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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DJ노벨평화상’ 이후

“대통령님, 고르바초프를 기억하십시오”

  • 유시춘 소설가·국민정치연구회 정책실장

“대통령님, 고르바초프를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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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에는 국민의 검증을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전당대회에서 대의원들이 선택한 훌륭한 인재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정부 산하 공기업의 임원을 인선하면서 과거와 조금도 다름없이 ‘낙하산 인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동교동계의 브레이크 없는 권력행사의 한 예입니다.

당내 중하위 당직자들로부터 들려오는 얘기는 더 우울합니다. 특정고 출신이 아니면 아예 고급정보에 접근조차 못한다고 합니다.

또 하나, 참으로 송구스러운 말씀이나 ‘호남 권력’이 부패했다는 사실입니다. 88년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호남 정치세력은 집권당과 상관없이 독자적인 권력을 형성했습니다.

저는 경북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으로 TK가 권력을 독점한 30년 세월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배타적 패권의식과 근거없는 우월주의야말로 우리의 건강한 공동체의식을 좀먹는 독소라고 늘 비판해왔습니다. 지난 총선에서 동교동이 공천한 인물 중 네 사람이 호남에서 고배를 마신 것은 호남 민중의 명백한 거부 의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새천년 민주당’에 ‘새천년’의 마인드가 없고 ‘민주’적 행태도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4·13총선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집권당이 제1당이 되는데 실패한 것이 단순히 영남지역 유권자들의 전략적 투표행위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민주당은 잠재적 지지기반인 20∼30대 젊은 층을 포용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수도권 여러 격전지에서 민주당 후보가 낙선했던 것입니다.

여성인 저는 평소 여성의 인권을 중시해온 김대중 대통령의 친여성 정책이 여성 유권자의 호응으로 연결되지 못한 점을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인권, 여성, 정보화, 시민사회의 성장 등 새천년에 걸맞은 화두를 집권당의 정책으로 이슈화하지 못한 탓입니다.

불운하게도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이라고 볼 수 있는 노동자와 저소득층은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처럼 열렬한 지지를 보내지도 않았고 자발적 홍보사절의 기력마저 상실했습니다.

이런 악조건이 겹쳤는데도 민주당은 새로운 대응양식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선의 필승전략이던 자민련과의 연대에만 매달려 날치기를 감행한 결과 정국이 어찌 되었습니까? 민심을 거스른 밀어붙이기 전술은 민주당을 곤경으로 몰아넣지 않았습니까?

민주당의 동진정책은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동진정책은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더욱 악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전국정당화라는 기치 아래 끌어들인 세력은 대부분 30년 군부정권 우산 아래서 부귀영달을 누린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인사는 지금 민주당의 국회의원이 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70년대 학생운동 출신들에게 수사 도중 신발을 벗어들어 얼굴을 후려친 자도 있습니다. 지금 영남 사람들은 비웃고 있습니다. ‘뭐 히딱 디비지는 꼬라지를 보는가 싶었더니 맨날 해묵던 그사람들이 줄 바까 서갖고 또 해묵네’라고.

처음부터 비우호적이었으니만큼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쉽게 동의하진 않겠지만, 이들의 쓴소리는 새겨 들을 대목이라고 봅니다.

세력교체 없는 정권교체에 대해 아무런 신선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민주당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공격합니다.

이 모든 현상이 김대중의 진보성을 신뢰하던 지지자들에게 한없는 좌절감을 느끼게 합니다. 늘 말씀하시듯 국민보다 한걸음만 앞서 나가야 하는 정치인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그러잖아도 ‘조선일보’와 같은 보수 언론에서 박정희 군국주의 망령을 불러내는 판에 공청회 한 번 없이 막대한 국고를 ‘박정희 기념관’에 지원하겠다는 발상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입니다.

고약한 정략의 냄새 이외에 어떤 해석이 가능할는지요? 용서와 관용의 정치철학을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80년 신군부가 내란 음모죄를 날조해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을 때 그는 군사법정에서 당당하게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다시는 나와 같은 정치적 희생양이 없어야 한다”는 사형수 김대중의 진술에 저는 감동받았습니다.

6·25전쟁은 국제적 냉전의 대리전이라는 성격 못지 않게 동족 내부의 이념적 대립과 갈등이 빚어낸 비극입니다. 이것이 증폭돼 이루 말할 수 없는 잔혹성을 초래했습니다. 모두가 상생과 관용의 정신이 부족했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반세기 동안 극한으로 대립해온 남북 구성원 모두 앞으로는 관용의 철학을 폭넓게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신을 곧바로 ‘박정희 기념관’과 연결하는 것은 매우 조급한 처사라고 봅니다. 지금이라도 각계 각층의 여론을 수렴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항간에는 대통령님의 지도력이 너무 독단적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야당 지도자에 대한 비열한 정치공작과 때로 목숨을 위협받는 무자비한 탄압이 자행되던 시절이라면 그런 지도력과 일사불란한 상명하달이 효율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경천동지할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며 사회는 인간의 소외를 염려해야 할 지경으로 다원화, 세분화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지도 패턴도 시대의 변화를 수용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쓴소리를 귀담아 들으십시오

오늘 20년 전 사형수였던 분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벅찬 감격을 맞으니 찬란한 영광의 뒤안길에서 가슴 시리게 생각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통일을 향한 험난한 도정에서 옥고를 얻어 돌아가신 이들과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존을 절규하며 스스로 목숨을 거둔 이들, 그리고 청사에 길이 빛날 광주의 민주영령들이 그들입니다.

청춘을 바쳐 80년대를 감옥에서 보냈던 젊음들이야 그들 스스로가 ‘정의의 사자’라는 강철 같은 신념을 가졌음에 무슨 회한이 있겠습니까?

감히 말씀드리건대 김대중의 집권과 평화상 수상의 뒤켠에는 민주화 세력의 헌신이라는 여명이 달무리처럼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제 마라톤 경주에 나선 한 무리의 선수 가운데 대통령께서는 마지막 결승점에 도달해 월계관을 쓰셨습니다. 자연인 김대중으로서는 소망한 바 모든 것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남북한 평화프로젝트는 이제 막 시동을 걸었습니다. 가야 할 길이 산첩첩 물겹겹일 것입니다. 바람 부는 언덕과 끊어진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난관을 돌파하는 힘은 오로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모든 면에서 소수파였던 대통령께서 오늘 지구촌의 핵이 된 것은 바로 긴 세월 동안 절망하지 않고 꾸준히 지지해준 국민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노둣돌은 내정이 튼튼할 때에 더욱 확고해질 것입니다.

성공한 내정만이 권력으로 발전한다는 충고를 깊이 새겨들으십시오.

페레스트로이카로 냉전철벽에 일격을 가한 위대한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내정 개혁을 완수하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부디 거친 말과 쓴소리로 민주당을 비판하는 인사들을 곁에 두십시오. 대통령께 직언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반세기 만의 기습적인 평화프로젝트가 만약 내정에 발목 잡혀 빛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김대중의 실패를 넘어 역사의 퇴영을 불러올 것입니다.

통일된 민족국가로 번영하는 미래를 갈망하는 한 여성의 충언을 담아 두서없이 썼습니다.

다시 한번 노벨평화상 수상을 온 국민과 함께 축하드리며 건승하심을 기원합니다.

신동아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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