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미 대통령 선거와 의원 선거에 뛰어든 후보들이 쓸 선거바용은 대략 3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유권자의 표를 현금으로 사들이는 매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미국의 정치풍토를 감안할 때 후보들이 책정한 선거 비용의 태반은 결국 컨설턴트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이다.
정치인들이 들으면 과히 기분 좋을 소리는 아니지만, 사실이다. 사실일 뿐만 아니라, 정치인이라는 상품을 유권자라는 소비자에게 팔아먹고 사는 정치 컨설턴트들의 세계에서는 진리로 통하는 말이다.
2000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미국은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올 대선의 경우 민주당 앨 고어 후보와 공화당 부시 후보 간의 대접전은 역대 어느 대통령 선거보다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두 후보가 내세운 정책의 차이가 뚜렷하지도 않고, 주목할 만한 대형 이슈도 없다는 점이 오히려 두 후보의 대결을 첨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선거판일수록 두 진영의 정치 컨설턴트들의 구실이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짝수 해의 황금 노다지, 미 선거판
미국 정치판은 짝수 해와 홀수 해가 엄격하게 나뉜다. 짝수 해에는 올해처럼 대통령 선거를 비롯해, 상하원 의원 선거, 주지사 선거에서부터 지방정부의 각종 선거직 자리의 임자를 뽑는다. 중간 선거도 물론 짝수 해에 치러지며, 간혹 일부 특수 선거만이 홀수 해에 치러질 뿐이다. 그러므로 짝수 해에 특수 경기가 조성됨은 물론이다. 이른바 정치 산업 경기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정치 생명을 걸지만, 정치인이라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컨설턴트들도 정치인 못지않게 눈에 불을 켜고 정치 시장을 파고든다. 돈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치시장이야말로 노다지다. 일확천금을 노렸던 서부 개척시대를 무색케 할 컨설턴트라는 이름의 ‘총잡이’들이 혈혈단신으로 혹은 무리를 지어 정치 마켓을 누비고 다닌다. 무법 천지, 배신, 일확천금 등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의 상징어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것이 짝수 해 미 선거판의 진풍경이다.
돈은 미국 정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미국 선거를 정의 내릴 때 역시 빼먹을 수 없는 단어가 돈이다. 지하 수맥처럼 잠복해 있던 돈이 선거 때에는 지표로 솟아올라 지표면을 따라 흐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정치 컨설턴트들이 그리는 족적과 행동 반경은 이 지표수 지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올해 미 대통령 선거와 의회 의원 선거에 뛰어든 후보들이 쓸 선거 비용은 대략 3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유권자의 표를 현금으로 사들이는 매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미국의 정치 풍토를 감안할 때, 후보들이 책정한 선거 비용의 태반은 결국 정치 컨설턴트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이다.
올해의 선거 비용은 1996년 선거 때보다 50%나 많아진 액수이다. 이런 인플레이션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정치 컨설턴트들이다. 이들은 후보를 만들어내고, 개조하고, 어떤 이슈가 중요한지 결정하며, 선거 자금을 모으고, 텔레비전 광고를 만들어내는 대전략가들이자 고도의 특수 지식과 노하우를 갖춘 고급 기능 보유자들이다. 정치 캠페인이 무엇인지는 이들이 정의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도 대선 후보로 나섰다가 또 도중 하차한 백만장자 스티브 포브스의 1급 선거 전략가는 한 달 만에 22만3000달러를 챙겼다. 앨 고어 부통령이 올해 예비선거에서 컨설팅 비용과 언론 광고에 들인 돈은 자그마치 1000만 달러가 넘는다. 거액이 오가다 보니 선거 캠프에 고용된 회계사들이 만지는 떡고물도 만만치 않다. 조지 W. 부시와 공화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맞붙었던 존 매케인 상원 의원 캠프에서 회계 장부를 정리했던 회계사들도 1500만 달러를 거머쥐었다.
정치 컨설턴트의 꽃, 미디어 전략가
정치 컨설턴트의 꽃은 뭐니뭐니 해도 언론 전략가다. 이른바 ‘정치 광고’가 이들의 손에서 주물러진다. 선거 분석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올 한 해 미국의 선거판에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인쇄물 등의 매체를 통해 정치 광고에 이미 지출되었거나 앞으로 수개월 안에 쏟아부을 돈은 무려 6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92년 대선 때 썼던 3억 달러의 딱 2배이며, 96년 대선 때의 4억 달러에 비하면 40% 증가한 액수이다.
정치 광고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매체는 물론 텔레비전이다. 1998년의 짝수 해에 정치 광고로 지출된 비용 가운데 텔레비전이 차지한 비율은 전체의 83.5%에 달했다. 라디오가 10.2%, 신문이 4.6%를 차지했고, 옥외 광고판과 잡지가 각각 1.5%와 0.2%였다.
주요 광고 회사 가운데 허스트-아가일(Hearst-Argyle)이 58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려 선두였고, 2위 벨로(Belo)가 3600만 달러, 3위 스크립스(Scripps)가 2000만 달러의 수익을 챙겼다. 또 1998년 한 해 동안 전체 텔레비전 광고 가운데 물량 면에서 정치 광고가 차지한 비중은 자동차(25%)와 소매업(15%) 광고에 이어 세 번째(10%)였다.
미디어 컨설턴트, 정치 광고 제작자, 애드 메이커, 애드맨 등은 모두 언론 전략가를 지칭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언론 전략가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소리는 ‘미디어 귀족(media baron)’이라는 호칭일 것이다.
미 전역을 누비면서 선거운동을 벌이는 고어나 부시 후보의 사진이 신문에 실릴 때마다, 비행기 안이든, 버스 안이든, 호텔 방이든, 선상이든, 기차 안이든 후보 바로 옆에는 늘 이 미디어 컨설턴트들이 후보와 코를 맞대고 앉아 최측근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순간들이다.
공화 민주 양당은 평균 4~5개의 미디어 컨설턴트 그룹을 고용하고 있다. 어느 한 그룹에게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민주당 앨 고어 대통령 후보 진영만 해도 슈럼 디바인 앤 도닐런(Shrum, Devine · Donilon)이라는 컨설턴트 펌(firm) 외에 스퀴어(Squier) 컨설턴트 펌 두 곳에 미디어 전략을 맡겼다.
이중 슈럼 펌은 대대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의 연두교서 작성을 도맡아온 민주당의 대표 주자 컨설턴트 펌이다. 클린턴 대통령의 연두교서 문장도 슈럼 펌이 만들었고, 케네디 가문의 모든 연설문도 슈럼 펌의 작품이다. 지금은 앨 고어 후보 진영 미디어 전략의 최선두에 서 있다.
미디어 펌들은 나름대로 비장의 주무기를 한두 개씩 보유하고 있다. 위의 슈럼 펌이 대통령 연두 교서 등 주로 문장과 정책 이슈 다듬기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면, 스트러블(Struble) 펌은 민주당 현역 상원 의원이 주고객이다. 스트러블이 관리하는 상원 의원 고객 명단이야말로 스트러블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하원보다는 상원 의원 선거가 늘 경쟁이 치열하고 긴장감 높고 박진감 넘치고 돈도 많이 돈다. 민주당 상원 캠페인을 도맡아 장기 집권(?)하고 있는 스트러블 펌은 민주당 하원 캠페인 위원회도 맡아달라는 ‘구애’를 받고 입이 벌어져 있다.
공화당의 단골 미디어 전략 팀 가운데 알렉스 캐스텔라노스(Alex Castellanos)가 이끄는 캐스텔라노스 펌은 가차 없는 공격용 비난 광고로 명성을 떨치는 미디어 귀족이다. 1996년 보브 돌 캠페인도 이 캐스텔라노스의 작품이다. 캐스텔라노스 펌이 공격 광고 외에 하나 더 감춰놓고 있는 비장의 무기는 자사 고객들에게만 제공하는 특유의 하이테크 서비스다. 이른바 광고 추적 시스템인데, 텔레비전 라디오 등 전파를 타고 나가는 모든 정치 광고를 일일이 추적해낸다. 네트워크는 물론 미 전역에서 방송되는 스폿 광고나 로컬 광고의 방영 여부 및 시간, 횟수 등을 모두 추적 점검해주는 이 서비스야말로 고객 만족의 으뜸가는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캐스텔라노스 펌은 올해 부시 후보 진영의 광고 캠페인도 맡고 있다.
마이크 머피(Mike Murphy)가 수장인 머피 펌은 1992년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재선 캠페인 언론 전략을 담당했던 ‘3 아미고스’ 가운데 하나. 올해는 존 매케인 상원 의원 캠페인에 합류했다가 결국 도중 하차의 쓴잔을 마셨으나, 매케인 의원이 도중 하차하기 한 달 전 먼저 손을 터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막대한 돈을 들여 정치 컨설턴트를 고용할 수 있는 자금줄 가운데 가장 든든한 밧줄은 이른바 ‘소프트 머니’다. 기업0104조합·개인 등으로부터 제한 없이 받을 수 있는 기부금이 대부분 소프트 머니로 들어간다. 클린턴 대통령의 1996년 재선 캠페인이 이 소프트 머니의 덕을 톡톡히 보았고, 공화당도 곧 선거판의 이 금과옥조 같은 전례를 뒤따랐다. 공화당이 2000년 대통령 선거를 위해 모금할 소프트 머니는 무려 1억6000만 달러에 달한다.
민주당 의회 선거위원회(DCCC)의 경우에는 2000만 달러의 소프트 머니를 모금해놓았으며, 광고 캠페인은 미시시피 강을 기준으로 동서부로 양분해 두 컨설팅 그룹에 나누어 주었다.
가장 최근인 9월 첫째주에 발표된 커먼 코스(Common Cause) 그룹의 분석 자료에 따르면, 1999년 1월부터 2000년 6월까지 18개월 동안 공화 민주 양당이 모금한 소프트 머니는 무려 2억5600만 달러에 이른다. 4년 전인 1996년에 비해 82%가 많은 금액이다. 이 가운데 75명의 기부자는 5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고, 최대 금액의 단일 기부자는 AT·T 전화회사로 양당에 290만 달러를 기부했다. 노동조합들에서도 1600만 달러를 기부했는데, 이는 4년 전과 비교해보면 3배나 상승한다.
개인 기부자 가운데에는 톰슨 의료 회사의 대니얼 에이브러햄(Daniel Abra- ham) 회장이 민주당에 1200만 달러를 기부해 최대 금액 기부자의 기록을 세웠다. 당별로 보면 같은 기간에 공화당이 1억3074만 달러를, 민주당이 1억1800만 달러를 거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 선거판의 거대한 지하 수맥인 소프트 머니야말로 미국을 움직이는 필요악의 원동력이다. 민간 기업, 협회, 압력단체, 개인 등이 모두 소프트 머니의 사슬을 형성하는 주체들이다. 소프트 머니의 형성 과정과 사용 방법은 선거판의 자금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캘리포니아의 벤처 기업 D사는 민주당이나 민주당 후보에게 직접 돈을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정치 자금을 제공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로컬 텔레비전 방송국의 광고시간을 D사가 사들였을 경우, 이것 역시 소프트 머니다. 그 시간에 공화당 후보나 정책을 비난하는 광고를 내보낼 수 있는 것이다.
겉보기에 D사는 엄연한 광고주다. 광고는 물론 D사의 이름으로 방영된다. 낙태, 총기 규제, 세금 감면, 교육, 외교 및 국방 정책 등 이슈는 얼마든지 있다. 이 경우 D사와 민주당은 겉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런 식의 소프트 머니는 단순한 정치 기부금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노동조합이나 각종 협회 등 거의 모든 이익단체와 압력단체들이 이런 식으로 선거 운동에 참여한다. 개인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광고 시간을 살 수 있다. 이런 구조를 파악해, 각 지역의 특색과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할 줄 알아야 1급 정치 컨설턴트로 군림해 큰돈을 만질 수 있다.
거액의 소프트 머니가 텔레비전 광고라는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지만, 정치산업에서 텔레비전의 영향력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정치 광고 전략가들도 이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부동표 공략에서 텔레비 광고 효과가 전 같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방송매체 종사자들조차 전통적인 재래식 텔레비전 광고의 영향력 감소를 경고하지만 동시에 텔레비전의 영향력은 여전히 어떤 매체보다 우위에 서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인터넷이 대안 매체로 떠올랐지만, 언론 전략가들이 원하는 광범위한 시청자들을 확보해 붙들어 놓기에는 역부족이다.
바로 여기에서 방송 매체 광고의 역설이 나오게 된다.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감소하면 할수록 방송 매체의 은행 구좌에는 돈이 더 들어오는 것이다. 영향력이 없을수록 광고 시간을 그만큼 더 많이 사기 때문이다. 광고 시간을 아무리 많이 산다 해도 효과는 같은 수준에서 맴돈다. 결국 효과가 떨어지는 것을 알면 알수록 돈은 더 많이 쓰게 되는 것이다.
“돈 없으면 당선될 생각 말라”
선거판의 색깔을 결정짓는 것은 돈의 규모다. 없는 돈 긁어모아 푼푼이 쪼개 쓰는 선거판은 탈 많고 잡음 많고 구질구질하게 마련이지만, 선거 전략가가 한 달에 수억 원씩 챙길 돈이 흘러 다니는 미국의 선거판은 그야말로 포성만 들리지 않고 피비린내만 나지 않을 뿐 정치 생명과 사업 생명을 내건 전쟁터가 아닐 수 없다.
전미 정치 컨설턴트 협회(AAPC) 회장인 레이몬드 스트로서는 컨설턴트들의 목표야말로 ‘이윤의 극대화’라고 서슴없이 토로한다. 정치인들에게 줄 수 있는 자문의 질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컨설턴트들이 노리는 이윤의 폭이 결정된다. 스트로서는 “돈이 선거 구조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컨설턴트는 뭘 모르는 사람이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각 당에서 서열 3, 4위 안에 드는 1급 언론 전략가들은 1년에 평균 최소 100만 달러는 거뜬히 거머쥔다. 이들이야말로 정치판을 주무르고 정치 산업계를 좌지우지하는 컨설턴트 귀족들이다. 여름은 이탈리아, 겨울은 하와이에서 보내고, 경관 좋은 휴양지에 으레 별장 한두 채 정도는 있으며, 각종 스포츠카에 고급 와인도 수집한다.
이들보다 한 급수 낮다 해도 1년에 50만 달러의 수입은 보장된다. 아메리칸 대학이 정치 컨설턴트들을 대상으로 최근에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응답자의 20%가 1년에 20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이 조사에 따르면 컨설턴트들의 4분의 1이 컨설팅을 하는 이유로 댄 것이 돈벌이였다. 컨설턴트들은 고객들(정치인들)에게 민주주의에는 큰돈이 든다는 사실을 늘 설교해야 한다. 이런 설교를 하는 컨설턴트들의 낯빛에서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컨설턴트들의 정치 자문 중에는 후보자들을 ‘사회화(socialization)’시키는 과정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한마디로 정치판·선거판의 습성을 익히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정치 초년생이거나 선거판에 처음 뛰어든 후보자일수록 이 사회화 학습은 필수적이다. 말이 그럴듯해 사회화지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하다. 상대 후보를 공격하는 공격용 광고를 되도록 많이 방영하도록 만들고, 돈은 현대 정치라는 요리에 빠져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의 재료라는 사실을 알아듣게끔 만드는 것이다.
지난 3월에 타계한 베테랑 여론조사가 윌리엄 해밀턴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후보들은 돈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돈이 필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왜? 당선되려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결별, 배신, 불신의 와일드 웨스트
선거판에 뛰어든 후보들은 정치 컨설턴트들이 만들어내는 메시지의 위력에 매혹되어 그들과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끝은 종종 비극이 된다. 결코 일반에 공개되지도 않고 공개될 수도 없는 돈 문제 때문에 후보들은 자신이 고용한 컨설턴트들을 해고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후보와 컨설턴트를 맺는 끈은 돈이다. 또 선거판 특수를 노려 한몫 단단히 챙기는 컨설턴트들이 만지는 돈이 워낙 어마어마한 탓에 후보와 컨설턴트 사이의 경계와 불신의 강도는 공존공생의 필요성 못지않게 살벌하고 질기고 강하다.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 자문이 천문학적 숫자의 자문비를 요구하자 면전에서 노발대발한 적이 있다. 이 일화는 컨설턴트 세계에서 금세 화제가 되었다. 마이크 머피(Mike Murphy)는 공화당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표급 언론 컨설턴트다. 동료와 같이 만든 텔레비전 정치 광고를 각기 다른 두 고객에게 팔았다가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로 역시 컨설턴트 귀족 대열에 드는 베테랑인데, 컨설턴트와 고객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내가 만약 삼류 정치 지망생이고 컨설턴트를 구하는 중이라면, 금속 탐지기와 거짓말 탐지기를 구입하기 전에는 절대 컨설턴트를 고용하지 않겠다. 솔직히 말하면 컨설팅을 그만둘 생각이다. 좀더 합법적인 일, 예를 들면 개 경주에 돈을 거는 게 낫다고 본다.”
컨설턴트들 간에도 불신의 벽은 높다. 컨설팅 펌이 깨졌다면 필시 돈이 연관되어 있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현재 조지 W. 부시 대통령 후보 선거 캠프의 1급 전략가로 뛰고 있는 스튜어트 스티븐스(Stuart Stevens)라는 사나이다.
스티븐스는 지난 1998년 컨설팅 동료였던 더글라스 매컬리프(Douglas McAuliffe)를 상대로 소송을 했다. 매컬리프가 자기 고객인 의회 의원들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매컬리프는 즉각 벤저민 긴스버그(Benjamin L. Ginsberg)라는 변호사를 고용했다. 긴스버그는 “불행한 소송건이다. 더욱 불행한 것은 스티븐스가 경쟁자인 공화당의 언론 컨설턴트들을 상대로 똑같은 수법을 써먹고 있다는 사실이다”라면서 자신의 고객인 매컬리프를 변호했다. 그렇게 말했던 긴스버그는 지금 고객의 고소인이었던 스티븐스와 함께 부시 후보 진영에서 선거 자문을 맡고 있다.
부시 진영의 손꼽히는 일급 자문역 가운데 한 사람인 칼 로브(Karl Rove)의 일화 역시 비정한 컨설턴트 세계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칼 로브는 연방 항소 법원에서 리처드 손버로(Richard L. Thornburgh)와 맞붙었다. 손버로가 1991년 특별 선거에서 상원 의원에 출마했을 당시 칼 로브가 그의 정치 컨설턴트였다. 선거에서 패배한 후 손버로가 17만 달러의 컨설팅비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이 칼 로브의 주장이다. 손버로는 지금 칼 로브가 돕고 있는 조지 W. 부시의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 밑에서 법무장관을 지냈던 사람이다.
대개의 경우 컨설턴트들은 후보들보다 늘 한수 위다. 컨설팅비가 비싸다거나 너무 무관심하다고 컨설턴트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후보가 있다면 그 후보는 컨설턴트에게 ‘해고’당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보통 컨설턴트가 후보보다 더 이름이 나 있기 때문에 후보로서는 늘 컨설턴트를 모시게 된다. 이런 역학 관계를 모르고 컨설팅비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 등 컨설턴트를 박대했다가는 후보로서는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 실제로 투표일을 불과 몇 주 남겨놓고 컨설턴트가 보따리를 싼 예는 비일비재하다. 유타주 상원 의원으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오린 해치 의원도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경우에 해당한다. 공화당의 베테랑 전략가 샐 루소(Sal Russo)를 고용했다가 대선 중도 하차 한 달 전에 샐 루소에게 ‘해고’당했다.
컨설팅비, 즉 커미션 액수는 당연히 극비 사항이다. 선거 비용의 몇 퍼센트가 커미션으로 지출되는지도 비밀에 속하긴 하지만, 대략 6~7%로 보면 무난하다. 컨설팅 세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정치사업계에 군림하다가 지난 2월 타계한 로버트 스퀴어(Robert Squier)는 탁월한 선거 전략가로도 이름을 날렸지만, 15%라는 부동의 커미션을 고집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커미션 기준은 15%. 이 15%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싫으면 다른 사람을 써라”라는 것이 스퀴어의 말이었고, 난다 긴다 하는 정치인 고객들은 말 한마디 붙여 보지 못한 채 계약서에 서명을 하든지 아니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컨설턴트의 78%는 컨설턴트 법인에 소속되어 있다. 따라서 선거판이 펼쳐질 때마다 명성과 이름을 날리는 쪽이 컨설턴트라면, 뒤에서 돈을 거둬들이는 쪽은 컨설턴트 법인이다. 이러다 보니 정치 컨설턴트와 로비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마이크로 소프트, 월마트 등 대형 민간 기업들도 정치 컨설턴트의 기술이 결국은 로비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치 컨설턴트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기는 하지만 미디어 전략가의 명성과 부와 영향력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컨설턴트도 있다. 여론조사가(pollster)와 전화 선거운동가(telemar- keter), 기금모금가(fundraiser)들이다.
민주·공화 양당의 폴스터들은 선거 예산의 5~10% 정도는 여론 조사에 쓰이기를 바란다. 하원 의원 선거의 경우 대략 100만 달러, 상원 의원 선거의 경우 1000만 달러가 여론 조사에 지출된다. 대통령 선거에는 물론 수천만 달러가 투입된다.
거액의 선거 자금이 텔레비전 광고 비용에 지출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후보자들은 광고가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먹혀드는지를 먼저 알고 싶어한다. 이때 폴스터들의 대답을 듣기 원한다. 여론조사 비용이 선거 때마다 증액되어 책정되는 이유 중의 하나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폴스터들은 미디어 전략가들처럼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키우고 있지 못하다. 굳이 예외를 들자면 클린턴 대통령의 그 유명한 폴스터로 컨설팅 귀족의 대열에 끼여든 마크 펜(Mark Penn) 정도일 것이다. 더구나 폴스터들은 미디어 컨설팅처럼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여론조사가 한번 실시될 때마다 일한 양에 따라 비용을 받기 때문에 미디어 귀족만큼 떼돈을 만지기가 쉽지 않다. 폴스터들이 법인체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유행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20년 전만 해도 폴스터를 고용해 정기적으로 여론조사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대통령 후보와 고참 상원 의원, 주지사 정도였다. 지금은 물론 사정이 달라졌다. 주 의회 의원들도 상근 폴스터를 고용해 정기적으로 여론조사를 하고 있다.
폴스터들은 미디어 컨설턴트들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다. 캠페인 목표를 정하고, 메시지를 선별하며, 인구 분포 및 지역 특성 등을 감안해 선거운동 전반을 점검하면서 유권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사람들은 자신들인데, 미디어 컨설턴트들은 빈둥거리다 20분 만에 스폿 광고를 3개씩이나 만들어 생색만 낸다는 것이다.
텔레마케터: 110만 통의 전화 전쟁
폴스터들만 해도 돈은 한푼도 만들어내지 않고 쓰기만 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비해 텔레마케터들은 돈을 쓰기도 하지만 전화로 직접 유권자와 접촉하면서 기금 일부를 모으는 등 한편, 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텔레마케터들의 주임무는 기금모금이 아니라, 유권자들 사이에 네거티브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이다.
이런 전화 선거운동을 텔레마케터들은 ‘부정적 설득(negative persuastion)’ 또는 ‘여론 밀어붙이기(push-polling)’라고 부른다. 가능하면 많은 유권자들에게 상대후보에 대한 비난성 정보를 유포하는 것이다. 실제로 유권자들에게 이 비난이 먹혀드는지는 관심 밖이다. 알아볼 필요도 없다. 무조건 비난하라! 그리고 설득하라! 이것이 텔레마케터들의 지상 과제다.
전화로 후보를 판매하는 텔레마케팅은 빠르고, 효과적이고, 추적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게릴라 전략이다. 단점이 있다면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개인용 전화가 아니라 사업용 전화비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1통화당 최소 50센트(500~550원)가 든다. 또 지역 전화국을 먼저 선점해야 효과적으로 전화 전쟁을 치를 수 있다.
플로리다주의 민주당 텔레마케터 한스브로(Hansbrough)가 네거티브 캠페인의 대가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지난 1994년이다. 조지 W. 부시의 동생 젭 부시가 플로리다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 민주당 후보 로턴 칠리스의 선거 진영에 소속된 한스브로의 텔레마케팅 펌 요원들은 플로리다 지역 유권자들에게 장장 110만 통의 전화를 걸었다. 이중 7만 통이 노인을 겨냥한 것이었다. 젭 부시 후보는 탈세 혐의를 받고 있으며, 그가 주지사가 될 경우 사회보장제도가 엉망이 될 것이라고 전화통에다 대고 부르짖었다.
현재 조지 W. 부시 후보 진영의 텔레마케터인 제프 라슨(Jeff Larson)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지역을 책임지고 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라슨 펌의 기지 구실을 하는 곳일 뿐 전화 공세지역은 미 전역이다. “군인 부인들이 여기서 전국에 전화를 걸고 있다.” 전화 전쟁의 지역 지휘관 라슨의 말이다.
기금모금가: “중고차 세일즈맨으로 보지 마라”
기금모금자 (fundraiser) 없는 정치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정치 비즈니스에서 기금모금자는 찬밥 신세다. 같은 정치 컨설턴트이긴 하지만 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정치판의 중고차 세일즈맨’이라고 혹평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늘 이전보다 많은 금액을 모아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린다. 실적은 모금 액수로 평가된다. 폴스터나 텔레마케터, 미디어 전략가들과는 평가 기준이 다르다. 누가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았느냐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기 때문이다.
하는 일도 거의 전방위다. 확보하고 있는 기금 기부자 명단을 판매하는 일에서부터 전통적 정치행사인 이벤트 만들기, 소프트 머니 기부자 관리 등 일이 끝이 없고 범위 또한 일정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기금 모금은 뚫고 들어가기 좋은 직업’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누구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후보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후보자 주변에 포진한 정치 컨설턴트들 가운데 오로지 기금모금자만이 돈을 만들어오는 사람이고, 이들이 은행 구좌를 채워놓는 것만이 캠페인이 제대로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믿을 만한 증빙물이기 때문이다.
기금모금자의 목표액은 정치 비용의 인플레이션과 비례해 해마다 상승세를 타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하원 의원의 경우 정치행위위원회(PACs)의 모금 목표액은 10만 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지금은 50만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지난 3월 부시 후보가 어떤 모금 파티에서 사상 최대액수를 거둬들인 것도 뒤에 숨은 기금모금자의 실력 과시가 아니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최근 추세로 볼 때, 1급 펀드레이저가 만들어내는 돈은 평균 12만 달러에서 15만 달러 사이를 오간다. 물론 20만 달러에서 25만 달러까지 만들어내는 초일류급도 수두룩하다. 5년 전 평균 5만 달러를 거둬들이면서 왜 이 짓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던 적도 있지만, 5만 달러 모금은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공화당에서 손꼽히는 기금모금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맷 킬란(Matt Keelan)은 이렇게 말한다. “단 하루만이라도 돈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