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전태일 분신 30년 인생을 바꾼 사람들

  • 육성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입력2006-08-01 1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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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스물세 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 그의 죽음은 침묵을 강요당하던 노동자들의 의식을 깨웠다. 그의 삶은 노동자들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본격적인 노동운동의 서곡이 됐다. 전태일의 분신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민주화 투쟁의 밑거름이 됐다. 그가 떠난 지 30년. 전태일과 더불어 청춘을 불살랐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는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 평범한 공동묘지였던 모란공원이 민주화의 성지로 변모한 것은 30년 전의 일이다.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스물세 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이곳에 묻히면서부터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시위 도중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그때만 해도 전태일의 분신이 한국 노동운동의 ‘불꽃’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태일이 분신한 지 2주 만에 결성된 청계피복노동조합은 70~80년대 노동운동의 ‘신화’였다. 경제개발 과정에 희생만을 강요당했던 노동자들의 처참한 실상이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낱낱이 드러났다. 전태일 사건은 노동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른 시발점이었으며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공장 담벽을 넘어 세상 밖으로 진출한 계기였다.

    전태일의 분신은 한 시대의 충격이었다. 그의 죽음은 70년대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전태일의 뒤를 이어 노동운동에 투신한 사람들, 재야에서 활동하다 정치권으로 진출한 사람들, 뒤늦게 전태일 평전을 읽고 인생을 바꾼 사람들…. 그들은 30년이 지난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형의 뒤를 따른 동생 전태삼

    전태삼(51)씨는 전태일의 동생이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최후의 선택을 준비하던 무렵 태삼씨는 3개월간 용문산에 들어가 있었다. 태삼씨도 형을 닮아 공부에 대한 욕심이 컸던 탓인데, 당시 전태일은 동생이 공부하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태삼씨는 “형이 무언가 결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1시간이나 말을 못하고 나를 쳐다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형은 나에게 어머니와 가족의 일을 맡기려 했다”는 말로 전태일의 의중을 헤아렸다.



    전태일은 분신하기 얼마 전 용문산에 머물고 있는 동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보다 남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할 수 있는 생각과 사상을 공부하는 데 기초로 삼아라.’ 이때부터 며칠간 태삼씨는 낮이나 밤이나 형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고 한다.

    태삼씨가 명동 성모병원에 도착했을 때 형 전태일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태삼씨는 붕대로 감아놓은 형의 주검 앞에서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형, 이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한 거야? 이제 됐어 형?”

    태삼씨는 한동안 학업에 열중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1년씩 다녔을 뿐 한번도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태삼씨는 전태일의 친구들로부터 청계 평화시장의 실상을 접하면서 달라졌다. 태삼씨는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일단 형이 못다한 일을 이루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태일처럼 재단보조로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 그는 ‘김흥택’이란 가명을 썼다.

    태삼씨는 81년 신군부에 의해 청계노조가 강제 해산당하면서 구속됐다. 춘천교도소에서 보낸 2년여의 징역생활. 태삼씨는 “형의 뜻을 잇는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털어놓았다.

    83년 출소한 태삼씨는 취직과 해고를 반복하며 청계천 주변을 떠돌았다. 가족의 생계문제도 시급했다. 아내와 삯바느질을 시작해 작은 공장도 마련했다. 하지만 친구에게 수표를 빌려주었다가 부도를 맞았다. 그때의 후유증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서울 쌍문동에 있는 그의 집엔 붉은색 가압류 딱지가 가득했다. 아파트도 이미 가등기로 넘어간 상태다.

    비록 집안은 어려워졌지만 형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다. “형이 있었기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비록 형처럼 ‘움막’을 치고 살지만 한번도 삶의 좌표가 흔들린 적은 없었다.” 태삼씨는 다만 “어머니를 편히 모시지 못한 것이 형에게 미안할 따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노동문제 연구하는 전순옥씨

    전태일에게는 두 명의 여동생이 있다. 전순옥씨(45)는 10년째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고학하고 있는데 최근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전공은 역시 노동문제. 순옥씨는 최근 “오빠의 30주기 추도식에 졸업장을 바치겠다”는 말을 했다고. 순옥씨는 앞으로 노동운동에 종사하면서 전태일 정신을 계승할 계획이라고 한다.

    막내 동생 순덕씨는 한때 청계천에서 저소득층 빈민 자녀들을 위한 놀이방을 운영한 적이 있다. 순덕씨는 현재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회 일을 거들고 있다. 순덕씨의 남편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현재 녹색연합 사무처장으로 있는 임삼진씨.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딸 임여진양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다.

    1968년 6월.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재단사 친구들과 ‘바보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전태일은 창립총회에서 “우리는 당당하게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있는데도 여태껏 기계 취급을 받으며 바보처럼 찍소리 못 하고 살아왔다. 그러니 우리는 바보들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날 의기투합했던 친구들은 초창기 청계피복노조의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2,3대 청계노조 위원장을 맡았던 최종인씨도 그중 한 사람. 최씨는 “우리는 노동자나 노동운동에 대해 몰랐다. 태일이가 우리를 깨우쳐 놓고 죽어간 것이다. 우리는 태일이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노동조합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전태일 정신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정치투쟁보다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나아가 학교를 짓고 복지시설을 늘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70년대의 양심세력들은 청계노조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 반독재투쟁의 전진기지로 여겼던 것이다.

    “친구가 앞에서 죽었으니 다음 타자로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싸웠다. 우리는 정말 순수했다. 그때는 외부세력 때문에 조합원의 희생이 늘고 있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우리 생각이 좁았던 것 같다.”

    이 과정에 초창기 노조를 이끌었던 전태일의 친구들은 마음 고생도 겪었다. 후배들이 노조집행부의 조합주의 노선을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씨에 따르면 당시 노조 간부들은 임금체불 사업장이 있을 경우 사장을 불러다 주먹을 휘두르고 돈을 받아내는 식으로 처리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청계노조를 정치투쟁과 연결지으려 했던 사람들과 갈등이 빚어졌던 것.

    “우리의 한계가 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아마추어였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노조를 물려주고 나왔던 것이다. 죽은 태일이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최씨는 전태일의 분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청계노조를 떠난 뒤에도 마음으로는 전태일을 잊지 못했다. 최씨는 현장에서 후배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늘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옷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문득 그렇게 사는 것이 태일이의 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고심 끝에 출판업을 시작했는데 뜻대로 되질 않았어요. 그게 잘되면 ‘전태일 장학사업’ 같은 걸 해보려고 했는데….”

    평화시장 친구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있다. 최씨와 함께 초창기 청계노조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던 이승철, 김영문, 임현재, 신진철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평생 전태일을 대신해서 이소선 여사의 아들이 되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명절이면 다같이 모여서 쌍문동 집을 찾는다.

    평화시장 친구들은 대부분 의류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전태일이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친구들은 아직도 돈독한 우정을 지키고 있다. 전태일과 함께 했던 시절의 기억이 뜨겁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 20년 동안은 태일이의 마지막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아마 죽을 때까지 태일이한테 빚지고 살아가야 할 것 같아요.”

    죽어서 만난 대학생 친구 장기표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장기표는 수배중이었다. 당시 장기표는 지하신문 ‘자유의 종’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전태일이 분신하기 한 달 전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실었다. 이런 인연으로 장기표는 전태일이 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모병원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이소선씨는 장기표를 처음 본 자리에서 오랜 친구처럼 반겼다. “우리 태일이가 그토록 대학생 친구를 갖고 싶어했는데, 죽어서야 만나는구나.” 이날 이소선씨는 태일이가 살아온 세월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장기표는 그 얘기를 친구 조영래에게 전했고, 그것이 뒷날 ‘전태일 평전’의 모태가 됐다. 장기표는 전태일의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이소선씨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국에서 어머니를 강제로 납치해 엄청난 돈을 주고 장례식을 치르려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돈을 뿌리치면서 맨발로 도망쳐 나왔어요. 어머니께서 ‘검은 치마폭에 싸서 뒷산에 묻더라도 내 아들 장례는 내가 치르겠다. 태일이의 요구사항을 받아주지 않으면 한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고 외치는 거예요.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뒤 장기표는 수배망을 뚫고 거의 날마다 이소선 여사를 만났다. 이소선씨는 노동교실 실장으로 청계노조에 직접 관여했고, 장기표는 배후에서 각종 유인물을 쓰고 전략을 수립했다. 장기표는 근로조건 개선에 주력하던 청계노조를 정치투쟁의 장으로 끌어낸 배후인물이었다. 장기표는 한때 ‘김씨 아저씨’라는 가명으로 평화시장에 위장 취업한 일도 있었다.

    그런 장기표가 90년대 이후 달라졌다. 전태일 분신 30주년을 맞는 지금 그는 민국당 최고위원을 맡고 있다. 30년의 세월이 길다지만 그의 변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변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투쟁하는 삶만으로는 전태일의 삶을 구현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정치를 통해 그것을 하려고 했구요. 내가 만약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을 갔으면 지금처럼 욕을 먹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 뜻을 펼칠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지는 거예요. 나는 내 꿈을 꺾지 않으려고 민국당을 선택한 겁니다.”

    그러나 민국당의 탄생 과정을 보면 장최고위원의 주장과 동떨어진 부분이 많다.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공천 탈락자들이 모여든 곳이 민국당이었다. 장최고위원은 그런 정당의 전국구 후보로 나섰지만 국회 진출에 실패했고 최근 김윤환 전 의원과 당대표 경선을 준비하다가 도중에 포기했다.

    “나의 민국당 참여 전략은 철저하게 실패했음을 인정합니다. 앞으로도 민국당을 고쳐보려고 노력하겠지만, 여기에 고집할 생각은 없습니다. 새로운 정치를 위한 그랜드 디자인을 구상하려고 합니다.”

    장최고위원에게 전태일 정신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 같은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보고 대충 산다고 말한다면 정말 억울해요. 나는 학생운동할 때의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고 전태일 정신을 버리지도 않았어요.”

    그렇다면 장최고위원이 지금껏 붙들고 있는 ‘전태일 정신’은 무엇일까. 그의 대답이 궁금해졌다.

    “전태일은 인간해방 사상을 말했습니다. 내 정치의 목표도 바로 인간해방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해방 노선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아니라면 나는 정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순수’를 지향하지만 ‘힘없는 순수’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갈 것입니다.”

    노동운동가로 나선 김문수

    70년 당시 서울대학교는 혜화동에 있었다. 개울 하나만 건너면 바로 청계천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태일의 분신은 서울대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전태일의 장례식을 학생장으로 치르기 위해 법대, 상대, 문리대 등이 잇따라 집회를 열었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법대는 장기표와 조영래 등 이른바 ‘사회법학회’ 멤버들이, 상대에서는 김근태 등이 이끌던 ‘경제복지’ 회원들이 적극적이었다.

    김문수 의원(한나라당)은 줄판으로 등사된 전태일 수기를 읽고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때부터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마석 모란공원을 찾아 참배했다고 한다. 김의원은 “처음엔 청계노조 간부들에게 한자와 상식을 가르쳐 주기로 했으나, 막상 노동자들을 만난 뒤부터는 오히려 내가 현장을 배워야 했다”고 회고했다. 김의원은 직접 재단 일을 배워 통일상가에 취업하기도 했다.

    김의원은 전태일 정신을 ‘양심에 대한 성찰’로 규정했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은 전태일 정신을 꾸준히 계승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국회에서 노동문제를 다루는 상임위원회는 제일 인기가 없어요. 하지만 나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고뇌하면서 노동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치열함과 자기 헌신성에서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태일은 목숨을 바쳤는데, 나는 아무것도 바친 게 없잖아요. 내가 비록 운동을 했지만, 전태일처럼 희생한 건 없지 않습니까? 전태일은 작은 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요. 그렇게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은 그 갑갑한 세상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어요.”

    김의원은 “전태일을 식상한 눈으로 보지 말고 깊은 통찰력으로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노동계가 전태일 정신을 70년대의 봉제공장에 가둬두고 있다는 것이다.

    김의원은 전태일 정신을 어떻게 계승하자는 것일까. 그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한국적 정신 영역과 전태일의 시대정신이 결합돼야 해요. 전태일을 노동자로만 남겨둘 것이 아니라 ‘성인’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봐요. 예수도 죽고 나서야 재평가되지 않았습니까?”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이었던 손학규 의원(한나라당)은 전태일의 분신에 자극받아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손학규는 탄광 노동자를 거쳐 청계천에서 빈민운동을 했는데, 경찰이 실탄을 장전하고 현장을 덮쳐 1년간 옥살이를 한 일도 있다. 그 이후엔 기독교사회운동협의회에서 활동했다.

    손학규 의원은 “70년대는 노동문제가 가장 뜨거운 화두였지만 지금은 국가경쟁력의 시대”라고 말했다. 노동의 내용과 질이 달라졌기 때문에 양극화된 투쟁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이 손의원의 주장이다.

    “노동자의 압박만 갖고는 전태일 문제를 제대로 볼 수가 없어요. 우리 사회의 통합이라는 측면까지 동시에 봐야 합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 정신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느낍니다. 그런 생각은 위선에 빠질 위험이 있어요.”

    손의원은 “70년대의 전태일 정신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 발전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70년대가 투쟁을 통한 인간해방을 갈구했다면, 이제는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광택은 70년 당시 서울대 법대 학생회 간부였다. 그는 전태일이 분신하기 전 부산지역 노동자들의 생활실태를 현장 조사한 일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간지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돼 파장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이광택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광택은 청계천이 서울대와 맞붙어 있는데도 관심을 갖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광택이 법대생들과 함께 성모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소선씨는 그가 목사인 줄 알고 추도사를 부탁했다. 이때 이광택은 요한복음 12장 24절을 암송했다.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노동법 교수가 된 이광택

    그 후 이광택은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고 교련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 강제 입영됐다. 75년 군에서 제대한 뒤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일하던 이광택은 강원룡 목사가 주도한 크리스찬아카데미를 통해 청계천 노동자들과 다시 만났다. 당시 강목사는 ‘중간집단’ 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소장파 학자들은 이것을 사회운동에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태일이 분신하고 6년이 지나서야 비로서 ‘대학생 친구’가 되었습니다. 살얼음판 같은 시국이었지만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어요. 노동야학을 하면서 전태일의 뜻을 조금이라도 실천하기 위해 노동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지요.”

    독일에서 노동법을 공부한 이광택은 귀국한 뒤 한국노동연구원 창립 멤버를 거쳐 산업사회연구소를 열었다. 현재는 국민대 법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교수는 전태일 정신을 ‘정의구현’이라고 말했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것이 전태일 시대의 정의였다면 사회적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이 오늘날의 정의라는 것이다. ‘가는 길이 비록 험해도 역사는 바뀐다’는 것이 바로 이교수의 인생 철학이다.

    강원룡 목사는 크리스찬아카데미를 개설한 사람이다. 그는 크리스찬아카데미에 5개 교육과정을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70~80년대 사회운동의 주역들이 대거 배출됐다. 노동계만 보면 동일방직 이총각, 반도상사 한순임, YH사건 최순영, 원풍모방 박순희씨 등이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았다. 청계노조에서도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씨가 ‘김태삼’, 민종덕씨는 ‘민종숙’이란 가명을 쓰고 이곳에서 수강했다.

    강목사는 전태일이 분신하던 무렵 청계천 근방 경동교회에 있었다. 그는 주일 예배에서 ‘전태일은 고귀하게 죽었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일도 있었다. 그는 한국사회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 안타까워 ‘압력을 통한 화해’를 이루고자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중간 노선은 시련을 겪었다. 정부 당국은 이적단체로 간주했고, 노동계에서는 회색단체로 몰아붙였다.

    강원룡 목사는 전태일의 죽음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는 “전태일에겐 정치성이 없었다. 감리교에 다니던 기독교 신자가 최후의 수단으로 분신 자살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태일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죽은 것인데, 노동계 인사들이 지나치게 정치적 색깔을 입혔다는 주장이다. 강목사는 지금도 ‘중간 집단’ 운동을 지향한다. 최근 그가 발족한 ‘평화포럼’도 남북문제를 제3지대에서 논의해보자는 모임이다.

    70년대 초반 노동문제는 사각지대에 있었다. 60년대 후반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뜨겁게 펼쳐졌다. 당시 재야운동을 이끌던 장준하, 계훈제, 백기완씨 등이 노동문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암울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박정희 정권이 62년부터 시작한 경제개발의 영향이기도 하다. 정부가 산업화 드라이브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는 철저히 희생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전태일의 분신을 가장 가슴 아파했던 재야인사는 고 함석헌 선생이다. 그는 영국에서 비보를 전해 듣고 귀국하자마자 전태일의 집을 찾았다. 새벽녘 함석헌 선생이 흰수염을 휘날리며 두루마기 차림으로 방문을 두드리자 이소선 여사는 산신령이 찾아온 줄 알았다고 한다. 이소선 여사는 당시 함석헌 선생이 남긴 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전태일 선생은 우리 죄인들을 깨우치기 위해 죽어갔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당시엔 재야인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 후보 신분으로 전태일의 집을 찾아가 가족들을 위로했다. 김대통령은 유세 과정에서도 노동자의 인권문제를 언급해 전태일 사건을 쟁점화했다.

    이창복 의원(민주당)은 전태일 1주기 추도식을 준비하면서 이소선씨와 인연을 맺었다. 이의원은 80년대 문익환 목사와 함께 전태일기념관 건립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의원은 “전태일 때문에 운동에 투신한 것은 아니지만, 항상 귀감이 된 인물이었다.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치인이 됐지만, 재야 시절의 정신과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의원은 전태일 정신에 대해 “사회가 양극화될수록 ‘약한 자’ ‘보호받지 못한 자’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신동아’를 읽고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전태일이 분신한 지 4년 뒤의 일이다. 전북 정읍에서 살다가 중3 때 서울로 올라온 민종덕씨(48)는 그처럼 우연하게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민씨가 읽었던 기사는 ‘신동아’ 71년 1월호와 3월호에 실렸던 전태일의 수기와 평화시장 르포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노조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이소선 어머니를 찾아가 ‘전태일의 뒤를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민씨는 조직에 관계된 일을 주로 맡았는데 수배중인 장기표, 조영래의 연락선이기도 했다. 민씨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들 중에는 정인숙씨(현 여성노조연맹 위원장), 이숙희씨(자영업) 등이 있다. 민씨는 80년대 들어 청계노조 복구 투쟁을 벌이다 85년 9월 구속돼 2년 가까이 징역을 살았다. 87년 6·29선언 이후 출감한 민씨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는 축산유통업에 종사하고 있다.

    “전태일은 내 인생의 20대에서 40대까지를 지배했습니다. 지금 노동조합 일을 하지는 않지만 전태일을 잊어본 일이 없습니다. 비록 소시민으로 살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과 양심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나의 젊은 날은 후회없는 삶이었습니다.”

    김영대씨는 72년 재단사 보조로 평화시장에 들어갔다. 그러나 몇 년간 그가 들은 것은 ‘월급을 못 받아서 술 먹고 자살했다’ ‘사장하고 다투다가 쫓겨나니까 분신했다’는 등의 전태일에 관한 루머뿐이었다. 당시 그가 몸담았던 업체는 노동조합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가 노동조합사무실을 구경하고 이소선씨를 만난 건 70년대 후반의 일이다.

    “줄판으로 긁은 전태일의 일기를 읽었어요. 내가 재단 일을 해서 그런지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나도 처음엔 빨리 재단사가 돼서 사장에게 항의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몇 해 겪어보니까 구조적인 문제더라구요. 목숨을 걸고 구조를 바꾸려고 했던 전태일을 알고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 거죠.”

    김씨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김씨는 청계노조 합법성 쟁취 투쟁을 벌였으며 88년엔 141개 사업장 하루 총파업을 주도했다.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중심이 대규모 사업장으로 옮겨갈 무렵 그는 서노협 건설에 앞장섰다. 이때 만난 단병호씨와는 평생 동지. 현재 단병호씨는 민주노총 위원장, 김영대씨는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전태일이 있었기에 흔들림없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상은 변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전태일 정신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열악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습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서 운동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열네 살에 구속된 임미경

    77년 7월 경찰은 이소선씨가 장기표의 재판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연행한 뒤 노동교실을 폐쇄했다. 두 달 뒤 조합원들이 노동교실을 점거하자 경찰이 대거 투입됐다. 이때 민종덕씨는 3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다 허리를 다쳤고, 임미경씨(38·자영업)는 “내가 제2의 전태일이 되겠다”며 강력히 저항했다.

    임씨는 1962년 11월생으로 당시 만 14세였는데, 구속영장과 수형자 기록부엔 60년 16세로 기록돼 있다. 임씨의 주민등록 뒷번호도 ‘2000000’으로 조작됐다. 하지만 전과기록엔 62년생으로 돼 있다.

    열네 살에 구속된 여성 노동자. 그에게 전태일은 무엇이었을까. 임씨는 “약자의 편을 드는 것, 그런 게 아닐까 해요. 전태일을 알게 되면서 항상 머릿속으로 없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어요. 시장에서 물건을 사도 좋은 것보다 할머니가 파는 작은 물건을 살 때가 많아요.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얘기를 해주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장옥자씨(37)는 충북 음성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81년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박형규 목사가 있던 제일교회를 다녔는데 이곳에서 민종덕씨를 만나 노동야학을 시작했다. 노동운동의 중심이 서서히 대규모 사업장으로 넘어가던 무렵 청계노조에 들어온 것이다. 장씨는 처음 전태일 평전을 읽었을 때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지만, 치열한 싸움을 거친 뒤 절실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노동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조차 망설이는 나 자신을 보면서 전태일 선배가 엄청난 일을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태일 선배가 죽음으로써 지켜낸 노동조합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지금껏 살아왔어요.”

    90년대 들어 청계천은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대부분의 사업장이 외곽으로 이전했다. 한때 2만명에 달했던 조합원은 이제 150여 명으로 줄었다. 노동조합은 있어도 임단협은 없는 상황. 고난의 30년 세월을 버텨온 청계노조가 이젠 동대문상가아파트에서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장씨는 지난해 제9회 ‘전태일 문학상’에 응모했다. 그가 쓴 ‘내 안에 살아 있는 사랑에 대하여’라는 서사시는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이 작품은 전태일 정신과 더불어 걸어온 청계노조의 투쟁사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장씨는 시의 마지막에서 ‘나는 여전히 노동운동을 합니다’라고 썼다. 그는 현재 청계노조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모란공원은 숨쉬고 있다

    10월 3일. 마석 모란공원을 찾았다. 감옥에서 영치금을 모아 전태일의 흉상을 세웠다는 고 문익환 목사. 그는 전태일의 왼편 언덕배기에 묻혀 있다. 폐암에 걸려 해남 대흥사에서 요양하는 중에도 전태일의 기일을 기억하며 밥 한 공기 떠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고 조영래 변호사. 그는 문 목사의 아래편에 누워 있다. 그 밖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어깨 너머와 발 밑에 잠들어 있다.

    이날 모란공원에서는 한평생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고 김말룡 의원의 4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일찌감치 도착해 민주열사 묘역을 돌고 있던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전태일 분신 30주년의 의미를 물었다. 그는 “전태일의 밑바탕에 흐르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모순된 사회구조를 깨려 했던 의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오는 11월엔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린다.

    [전태일 기념사업회는 지금]

    연극 ‘전태일’ 올리고, 홈페이지 뜨고

    서울 종로구 창신동엔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있다. 이곳은 지난 85년 후원금을 모아 전태일 기념관으로 문을 열었는데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다시 지었다. 80년대엔 주로 노동자들의 교육장소나 수배자들의 은신처로 사용됐다. 기념사업회의 살림은 매우 어려운 상태. 한달에 130만원 정도 되는 후원금으로는 상근자 3명의 활동비를 지급하기도 빠듯하다.

    전태일기념사업회는 30주년을 맞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문화행사가 어느 해보다 많은 것이 가장 큰 특징. 극단 ‘한강’과 ‘꽃다지’ 등이 준비한 연극 ‘전태일’이 11월 8일부터 국립극장 야외무대에서 막이 오른다. 11월 13일엔 ‘이몽’이 만든 다큐멘터리 ‘전태일의 기억’이 상영된다. 또한 ‘오성과 한음’은 판소리 ‘전태일전’을 제작중이며, 지난달 말엔 전태일 홈페이지가 개통됐다(www.juntaeil.com).

    이 밖에 청계3가에서 8가까지를 ‘전태일로’로 고쳐 부르자는 운동이 펼쳐질 예정이다. 기념사업회는 현재 각종 창구를 통해 개정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서명운동도 벌일 계획. 학술행사로는 39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11월 3일 개최된다. 또한 ‘전태일 평전’ 다시 읽기 운동과 모란공원 헌화 캠페인도 벌어진다. 기념사업회에서는 30주년 행사를 함께할 일꾼을 모집하고 있다. (전화 02-3672-4138)


    [전태일 평전발간 비화]

    80년대엔 금서, 90년대엔 필독서

    전태일의 수기는 70년대 초부터 평화시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읽혔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평전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76년 무렵이다. 민종덕씨에 따르면 “수배중이던 조영래로부터 원고에 대한 얘기를 흘려들었다. 얼마 후 이소선 여사와 함께 원고를 보게 되었는데, 직감으로 조영래의 글임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태일 평전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국내 출판이 어렵다고 판단한 일부 인사들은 원고를 먼저 일본으로 보냈다. 여기엔 이창복 의원, 손학규 의원 등이 관여했다. 84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이 나왔을 때도 사람들은 저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판매금지됐지만 80년대 내내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다. 90년대 이후엔 수험생의 필독도서로 꼽히기도.

    조영래 변호사의 병세가 회복이 불가능해졌을 무렵 민종덕씨는 조용히 물었다고 한다. “이젠 밝히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조변호사는 평전에서 두 가지 잘못을 지적했다고 한다. 하나는 지식인 중심으로 쓰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미화한 부분이었다고. 조영래의 의중을 확인한 장기표는 개정판 말미에 저자의 이름을 밝혔다. 개정판은 90년에 ‘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하지만 책이 나오기 며칠 전 조변호사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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