지만 후자는 27년이나 되었다.

    1차 인혁당사건 발표 시점에 박정권은 정치적으로 위기상황에 몰려 있었다. 1964년 봄에는 한일회담을 대일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이를 규탄하는 움직임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고 그 움직임은 갓 출범한 박정희 정권의 안보를 정면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6월3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대량검거 선풍이 불어닥쳤다. 그리고 바로 2개월 후에 ‘기억 1’의 인혁당 사건이 발표된 것이다.

    그러나 중정의 발표와는 달리 당시 이 사건 수사를 맡았던 검사들은 피의자들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결과적으로 사건 자체가 기소할 수 있는 사안이 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기소를 포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담당이었던 이용훈 부장검사 등 공안검사들과 이 사건 담당 변호사들의 진술 그리고 판결문은 1차 인혁당 사건을 적발했다는 당시 중정의 발표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이 발표가 정권 안보를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는 세간의 평가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당시 신직수 검찰총장은 중정의 압력에 굴복하여, 수사에 전혀 참여하지도 않았던 당직검사에게 기소를 지시했다. 이에 반발해 이용훈 부장검사와 장원찬 검사, 김병리 검사 등 담당검사 4명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며 결국 사정이 있던 한 사람을 제외한 세 사람이 사표를 제출했다. 재판과정에서도 ‘인혁당’이라는 조직의 실체는 부정됐다. 인혁당이라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한 적도 없다는 것이 사법부의 판단이다.

    인혁당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10년 뒤 ‘인혁당의 재건’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국방부에서 제출받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은 관련자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라기보다는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말해주는 웅변이나 진배없었다.

    우선 경찰과 중정이 압수한 품목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인혁당’은커녕 조직을 결성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 수사기록을 시간 순서에 따라 분석하면서 우리는 수사관들이 사건 초기에는 이 사건을 ‘조직사건’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 대다수는 신문 지상에 이 사건이 대서특필된 후에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자기의 집에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중정 발표와는 달리 세칭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는 증거도 전혀 없었다. 물증이 없다면 사전 내사를 통해 혐의자들이 북한과 접촉하거나 아니면 학생세력과 연대하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지하 비밀조직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내부적인 혐의를 갖고 수사에 착수했던 것일까. 그러나 당시 수사관들에 따르면 그 역시 사실이 아니다. 1974년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수사관들 중에 이런 사실을 부인하는 수사관은 없다.

    그렇다면 사전 내사도 없었고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중정의 발표와 같이 조직원이 수십 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비밀 지하당을 일망타진하는 개가를 올리는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당연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위원회의 조사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가보자.

    필자를 포함해 두 명의 조사관이 국방부 검찰단 문서고에 들어가 인혁당 재건위 관련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확인한 시점은 2001년 8월이었다. 서류에 쌓여 있는 먼지 두께가 27년이라는 세월을 말해주는 이 기록은 이때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왔다. 분량만 해도 2만여 페이지였다. 정의평화구현사제단과 천주교인권위원회, 그밖에 사건 관련자들에 따르면 그동안 국방부는 이들의 기록열람 요청에 대해 “보관하고 있지 않다”고 답변해왔다.

    의문사위에 이 사건 재판기록의 확보는 진상조사를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기록이 없으면 조사대상자조차 확정할 수 없고 사건 흐름을 파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기록 확보를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석 달이 흘렀다. 기록이 있을 만한 곳 가운데 남은 것은 국방부 밖에 없었다.

    국방부에 기록을 요청하기에 앞서 의문사위는 사전준비 계획을 세웠다. 관련 기록을 요청하는 공문 한 장 달랑 보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문을 보냈다가 ‘기록을 보관하고 있지 않다’는 답변이 올 경우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조사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것임이 분명했다. 물론 국방부가 그와 같은 답변을 보내올 것이라고 예상할 실제적 근거는 부족했고 또한 실지조사라는 최후 수단이 남아 있었지만, 군 대상 의문사를 조사하는 우리 위원회 조사3과의 경험은 담당 조사관이던 필자에게는 심각한 경고음이었다. 당시까지 3과가 군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지조사는 성과가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기록의 존재 여부를 확인한 후 공문을 발송하기로 하고 곧바로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확인 작업에 착수한 지 두 달 보름 만에 국방부 검찰단에 기록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공문을 보내 기록을 확인하고 사본을 복사하는 데 또 두 주일이 걸렸다. 기록을 입수해오기까지 정확히 6개월이 소비된 것이다.

    기록을 복사하기 위해 검찰단에 갔던 첫날은 시간이 유난히도 느리게 흘렀던 기억이 난다. 일군의 고위급 장교들이 우르르 검찰단 문서고에 들어오더니 “위원회에 사본을 내줘도 좋다고 결재한 사람이 대체 누구냐”며 큰 소리를 치는 등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종료휘슬이 울린 이후였다.

    이제 닥친 일은 기록의 분석이었다. 필자는 당시 최종길 교수 사건을 마무리하는 시점이어서 기록의 분류와 분석 그리고 피해자측에 대한 조사는 조현조 조사관이 전담하기로 했다. 방대한 문서기록을 분류한 후 이를 분석하는 데 다시 몇 개월이 흘렀다.

    분석을 통해 조사대상자가 확정되었고 또 이들을 몇 개 그룹으로 나누었으나 문제는 증언을 해줄 제3자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때까지 고문, 문서 허위작성, 증거 조작 등은 기록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추정한 잠정적인 결론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육성으로 확인해줄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가혹한 고문이 광범위하게 자행됐다는 사실, 문서가 허위로 작성되고 증거가 조작되었다는 것을 필자가 확신할 수 있었던 근거는 피해자들의 증언이 일관되고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입수한 기록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순이 너무나도 많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중정의 당시 수사관들이 음으로 양으로 이 사건 해결을 도와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사건으로 사형당한 여덟 명을 비롯해 구속된 사람 모두 상고심으로 형이 확정되기까지 약 1년 동안 중정의 지시에 의해 면회가 일절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고문당한 사실을 증언해줄 사람은 본인들을 제외하고는 변호사와 교도관들 그리고 직접 고문을 하거나 목격한 수사관들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서울구치소에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을 담당했던 교도관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74년 당시 서울구치소에 근무하던 교도관들은 약 480명. 간단히 말해 공휴일을 제외하고 하루에 한 명씩 소환 조사한다 해도 2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결국 소환조사 대신 탐문조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대일 접촉을 지양하고 집단접촉(grouping)을 시도했다. 접견과와 출정과 그리고 사동담당자들 중에서 근무기간이 긴 사람을 우선 선정하여 협조자를 찾는 한편, 한 번에 다수를 접촉할 수 있는 소모임을 만들어 증언 확보를 위한 교두보로 삼았다.

    생각보다는 정보타깃(조사에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는 대상이나 그 대상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 혹은 자료)을 찾기가 쉬웠다. 거의 대부분의 교도관들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된 사건이며 매우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례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나서서 유용한 정보를 알 만한 사람을 소개해주고 심지어 연락처를 일일이 확인해 우리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선고 20시간만에 사형시킨 정권 안보 조작극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오열하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유가족들

    이들의 도움으로 당시 사동담당자, 요시찰 접견을 담당했던 사람, 재판정에 입회했던 출정과 직원, 사형장에 입회했던 사람, 고문을 목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 명단이 작성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형당한 하재완씨가 탈장이 되는 등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것을 목격한 교도관의 증언이 있었다. 이후 재판정에서 이 사건 관련 피고인들이 인혁당이라는 조직의 결성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그 외에도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억울해 했다는 증언, 사형당한 사람들이 남긴 유언, 그리고 중정 요원이 구치소에 상주하며 교도소 내의 권력자로 행세했던 일 등 다양한 증언이 확보되었다.

    당시에 이들을 변호했던 변호인들도 피고인들이 고문을 당했다는 내용, 인혁당이라는 조직은커녕 어떠한 조직도 만든 적이 없다는 법정진술, 기소한 검찰이 혐의 내용을 입증할 증거가 거의 없었으며 오직 고문으로 만든 진술서가 증거의 전부나 마찬가지여서 검찰에서 작성한 조서가 임의성이 없고 따라서 증거능력이 없다는 사실, 그 외 재판장에서 피고인들이 했던 진술내용 등을 증언했다. 변호사들은 이 사건을 담당했던 군사법정의 심리절차가 위법했으며 채증 법칙을 위반한만큼 이 사건의 재판은 위법한 재판이었다고 분명한 어조로 진술했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한 변호인들은 피고인들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인을 여러 차례 재판부에 신청했지만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기각당했다고 진술했다. “이 법정에서 우리 변호인들이 할 일이 없으니 모두 동반 사퇴하자”는 논의까지 있었다는 것. 담당 변호사들에 따르면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구속부터 경·검의 조사, 재판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불법으로 점철됐다는 것이었다.

    위와 같은 진술을 확보한 상태에서 당시 이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수사관들을 상대로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 초기에 상당수 수사관들은 “이 사건은 재판을 통해 결론이 난 사건인데 무슨 일로 조사를 한다는 것이냐”며 응하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자신은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며 발뺌하는 수사관들도 있었다. 일부 수사관은 “나는 가해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피해자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고 호소하며 조사를 피하려 했다. 대부분의 수사관은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기보다는 망각의 늪 속에 영원히 묻혀있기를 바랐다.

    수사관들의 입장이 위와 같으니만큼 우리는 1차 조사 목표를 수사관들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이 작업이 앞으로의 조사방향을 정교하게 설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소환조사 외에 탐문조사를 병행했는데 이 과정에 퇴직한 중정 수사관들은 물론 현직 국정원 수사관들까지도 조사 대상자들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조사관들은 정보타깃과 조사타깃 그리고 조사방법의 대강을 설정할 수 있었다.

    수사관도 피해자

    담당 수사관들에 대한 1차 조사를 마친 후 우리 조사관들은, 조사대상자를 단지 정보를 제공하거나 잘못한 사실을 털어놓아야 할 객체로만 파악해서는 안 되며, 가해자라는 측면만을 강조해 공격적인 조사를 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괴롭고 처참했던 이 사건을, 조사관 혹은 피해자들과 함께 ‘기억’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을 원칙의 하나로 삼았다. 이를 위해서는 조사관의 눈으로뿐 아니라 당시 수사관들의 시각에서 이 사건을 볼 수 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고급 정보는 ‘신뢰’라고 판단했다. 이 사건처럼 수십년이 지난 사건의 경우 정보의 양과 적합성 혹은 신속성은 신뢰에 비해 후순위일 수밖에 없다. 조사관들은 여러가지 방증 조사를 통해 수사관들도 어쩔 수 없이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양심 때문에 괴로워한 사람이 있다고 확신했다. 고문한 수사관들을 가해자로 설정하고 고문당한 사람들을 피해자로 놓는 이분법적 구도는 이 사건의 성격과 맞지 않는 위치설정(positioning)임이 분명해 보였다.

    수사관들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다. 즐기려는 마음에서 사람을 고문하는 사람은 드물다. 죄 없는 자를 식별하지 못하는 수사관도 드물다. 당시 수사관들이 위원회의 조사관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진실을 털어놓는 데 장애가 될 것임은 물어보나마나였다. 이외에 또 하나의 변수는 채 3개월도 남지 않은 조사기간이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자 대부분의 수사관들은 고문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조사를 받을 수 없다고 고함을 지르며 거품을 무는 사람, “정권이 바뀌면 당신부터 조사하겠다”고 협박하는 사람, “세상이 뒤집혔다. 빨갱이들에게 무슨 인권이 있느냐. 완전히 빨갱이 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사람 등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필자는 이들의 반응을 고려해 조사에 들어가면 모든 질문에 우선해서 고문사실부터 파고들었다.

    첫 질문은 대개 “왜 고문을 하셨습니까. 이제 연세가 들고나서 돌이켜 보면 후회가 되시죠”였다. 그 당시와 같은 상황이라면 지금 조사하고 있는 나라도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위와 같은 질문의 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무리 수사관들 스스로 고문사실에 대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있다고 해도 어쩌다 비위가 상하면 한번쯤은 조사관과 맞붙어볼 요량으로 가슴 한 구석에 전의를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접근방식은 수사관들의 가슴을 얼마쯤은 부드럽게 녹여주었고, 동시에 자신이 조사를 받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뚜렷이 각인시키는 질문이었다.

    사실 우리는 이 수사관들을 조사하기 전에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왜 고문을 했는가에 대하여 상당정도를 파악하고 있었고 우리에게 조사를 받으러 오는 수사관들도 반쯤은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자백의 선두주자일 수는 없다는 생각 그리고 위원회에서 자신이 한 진술이 외부에 공개될 것이라는 근거없는 추정 때문에 고문을 시인하지 못하는 수사관도 있었고,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즉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고문을 차마 인정할 용기가 없어서 자백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후자의 한 예는 전기고문으로 피의자의 한쪽 눈을 실명케 하거나 발가락을 마비시키거나 사람을 실신시켜 사망 직전까지 가게 만든 전기고문 기술자 박○○씨의 경우였다. 전기고문은 보통 물고문 후에 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박○○ 수사관은 물 고문도 직접 했다.

    전기고문은 엄지손가락이나 발가락에 코일을 붙인 다음 228전화기(야전용 전화기)에 달린 손잡이를 돌리는 방법을 쓴다. 고문을 당해본 사람에 따르면 이로 인한 고통은 마치 번갯불로 온몸을 지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라 한다. 전기고문에 대한 증언은 이미 이 사건 피의자들 거의 모두로부터 구체적으로 나와 있었지만 이번 위원회 조사과정에 당시 수사관이던 전○○씨 등의 목격담이 나오면서 분명한 사실로 입증됐다.

    물고문은 이른바 통닭구이 고문과 병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우선 고문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철봉에 붕대를 감는다. 그러지 않으면 고문 당한 사람 피부에 찰과상이 나서 고문사실이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양팔과 다리를 묶고 이 사이에 이 철봉을 끼운 후 두 책상 사이에 걸면 사람이 통닭처럼 대롱대롱 매달린다. 그리고는 물수건을 얼굴에 씌운 다음 고춧가루가 섞인 물을 주전자로 서서히 얼굴에 붓는다. 이 고문을 당하면 호흡이 매우 어렵고 숨을 쉰다 해도 고춧가루가 섞인 물이 들어와 폐가 손상되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의 경우 이러한 물고문은 수도 없이 자행됐다. 여기에 참여한 수사관은 박○○씨 외에도 손○○씨 심○○씨 등이었다.

    야전침대에서 뺀 봉으로 사람을 두들겨 패는 몽둥이 찜질도 자행됐다. 고문을 하다가 피의자의 비명소리가 크게 나면 입에다 솜을 집어넣고 구타했다. 이 사건 피의자들은 하도 심하게 맞아 온몸이 시퍼렇게 변할 정도였다. 교도관들과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몽둥이 찜질을 당한 사람들 피부는 새카맣게 탄 것 같았다.

    희생자인 하재완씨의 사동담당 교도관은 하재완씨가 중정에서 물고문, 전기고문을 받았다고 말하기에 자세히 살펴보니 탈장이 돼 있었고 온몸에 멍자국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아랫배가 불룩한 상태에다 정상적으로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의무과로 치료받으러 갈 때도 소제(교도소나 구치소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재소자로 비교적 죄질이 경미한 사람들이 차출된다)들이 부축해 걸어갔다는 것이었다.

    하재완씨나 우홍선, 김용원씨 등이 조사를 받고 서울구치소로 복귀할 때 업혀서 들어오는 것을 여러 차례 봤으며 이들에게 밤 늦게서야 돌아오는 이유를 물으니까 “고문을 많이 받아서 그렇다”고 답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그 외 이수병씨도 여러 차례 몸이 불편하다고 호소해서 살펴보니 피부가 새카맣게 타 있더라는 교도관의 증언도 있었다.

    위원회 조사결과 고문은 수사초기 중정에서부터 검찰 조사를 받을 때까지 수시로 자행됐다. 수사관들이 고문을 가한 이유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고문을 할 필요가 없다. 이 사건의 경우에도 피의자들의 혐의점을 밝히기 위한 ‘수사’보다는 원하는 답변을 얻기 위한 고문이 중점적으로 자행됐다. 당시 수사관들은 “이 사건의 현장 수사지휘 책임자이던 중정의 윤○○로부터 ‘물건(조직사건)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털어놓았다.

    사건조사가 마무리에 접어드는 시점에 윤○○가 세칭 1차 인혁당 사건 관련 자료를 열심히 들여다보더니 느닷없이 이 사건을 인혁당 재건위라는 조직사건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잔혹한 고문을 직접 했던 수사관들을 제외하고는 위와 같은 구체적 진술 앞에서 동료 수사관들의 고문사실과 이유를 털어놓는 수사관이 나왔다. 그뿐 아니라 고문한 수사관들조차도 이 사건이 중정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털어놓았다. 특히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기억 2’와 같은 중정의 발표에 반발했다고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세칭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이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한 사실이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발표가 먼저, 조사는 다음

    그러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중정이나 군법회의 검찰부에서 사건을 발표하는 시점까지 피의자들을 대상으로 ‘인혁당 재건위’라는 조직의 실체가 존재하느냐에 대해 어떠한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검찰은 사건 발표와 동시에 거의 동일한 내용의 공소를 제기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증거는 물론 진술도 없었다. 조사 자체가 없었던 상태에서 발표를 먼저 한 셈이다. 이는 재판기록과 수사기록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검찰과 중정은 먼저 가상의 사실을 유포한 후 인혁당 재건위를 만들어냈다. 중정 요원들의 냉소적인 표현을 빌리면 “제품을 만들기도 전에 광고 컨셉을 기획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증거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이 기획한 제품(공산주의 조직)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였다. 중정에서 사용한 ‘제품’의 제조기술은 다름 아닌 고문이었다.

    실제로 수사기록을 자세히 살펴봐도 비밀지하당 구성에 관한 물증은 전혀 없다. 구성 시점과 장소, 조직원, 강령은 물론 활동 내용에 대한 물증도 없다. 그런데도 중정은 사전 내사활동은커녕 사후 방증수사조차 하지 않았다. 비밀지하당을 건설해 남한을 공산화하려 했던 엄청난 사건에 있어서 피의자들의 동선이나 연락수단, 조직성격 등에 대한 수사는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중정 수사관들의 직무유기였을까? 아니면 그러한 수사 활동조차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까? 이 사건 담당 수사관의 말이다.

    “피의자들이 인혁당 재건위라는 비밀지하당을 구성했다는 중정 발표를 보고 우리도 깜짝 놀랐다. 그 때까지 수사를 하고 있던 우리들도 모르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발표에 너무 놀라 반발했었다.”

    발표 후 수사관들은 중정 고위관계자가 만들어 온 조직표(수사관들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와꾸’)를 놓고 피의자들을 틀에 그 꿰맞출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렇듯 꿰맞춘 수사의 흔적은 여러 곳에 널려있다. 수사도 하기 전에 발표를 하고 이 발표내용에 맞춰 공소를 제기했으니, 인혁당 조직과 관련한 조사일시는 발표와 공소제기 전에 수사한 것처럼 허위로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검찰에서 작성하는 피의자신문조서와 진술서에 기록되어 있는 일시는 허위작성된 것이었다.

    조서가 조작되었다는 근거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첫째, 당시 수사관들의 진술. 이○○, 신○○ 수사관 등은 당시 중정에서 조서 작성일자를 사실과 다르게 순서를 바꾸어 기록한 사실을 인정했다. 둘째, 이 사건으로 수형 생활을 했던 피의자들의 증언. 이들의 증언에는 수사관들이 진술서와 조서에 일시를 기록하지 말라고 강요했던 정황이 상세히 드러나고 있다. 셋째, 사건 당시 이 사건 피의자들이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서와 상고이유서에 나타나는 진술. 이 진술에는 조서와 진술서의 작성일자가 변경된 사실이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진술돼 있다. 특히 항소이유서와 상고이유서에 기록된 내용을 당시 수사기록과 비교하면 기록이 허위로 작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피의자들이 인혁당 재건위와 관련된 조사를 처음 받은 것은 사건발표와 기소일인 1974년 5월27일 이후였던 것이다.

    조사일시뿐 아니라 장소도 허위로 기재되어 있다. 국방부로부터 제출받은 공판기록을 분석하면 이 사건 피의자들을 조사한 장소는 대부분 서울구치소, 서울 중부경찰서로 되어 있다. 이 기록 역시 허위다. 수사관들은 몇몇 조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조사가 중앙정보부 6국에서 진행됐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를 부인하는 수사관은 한 사람도 없다. 특히 한 수사관은 “중정 간부로 수사를 현장지휘했던 윤○○이 경찰에서 파견 나온 수사관들에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모두 경찰이 조사한 것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조사장소를 허위로 작성하게 한 이유 역시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으로 망신을 당한 중정 수사관들이, 10년이 지난 후 또다시 이 사건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만들려는 상부 방침에 ‘무리한 수사’라고 심하게 반발하며 조서에 이름 남기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퇴직한 한 중정수사관은 “중정에서 수사관들이 상부 지시에 이렇게 반발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말한다.

    납득할 수 없는 재판과정

    선고 20시간만에 사형시킨 정권 안보 조작극

    사형집행 직후 촬영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시신 사진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은 혐의에 대해 공소를 제기한 것 자체가 법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며 생명을 대상으로 한 위험한 블랙 코미디였다. 공소제기는 매우 엄밀한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극히 초보적인 법 정신은 검찰관들에 의해 법전 속에 유폐됐다. 검찰의 공소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날인을 거부하는 피의자들에게는 검찰 수사관들이 전기고문, 물고문 등으로 ‘본때’를 보여주었다. 한 퇴직 수사관의 말을 들어보자.

    “사흘 매에 견디는 장사가 없다고 하지만 세 시간을 견디는 사람도 본 기억이 없다. 증거고 뭐고 소용없다. 일단 공산주의자로 도장을 박아 놓으면 확실한 면죄부를 손에 쥔 것이다. 누구 하나 찍소리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 사건 피의자들은 고문으로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진 상태에서도 마지막으로 재판부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재판은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됐고 검찰은 물론 재판관들도 피고의 발언을 수시로 제지했다. 이 사건 피고인이었던 임구호씨의 경우 재판관의 제지를 무시한 채 최후진술을 통해 “증거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한 직후에 검찰관실로 불려가 문호철, 이규명 검사 등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변호인측이 요청한 증인은 모두 기각되고 검찰측 증인만 채택됐는데 그나마 변호인들은 이들을 상대로 심리조차 하지 못했다.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조서와 진술서가 임의성이 없었다”고, 말해 본인들의 자유의지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고 진술했고 변호인들 역시 증거로 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니, 법적으로 볼 때 별도의 방법으로 그 임의성이 입증되지 않는 이상 진술서와 조서는 증거로 채택될 수 없었지만 이 역시 무시됐다.

    담당 변호사였던 함정호 변호사와 박승서 변호사는 “피고인들이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하고 무죄를 주장했는데도 재판부가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피고인의 증거신청을 모두 기각한 것은 증거법 위반이며 위법한 심리태도”라고 말했다. 한승헌 변호사는 또 “헌법 제10조 제2항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은 위법행위의 결과로 얻은 진술은 어떠한 효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에 어긋나는 원심판결은 헌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말한다.

    더욱더 충격적인 사실은 공판 조서 또한 허위로 작성됐다는 사실이다. 공판조서에는 이 사건 피고인들이 수사과정에 당한 고문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항변하지 않았고, 검찰에서 작성한 조서의 임의성을 인정한 것으로 돼있으며, 지하 비밀당을 만들어서 국가를 변란시키고 정부를 전복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공소내용을 시인한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재판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이를 부인한다. 그 당시 서울구치소 김○○, 이○○ 교도관은 “다른 것은 몰라도 검찰의 공소내용을 시인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진술했다. 변호인이었던 김종길 변호사(작고)는 1975년 2월4일에 공판조서의 허위작성 사실을 인정하는 확인서를 남겼다.

    함정호 박승서 등 다른 변호인들도 인혁당 재건위는커녕 어떠한 조직도 건설하였다고 인정한 피고인들은 없었다고 말한다.

    함변호사는 “공판조서를 보니 일부는 사실과 일치하고 일부는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아서 마치 피고인들이 유죄를 인정한 듯 오해를 야기할 수 있게 오기(誤記)되어 있다”고 말한다.

    박승서 변호사도 “피고인들은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검찰관 앞에서 자백하지 않으면 다시 끌려가서 고문을 당할까봐 겁이 나 공포분위기 속에서 검찰이 원하는 대로 허위자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고 증언한다. 박 변호사는 또 “피고인들이 인혁당은 물론 어떠한 조직도 결성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관련자 모두가 부인한 것이 사실”이라며 “공판 과정에 피고인 중 일부는 자신들이 혁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이 사건과 관련하여 문제가 된 노트(북한 조선노동당대회에 관한 노트)를 돌려보았다는 사실은 인정했다”고 진술했다.

    한 수사관은 이에 대해 “하재완씨는 군에 근무할 당시 북한방송 녹취를 전담했던 사람으로, 중정에서 수사를 받을 때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을 전후하여 북한의 동향을 알고 싶어 방송을 청취했다고 진술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이 외에도 많은 진술이 있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이렇게 허위로 작성된 조서와 공판조서를 바탕으로 여덟 명은 사형을 당했고 나머지 피고인들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20년형을 선고받았다. 특히 사형은 대법원 판결 바로 다음 날인 1975년 4월9일 새벽에 집행되었다. 사형집행은 확정판결 후에도 상당 시간(보통 1~7년)이 경과한 다음에 집행되거나 혹은 감형조치 되던 관례는 이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전격적인 사형집행은 재심 기회마저 박탈했다.

    이 집행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또 다른 근거는 상고심에서 확정 판결이 나기도 전에 이미 교도소에서는 사형집행을 위한 준비절차에 들어가 있었다는 증언이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유인태씨(전 국회의원)는 사형을 집행하기 전날 우연히 운동장에서 김용원씨를 만나 “오늘 오전에 수정이 미제 수정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내일 처형당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사형수들은 평소에 국산 수정을 차고 있었는데 집행 하루 전에 이를 단단한 미제 수정으로 바꾸는 것이 관례였다. 유인태씨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대법원 재판이 진행중이던 시점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가해는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사형장에서 ‘적화통일 만세’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등의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사형장면을 목격했던 교도관들과 군종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와 같은 유언 역시 조작된 것이다. 당시 교도관 김○○, 안○○, 이○○에 의하면 도예종씨는 “통일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는 한마디를 남겼으며 그 외에도 ‘적화통일’이란 표현은 사용한 사람이 없다.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말 역시 듣지 못했다는 것. 당시 사형집행 명령부를 작성했던 교도관 이○○ 역시 자신이 기록한 유언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유가족들은 사형이 집행된 후 사체조차 뜻대로 수습할 수 없었다. 일부 사체는 경찰이 경계하는 가운데 응암동 성당으로 옮기려는 가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바로 대구로 옮겨졌고, 송상진씨의 경우에는 경찰들이 사체를 탈취한 뒤 가족의 동의없이 화장한 후에 유골을 인계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수사, 재판, 사형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유신시대의 법을 ‘민주로 위장하기 위한 장식용 소품’으로 비유한 어느 시인의 말은 너무 가벼워 보인다. 이 사건만을 놓고 본다면 당시의 법은 반대자를 제거하기 위한 지배의 도구였다.

    유가족들은 ‘빨갱이의 가족’으로 낙인 찍혀 사회에서 격리됐다. 이들은 끊임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고 어린 자식들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놀림을 들으며 동네 아이들의 전쟁 놀이에서 나무에 묶인 채 수도 없이 총살을 당해야 했다. 이제야 이들의 무고함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하지만 지난 세월 유신의 광기와 반공의 망령에 저당잡힌 인생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인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망각’

    유가족과 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 받았던 사람들,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에서는 지난 30여 년간 “인혁당 재건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가상의 조직이며 고문으로 인해 증거가 조작됐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하지만 사건 당시부터 언론은 침묵했고 법의 지배와 정의를 말하던 대부분의 지식인 또한 이 사건의 진실을 외면했다. 그 결과 지난 30여 년간 거짓은 진실로 행세했고 사회는 이 사건을 ‘망각의 영역’으로 추방해버렸던 셈이다. 그리고 당시 유신정권의 총책임자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지금 기념관으로 부활하고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주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했지만 앞으로는 이 사건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에 대해 발전적이고 생산적인 논쟁이 전개되기를 바란다. 법적인 재심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역사적인 평가가 더 절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오류가 교정되지 않고 비인도적인 범죄가 처벌되지 않는다면, 미래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을 이 사건은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거나 ‘죽은 X만 억울한 것’이라는 처세술에 몸을 맡긴 채 ‘법의 지배’를 이론 속의 존재로만 여기는 경향이 사회적으로 통용 가능한 선택이라면 미래에는 더 끔찍한 망령이 나타날 수도 있다.

    오이디푸스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오이디푸스가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를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목매 자살한 후였다. 오이디푸스는 당장 목숨을 끊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해 스스로 눈을 멀게 하고, 속죄를 위해 딸 안티고네의 도움을 받아 참회의 길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범죄인 것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 그런데도 참회의 길을 걸어 복수의 여신인 에리니에스의 사당에서 지난날의 죄를 깨끗이 씻고 죽어서 신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담당했던 재판관들, 중정 고위간부들 그리고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던 수사관들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지 자못 궁금하다. 과연 우리 사회에 에리니에스의 사당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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