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라마단 금식을 하루라도 어기면 60일 동안 다시 금식해야 한다.그러나 같은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선 라마단 기간에도 뻔뻔하게 맥도널드 햄버거를 사 먹을 수 있다.
- 종교는 사람들의 얼굴생김새나 변화무쌍한 날씨처럼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떻게 자기 눈을 찌른단 말인가? 충격적인 것은 시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이곳 알레포를 자청해서 안내해준 젊은이가 들려준 설명이었다.
“저 노인들은 메카로 성지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입니다. 이미 천국을 봤기 때문에 이 세상에선 볼 것이 더 남아 있지 않다고 저렇게 한 것입니다. 이슬람 사회에는 저런 사람이 많습니다.”
순간, 종교에 대해 갖고 있던 내 생각이 갑자기 지진을 만난 듯 심하게 흔들렸다. 종교란 도대체 뭔가 하면서, 나는 다시 원점에 섰던 것이다.
89년 6월, 나는 바그다드 국제공항을 통해 처음으로 아랍땅을 밟았다. 공항의 출입국 수속장은 무슬림과 비(非)무슬림 출구로 나뉘어 있어 내국인·외국인으로 되어 있는 여느 국제공항과 달랐다. 그들에게는 국적보다는 이슬람을 믿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이것이 세상을 ‘다르 알 이슬람(이슬람이 지배하는 세계, 즉 평화의 세계)’과 ‘다르 알 하르브(아직 이슬람의 법이 미치지 않는 세계, 즉 악의 세계)’로 이분하는 그들 세계관을 반영한다는 사실은 뒤에 알았다. 몇몇 모스크가 나같은 비무슬림에게는 아예 접근할 기회마저 주지 않아 속으로 ‘종교라는 게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하면서 불평해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르 알 이슬람, 다르 알 하르브
웬만한 곳에선 모스크 앞의 중정(中庭)까지는 입장을 허락했지만, 모로코의 페스란 곳에 있는 거대한 가라윈 모스크에선 입구에서부터 막고 나섰다. 그렇다고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 ‘나는 무슬림이요’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양심을 속여서가 아니라 금방 들통날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신 알라 신의 이름으로…’ 하고 시작되는 그들의 ‘주기도문’을 아랍어로 들려줘야 하는데, 그건 내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슬람 최고의 성지로 꼽히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는 도시 전체가 성지라 비무슬림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 내로라하는 사진기자들을 파견하는 권위 있는 지리정보지 ‘내셔널 지오그래픽’도 이곳 사진은 어쩔 수 없이 이슬람측이 지정한 무슬림 사진사에게 부탁하곤 한다는 것이다.
성(聖)이란 따지고 보면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무언가로 가려져 있거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는 대상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범상은 그와 반대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낙원(paradise)이란 것도 그런 것이다. ‘paradise’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둘러쳐진 정원’이란 뜻의 ‘pairi daeza’에서 유래된 것이니까. 그곳에 사는 사람도 ‘먹지 말라’는 것은 먹지 말아야 하지 않았던가?
성지순례가 스스로 눈을 멀게 할 만큼 무슬림의 중대사라면 그것을 가능케 하고 고무하는 제도적 장치 혹은 분위기가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1년에 1주일간 주어지는 성지순례 휴가 ‘하지(Haji)’다.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모든 일상을 접고 성지를 향해 떠난다. 일상에서 해방되어 ‘근원’과 만나고, 그리하여 종교적 열정을 다잡으려는 이 기간에 그들은 메카까지 못 가도 가까운 성지를 찾아 떠난다.
혹독한 자연, 혹독한 계율
하지는 정말 대단했다. 도로란 도로는 차량으로 넘쳤고, 거리 곳곳에서 축제가 벌어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라 해도 성지순례를 목적으로 방문하겠다고 하면 두말 없이 비자를 발급해주는 것이 이슬람 국가의 전통이라고 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순례를 방해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치 고대 그리스인들이 올림피아드 기간에는 휴전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배경 때문에 무슬림에게 국경의 의미는 아무래도 퇴색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국경 없는(borderless) 시대’를 살아오면서 ‘동(動)의 문화’를 일궈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비무슬림의 눈에는 이슬람이 지독스런 그 무엇으로 보였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좀처럼 용납하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메카순례를 다녀온 사람이 자기 눈을 찌르는 것은 극히 일부 신자에게 있는 일이라고 쳐도, 매일 몇번씩 기도를 올리고, 1년에 한 달 동안 낮에 먹고 마시고 피는 일을 삼가야 하는 ‘라마단’을 지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만약 금식을 어기면 60일 동안 다시 라마단 금식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60명의 배고픈 이들을 흡족하게 먹여야 했으니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 동안 몇 차례 그 지역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그곳의 자연환경은 혹독하기 짝이 없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쬘 때엔 수은주가 50℃까지 올라갔고, 그런 날 사막길을 달리기라도 하면 숨이 턱턱 막혀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먹을 것, 마실 것이 넉넉한 것도 아니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강인해져야 하고 나태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은 삼가야 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데도 그걸 게을리하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 어떡하겠는가. 그게 사막의 삶인데. 그렇다고 그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쳐서 해결될 것도 아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이었다.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명령으로 그 땅에 태어나 사는 모든 이에게 사막에서 안전하고 넉넉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다. 코란은 이렇게 인간의 영적·육체적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린다. 그들에게 종교는 예술이나 정치·경제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들 사회에서 이슬람의 법인 ‘샤리아’가 인간이 만든 법에 앞서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인데, 그러므로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비록 그들이 ‘인살라’라며 알라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해도.
무슬림이 삶을 기대고 살아가는 자연조건이 이렇듯 혹독하기에 코란은 어려운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그러다 보니 그런 문화에 익숙지 않은 자의 눈에는 지독스럽게 비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토록 가혹한 자연조건을 갖고 있지 않은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등은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아랍지역의 무슬림에 비해 융통성이 많다. 인도네시아에선 라마단 기간 중에도 맥도널드 햄버거집에서 창문에 커튼을 치고 먹을거리를 팔면 눈감아 주며, 여성에 대해서도 까다롭지 않다.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은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같은 곳에서는 차도르를 걸친 여성이 수상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중동국가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아랍의 이슬람에 부드러운 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중의 하나가 새벽이면 어김없이 미나렛(모스크 옆의 첨탑)에서 들려오는 ‘무에진’(코란의 독경소리)이었는데, 정말 아름다웠다. 그 소리에 자주 잠을 깨곤 했지만, 그 특유의 음색과 리듬에는 무언가 애틋한 것이 깃들여 있는 듯해 내 가슴을 울렸다. 무에진은 다름아닌 이슬람의 소리이자 그들의 심장을 움직이는 맥박이었다.
이들 무슬림과 가까운 거리에서 늘 서로 부닥치면 살았던 유태인들의 삶의 방식도 무슬림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유태인의 조상이 아브라함의 적자인 이삭이고, 아랍인은 그 서자인 이스마일의 후예라는 고사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유태인이 살았던 땅과 이슬람을 태동시킨 땅은 근본적으로는 똑같이 메마른 사막이었던 것이다. 그걸 이겨내며 사는 지혜라는 게 피가 다르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유태인들 쪽이 더 혹독스러웠기에 그 강도가 더 심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떠난 것을 비롯해 출애굽과 광야생활 40년, 바빌론 유수, 디아스포라(로마의 압제로 인한 유태인들의 유랑생활) 등 그들은 모진 박해의 세월을 이겨냈다. 또한 개종과 선교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기에 타민족과 타협할 이유도 없었으니 그들의 율법인 ‘토라’는 이슬람의 샤리아보다 더 가혹한 것을 요구했다.
토라는 여느 종교의 경전과는 달리 개인의 결단과 대단한 학습을 요구한다. 유태인 부모에게서 태어난다고 다 유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이 100세의 나이에도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할례를 행했듯이 할례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하느님의 계율을 지키는 아들로서 유태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회적인 작업만으로 ‘유태인 되기’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를 올리고 토라 공부를 하는 평생학습을 거쳐야 한다.
매일 올리는 기도와 1주일에 한 번 갖는 안식일은 형식상 이슬람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 내용을 파고들면 토라가 더 혹독한 것을 요구함을 알 수 있는데, 유태인의 안식일에는 모든 생산적인 일을 쉬고 오직 하느님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그 예다. 그때 만나는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닌 오직 그들만의 하느님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곳으로 저 유명한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이 있다. 이는 외지 관광객들도 별도의 절차 없이, 돈도 내지 않고 확인할 수 있어 유태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학습의 장이 되기도 한다(‘신동아’ 2000년 9월호 520쪽 ‘동예루살렘, 피의 역사는 끝나는가’ 참조).
석벽에서 10m 거리를 두고 허리춤 높이에 쇠줄이 쳐져 있는데, 그 안쪽이 바로 기도 공간이다. 그것은 다시 남녀의 구역으로 나뉜다. 남녀 부동석은 유태사회의 삶의 방식이다. 유태인뿐 아니라 이들과 뿌리를 같이하는 이슬람과 기독교에서도 그러하다. ‘정통 기독교’인 가톨릭의 여신도가 머리 위에 너울을 쓰는 것이나 지난 1000년 동안 여성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아토스 수도원 등이 바로 그런 예다.
사막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유태사회의 성 모럴은 남녀의 절대적 구분과 부계 중심이었다. 신을 만나는 순간 신이 그걸 말해주었으니까 달리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흔히 유교사회가 남녀를 엄격히 구분하고, 그래서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것이 있지 않았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 남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남성 중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강화되다 보니 예외적으로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지, 유교 본래의 것은 아니었다. 유교에서는 남녀간에 지킬 바를 강조했을 뿐이다.
이에 비해 구약성서에는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든지, 여자가 사악한 뱀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원죄를 저질렀고 그리하여 남녀 모두 낙원에서 쫓겨났다는 내용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聖都
나는 기도소 입구에서 나눠준 고깔모자 ‘키파’를 머리에 쓰고 벽 가까이로 다가갔다. 벽은 아스라히 높았다. 거대한 빌딩 벽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벽을 이루고 있는 돌들은 매우 컸고, 형태는 사각이었다. ‘미찌(mizzi)’라 부르는 이 돌은 유태인이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하는 것으로 그 특유의 베이지색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의 키가 닿지 않는 높은 곳에는 녹색을 띤 풀포기들이 바위틈을 비집고 고개를 내밀고 있고, 그 아래 조금 작은 크기의 바위들 틈에는 꼬깃꼬깃 접은 쪽지들이 박혀 있었다. 아마도 기도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간절한 기원을 적은 것일 터.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기도하게 만들었을까?
종교적 명절이 민족의 명절이 되고, 종교적 공동체가 민족의 그것이 되어 세속적인 국가공동체를 포용해버린 이스라엘. 그들이 보여주는 종교와 민족의 일치는 타종교·타민족과의 고립을, 고립은 배척을, 배척은 자신들의 고난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들의 2000년에 걸친 세속적 역사는 고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세속적인 고난이 하나님의 심판일 이후에는 영광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그래서 혹시 세속적인 영광이 있다면 그걸 즉시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려버리곤 했던 삶의 태도, 그것은 세속을 초월한 지극한 구원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이곳에서 간곡한 기도를 올리는 것을 보면 기도의 공간이라는 게 굳이 거창하고 화려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성전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또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그 속에서 기도하는 인간의 심령은 오히려 신과 멀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지붕이 없는 통곡의 벽 기도소는 기도의 공간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렇듯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의 중동 사막에서 태어난 종교로는 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가 있다. 마니교도가 지금도 살고 있는지, 그렇다면 거기가 어딘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어 혹시나 하고 마니교가 태어났다는 이라크의 크테시폰까지 가봤으나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여행안내서엔 조로아스터교의 성도인 이란의 예즈드(Yezd)에 가면 조로아스터교도를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성전과 무엇보다도 ‘영원한 불’을 볼 수 있다고 돼 있어 이란 여행중 시간을 내어 그곳을 찾았다.
이란 동남쪽의 아주 외진 예즈드에는 정말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모셔진 아테시카데 성전이 있었다. 평지붕 형태의 흙벽돌 가옥들이 옹기종기 박힌 시내 한곳에 자리한 그곳은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성전은 분명 성전이었다. 정면 지붕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인 ‘아후라 마즈다’의 신상이 걸려 있었고, 그 뒤로는 굴뚝이 보였다. 성전 안의 영원한 불이 내뿜는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한 것이었다.
문을 열고 성전 안으로 들어서자 6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노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관리인이자 안내인이었다. 장방형 공간의 정면 벽에는 교조 조로아스터의 대형 초상화가, 작은 전시대에는 경전 ‘아베스타’가, 그 한가운데엔 ‘영원한 불’이 있었다. 그 앞을 유리로 막아 신성한 공간임을 알렸다. 영원한 불은 밝은 빛을 내며 타고 있었다.
불의 의미
오전 11시가 되자 하얀 성의를 입은 성직자가 예를 올리고는 새 나무를 화단에 집어넣었다. 그는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자신이 내쉬는 숨이 그 청정한 불꽃에 직접 닿아 오염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노인은 깨끗하고 단단한 통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한다고 일러줬다.
그들이 이렇게 불을 신성시하는 것은 불이 신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깨끗한 것이면서 위로 상승하는 성질이 있어 그들이 최고신으로 모시는 아후라 마즈다를 가장 잘 상징해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에는 빛과 선과 창조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어둠과 악과 파괴의 신 ‘앙리 마이유’, 이렇게 두 개의 최고신이 존재하는데, 서로 대결하며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 영혼의 세계에서도 이 두 최고신을 우두머리로 한 천사와 악령의 싸움이 계속된다고 믿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우리에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비로소 알려졌지만 페르시아 제국시대엔 국교가 됐을 만큼 역사가 오래다. 아시리아 제국에까지 영향을 끼쳐 한때는 서아시아 일대를 지배할 정도로 대단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7세기에 이 지역이 이슬람화 되면서 쇠퇴일로를 걸었다. ‘알라 외의 신은 없다’고 외치는 이슬람은 조로아스터교와의 공존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신도가 박해받아 죽거나 그 땅을 떠나야 했고, 그 결과 지금은 인도에 오히려 더 많은 신자가 남아 있게 됐다. 그 중심인 뭄바이(옛 봄베이)에는 10만 명의 성도(聖徒)가 있다는데, 정작 성도(聖都)라고 하는 예즈드에는 1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지금의 이란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이슬람 공화국이니 당분간은 교세를 늘릴 희망도 없어 보였다.
그 옛날 조로아스터교도들이 춘분 전후의 축제기간인 ‘노 루스’가 되면 찾았다는 성지 ‘착착’에는 순례자들을 위해 세운 숙박시설은 많았으나 모두 폐허로 변해버려 쇠락의 징후가 역력했다. 그래도 영원한 불은 타고 있었다.
조로아스터교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높은 곳에 널어놓아 새들에게 뜯어 먹게 하는 특이한 조장(鳥葬) 풍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시신을 더러운 것으로 생각해 신성한 불로는 태울 수 없고, 그렇다고 매장해서 땅을 오염시킬 수도 없다고 여겨 높은 곳에 널어뒀다가 맹금류에게 뒤처리를 맡겨버렸던 것이다. 예즈드엔 그것을 증명하는 ‘침묵의 탑’이 두 개 있었다.
흙벽돌을 쌓아 올려 지은 원통형 침묵의 탑은 외딴 가파른 언덕 정상에 있어 택시기사는 무서운 듯 오르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20분을 걸어 올라서야 사람 키를 훨씬 넘는 탑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어 한 바퀴 돌다 보니 다행히 벽에 갈라진 틈이 있었다. 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바닥은 편평한데 가운데가 움푹 패어 있었다. 뼈를 수습하기 위한 것인 듯했다. 보존상태는 양호했다. 그러나 그날 독수리는 보지 못했다. 아마도 조장이 금지된 지 오래여서 그럴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이 시차를 두고 위세를 떨친 이란 고원의 풍광은 너무나 신비스러웠다. 잎사귀가 억센 ‘셴’이란 풀만 겨우 자라는 메마른 사막은 높은 준봉들에 에워싸여 있었는데, 거기에도 소나기가 내렸다. 그러나 비는 땅에 닿기가 무섭게 증기로 변해 하늘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서로 엇비슷하게 포개진 것처럼 보이던 준봉들은 마치 먹으로 가까운 것은 진하게, 먼 데 것은 희미하게 그린 듯한 한 폭의 멋진 수묵화가 됐다. 그것을 보면서 이런 사막이라면 신비주의가 태어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물론 종교의 한 형태로서 신비주의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흔히 ‘수피즘(Sufism)’이라 부르는 신비주의 추종자는 일반 무슬림과는 달리 득도를 위해 출가, 자신에게 맞는 수행방법을 통해 코란을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읽고, 궁극적으로는 알라신과의 만남을 추구한다. 수피즘 중에는 메블라나 교단이 특히 유명하다. 교조인 메블라나(원명은 루미)는 13세기 인물로 중앙아시아의 발크에서 태어났지만, 중년 이후 지금의 터키 콘야에 정착, 원무(圓舞)를 통해 신과 만나고자 했다.
그가 활동했고 또 그의 석관이 있는 콘야의 메블라나 이슬람 사원을 찾았던 날도 방문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말해줬다. 관람순서는 그의 여러 유품과 원무 ‘더비시(dervish)’의 춤사위에 관한 자료 등을 둘러본 뒤 녹색 타일로 덮인 그의 석관 앞에서 끝나게 돼 있었다. 사람들은 더러 예를 표하기 위해 절을 올리기도 했다. 바닥과 벽면은 아름다운 카펫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곳을 빠져나오자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라고 하고는 향을 발라줬다. “이 향이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며. 향은 너무나 진했다. 내가 몇 번이나 물로 씻어냈는데도 코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 메마른 땅에서 나는 그 예사롭지 않은 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수피즘은 흔히 말하는 ‘정통’이 아니다. 소수 종교다. 교리도, 수행방법도 예사롭지 않다. 터키를 공화국으로 만든 아타 튀르크는 사람들을 잘못 이끌 수 있다 하여 메블라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는 교세랄 것도 없다. 종교라기보다는 차라리 관광자원이란 말이 더 어울릴 듯 싶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더비시 춤판은 1년에 단 한 차례, 메블라나가 세상을 떠난 12월 중순에 1주일간 열린다는데, 그때가 되면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한마디로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찾은 것은 4월. 춤판을 보기는 다 틀렸다. 먼 길을 달려왔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기회는 있었다. 이스탄불을 찾았을 때 우연히 알게 된 미국 할머니가 갈라타세라이 지구에 가면 ‘세마하네’(‘세마’는 더비시 의식을 말함)가 있는데, 그곳에서 매월 마지막 일요일 오후에 더비시 춤판이 벌어진다고 일러줬던 것이다. 그걸 보기 위해 여정을 바꾸면서까지 이스탄불에서 며칠 더 묵었다.
그날 세마하네에서도 난리가 났다.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사람들이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것도 모두 말쑥한 차림으로. 그리 크지 않은 홀 한가운데 원형 무대가 있고, 그 위엔 일곱 가지 천으로 장식된,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발광체가 매달려 있었다.
圓舞로 신과 만나다
드디어 ‘세마’가 시작됐다. 갈색의 원통형 모자, 하얀 윗도리, 역시 하얗고 둥근 치마,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은 댄서들이 맨발로 들어왔다. 인사를 하고는 사랑의 시를 낭송했다. 이어서 북과 플루트가 유장한 선율을 선사했다. 발을 구르는 빠른 리듬은 어느새 무대를 휘감아 버렸다. 소리는 점점 높아 갔다. 순간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뚝 그쳤다. 그것도 아주 매정하게. 음악이 끝나자 그들은 뒷걸음으로 무대를 빠져나갔다.
얼마간의 막간이 끝나자 수석 댄서가 등장해 짧은 인사를 했다. 다시 오랜 침묵. 긴장을 자아냈다. 긴장 속에서 기대감은 오히려 부풀었다. 이제 하얀 상의와 치마만 입은 댄서들이 나타나 인사를 하고는 원을 그리며 돌았다. 그때 오른발은 고정시키고 왼발로만 움직이는데, 그것도 들지 않고 가만히 끌기만 한다. 또 한 차례 인사가 있고 난 뒤에는 한 마리 학이 되어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았다. 발레의 동작, 바로 그것이었다.
눈을 감고 몸을 한쪽으로 살짝 기울인 채 팽이처럼 빙글빙글 도는 원무, 몸을 돌 때 우산처럼 펼쳐지면서 만들어지는 치마의 날렵한 율동미, 댄서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 흰색을 비롯한 색색의 옷이 한데 어울려 홀은 그야말로 환상의 극치로 치달았다.
그들은 이런 원무를 네 번 추었다. 춤이 거듭되면서 관객들이 황홀감에 빠지듯 댄서 또한 그런 기분이 되어 인간의 경지에서 벗어나 차츰 신의 경지로 오르는 듯 했다. 그렇듯 춤은 이들에게 수행 방법이자 신과의 대화수단이었다. 종교의식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그날 이스탄불의 세마가 보여주었다.
아랍지역은 모두 이슬람을 상징하는 녹색으로 칠해져 있을 것 같은데, 그 사이사이에는 기독교 계통의 성당과 교회, 수도원이 알알이 박혀 있어 마치 종교의 모자이크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비잔틴 제국의 오랜 지배를 받았던 이 지역의 역사 때문이다. 이라크 북부의 고도(古都) 모술에는 교인들의 공동묘지까지 있는 시몬 바오로 교회와 성 토마스 성당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는 환영(幻影) 중에 예수를 만나 기독교도가 된 사도 바울을 기념하는 사도 바울 기념교회와 성 아나니아교회 등이 있었다. 그리고 알레포에는 가톨릭 성당과 정교회, 시리아 기독교, 그리고 아르메니아 교회가 성업중이었다.
그중에서도 아르메니아 교회는 교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신도들이 넓은 홀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그것은 러시아와 터키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와서 살게 된 아르메니아인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아르메니아는 4세기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최초의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성론(그리스도에게는 하나의 性, 즉 인간이 된 신성밖에 없다는 주장)을 믿은 탓에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낙인 찍혀 주류 기독교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그 후의 역사는 그래서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고립된 기독교는 아르메니아 기독교가 유일한 게 아니다. 시리아 기독교,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 동방 기독교 대부분이 그런 경우에 든다.
아르메니아 출신 호텔 관리인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아르메니아 교회는 촛불로 내부를 밝힌데다 어두운 색조로 그려진 성화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어 자못 엄숙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예배는 어딘지 모르게 형식에 치우친 듯했다. 특별행사가 있는 날이어서인지, 아니면 남자들은 보이지 않고 여자들과 아이들이 홀을 채우고 있어서인지, 그게 아니라면 타성에 젖어 진지하지 않게 예배를 드려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내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나는 그때 어떤 종교라도 그것이 국교가 되고 그래서 종교가 선택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그저 주어지는 것이라면 저렇게 탄력을 잃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반성과 치열한 회개가 있어야만 구원에 대한 간구가 절실할 텐데, 그저 시간이 됐으니 교회에 나가고 예배에 참가하는 것이라면 그건 종교적 삶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일상의 연장일 것 같았다.
종교 열기 식어가는 유럽
이런 모습은 유럽의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교회는 태어나면서 그저 주어지는 것이지, 자신의 선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다, 또는 정교회가 국교다 하는 통계수치는 ‘타고난 교인 수’를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선택에 따라 행동하는 신도를 말하는 수치는 아닌 것이다. 그런 인구는 전체의 25%가 채 안 된다. 주일에 교회를 가봐도 많은 자리가 비어 있었다.
16세기에 가톨릭을 버리고 루터교를 국교로 삼은 스웨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교회로 데려가 먼저 유아세례를 받고 그 자리에서 호적에 올린다. 동사무소가 아니라 교회에다 호적신고를 하는 것이다. 교회는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다. 교회가 사회보장제도와 손잡고 사회안전망 구실까지 해주니 가족부양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장점은 분명한 것 같았지만, 영혼에 안식을 베푼다고 하는 종교 본래의 기능은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유럽에서 기독교는 이제 정치·경제·법률과 같은 고착된 사회제도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종교에 대한 관심이나 열정을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닌 듯했다. 불교나 이슬람교 같은 동양 종교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절이나 도조(dojo), 모스크 등을 찾고 있었으니까. 이런 현상은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현지 신문은 5800만 인구 중 유태교 신자가 70만, 개신교가 70만, 이슬람교가 300만, 불교가 50만 내지 100만에 이른다고 했다.
한때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등 동남아 불교국을 지배했던 경험이 있는 프랑스는 이제 유럽의 불교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 중에는 이민자가 아닌 본토 프랑스인도 많다. 달라이 라마는 영적 지도를 위해 매년 프랑스를 찾고 있으며, 그걸 보겠다고 유럽 전역에서 수천 명이 모여들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불교에 심취하게 된 이유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의 판단은 개인의 체험에 맡겨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지, 또 그걸 어떻게 할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하게 해야지, 누군가가 나서서 강요해서는 안 된다. 불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항상 자기 자신의 체험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이런 말을 듣고 보면 하느님이 그 아들인 인간에게 하신 말씀도 이제 약효가 다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문명이란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라는 권위만으로는 인간을 구제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고 만 것이다. 물론 이런 다원화 현상은 한 종교가 해결하지 못해 생기는 빈 자리를 다른 종교가 나서 메워줄 수 있는 가능성을 낳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한때 유럽인들은 자기네 종교인 기독교를 전세계에 퍼뜨리려 했다. 그리하여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를 모두 그들의 식민지로, 또 선교대상지로 삼았다. 그런 목표는 상당부분 성공을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의 이름을 빌린 전쟁이었다. 그때 종교는 허울이었다. 실체는 정치였고, 경제였다. 예수회 선교사가 아마존 열대우림의 원주민 과라니족 마을로 찾아가 그들의 전통적 삶을 인정하며 잘 어울려 지내다 어느날 로마가톨릭 선교사가 나타나 상황이 돌변하면서 예수회 선교사는 쫓겨나고 과라니족 마을이 파괴되는 모습을 뛰어난 영상미학과 음악을 동원해 감동 넘치게 그린 영화 ‘미션’이 이를 잘 보여주지 않았던가?
과라니족이 살았던 브라질, 그곳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항구도시 리우 데 자네이루의 깎아지른 듯한 코르크바도 언덕 위엔 ‘이곳은 기독교의 땅이다’라고 알리려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는 커다란 예수상(像)이 세워져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피를 불렀던 그 땅에. 유감스럽게도 그런 예수상은 리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미의 웬만한 도시에는 크기는 비록 다를지라도 어김없이 그런 예수상이 서 있다.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에는 옛 도시를 지키기 위해 세운 사크사와이만 성채 위, 그러니까 쿠스코에서 가장 높은 곳에 마치 잉카제국을 정복했다는 증표인 양 예수상이 서 있었다. 잉카의 후예인 인디오들이 많이 살고 있는 페루와 에콰도르, 볼리비아에는 그런 목적으로 건축된 성당이 많았다. 그것들은 대개 잉카의 신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들이었다.지금 그 땅에 사는 인디오들도 그런 역사를 갖고 있는 성당에 나간다. 정복자의 강요에 의해 시작된 ‘교회 가기’가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성당에 나가긴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상을 바라보면서도 딴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를 잉카의 어린 왕자로, 성모 마리아를 잉카의 대지모신(大地母神)인 ‘파차맘마’로 생각하고 예배를 올렸던 것이다.
200∼300년 전의 쿠스코 화가들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의 강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성당을 장식할 성화를 그리긴 했지만, 거기에다 잉카의 혼을 담으려 했다. 그렇다고 정복자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되므로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그렸다.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에게 잉카의 왕관을 씌웠고, 성모 마리아의 치마는 그들의 고향인 안데스산이 부푼 형상으로, 마리아의 얼굴은 파차맘마의 것으로 그렸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쿠스코 성화’였고, 그것들은 지금도 쿠스코의 여러 성당에 걸려 있다.
이런 전통은 지금의 페루 민중화가들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상의 백인 예수를 얼굴이 검은 인디오 예수로 바꿔 억압받는 민중을 구하는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또한 60년대 말 그 땅에 불었던 해방신학의 미술적 변용이기도 했다.
일본인과 금기
우리 학생들의 수학여행 단골코스로 경주로 잡는다면 일본 학생들은 단연 이세(伊勢)를 꼽는다. 미와(三重)현의 작은 도시 이세는 우리에겐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일본의 개국신이자 초대 천황인 아마테라스 오오카미(天照大神)를 제사지내는 곳으로, 일본인들에겐 마음의 고향이다. 일생에 한번은 참배하는 것이 상례이며, ‘이세에 7번, 구마노(熊野)에 3번 참배하지 않으면 저승에 가서 문책당한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다.
이세엔 신궁(神宮)이 있다. 신궁이란 황실과 관련이 있는 제사공간으로, 스이닌 천황이 이곳에서 수확제를 지낸 이후 역대 천황이 계속 의례를 행하고 있다. ‘다이조우사이(神嘗祭)’란 이름의 수확제는 추수 무렵인 매년 10월17일에 열린다. 햅쌀로 지은 밥을 아마테라스 신에게 바치며 풍요를 안겨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이런 신상제의 역사는 자그마치 1300년이 넘는데, 그들은 이런 연례적인 신상제와는 별도로 20년에 한 번씩 낡은 목조 신전을 대신할 새로운 신전을 지어 모든 신보(神寶)와 장속(裝束)을 옮기는 ‘식년천궁(式年遷宮)’ 행사를 갖는다. 대단한 돈과 공력이 드는 이 행사를 이제껏 61차례나 계속해 오고 있다(전국시대엔 잠깐 중단됐다).
92년에 신상제를 관람했다가 그 이듬해 식년천궁 행사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는 다시 이세를 찾았다. 내·외궁에서는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안내책자에는 10월9일부터 11월14일까지 무려 170여 회의 행사 목록이 적혀 있었다. 이런 행사는 일반인을 위한 것이었는데, 천궁을 위한 별도의 행사도 30개나 됐다. 일부 행사에는 일반인의 참관이 허락되지 않았다. 흰색 또는 검은색 제복을 입은 신직(神職, 즉 제관)들의 행렬과 이를 말없이 지켜보는 참배객들, 그리고 그 엄숙한 분위기를 접하며 쌀에 대한 일본인들의 깊은 애정과 ‘지속’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한 신직이 탕욕하고 몸을 정히 한 다음, 나무를 서로 격렬하게 비벼 불씨를 얻어서는 그걸로 신찬(神饌, 신에게 바치는 식사. 밥, 물, 소금으로 구성)을 준비하는 것이라든가, 신상 앞에서 두 번 절하고 두 번 손뼉치고 다시 한 번 절하는(二拜二拍手一拜) 참배객들의 모습도 그중 일부였다.
커다란 도리를 지나 삼나무가 우거진 매우 조용한 경내로 찾아든 방문객들은 참배에 앞서 판매소에서 신부(神符)나 수찰(守札) 등을 샀다. 그들이 기원하고자 하는 글귀가 적혀 있는 것으로. 대개는 시험 합격, 건강, 쾌유, 취직, 사고예방, 결혼 등 일상에서 부닥치게 되는 고비들을 잘 넘길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무척 소박해 보였다. 세상이 어떻고,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 등의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오직 일상의 안녕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신사(神社)와 절에서도 한 차례 목격한 바 있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일상의 눈으로 바라봐서일까. 일본인들은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왜 그런가’ 하는 궁금증, 호기심은 아예 접어둔 것인지, ‘궁극’이나 ‘근원’ 같은 것에는 매달리는 것 같지 않았다. 신궁에서 그렇게 수없이 절을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절을 올리고 있는 대상인 신상을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굳이 그걸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앞에는 항상 흰 천이 내려져 있었으므로 그들은 거기에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절을 올릴 뿐이었다. 그래서 제 눈으로 봐야만 직성이 풀리고, 또 믿으려 하는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정신세계에 살고 있구나 싶었다.
일본에는 세 가지의 ‘신기(神器)’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칼·거울·구슬이 그것인데, 이것을 본 사람은 없다. 있다는 말만 있을 뿐 일본 어디에서도 이걸 보여주는 곳은 없다. 그들은 있다면 있는 것이지,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문화란 거칠게 말하면 이런 금기(禁忌)가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신궁에서 일을 익히는 소년을 ‘기동(忌童)’, 신전에서 불을 일으키는 것을 ‘기화(忌火)’라 부른다. 그런 그들이기에 어쩌면 근본적인 변혁을 꿈꾸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늘 그 틀에서만 놀뿐이다. 막강한 쇼군(將軍)이 권력을 휘두르는 체제를 몇백년 동안이나 유지하면서도 그들은 허수아비 천황제를 폐지하지 않았다. 이게 일본의 1300년 역사다. 그런 그들에게서 우리가 어찌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받아낼 수 있겠는가. 그건 연목구어일 뿐이다.
열린 인도인들의 종교
일상에 매몰돼 근본을 보지 못하는 게 일본이라면 일상을 버리지 않으면서 근원적인 물음을 통해 그 일상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는 민족이 인도다. 금기가 많은 일본이 폐쇄된 사회라면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인도는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사회다. 그들은 주검마저 관으로 싸지 않았고, 치욕스러울 수도 있는 가난도 떳떳하게 드러냈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과 수도 없이 마주쳤고, 몇 차례 그들의 손에 지폐를 집어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들은 손을 내밀긴 해도 미안하다거나 부끄럽다거나 감사하다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렇다고 뻔뻔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 맑고 큰 눈을 한번 흘깃하고는 발길을 돌려버리는 것이 아무래도 무언가 다른 뜻이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가난은 무지와 게으름의 소치이며, 그래서 수치라고 배웠던 나는 그들의 그런 모습을 대할 땐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돈을 버는 일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소중한 자원을 고갈시키는 짓이므로 죄업이다. 만약 당신이 죄업을 저지르면서 번 돈을 남을 위해 희사한다면 그를 통해 당신은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감사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당신이다.”
그런 말 앞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한 것들은 너무나 무력하게 여겨져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10세기에 세워진 아름다운 자이나 석굴사원을 간직하고 있는 엘로라 사원으로 가다 중간에 자이나 교도들이 사는 마을에 들렀던 적이 있었다. 그곳의 자이나교 사원에는 암소 조각이 있었고 많은 사람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거기에서 한 사제를 만났다. 하얀 성의를 입고 있는 그는 “가진 것이라곤 지금 입고 있는 옷 한 벌이 모두이며, 채식만 하고 있다”면서 자이나 사제 가운데는 숨을 쉬다가 실수로 공기 속의 미물을 죽일까 봐 하얀 마스크를 입에 착용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자이나교는 불교와 거의 동시대에 태어난 종교지만, 그 성격은 힌두교에 더 가까우며 불살생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 그래서 신도들은 농사나 유목보다는 장사치나 공무원이 되길 원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인도인들은 공생을 꿈꾸는 것 같았다. 자연과 인간의 공생, 가난한 자와 부자의 공생, 심지어 삶과 죽음의 공생까지. 그들 특유의 비폭력과 불살생, 그리고 수련의 철학은 거기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누구나 제 나름대로 갖고 있다는 종교가 다른 곳에서처럼 인습과 제도로서 삶을 간섭하고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떠받들게 도와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곳에선 서양의 종교가 그 오랜 식민시대에도 발을 디디지 못했다. 근대화·서구화란 것도 이곳에서만은 지지부진했다. 그들은 부화뇌동이란 말을 몰랐던 것이다.
인도는 종교의 땅이었다. 그 땅에서 힌두교·불교·자이나교·시크교 등이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인도인이면 누구나 종교를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은 종교에 살고 종교에 죽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종교는 호흡하는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 인도이기에 국기에도 종교를 그려넣고 있었다. 인도 국기의 세 가지 색 중 첫번째의 오렌지색은 힌두교를, 두 번째 녹색은 이슬람을, 세 번째 흰색은 그 밖의 모든 종교를 상징했다.
그래서 인도에선 모든 것이 종교적 의미와 상징을 지녔다. 새벽을 깨우는 힌두교의 독경소리, 거리를 활보하는 소, 시신이 타는 매캐한 냄새, 구걸을 위해 내미는 손, 그러다가 신전에라도 들르게 되면 만나게 되는 비시뉴와 시바, 락슈미(재화의 신), 하누마(원숭이 얼굴의 악마를 쫓는 신), 가네쉬(코끼리 얼굴의 지혜와 성공의 신) 같은 여러 신과 꽃과 향과 음식…. 이렇게 모든 것이 종교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종교적 자세를 가졌기에 그들에겐 죽음이 슬픔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생사여일(生死如一)의 자세, 그들은 바로 그것을 견지하고 있었다. 종교적 열정은 누구 못지않게 강하나, 종교란 제도에 결코 자기를 맡기려 들지 않는 인도인들이야말로 종교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인도 여행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