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호

“베트콩은 날 검둥이라고 안 불렀소!”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상을 관통하는 대서사

  • 안병찬│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언론인권센터명예이사장 ann-bc@daum.net

    입력2011-09-20 1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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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인 챔피언인 떠버리 클레이는 왜 흑인 인권조직 ‘이슬람민족’에 가담하는가. 그가 정체성을 자각한 동기는 무엇인가. 양심적 입대 거부로 사나운 백인 독수리 엉클 샘, 곧 아메리카를 상대로 전면 전쟁을 시작한 무하마드 알리. 그는 왜 같은 검둥이인 ‘엉클 톰’을 경멸하는가. “나는 흑인이 자랑스럽다”고 포효하는 알리.
    3장/ 엉클 샘과 엉클 톰

    1. 흑인 인권조직 ‘이슬람 민족’

    “베트콩은 날 검둥이라고 안 불렀소!”
    1961년 캐시어스 클레이는 마이애미에 있는 회교사원(모스크)을 처음으로 방문해 ‘이슬람 민족’ 대변인 말콤 엑스(X)를 만난다. 클레이는 “사원에서 생전 처음으로 진정한 정신적 영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말콤 엑스는 그 후 한동안 알리의 고문 역할을 맡았다.

    1962년 클레이는 ‘이슬람 민족’의 교주 엘리야 무하마드가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 ‘이슬람 민족(원명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이슬람교에 입각한 미국 내의 흑인해방조직이다. 흑인민족주의, 흑백분리주의를 기반으로 뭉쳐 종교운동과 동시에 사회운동을 폈다. 이슬람 민족운동, 또는 블랙 무슬림운동이라고도 불렀다.

    1930년에 월러스 파드 무하마드(1877~1934)가 미국 흑인의 영혼적, 정신적, 사회경제적 조건을 회복한다는 목적을 내세워 이 운동을 조직했다. 클레이가 가입한 1962년은 ‘이슬람 민족’이 제2대 교주 엘리야 무하마드(1897~1975)를 중심으로 크게 영향력을 떨칠 때였다.



    영국 작가 마이크 마커시는 저서 ‘보상의 노래-알리와 60년대 정신’(번역서 제목: 알리, 아메리카를 쏘다)에서 ‘이슬람 민족’ 조직은 미국식 소수 종교집단의 전형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단은 미국 문화의 산물이면서 미국을 사악한 존재라고 규탄한다는 것이다. 조직의 상징은 초승달로서 이슬람·자유·평등·평화를 숭상한다고 했다.

    훗날 무하마드 알리는 흑백 인종 간의 결혼에 대해 자기 생각을 밝힌 적이 있다.

    “지성이 있고 올바른 정신을 가진 흑인이라면 자기 흑인 아들이나 딸이 백인 소년 소녀와 결혼하려는 것을 어느 누가 원하겠는가.”

    알리는 ‘인종차별 폐지론’을 두고는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우리는 엘리야 무하마드의 가르침을 따른다. 따라서 우리는 인종차별을 폐지한다는 말에 찬성할 수 없다. 인종차별 폐지론은 틀린 것이다. 우리는 백인과 함께 살고 싶지 않고 따로 살고 싶다. 차별 폐지론은 필요가 없다.”

    / “백인은 사탄이다” /

    흑인 민권운동 진영은 아프리카 흑인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자각과 자부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인종차별 폐지를 흑인 포섭의 수단으로 보았다.

    미국은 인종차별이 심했다. 남북전쟁 때 남군이 사용한 남부연합기의 상징은 남십자성 문양이다. 미시시피 주는 미국에서 ‘깊은 남부(딥 사우스)’라고 부르는 곳으로, 2001년에 주기(州旗)에서 남십자성 문양을 제거하자는 제안을 부결하며 흑백차별을 고수했다. 남북전쟁을 치르고 150년이 지났어도 흑백차별 문제는 미국 땅에 뿌리 깊게 남아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슬람 민족’에 가입한 1964년, 그는 태어났을 때 받은 노예의 이름 캐시어스 클레이를 버리고 이슬람식 이름인 무하마드 알리로 바꾼다. 그가 정통 이슬람교도가 된 것은 킨샤사에서 ‘정글의 혈전’을 치른 이듬해인 1975년이다. 알리는 “백인은 사탄이고 정의롭지 않다”는 종교적 믿음을 가졌다. 그는 백인이 흑인을 증오한다고 생각했다.

    2. “덤벼 아메리카! 덤벼 흰 가면 검둥이!”

    앞 장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무패 기록으로 승승장구하던 클레이는 1964년 2월25일 황소 투사인 챔피언 소니 리스튼과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격돌한다. 세계권투협회(WBA)와 세계권투평의회(WBC)의 통합 선수권을 건 첫 대결이었다. 클레이가 소니 리스튼을 이길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문가들은 리스튼이 7대1의 비율로 우세하다고 점쳤다.

    경기를 앞두고 클레이는 리스튼을 향해 “덩치만 큰 못난 곰”이라고 조롱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유명한 말을 던진 것도 이때였다. 그는 리스튼을 랩으로 야유했다.

    소니 리스튼은 빈탕이야. 그자는 말할 줄도 몰라. 그자는 싸울 줄도 몰라. 그자는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해. 그자는 복싱 실습을 받아야 해. 그자는 나와 싸우기로 했으니까 쓰러지는 법을 배워야 해.

    리스튼은 클레이를 허풍쟁이라고 여기고 클레이의 실력을 과소평가했다. 계체량 때 클레이의 맥박수가 평소의 54보다 두 배가 넘는 120으로 나온 것을 보고, 클레이가 겁쟁이라고 여겨 단 한 방에 넉 아웃시킬 수 있다고 지나치게 자신했다.

    대전이 시작되자 클레이는 빠른 발과 긴 팔을 이용해 리스튼의 강력한 주먹을 피했다. 3라운드에서 리스튼은 눈 밑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6라운드에서 클레이는 번개같이 빠른 주먹으로 리스튼을 압도했다. 결국 리스튼은 7라운드 벨 소리를 듣고도 일어나지 못한 채 티케이오(TKO) 패를 당한다.

    클레이가 흑인 종교 조직인 ‘이슬람 민족’과 관련이 있다는 뉴스는 리스튼과 대전을 앞둔 때 불거져 나왔다. 그가 대변인인 말콤 엑스와 어울린 일도 알려졌다. 말콤 엑스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공개적으로 비웃어 물의를 일으킨 급진파다. 문제가 불거지자 ‘이슬람 민족’의 교주인 엘리야 무하마드는 과격한 말콤 엑스에게 자격정지 조치를 내려야 했다. 미국의 백인 주류와 백인 언론은 ‘이슬람 민족’을 혐오단체로 낙인찍었다.

    흥행주 빌 패버샴은 캐시어스 클레이와 소니 리스튼의 대전을 주선했는데 이슬람 개종 문제로 클레이와 갈등했다. 결국 클레이가 리스튼 대전을 끝낸 후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실을 발표하기로 절충해 대전이 무산되는 위기를 넘겼다. 이런 사실은 알리가 1975년에 쓴 자서전 ‘나는 최고다: 알리가 쓴 내 이야기’(원제 I am the Greatest: My Owen Story by Ali)에도 나온다.

    1964년 2월26일, 소니 리스튼을 케이오(KO)로 이긴 다음날, 캐시어스 클레이는 ‘이슬람 민족’조직에 가입했으며 이름을 캐시어스 엑스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미국 기득권 사회는 일제히 알리를 비난했다. 알리가 권투와 돈벌이를 모두 포기하는 무모한 행동을 했다면서 들끓었다.

    1964년 3월6일 ‘이슬람 민족’ 조직의 창시자 엘리야 무하마드는 클레이에게 ‘찬양받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새 이름 ‘무하마드 알리’를 부여했다. 이로써 캐시어스 클레이는 무하마드 알리로 다시 태어났다.

    / ‘유령 펀치’와 황소 리스튼 /

    소니 리스튼과의 재대결은 1965년 5월 미국 메인 주 루이스턴에서 열렸다. 공식적으로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슬람 이름을 쓴 이후에 가진 첫 챔피언전이다.

    알리는 1회전에서 눈에 띄지 않는 번개 같은 펀치로 쉽게 케이오승을 거두었다. 이 결과를 보고 일각에서는 리스튼이 ‘이슬람 민족’의 과격파에게 협박을 받고 일부러 나가떨어져 경기를 포기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알리의 그 한 방에는 이른바 ‘유령 펀치’(팬텀 펀치)라는 별명이 붙었다.

    소니 리스튼의 후일담은 쓸쓸하다. 알리에게 두 번 진 뒤에 일단 재기해 연속 14회 케이오승을 거두지만, 그에게 다시는 챔피언에 도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헤비급 최고의 하드펀치를 가졌다고 하던 리스튼은 무하마드 알리라는 영웅의 제물이 됐다(1970년 12월30일 38세의 소니 리스튼은 라스베이거스의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사인은 약물 과다복용이었다).

    1965년 9월 최초로 인공위성 컬러중계방송이 있었다. 무하마드 알리는 서독 프랑크푸르트에서 카를 밀덴버거와 싸워 12회전에서 이겼다. 이 대전은 인공위성을 통해 컬러로 중계됐다. 밀덴버거는 막스 슈멜링 이래 세계 헤비급에 도전한 첫 독일 선수여서 알리의 이름이 서독에 널리 알려진다.

    1965년 10월 전 헤비급 챔피언 프로이드 패터슨이 알리를 비난하고 나섰다. 패터슨은 자신이 가톨릭교도라고 밝히면서 타이틀을 빼앗아 미국에 다시 바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말했다. 흑백통합주의자인 패터슨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지에 이렇게 썼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자신은 물론 검둥이 혈통에 치욕을 주고 있다. 미국의 헤비급 챔피언이 블랙 무슬림이라니 스포츠와 국가를 모욕하는 짓이다. 누군가 캐시어스 클레이를 때려눕혀야 한다.

    패터슨은 무하마드 알리라는 새 이름을 부르지 않고 굳이 옛 이름을 불렀다. 패터슨이 “누가 흑인의 본보기인지 겨뤄보자” 하고 싸움을 걸어오자 알리는 맞받아 패터슨을 조롱하고 비난한다.

    패터슨은 제가 타이틀을 미국에 되찾아주겠다고 말하는데, 내가 누구한테 세금을 내고 있는지 봐라. 난 미국인이야. 하지만 패터슨은 깜둥이라 불리는 귀머거리 멍청이다. 내가 좀 패줘야겠어. 그 작자 말이 괘씸해서 진탕 패줄 테야….

    / ‘톰 아저씨’를 흠씬 패주다 /

    그해 11월에 열린 패터슨과의 대결은 클레이의 두 번째 타이틀 방어전이었다. 알리는 보란 듯이 싸움을 질질 끌며 12회까지 끌고 갔다. 패터슨에게 주먹맛을 보여주다가 곧 물러서서 숨 돌릴 시간을 주고 입으로 연신 “덤벼, 아메리카! 덤벼, 흰둥이 미국놈아!”하고 욕을 퍼부었다.

    역부족의 패터슨이 티케이오로 쓰러지자, 백인 언론은 알리가 의도적으로 경기를 질질 끌면서 패터슨을 잔인하게 징벌했다고 비난했다. 당시 미국 주류사회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알리를 비판하고 독실한 기독교도인 패터슨을 옹호하는 분위기였다.

    흑인 민권운동가 엘드리지 클리버는 이 싸움은 사상적 측면에서 흑인혁명의 정신적 성취를 반영하는 전환점이 된다고 평가했다. “독립적인 흑인이 굴종적인 흑인을 징벌하는 상징적인 승리였다.” 클리버는 급진적 지식인이자 사회평론가로 검은 표범 당(블랙 팬더 파티)의 대변인 겸 정보장관을 지냈고 알제리와 쿠바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알리가 보기에 패터슨은 ‘톰 아저씨(엉클 톰)’였다. 알리가 패터슨에 대고 욕한 ‘흰둥이 미국놈’은 스토 부인이 쓴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 집(엉클 톰스 캐빈)’의 노예 주인공 같은 존재다. 톰은 노예로서 순종하며 기독교도가 되고 기독교적 순교를 감수하는 검둥이로 그려졌다.

    알리와 패터슨의 싸움은 미국 사회 안에 있는 두 흑인 진영 간의 대결을 상징했다. 1967년 에미 테럴과 대결한 한 판도 패터슨과의 싸움처럼 험하게 벌어졌다. 테럴 역시 알리를 굳이 클레이라고 불러 알리를 격분시켰다. 알리는 경기 내내 고함을 질러댔다.

    “내 이름이 뭐라고, 엉클 톰아. 내 이름이 뭐라고?”

    테럴은 15라운드 중 13라운드를 알리의 잔혹한 징벌에 시달렸다.

    한 복싱 전문가가 “정말 놀라운 복싱기술의 과시였다. 그리고 정말 야만적인 잔인성의 전시였다”고 평한 한 판이었다.

    / ‘검둥이’의 자각 /

    알리는 태어났을 때 백인 농장주의 기독교적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알리의 부모는 기독교 감리교와 침례교를 믿었고 어린 알리 형제는 어머니에게 이끌려 교회에 다녔다. 알리는 올림픽 금메달을 딴 직후 인종적인 편견을 체험하고 격분했다. 그는 “로마올림픽 금메달로 미국을 대표한다는 환상은 그때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때 그는 “미국인이 되기 위해 쌓아온 모든 성과를 아예 없었던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무하마드 알리는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노예의 이름을 버린 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알라와 평화를 믿는다. 나는 이제 크리스천이 아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바를 실천하기에 자유롭다. 알라의 추종자는 세계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다. 우리는 무기를 메지 않는다. 우리는 하루 다섯 번씩 기도한다.



    조직의 지도자 말콤 엑스는 1964년 3월6일 클레이를 동반하고 뉴욕 유엔본부 건물을 관람했다. 흑인 급진파 해방운동가인 말콤 엑스는 1965년 2월 뉴욕 집회에서 연설하던 중 암살당한다.

    알리는 2004년에 딸 하나 야스민과 함께 쓴 자서전에서 1975년에 주류파인 수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슬람 민족’의 교주 엘리야 무하마드가 죽고 그 아들 월러스 딘 무하마드가 새 지도자가 되면서 조직의 개혁운동을 편다. 알리는 그런 월러스의 노선에 동조했다. 뒷날 월러스 무하마드는 조직의 이름을 미국무슬림협회(American Society of Muslims)로 바꾼다.

    3. 아메리카와의 전쟁

    무하마드 알리와 플로이드 패터슨은 한바탕 십자군전쟁을 벌인 후 바로 화해했다. 패터슨은 무하마드 알리라고 새 이름을 부르며 화답했다. 패터슨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알리는 고작 24세밖에 안 됐고 순탄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 미국인들은 그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 말을 듣고 알리는 응답한다.

    “플로이드, 당신은 미국을 위해 싸운 선하고 깨끗한 미국인이며 모든 할리우드 스타는 당신보다 못하다.” 패터슨과의 십자군전쟁을 마친 알리에게는 본격적인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는 거대하고 무서운 적이었다. 바로 미국 정부라는 권력과의 전쟁이었다. 알리는 고등학교에 재학하던 1960년 군복무 여부를 가리는 신체검사를 받았고, 1962년에 현역 입영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소니 리스튼에게 도전하기 직전인 1964년 적성검사를 받고 현역 입영 대상에서 제외됐다. 놀랍게도 그렇게 영민하고 재치 있는 알리의 지능지수(IQ)가 현역 복무를 하기에는 부적절한 78로 나왔다. 알리는 지능지수가 낮은 것을 두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Greatest)고 말했을 뿐,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Smartest)고 말한 적은 없다”고 익살을 부렸다. 하지만 웃어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알리가 세계챔피언이 된 후 미국 정부는 알리가 의도적으로 낮은 점수를 받았을지 모른다고 의심해 다시 한 번 테스트를 했다. 결과는 같았다. 알리가 결코 의도적으로 적성검사를 엉터리로 받은 것도 아니었다. 알리는 자신을 입영시키려는 미국의 조치에 정면으로 맞선다. 길고도 지루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알리는 말했다. “나는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베트남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언론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 가운데 그는 유명한 말을 뱉어냈다.

    “보쇼. 난 그들 베트콩과 싸울 일 없소. 베트콩은 절대로 날 검둥이라고 안 불렀소.(I ain′t got no quarrel with them Vietcong… They never call me nigger.”

    인종 문제에서 출발한 알리의 저항은 군 입대 거부로 그 지평을 넓히기 시작했다. 미국 법무부는 알리의 여권을 압수했다. 이 조치는 알리가 더욱 강한 정치적인 전사가 되게 만들었다. 미국 내 흑인의 인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에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운다는 것에 알리는 코웃음을 쳤다. 알리는 양심적 거부자임을 전제로 미군에 입대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선언한다.

    알리의 프로모터인 루이빌 스폰서링 그룹은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걱정했다. 그가 계속해서 군 입대를 거부하다가는 챔피언 타이틀과 인기, 그리고 수백만달러의 수입을 모두 날릴 수밖에 없었다.

    / ‘아메리카 흰둥이’와의 싸움 /

    미국 당국은 알리가 입대해도 실제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예능인이나 대변인으로 복무하면 된다고 슬며시 유인했다.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때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는 군에 입대해 후방에서 시범경기를 하며 보내다가 제대한 선례가 있다고 했다.

    미국 정부나 알리나 크게 손해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절충안이었다. 미국 주류 사회의 공적(公敵)이 돼 지탄을 받던 알리로서는 자기 이미지를 바꾸고 권투 훈련을 계속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게다가 목숨을 건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됐다. 프로모터 그룹이 중재하고 나섰으나 알리는 타협안을 단연코 거부했다. 결국 루이빌 스폰서링 그룹의 담당 변호사는 알리의 협상 거부 의사를 최종 확인했다.

    알리의 입대 거부는 단순히 고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 내의 많은 주류 정치가는 알리를 반역자로 규정했다. 심지어 고향인 켄터키 주 상원의원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켄터키 주 사람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이라고 알리를 비난했다. 알리는 미국 정부와 싸우는 동안에도 링 위에서 무적시대를 이어갔다. 소니 리스튼과 프로이드 패터슨을 케이오로 이기고 캐나다의 조지 추발로, 영국의 브라이언 런던과 헨리 쿠퍼, 서독의 카를 밀덴버거, 그리고 미국의 강타자 클리블랜드 윌리엄스, 어니 테럴, 조라 폴리를 차례로 이겼다.

    1967년 2월6일 벌어진 알리와 어니 테럴의 싸움은 상징적인 흑백의 싸움이었다. 패터슨과의 싸움이 ‘아메리카 검둥이’와의 싸움이라면 테럴과의 싸움은 ‘아메리카 흰둥이’와의 싸움이었다. 계체량 때 테럴은 알리를 “클레이”라고 불렀다. 분노한 알리는 링에서 15라운드 내내 테럴에게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내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바보야!(What′s my name? Fool)” 알리는 소리쳤다. 미국 정부는 끈질기게 알리를 물고 늘어졌다. 미국연방수사국(FBI)은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나 말콤 엑스를 감시하는 수준으로 알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주류 언론은 알리를 맹렬히 비난했다. 결론은 뻔했다. 알리가 타이틀을 박탈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잘못하면 감옥에 갈 각오도 해야 했다. 알리의 법률 담당 변호사는 “미국 정부는 당신을 군기피자에 대한 본보기로 다루고 있다”고 사태의 심각성을 전했다.

    / 흑인들은 개만도 못하다 /

    미국 정부의 압력이 강해질수록 알리의 입장은 더욱 분명해졌다. 알리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와 인터뷰하면서 자기 입장을 밝혔다.

    “국내에서 흑인들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 왜 그들은 내가 군복을 입고 베트남까지 가서 싸우기를 원하나. 만약 내가 입대해서 베트콩과 싸우는 것이 2200만명이나 되는 미국 흑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할 수 있다면 미국 정부는 나를 징집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일 당장 내 발로 입대할 것이다.

    나는 알라신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 내 신념을 지키는 한 나는 잃을 게 없다. 우리 흑인들은 이미 노예로 끌려온 지 4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결국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쟁이 달아오르자 검사기준을 낮춘다. 1966년 군 당국은 징집에 관한 규정을 바꾸어 알리를 현역 입영대상자로 판정한다.

    1967년 4월28일. 마침내 소환장을 받은 알리가 휴스턴에 있는 신병 소집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병들은 신체검사를 마친 뒤 루이지애나 기지로 향하는 버스를 타야 한다. 젊은 장교 스티브 던클리가 알리를 포함한 26명의 입영자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호명을 받은 사람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대답해야 했다. 알리의 이름이 호명됐다. “육군, 캐시어스 클레이!” 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교는 거듭해서 불렀으나 알리는 요지부동이었다. 다른 장교가 알리에게 군 입대를 거부할 경우 최고 5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장교는 다시 알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알리는 응답하지 않았다. 군 당국자는 알리에게 징집을 거부하는 이유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미국 정부가 알리를 회유하기를 포기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슬람교의 성직자로서 미국 육군 입대를 거부한다.” 알리가 써낸 이유서였다. 알리는 결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한 흑인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백인들이 결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한 명의 검둥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 명의 검둥이. 백인들이 어찌할 수 없는 검둥이 말이다.” 알리는 칭찬받고 사랑받는 세계헤비급 챔피언이 아니라 한 명의 진정한 검둥이가 되기를 선택했다. 백인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저항의 검둥이’다.

    / 양심적 입대 거부 /

    미국 행정부는 알리가 종교적 이유가 아니고 정치적 이유로 징병을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알리는 양심적 거부자로서 미군에 입대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선언한다.

    전쟁은 성스러운 코란의 가르침에 반한다. 나는 징병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알라신과 후계자 무하마드의 선언에 따라서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독교도의 전쟁이나 이교도의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

    이 무렵부터 알리의 매니저 역할은 ‘이슬람 민족’의 최고지도자 엘리야 무하마드의 아들 허버트 무하마드가 맡게 된다. 알리는 학생저항단체인 흑인세력위원회(Black Power Committee)의 초청을 받고 워싱턴에 있는 흑인전용 하워드대학에서 연설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운집한 4000여 명의 학생과 흑인 공동체 지식인은 알리가 “흑인이 최고다(Blck is Best)”라고 외치자 만장의 갈채를 보냈다.

    1967년 4월28일에 알리는 미군 입대를 연달아 거부한다. 2개월 후 1심 재판 배심원은 21분 만에 알리의 유죄를 결정하고 징역 5년에 벌금 1만달러의 실형을 선고했다. 뉴욕 주 체육위원회는 즉각 알리의 선수권을 박탈하고 권투면허를 정지시켰다.

    백인 스포츠 기자로 알리와 친분이 두터운 하워드 코셀의 해석은 이랬다.

    백인 주류는 알리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백인에 복종하지 않자 생계를 박탈했다. 미식축구 선수들이 징병을 기피할 때는 한 마디도 안 하더니 알리한테는 생판 달리 대했다. 알리가 흑인이고 자화자찬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백인 사회는 알리가 자기 나라를 위해 싸우기를 기피하는 비겁자라고 헐뜯었다. 마틴 루터 킹 같은 민권운동 지도자를 앞세운 흑인 공동체의 생각은 그 반대였다. 알리는 양심이 옳다고 명하는 바에 따라서 수만달러의 돈을 내버리고 고행의 길을 택하니 참으로 정의롭다고 여겼다

    / 샘 아저씨 對 톰 아저씨 /

    미국에는 두 사람의 상징적인 ‘아저씨’가 있다. 그 첫 번째는 백인 샘 아저씨(엉클 샘)이다. 샘 아저씨는 미합중국을 의인화하하고 인격화한 백인 국가주의의 표상이다. 미국은 독립전쟁을 끝내고 29년 만에 다시 영국을 상대로 ‘1812년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엉클 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엉클 샘이 미국의 국가적 아이콘으로 자리를 굳힌 것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제임스 몽고메리 프래그라는 초상화가가 ‘엉클 샘 포스터’를 그린 이후였다.

    엉클 샘은 사나운 표정으로 정면을 손가락질하는 늙은 백인이다. 백발에 염소수염을 하고 성조기를 상징하는 톱 해트(실크 해트)를 쓴 샘은 “우리는 당신의 입대를 원한다”고 독촉한다. 지금도 백발 염소수염을 한 이 늙은 백인은 미국 정부가 애국심을 고취할 때는 물론 테러와의 전쟁, 금연, 음주운전 금지, 치아 닦기 등 여러 가지 홍보를 할 때마다 수시로 포스터에 등장한다. 1962년 미국 의회는 엉클 샘이라는 국가 아이콘의 창시자인 ‘엉클 샘 윌슨’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또 하나는 검둥이 톰 아저씨다. 미국 작가 해리 비처 스토 부인은 1852년 멜로드라마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엉클 톰스 캐빈)’을 썼는데 주인공인 검둥이 아저씨 톰은 켄터기 주 백인 지주의 노예로서 기독교적 순교자로 나온다. 목사 집 딸인 스토 부인은 기독교적 인도주의 입장에서 흑인 노예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해 당시 50만부라는 판매기록을 세웠다. 이 책은 미국 동부 백인들이 노예의 고통 받는 삶을 알고 동정적인 시선을 보내도록 만들었다.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대통령은 이 소설을 선거전에 활용했다. 링컨이 백악관에 스토 부인을 초청했을 때 “조그마한 스토 부인이 남북전쟁을 일으켰군요” 하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오늘날 엉클 톰은 백인에게 순치된 검둥이를 가리키는 경멸어가 됐다. 아프리칸-아메리칸(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민권운동 진영은 엉클 톰을 노예근성으로 순치돼 백인의 기독교도가 된 나약하고 비굴한 흑인상이라고 비판한다.

    무하마드 알리는 엉클 샘이 주도하는 미국의 백인 주류사회에 단신으로 용감하게 저항한 챔피언이다. 그는 엉클 샘과 종속관계를 이루는 엉클 톰을 “검은 얼굴에 흰 가면을 쓴 노예다”라고 비판했다.

    알리의 정신은 아프리칸-아메리칸의 정체를 찾고 인간의 평등권을 회복하자는 흑인성(네그리튜드)에 근원을 두고 있다. 아프리카 흑인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자각과 자부는 그의 모든 행동의 근간을 이룬다.

    / 유형 생활 /

    알리는 직업선수로 전향한 후 1960년부터 1967년까지 7년 동안 30차례 대전을 치르며 무패행진을 이어나갔다. 특히 이슬람으로 개종해 미국 정부와 병역문제로 전쟁을 벌이면서도 1964년과 1965년에 소니 리스튼과 두 차례 대결해 케이오로 이겼다. 이어서 프로이드 패터슨(1965년 11월), 조지 추발로(1966년 3월 캐나다 토론토), 헨리 쿠퍼(1966년 5월 영국 런던), 카를 밀덴버거(1966년 9월 서독 프랑크푸르트), 어니 테럴(1967년 2월) 등을 모두 이겼다. 추발로와 테럴을 빼고는 다 케이오나 티케이오 승이다.

    1967년 3월22일 알리는 뉴욕에서 조라 폴리를 맞아 7회전 케이오로 꺾었다. 이 대전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권투를 계속할 수 없게 됐다. 다음달에 그는 선수권을 박탈당한다.

    무하마드 알리는 미국 땅에서 3년 반의 긴 유형생활에 들어간다. 알리가 선수권을 박탈당하고 어렵게 지내던 1968년에 흑인음악의 대부 브라운 킹은 훗날 흑인운동의 애국가처럼 유행한 펑크노래 ‘크게 외쳐라, 난 흑인이다, 난 자랑스럽다(Say it loud-I′m black and I′m proud)’를 불렀다. 무대 밖으로 뛰어나와서 열정적으로 울부짖는 그 노래는 흑인의 자부심을 자극한다.

    크게 외쳐라, 난 흑인이야, 난 자랑스러워

    크게 외쳐라, 난 흑인이야, 난 자랑스러워

    (중략)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일할 기회를 요구해

    우리는 머리를 벽에 처박기도 지쳤어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기도 지쳤어

    우리는 사람이야

    우리는 새처럼 벌처럼 똑같이 자유로워

    우리는 무릎 꿇고 사느니

    우리는 차라리 두 발로 서서 죽겠어

    크게 외쳐라, 난 흑인이야, 난 자랑스러워

    크게 외쳐라, 난 흑인이야, 난 자랑스러워

    안병찬

    “베트콩은 날 검둥이라고 안 불렀소!”
    경찰에 앞서 살인사건 2건을 해결해 이름을 날린 사건기자 출신. 한국일보 베트남 특파원 시절이던 1975년 남부 베트남 패망(베트남 통일)의 마지막 현장을 취재하고 탈출한 후 르포르타주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발간해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한국일보 주불특파원·논설위원을 거쳤고 시사저널 편집·발행인을 역임한 후 경원대 언론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민영통신 뉴시스의 고정칼럼 ‘기자 49년차―안병찬의 영상르포르타주’(http://www.newsis.com)를 집필하고 소셜뉴스 위키트리의 개인 데스크 ‘안병찬 기자 49년차’(http://www.wikitree.co.kr)를 운영하며 언론인권센터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다. ‘신문 발행인의 권력과 리더십’ 등 저서 1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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