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일, 이 곳 ‘칼럼’란(http://column.daum.net)에 ‘말기 암환자의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글이 떴다.
‘오늘도 하루 종일 통증과 싸웠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글은 죽음의 고통과 사투하는 한 젊은 여성의 하루를 담담히 그리고 있었다.
‘통증으로 악악 소리를 질러대다, 요즘 내가 느낀 것을 말하고 싶어져’ 시작했다는 글은 놀랍게도 행간 가득 ‘희망’이었다.
글의 주인공은 김현경씨. 다섯 살배기 아들, 5년 열애 끝에 결혼한 두 살 위 남편을 둔 서른 한 살의 가정주부다. 1년 10개월 전, 그녀는 직장암 3기 말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수술 후 항문을 꿰매고 장을 끌어내 왼쪽 아랫배에 인공항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암은 재발했고 이제는 폐, 골반으로까지 퍼져 손쓰기 어려운 상황이 돼 버렸다.
그녀가 그렇게 ‘앉지도 눕지도 못할 만큼’ 처절한 통증 속에서 써내려간 글들은 네티즌 사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정 독자만 3000여 명.
그들은 각기 아픈 사연을 담은 글들을 앞다투어 올려놓았고 김현경씨는 그 하나하나에 짧지만 정성어린 답장을 써주었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도리어 위로가 되어주는, 그렇기에 더 감동적인 ‘사이버 스페이스의 기적’이었다.
여기 그녀의 글을 소개한다. 김현경씨는 칼럼 게재를 허락하며 ‘원고료는 불우이웃돕기에 써달라’는 뜻을 전해왔다.
참으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는 김현경씨의 쾌유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
고통도 삶의 이유입니다 2000년 8월 1일
오늘도 거의 하루 종일 통증과 싸웠습니다. 통증을 조금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게 뜨개질도 해보고 보고 싶던 책도 사놓았지만 아무것도 손댈 수가 없었습니다.
암이라는, 나와는 평생 상관없을 것만 같던 병을 진단받고 수술을 하고 방사선, 항암치료를 하고 다시 재발, 그러고 나서 한방병원, 이제는 중국의 어느 병원의 약을 먹고 있습니다.
제 병은 직장암입니다. 그것이 이제는 폐와, 골반 그리고 아무도 알 수 없는 어느 곳에 퍼졌다고 하는군요. 벌써 1년하고 8개월째입니다. 발견 당시 이미 3기 말이었으니, 아직 살아 있는 게 신기합니다.
수술할 때 항문을 꿰매버리고 장을 끌어내어 왼쪽 아랫배에 인공항문을 만들었습니다. 관장으로 세척하고 있지요.
항문 쪽에 통증이 아주 심해서 앉지도 못합니다. 그저 한쪽 엉덩이뼈와 다리뼈를 의자에 걸치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글이 쓰고 싶어졌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통증으로 ‘악악’ 소리를 질러대고, 진통제를 한알이라도 안 먹으려고 버티고 버티다가 요즘 내가 느낀 것을 말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오늘 하루는 제 인생의 모든 날과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땐 희망도 가져보고 기운도 차려보지만 밤이 되면 몸의 모든 진이 빠져버립니다. 하긴 모든 사람의 하루가 그렇지 않을까요?
오늘은 남편이 늦는군요. 저는 5세 난 아들과 33세 난 큰아들이 있습니다. 제가 통증에 몸부림치며 이제는 가고 싶다, 죽고 싶다고 소리를 내지르다가 금방 입을 막아버리는 이유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이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가족이 없는 환자는 일찍 죽습니다. 아니, 병이 없어도 죽습니다.
이제 제 얘길 해보려 합니다. 만약 건강하시다면 제 글을 읽고 건강에 신경 쓰시고요, 아프시다면 저 사람은 나보다 더하구나 하고 위로받으시길 원합니다. 만나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다시 만나요.
우리 남편은 로봇 태권브이! 2000년 8월 1일
우리 남편은 로봇 태권브이나 마징가, 아니면 메가레인저입니다. 제가 암을 선고받은 날 한 번, 제가 고통받는 것을 처음 보던 날 한 번, 그리고 시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한 번, 이렇게 세 번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오늘도 관장이 안 돼서 고생하다가 짜증을 부리는 내게 그는 현실을 직시하라, 그보다 더 나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통증은 진통제를 먹어라 하고 세 마디 했습니다.
그래요,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 그가 아주 나쁜 사람처럼 보이는군요. 하지만 질질 짜기 좋아하는 제게 그는 천생연분입니다. 5년 연애하고 학교 다니면서 결혼한 사이니, 사랑은 해볼 만치 해봤겠죠. 하지만, 여러분 아직도 순간순간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할까’ 하는 말도 안 되는 말을 중얼거린답니다.
사람은 왜 그리 이중적인지, 통증이 오면 보는 사람 괴로울까 봐 극구 나가라고 하지만 막상 나 혼자 악악 댈 때면 어서 와 손이라도 잡아주길 원합니다.
회사 생활하랴, 어린 아들 친구 되어주랴, 마누라 투정 받아주는 그는 정말 태권브이입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죽으면 화장해 달라, 그리고 날 빨리 잊어달라는 내 말에는 화장은 생각해보겠으나 절대 너를 잊을 수는 없다고 단호히 말하는 이 늠름한 남편 때문에 저는 오늘도 하루를 참아냅니다.
오늘 남편이나 아내에게 짜증내거나 화가 나셨나요? 그러면 저를 기억하시고, 그깟것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밝은 목소리로 전화하세요, 영원히 사랑한다고.
뭉크는 정말로 절규를 알았다 2000년 8월 2일
오늘 새로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뭉크 말이에요. 그 괴기한 그림 중에 ‘절규’라는 것이 있죠. 머리털 없는 사람이 머리와 귀를 덮듯이 얹고서 소리지르는 듯한 그림.
지금까지 뭉크가 그런 그림을 그렸구나, 그런 정도였는데 오늘로 그가 굉장히 가깝게 느껴지네요.
통증으로 헉헉대다가 무의식중에 내가 보인 행동이 바로 뭉크의 ‘절규’였습니다.
병에 걸리면 100%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모르고 있던 것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되고, 그리고 동감하게 되지요.
뭉크가 암을 앓았던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 그를 그렇게 절규하게 했는지 궁금해지면서 동정심이 생기더군요.
병에 걸려 좋은 일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암으로 진단받은 것은 정확히 98년 12월 19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두 달 전에 이미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꿔가고 있었답니다.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책 때문이었지요. 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책으로, 글로 사람의 의식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도, 경험도 못해본 저에게 그 책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워낙 베스트셀러이니 잘 아시겠지만 이책은 모리라는 늙은 미국의 사회학 교수가 몸 아래부터 천천히 굳어 결국 죽는 루게릭 병에 걸리자 이것을 알게 된 세상과 생활에 찌들어 있던 옛 제자가 그를 찾아가고 우연히 그 만남이 화요일마다 이어지면서 죽음, 결혼, 삶 등에 대한 교수의 생각을 제자가 정리해 적은 책입니다.,p> 저는 그때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젖어서 괴로워했어요.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달라진 인생에 적응도 안 되고 능력 있다고 칭송받던 제가 바닥인생으로 떨어진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죠. 그때 그 책은 모든 고민에 대답이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책 10권을 사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사람들은 고마워하면서도 의아해하는 표정이 역력했죠. 나중에 한 친구는 마치 제가 제 병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고맙게도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암진단을 받고 나서 통증의 고통으로 울기 전에 딱 세 번 울었는데 진단받던 날과 재발선고를 받던 날, 그리고 종교를 갖던 날입니다. 이렇게 제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죽음과 병에 초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책에서 얻은 교훈 때문일 겁니다.
그는 어떤 불교도가 매일 어깨 위에 새를 올려놓고는 새에게 ‘오늘이 그날인가? 나는 준비가 되었나? 나는 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있나?’라고 묻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물을 것을 제안합니다.
‘오늘이 내가 죽을 그날인가.’
솔직히 어깨 위의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지금처럼 야망에 넘쳐 괴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진정한 삶을 보게 된다는 얘기죠.
다행히 저는 병을 알기 전에 책을 알아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진단받고 나서 남편에게 제일 먼저 이 책을 읽게 했죠.
오늘은 얘기가 길어졌네요. 읽어보세요. 분명히 얻는 게 많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모리의 학교에서 체육대회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가 1등! 우리가 1등!” 하면서 응원했대요. 그랬더니 모리가 그 곁에서 뭐라고 소리쳤는데 아세요?
“2등이면 어때!”
나는 현재다! 2000년 8월 6일
금요일날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줄이려고 노력하던 진통제를 더 먹어버렸습니다.
통증이 강해질수록 외로움도 커집니다. 통증을 느낄 때만큼 지독히 혼자임을 느끼는 때는 없으니까요.
체면도, 가족들 생각에 틀어막은 수건도 다 버리고는 나도 모르게 머리로는 이러면 안 되지 이게 무슨 소용이야 하는 일들을 합니다. 넋두리, 하소연, 원망….
그리고는 1분도 안 되서 미안해, 진심이 아니었어, 내가 왜 이러지 하지요.
주위의 반응은… 아직은 이해해 줍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간병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괴롭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서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것, 이것이 가족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소중함을 뼛속 깊이 느낍니다.
친한 친구가 그러더군요. 어떻게 하루를 평생같이 살 수 있을까?
저는요, 아침에 일어나면 일어나서 고마워요. 전날 잘 잤건 못 잤건 그날의 시작에 감사하죠. 그리고 다른 생각 안 합니다. 내일도 모레도 한 달 뒤도 두 달 뒤도. 그래서 사실 세금 고지서를 연체하는 경우가 많답니다. 밤에는 잘 지낸 오늘에 대해 감사를 합니다. 이렇게 제 평생의 하루가 가지요. 과거도 미래도 생각지 않습니다. 우선 오늘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충실합니다.
저도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실수와 후회로 얼룩진 과거에 매여 산다면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는 인생이 더 힘들고 괴로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닥칠 일 때문에 두려움을 가지고 산다면 더 힘들고 괴로워지리라는 것도 깨달았죠.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가끔은 저도 과거와 미래의 괴로움에 빠져들죠.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을 현재에 충실하며 삽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겠지요.
지금은 새벽입니다. 잠을 못 잤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루 못 잔다고 어떻게 되냐, 언젠가는 잠이 오겠지, 이러면서 이 글을 씁니다.
여러분의 오늘도 오늘만으로 꽉 채워지길 바랄게요. 건강하세요.
죽으면 다 소용없는데 왜 그리 안달했을까 2000년 8월 2일
오늘 한겨레신문에서 귀한 글을 읽었습니다.
천주교 어떤 단체에서 하는 교육의 일종인데요, 그 중에 죽음묵상이라는 것이 있답니다.
촛불과 함께 자신의 영정을 앞에 두고 글을 들으면서 묵상하는 모양입니다. 그글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죽음에는 남녀노소도 없고 빈부와 귀천의 차별도 없다지만 설마 나도 그러랴 하고 있던 차 이 설마에 속고 말았네.”
“온갖 맵시 다 차려입고 모든 사랑을 제 한몸에 받으려 허덕이더니 굶주린 가난뱅이는 티끌같이 눈 아래 내려보더니 잘났다는 네 몸은 얼마나 잘나 먼지 되고 흙되어 흩어지는가.”
어떤 사람이 이 상황에서 자신에 대한 후회와 반성을 안할까요. 그리고 또 다짐하겠지요. 다르게 살겠다고.
저도 얼마 전 거동에 큰 불편이 없을 때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몸이 조금 좋아지면 꼭 봉사하러 다녀야지, 소년소녀가장도 도와야지 이렇게 말입니다.
하지만 이젠 진짜 거동할 수 없게 되니 후회가 됩니다. 그때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남을 위한 일을 해야 했는데….
어쩌면 숨을 거둘 때는 지금의 저를 생각하며 후회할지도 모르지요. 어떤 방법이라도 있을 때 실천할걸.
여러분은 어떠세요. 저처럼 뒤늦게 후회 마시고 조그만 일이라도 실천해주세요. 제 대신이라도요.
부탁합니다.
오늘은 정말 너무너무 아픕니다. 아침부터 지금 오후까지 한시도 저를 쉬게 하질 않는군요.
한참 아픈데 엄마가 오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용케도 엄마가 오는 시간은 크게 아프지 않아 다행이었는데 오늘은 들키고 만 것입니다.
엄마는 제 손을 붙들고 우셨습니다. 기도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점심을 먹었지요. 입맛이 없는 저는 여전히 툴툴거리며 밥을 먹었어요.
밥을 먹고 나서도 자꾸 아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신음소릴 내는데 엄마의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밖에서 엎드려 기도하시는 거예요. 처음엔 애원을 하다가 나중엔 원망을 하시더군요. 난 순간 내가 지금 죽었으면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불쌍한 엄마의 고통이 끝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저도 울고 엄마도 울고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저는 엄마에게 엄마는 저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하면서….
저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여서 아이가 아플 때의 그 괴로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실까요.
차라리 나를 대신 데려가 달라는 엄마의 기도에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 불효를 도대체 어떻게 갚을 수 있을 지.
하지만 답은 언제나 하나지요.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지요.
아, 오늘은 정말 힘들군요.
참 외롭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내야겠지요.
글을 올린다는 것 2000년 9월 5일
오늘은 멀리서 아빠도 오시고 맛있는 점심도 사오시고, 무엇보다 많은 님들의 기도와 위로 때문인지 견딜 만한 하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긴 겁이 나서 진통제를 왕으로 먹은 탓도 있겠지만요.
매일 이 시간이 될 때까지는 글을 올리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힘도 들고, 아프고, 또 뭔가 쓸 얘기도 없고….
하지만 거의 매일 뭔가를 쓰게 되는군요. 이것도 작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종교를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이 주신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여기에 저는 무엇보다도 많은 님들의 격려가 그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칼럼에 들어와 쓰지 않고 나가더라도 읽어주시고 뭔가 마음에 느끼시는 그 자체가 제게 울트라 바이올렛 슈퍼 짱!(맞나?)의 힘을 주는 것 같아요.
어제 그런 푸념의 글을 써놓고는 창피해서 칼럼에 들어오기가 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평소보다 더 많은 님들의 격려의 글을 읽으며 정말 행복한 사람임을 절감했습니다.
그래도 자꾸 힘들어져만 갑니다. 이젠 제 주위 사람들에게 끼치는 폐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침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남편에게 웃음 한번 웃어주지 못하는 아내의 마음을 누가 알겠어요?
참 좋은 아내라고 자부하며 살아가던 저였는데 말예요.
그래요. 아무리 힘들어도 웃어줄 수는 있겠지요. 그래요. 웃을게요. 님들의 그 큰 사랑의 힘으로 오늘은 남편에게 웃음을 꼭 선물하겠습니다.
칼럼이 점점 짧아져 가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사실 자판 두들기기도 힘이 드는군요.
여러분의 사랑,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답글을 한다는 것 2000년 9월 6일
오늘은 하루종일 약 먹은 쥐처럼 먹고 졸고 먹고 졸고 하고 있습니다.
참 무기력합니다. 힘들고요.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꿈틀거립니다.
하지만 피곤이 이렇게 심한데도 먹기도 해야 하고, 관장도 해야 하고, 그리고 칼럼도 써야 하고….
칼럼이 이렇게 제 생활에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하도 아파서 글을 못 올려 칼럼이 폐지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럼 어쩌나 남편에게 대신 사과의 글을 올리라고 해야 할까 하는 걱정만 잔뜩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있군요.
답글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많이 망설이고 있습니다. 답글을 쓰는 것이 수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써야 하지 않나 하는 쪽입니다.
저도 모르게 답장하기에 손이 가는 걸요.
정말 걱정입니다. 이젠 칼럼을 쓰고 나서 힘이 들어 한참은 꼼짝도 못합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하지만 여러분,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닥 못 할 때까지는 꼭 한마디라도 하러 들어올 생각입니다.
저 오늘도 살아 있어요.
기다리는 많은, 걱정해 주는 많은 님들이 계시기 때문이지요.
여러분께서도 이해해 주리라 믿습니다.
자꾸 한숨이 나오네요. 오늘은 여기서 접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좋은 오후 되세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오늘은 아침에 컨디션이 좋아서 TV를 보는데 갑자기 그 노래 있잖아요. ‘가을에 편지를 쓰겠어요…’ 하는 노래가 나오지 않겠어요.
그런데 갑자기 동시에 눈물이 막 줄줄 흐르는 거예요. 얼마나 놀랐는지.
제가 원래 센티멘탈한 데가 있기는 해도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제가 놀라 깜짝놀랐다니까요.
아, 가을이구나 생각하니까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여름에 하도 힘들어서 고생할 때 기도를 했죠. 이 더운 여름에 장사 치르게 하지는 말아달라고요.
그런데 벌써 가을인 겁니다. 커피라도 한잔 하는 꿈을 꾸고 있는데 밖을 보니 산은 푸르다 못해 푸르딩딩한 거 있죠. 무드 다 깼어요.
오후에 안 좋은 일이 있어 체기로 정말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괜찮은 듯하고….
하여튼 가을은 가을입니다. 제가 집에서 입는 유니폼이 긴 팔, 긴 바지로 변했거든요.
이 가을도 잘 보내야 할 텐데… 꼭 노인네 같은 멘트네요.
쓸쓸한 추석입니다 2000년 9월 10일
여러분이 걱정하신 대로 많이 아팠습니다. 매일 그래도 몇 시간은 괜찮았는데, 이젠 그것도 힘들군요.
게다가 남편과 아이가 시골에 모두 모이는 모임에 가버려서 혼자 있습니다.
어떨 땐 혼자 있다가 어떻게 되는 것 아닐까, 인사도 못 하고 가는 게 아닐까 걱정됩니다.
작년에도 추석엔 혼자였는데, 왜 이리 이번 추석은 외로운지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관장을 하고 나면 왜 그리 아프고 외롭고 슬픈지….
자꾸 약해져 가는 몸을 느끼면서 두려움이 찾아듭니다. 힘듭니다. 이젠 강한 척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즐거운 추석에 자꾸 기어 들어가는 얘기만 해서 미안합니다. 엄마가 사다놓은 햇밤을 보니 정말 추석이구나 싶었습니다.
정말 토실토실 알토실이더군요.
남편과 아이한테로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아프게 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시골이거든요.
이젠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남편과 아이가 오는 것만 기다리게 됩니다.
병이 확 나아버렸으면….
아파서인지 두서없는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음부터는 좀더 힘있는 제가 되어야겠지요.
여러분이 응원해 주시니까요.
답글 못 올려 죄송합니다. 너무 힘들어서요….
잠자기 힘든 이유 2000년 9월 12일
요즘엔 통 잠을 못 잤습니다. 잠을 못 자는 것보다 더 큰 고문은 없다잖아요. 우리 남편은 자기가 항일운동을 했더라도 하루만 안 재우면 다 불었을 거라고 할 정도니까요.
나중엔 화가 났습니다. 그래, 안 자면 될 거 아니야! 안 잔다 안 자!!!
하지만 소리쳐 봤자 메아리만 돌아올 뿐….
허리가 아파서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잤더니 그게 오히려 허리에 무리를 주어서 어떤 행태로도 누워서는 잘 수가 없습니다. 별 궁리를 다해봤지만….
게다가 조금씩 짝잠을 잘 때는 왜 이리 꿈을 꾸는지 주로 과거가 배경인 꿈인데요, 꿈에 치어서 일어난다니까요.
어제, 그러니까 오늘 새벽에는 고등학교 때 꿈을 꾸었습니다. 다 생각은 안 나지만 하여튼 준비해온 도시락을 펴고 막 먹으려는데 그만 잠이 깨버렸어요. 깨자마자 속상했지만 꿈에서 뭐 먹으면 감기 걸린다는 엄마의 말씀을 기억하고는 오히려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그저께는 그렇게 보고 싶던 외할머니, 할아버지를 꿈에서 뵈었습니다. 아무 말도 못했지만 가슴이 뭉클합니다.
꿈이라고는 꾸지 않는 제가 왜 이러는지… 원래 얕은 잠에는 꿈을 많이 꾸나요?
오늘 안으로 가족들이 온다고 합니다. 차가 밀려 오늘 안에 올지….
하지만 엄마는 큰댁에 가셔서 못 오시고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어린이 프로가 있죠. 저도 혼자서도 잘하는 제가 됐으면 합니다.
여러분, 정말 뜻 깊은 추석입니다. 여러분도 기억에 남는 추석이 됐으면 합니다.
해피, 추석!!!!!
지금 43,800원이 통장에 있다면 어떡하시겠어요? 공짜로 드리는 거지만 대신 오늘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통장에서 지워진답니다.
모두 금방 찾아 열심히 쓰겠지요. 공짠데….
이건 시간의 비유랍니다. 하루가 43,800초래요. 오늘이 지나면 없어지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통장에 있는 많은 것들이 영원한 줄 아는 바보들이지요.
저도 그래요. 특히나 저는 하루하루가 중요한데도, 바보같이 하루하루를 그냥 무의미하게 지워갑니다.
여러분은 그러지 마세요. 당장 찾아서 좋은 일에 쓰세요. 저도 노력할게요.
오늘은 힘들지 않은 하루가 되길….
여러분도 행복한 시작이 되시길….
빨래하기 2000년 9월 15일
오늘은 남편이 회사에서 일찍 올 수 있다기에 엄마에게 쉬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빨래가 쌓여 있는 것이었어요.
아이와 남편이 시골에서 가져온 것과 제 것 등 삶을 빨래도 아주 많았습니다.
고민을 좀 하다가 제가 하기로 했지요. 물론 세탁기가 하는 것이었지만요.
하지만 삶은 빨래는 중간에 삶아주고 옮기고 하는 과정이 있어서 힘들었습니다. 큰 들통에 빨래를 삶고 그것을 다시 헹구려고 세탁기로 들고 가다가 정말 고꾸라질 뻔했습니다. 왜 그렇게 무겁던지요.
엄마는 이렇게 무거운 것을 매일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과 제가 왜 이리 힘이 없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빨래가 다 된 뒤 널고 나니 정말 시원하고 뿌듯했습니다. 원래 제가 빨래하기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남편이 화를 낼 정도였거든요. 또 빨아! 하고요.
저는 내가 하나 세탁기가 하지 하곤 했는데 이젠 세탁기에게 맡기는 것도 힘들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엄마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을 드렸다는 것이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픈 것도 덜한 듯했습니다.
저도 자꾸 뭔가를 해야겠어요. 그래야 살아 있다는 확신을 한번씩 하게 될 테니까요.
비가 많이 옵니다. 저야 원래 비 타입이어서 괜찮지만, 정말 지방은 걱정입니다. 이젠 그만 왔으면 합니다.
오늘의 기도에는 비피해에 대한 것도 첨가해야 할까 봐요.
쨍쨍한 가을 하늘을 기대하며….
형님의 이사 2000년 9월 18일
형님이 드디어 우리 동네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차로는 10분쯤 걸리는 곳이에요.
서울생활을 접고 시골생활로 들어오신 거지요.
여러 가지 불편한 점도 많지만 이곳을 선택한 데는 저를 위한 배려도 많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가까우면 얼굴도 더 자주 볼 수 있을 테니까요.
형님이 이사한 곳은 저의 아파트보다도 더 쏙 들어가 있어서 산과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하고도 공기 차이가 나는 듯했어요.
어제 잠깐 들러 점심을 같이 했습니다. 형님은 앞집 아주머니 얘기랑 이사할 때 있었던 재밌는 에피소드를 여러 가지 들려주었습니다.
역시 우리 형님은 울트라맨이라니까요. 수다의 왕자….
아직 정리할 것이 많은 것 같아서 일찍 나왔습니다. 형님이 자꾸만 보고 싶네요.
잠깐의 외출에도 힘이 들어서 걱정입니다. 머리로는 자꾸 나가고 싶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몸이 따라주질 않는군요.
무리를 했다가는 금방 몸이 반응을 합니다.
밥을 먹고 집 안을 왔다갔다하는 10분간의 운동에도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니까 자꾸 움직여야겠지요.
누가 그러더군요. 죽는다는 것은 침대에 누워만 있는 것이라고요.
여러분도 잊지 말고 운동하세요. 건강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랍니다.
아이 마중 나가기 2000년 9월 20일
아이가 유치원에 가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죠. 잘 다니고 있답니다. 며칠 안 가겠다고 떼를 쓰더니만 이젠 아침마다 잘 갑니다.
제가 힘들어서 아이는 종일반에 맡겼습니다. 거의 6시까지 유치원에서 논답니다. 가슴이 아프지만 제가 아이를 볼 수가 없으니….
작은 규모의 놀이방 때와는 통신문의 수준도 그렇고 교과 학습도 그렇고 꽤 체계적인 듯싶습니다.
이 녀석 아직도 자기반이 수업할 때 딴 반 가서 노는 모양입니다. 놀이방에서 자기가 왕초였으니 하고 싶은 대로 했던 버릇이 잘 없어지지 않나봐요.
6시쯤이면 제가 저녁 관장을 하는 시간이어서 할머니가 대신 마중을 갈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땐 이 녀석 아파트 앞 슈퍼에 들러서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하나씩 꼭 사옵니다. 저녁 먹을 시간인데도 막무가내랍니다. 할머니가 못 이기고 사주시는 거죠.
하지만, 제가 마중을 나갈 때는 얘기가 다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히 손잡고 집으로 곧장 향합니다.
이 어린 녀석도 무서운 사람이 있는 건지, 아니면 엄마가 나와서 신이 나서 잊어버린 건지….
이젠 말도 많이 늘어서 질문에 대답도 꽤 합니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사람들에게 갑자기 질문하고 말 붙이고 해서 놀라고 당황스러울 지경입니다.
왜 이리 자기 새끼는 이쁜 건지 밖에 나가보면 더 이쁘게 빛이 납니다.
내일은 유치원에서 견학을 가는 날입니다. 예쁜 원복을 입고 가야 할 텐데 개량한복이라 녀석이 거추장스러워합니다.
또 한 번 싸워야죠.
사는 이유, 아이가 아닌가 합니다.
아, 오늘은 답장을 쓰느라 좀 지쳤습니다. 하루하고 반일 안 왔는데 이렇게 많은 글들이….
정말 감사합니다.
며칠 동안 고통이 좀 심했습니다. 기운도 없고요.
어제는 출근하는 남편과 아이에게 보이기 싫어서 방에 꼭 숨어서 울다가 못 참고는 남편에게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곤 안았습니다. 얼마 만에 안아보는지….
남편의 가슴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안아본 등은 너무나 작고 초라해져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아내의 품에서 아침이니 저녁이니 챙겨먹지도 못 하고 또 스트레스는 얼마나 많았을까요. 남편의 슬픔이 위로로 두들겨주는 ‘괜찮니’ 소리보다도 더 크게 밀려와서 더 이상 안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튕겨져 나왔다고 할까요.
이렇게 주변 사람들이 아파하고 있는데 내가 너무 어리광 부린 것은 아닌가 반성합니다. 죽을 날 받아놓은 것처럼 우울해 하지는 않았나, 짜증이나 내진 않았나….
모두 제가 한 짓들이었습니다.
어서 빨리 제가 차도를 보여야 주위사람들도 신이 날 텐데, 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 같은 병은 언제가 끝인지 알 수가 없으니….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도 돌아서면 또 내 중심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아픈데 왜 와보지 않는 거야, 내가 아픈데 왜 위로하지 않는 거지….
아직도, 아직도 먼 인간인가 봅니다, 저는.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를 모르지만 또 한 번 다짐해 봅니다. 가족에게 잘해주기, 짜증내지 않기, 행복한 얼굴로 맞아주기 등등.
여러분도 기도해 주세요. 이 약한 영혼이 또 어디로 빠져 나갈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많은 분들이 칼럼에 가입하신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지지 않게 저도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2000년 9월 27일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믿기지 않습니다.
칼럼에 등록한 독자가 400명을 넘었고 독자의 한마디만 하더라도 매일 100마디씩은 충분히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다음에선 추천칼럼으로 뽑혔답니다.
겁이 덜컥 났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새롭게 올라오는 글마다 저를 걱정하고 응원하고, 기도해 주신다는 글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의 성원과 기도라면 그 것만으로도 병이 다 나을 듯싶었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암환자가 많은지요. 부모나 형제 자매가 암으로 고통받거나 이미 돌아가신 분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완치되었다는 기쁜 소식도 놀랍게도 많았습니다.
암은 완치될 수 없다고 속으로 생각했던 저는 깜짝 놀라 부끄러웠습니다.
답글을 쓰다가 지쳐서 이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꼭 제가 한마디 드리고 싶거나 드려야 할 글에만 짧은 답글을 쓰기로 제 나름대로 규칙을 정했습니다. 그래도 많은 수더군요. 이렇게라도 제어하지 않으면 정말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성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시죠? 답글이 없어도 제가 꼭 읽어 보았고, 또 고마워한다는 것을.
저녁마다 기도를 합니다. 제 칼럼에서 힘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어떨 땐 저를 위한 기도는 뒷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아, 바로 이게 진짜 기도로구나 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뭐든지 저를 놀랍게 하는 많은 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다시 한 번 용기를 얻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이 감사와 기도하는 마음이 여러분 한분 한분께 닿기를 바라며….
두꺼비 얼굴로 2000년 9월 29일
오늘은 문득 예전에 은행에서 봤던 한 여자가 생각났습니다.
그 여자는 멋진 옷을 입고 있었고 뭔가가 안 되는지 자꾸 짜증을 내어 주위사람들이 그녀를 한 번씩 쳐다보게끔 만들었습니다.
무심코 돌아본 그녀의 얼굴은 두꺼비 같았습니다. 얼굴에 뭐가 잔뜩 나서 두꺼비 피부 같은데다가 그걸 감추려고 화장을 잔뜩해서 독이 오른 두꺼비 같았습니다.
왜 오늘 그녀가 생각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형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칠고 못되고 짜증스런 ‘나’를 멋진 옷으로 치장하고 감출 수 없는 허영과 욕심을 짙은 화장으로 감춘 모습 말입니다.
그녀가 만일 웃는 모습이었으면 그렇게 흉측하게 보이진 않았을 텐데요. 오히려 그녀의 높고 앙칼진 목소리로 사람들은 그녀를 더 쳐다보고 놀랐으니까요.
내 모습은 그렇지 않은가요. 겉으론 풍성하면서 속에서는 얄팍한 속셈을 가지고 있진 않은가요.
오늘도 그녀는 어느 곳엔가 서 있겠지요. 그녀가 웃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사랑하면서 더 이상 감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해 봅니다.
요 며칠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누울 수가 없이 허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이 침대를 베개삼아 바닥에 앉아서 잤더니 그 수위가 다했는지 온몸이 다 아픕니다.
아침이면 통증까지 찾아옵니다. 하필이면 아이와 아빠가 유치원과 회사 갈 채비를 하는 시간이라서 저는 꼼짝없이 방에서 혼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그날도 아침에 너무나 아파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고쳐주소서, 이 통증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제 곁에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손으로 저를 만져주소서 하고 말입니다.
마음이 괴롭고 몸도 괴로워서인지 눈물도 나고 격해졌습니다. 그런 기도를 한참하다가 약을 먹을 시간이 되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밖에서는 손수 아침을 챙겨 먹은 부자가 아침 세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 않던 일이라 짜증도 날 터인데 아이와 아빠는 웃으며 세수하고 있었습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까르르대면서….
난 쫓기듯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창피했습니다.
하나님께 다시 기도했습니다. 아름다운 아이와 남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이렇게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는 감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가진 것에 대한 감사없이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요 며칠 동안은 특히 더 힘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별 수단을 다 써도 역시 통증이 올 때는 다 집어치우고는 바보가 되어버립니다. 후회할 말들과 외침들,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많은 님들께서 지켜봐 주시는데 정말 창피합니다. 님들의 아름다운 응원때문에라도 오늘은 다시 한 번 털고 일어나 용기있게 참아봐야겠습니다.
날씨가 좋습니다. 여행을 가고 싶군요. 님들, 건강하세요.
힘든 날들 2000년 10월 5일
참, 많이 아팠습니다. 과거형을 쓰는 이유는 제발 이 통증의 고통이 이 글에서나마 과거형이 돼주길 비는 마음에서입니다.
먹던 약이 문제가 있어 다음 약까지의 텀이 길어져 순전히 진통제로만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황폐한 일인가를 다시 느꼈습니다. 사람은 왜 그리 빨리 잊는지요. 얼마 전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
컴퓨터를 켜볼 엄두도 못낼 만큼 시간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이 먹고, 아프고, 울고, 기도하고, 이것이 반복되는 단순한 생활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약을 먹을 때보다 진통제의 단위를 두배로 올렸는데도 별 효과가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자꾸만 진통제를 늘려가는 것도 힘든일이고….
많은 분이 걱정해 주셨을 것을 압니다. 또 칼럼을 기다리는 분도 많았겠지요.
오늘은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고통 앞에서 철저히 혼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참 외롭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채워줄 온기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신앙을 갖지 않은 분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렇게 힘들게라도 하루를 지탱하는 힘이 온전히 신앙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다시 한번 이야기하세요. 얘기하지 않으면 모른답니다. 그리고 서로 체온을 나누세요. 이상하게 아프면서 춥습니까. 사람이 그리워서겠지요. 특히 힘든 사람이 있다면 꼭 안아주세요.
제가 여러분에게 안기고 싶어하는 것처럼 안아주세요. 그리고 사랑한다고, 잊지않는다고 말해주세요.
매일 천국에서의 유혹에서 이기기 위해 힘쓰고 있는 여러분의 용감한 투사가….
기사가 된다는 것 2000년 10월 9일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의 글에 관해 ‘중앙일보’에 작은 기사가 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메일도 폭주했지요. 취재요청도 대단했습니다. 갑자기 제가 스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그 취재에 다 응해 단 한 사람에게라도 힘을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제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기사를 보고는 실망했습니다. 언제 내가 이런 글을 썼나 싶었어요. 그 기사에는 막 숨이 넘어가 죽어가는 어떤 여인이 주변을 정리하는 글이었는데, 제 글이 그랬나요.
전 제 글이 절망에서도 뭔가를 보고 희망을 찾는 글이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즘같이 희망이 없는 듯 아프기만 할 때는 일부러 아무런 내용도 쓰지 않았는데…
하여튼 매체의 힘은 엄청났습니다. 메일체크를 하지 않으면 하루에도 몇백 건씩 올라와서 지우기 바빴지요.
요즘은, 여전히 힘든 나날입니다. 하지만 단 하루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아프고, 다시 희망을 가지고, 다시 아프고 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아마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들의 많은 성원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저를 다른 생각 못하게 꼭 붙들어 놓는 듯하다니까요.
하룻밤이라도 편히 잠들기를 소원하는 제가 있는 한 여러분은 아직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 잊지 마세요.
언제나 남을 돌아보는 사랑하는 님들이 되길 기원하며…
좋은 추억 붙들기 2000년 10월 14일
아프면서도 기도하면서 엉엉 소리치며 울면서도 가끔 이상하게 머리속 한 쪽에서는 어떤 장소가 떠오르는 겁니다. 여러분도 이런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데, 대부분이 저와 관련있었던 과거의 거리들입니다. 대학의 지하도서실 출입구, 학교앞에 짱게집, 미국에서 살던 베이글이 맛있는 가게가 있던 동네….
코끝에 그때의 냄새까지 풀풀 나면서 말입니다.
저는 추억에 젖어버리고 말지요.
아프다가 무슨 짓인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주신 행복 중 하나라고 자부합니다.
옛 추억을 붙들다보면 거의 100%웃음이 빙그레 나오지 울음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웃을 일이 없는 저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빙그레 웃습니다. 여러분도 오늘이 힘들고 따분하시면 과거의 어떤 고을 떠올려 보세요.
내친 김에 그 곳에 가보거나 그 곳을 함께 찾았던 친구에게 연락해보는 것도 좋겠죠.
저는 오늘도 또 이렇게 살아갑니다.
옛추억을 붙잡으면서 그리고 미래에 가볼 것을 기약하면서….
여러분도 꼭 따라하세요!!
아팠습니다. 먹던 약이 떨어져 기다리는 시기인데다가 파업중이신 고귀한 의사선생님들 때문에 진통제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굴러다니며 신음하는 저에게 보다못한 엄마가 울며 방으로 들어와 기도하셨습니다. 글쎄, 기도일까요, 절규일까요. 저도 아이를 가지고 있으므로 새끼가 아파하는 것이 얼마나 가슴 후려내는 일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어, 같이 울었습니다.
서로에게 하고 싶지만 무서워 차마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했습니다. 엄마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했고, 나를 태어나게 한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나는 내 엄마에게 지금 죽어도 행복하다는 것을,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슬픈 시간이었지만, 감정을 샤워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물론 마무리는 희망의 말들로 채워졌지요.
엄마에게도 말했지만, 우리는 행복합니다. 암을 앓고 있는 나보다 건강한 엄마가 교통사고로 먼저 갈 수도 있는 세상이라고요.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벌어놓고,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할 수도 있는 성숙도 얻었습니다.
오늘, 괴로운 일이 있거나 마음이 아프면 한마디 유언을 해보세요.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내 옆에 있는 그 사람의 가치도 달라집니다. 지겨운 남편이 아니라 지금까지 못해주었던 것만 생각나는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친구를 만났습니다 2000년 8월 9일
오늘 가장 친한 친구 녀석이 오랜만에 집에 왔습니다. 저로서는 큰 행사였어요. 약기운이 떨어지는 때를 피해 친구와 좋은 시간을 가지고 싶었거든요. 힘든 모습 보이기도 싫었고요.
그런데 이 녀석이 제 시간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 식사시간까지 놓친 저는 너무 화가 났습니다. 결국 친구도 남이구나 하면서 퉁퉁 부어 있었죠.
그렇지만 몇 마디 퉁퉁대고는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일부러 그 녀석 주위를 중심으로 얘기하고 식사도 하고, 차도 마셨습니다.
하지만 할 건 해야죠. 맘속 한구석에서는 그럼 안돼 하면서도 한쪽에서는 이렇게 만나는 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꼬드김이 자꾸 저를 닦달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 녀석도 여전히 힘든 사회생활을 하는 평범한 일상에 지쳐 있었구요.
돌아가는 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난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 너무 아파, 아파서 죽고 싶단다. 그 말을 들은 그 녀석의 눈속에 가득 괸 눈물이 제 영혼까지 씻어주는 듯했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어쩜 우린 너무 많은 말을 하며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친구는 또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럼요, 또 만날 겁니다.
그렇게 오늘 친구를 만났습니다.
진통제가 늘어갑니다 2000년 8월 11일
의사님들은 파업이다 뭐다 하고 있지만 다행히 친지의 도움으로 이전보다 단위가 높은 진통제를 받고 지금 먹었습니다.
매번 있는 일이지만 약이 새로 쥐어질 때마다 양도 엄청 많아지고 걱정과 한숨도 많아집니다.
이번에도 일주일분이라지만 정말 쇼핑백 하나 가득 약을 받아들고는 정말 놀랐습니다. 마약성 진통제, 그냥 진통제, 이것들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을 위한 소화제, 변비약 등등.
문제는 먹어도 통증은 잡히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공항문을 가지고 있고, 또 해독효과도 있다고 해서(효과가 있다고 체험합니다) 관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들을 먹고 난 뒤부터 장이 움직이지 않아 이젠 관장조차 되질 않습니다.
너무 황당하고 가슴이 아파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니 또 한 번 나의 간사함에 놀랐습니다. 아플 때마다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자꾸만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고 담담해졌다고 스스로 평가했으면서 그깟 변 좀 안 나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걱정하다니.
그냥 많은 일 중의 한 가지일 뿐인데, 왜 안 되지, 내일은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병에도 좋을 텐데….
하지만 어렵습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아빠가 오셨습니다. 입맛 없는 저를 위해 두 시간도 더 걸리는 서울 시내에 가서 초밥을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사실 저는 아빠를 사랑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만 넘치지 아빤 소위 능력이 없는, 아니 너무 순진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사에 똑 부러지는 남편을 만났는지도 모릅니다.
병에 걸리고 나서도 아빠는 제 수술날 오지도 않으셨습니다. 무서워서요. 우리 아빤 그런 분입니다. 제가 힘들어하는 걸 보기 괴로워 절 찾지도 못하는 분입니다. 저는 그런 아빠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좀더 강한 모습으로 절 대해주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통증 때문에 울고불고 하다가 갑자기 아빠를 부르게 됐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이제까지 방자하게 굴었던 모습들이 거짓말처럼 모두 기억 났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아빠가 저를 사랑하시는지, 아빠의 사랑방식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한순간에 이해됐습니다.
이것도 통증의 힘일까요. 하여튼 속죄와 사죄의 눈물과 함께 사랑하는 아빠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오시라고 해도 피하기만 하던 아빠가 어제 전화로 초밥을 사가지고 오늘 오시겠다는 겁니다. 신기하지요. 부녀의 텔레파시일까요.
오늘도 아빠와 저는 사랑한다는 말도, 얼마나 힘드냐는 말도, 한번의 포옹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눈빛에서 이제까지의 불신과 원망이 다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병에 걸린다는 것은 역시, 어쩔 수 없이, 도움되는 일도 많으니 정말 아이러니 하지요?
오늘은 새로 가져온 진통제가 궁합이 맞는지(하긴 그 양을 보면 어찌 그렇지 않으리요!) 구르기를 안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거든요.
오늘은 우리 쌍둥이 조카들의 첫돌입니다. 우리 형님의 귀여운 새끼들이지요(여기서 우리 형님은 남편 형의 아내를 말합니다).
저에겐 이 녀석들은 조카 이상입니다. 자식 같아요. 제가 암에 걸렸을 때, 그 아이들은 잉태되고 태어났거든요.
우리 형님은 제 수호천사입니다.
제 친구들(시집간)은 제가 우리 형님 얘기만 하면 싫어해요.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 동서지간은 험악하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거의 친자매 같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전화하고요, 제가 구르기만 안 하면 그 전화는 보통 1시간입니다. 그것도 쌍둥이의 공격 때문에 끊어지지요.
그리고 엄마한테도 못하는 마음속 얘기까지 한답니다. 남편은 물론이고요.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형님은 제가 시집간 지 1년 전에 먼저 자리를 잡으셨는데, 이분은 천상 맏며느리예요. 전 그 많은 친척들 얼굴도 기억 못하는데 손 잡고 아유 오셨어요를 연발하지 않나, 서로 시집온 지 얼마 안 된 새색시인데 형님은 이미 10년지기 며느리가 되어 있었지요.
전 물론 부담스러웠구요. 그러다 6개월쯤 됐을 때 7개월이나 된 아이를 뱃속에서 잃는 슬픈 일을 겪었습니다. 전 그때 형님의 눈물을 처음 보았지만 절대 같이 울진 않았습니다. 형님은 그런 저를 이해해주었고, 절대 희망과 용기, 낙관을 버리지 않은 형님은 서서히 회복됐습니다.
우린 서로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 친해졌습니다. 시어머니한테 속상할 땐 곧장 형님에게 전화해서 공동의 적을 공격하고 위로하다가 결국 둘 중 하나는 그래도 우리 어머니 같은 시어머닌 없다며 우리가 무조건 꼬랑지 내릴 것을 다짐하고, 남편에 대한 실망과 원망도 마찬가지로 날려버리지요.
너무 아파서 구르기 하던 날 형님에게 전화했습니다. 또 몇 가지 부탁이 제 목소리를 떨게 했습니다. 형님은 그런 저와 절대 함께 울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동서가 어떻게 될 리는 절대 없어” 같은 답답하기만 한 위로도 하지 않습니다. 형님은 그저 다 알고 있으니 걱정 마라,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말합니다.
형님은 내가 병을 알고 제일 먼저 알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때도 형님은 참고 울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제 앞에서 어두운 얼굴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살든 죽든 형님은 제 맘을 가장 잘 알고 내 뜻대로 해줄 제 수호천사입니다.
형님은 고맙다는 제 말에 그러지요. 받은 만큼도 안 된다고….
어렵게 얻었지만 정말 잘 크고 있는 조카녀석들, 너무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엄마는 더 사랑하구요.
병은 사람을 참 사랑하게 만들기도 한답니다.
칼럼을 쓰고 나서 달라진 것들 2000년 8월 13일
사실 칼럼을 시작하던 날은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다른 쪽으로 신경을 돌리려 인터넷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다음 (DAUM)을 클릭했고 갑자기 칼럼이라는 걸 써보자는 생각에 부랴부랴 만들어, 글을 올렸던 기억입니다.
그런데 벌써 11번째가 됐군요. 와… 100번째까지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처음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해서 속이나 풀어보자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간단히 생각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독자의 소리는 한 건도 없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한두 건씩 올라오더니 이젠 대여섯 건으로 늘어났습니다. 답장을 쓰다가 으악! 이젠 아무렇게나 쓰면 안 되겠는 걸 하고는 꼬랑지가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멋진 글을 써보려고 몇분(?)씩이나 근사한 주제를 생각해보지만 역시 저는 첫 문장을 쓰고 거기에 따라 주욱 내려가는 게 제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초고도 없고, 수정도 안 하거든요. 어쩔 때는 아찔하기도 하지요.
하여튼 일일이 답장을 보내다가 내가 달라졌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처음엔 경직되고 형식적이었던 어투가 좀 다정(?)해졌고, 답장을 보내는 마음도 부담이 없어졌어요.
무엇보다 바뀐 것은 제가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나를 보고 놀라고 슬퍼할 것이 두려워, 아니 내가 그런 상대방의 모습을 볼 것이 두려워 만나기를 꺼리던 사람들을 보고 싶었고, 또 만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또 제 병을 차츰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어떨 땐 암이라는 것이 병이 아닌 무슨 장애같이, 평생을 가져왔고, 가지고 갈 단순한 핸디캡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쩜 글쓰기 좋아하는 제가 물 만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뭔가 써서 남기고 싶다는 욕구가 해결되어서 정말 시원하고 뿌듯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랑과 격려, 그리고 걱정, 놀람, 이런 것들이 저를 정말 많이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100번째 글을 올릴 때까지 그때까지 열심히 투병할게요. 100번째엔 우리 만나서 백일떡도 같이 나눠먹을 수 있으면 좋겠군요. 사랑합니다.
맛있게 밥먹기 2000년 8월 14일
힘든 하루입니다. 다른 것보다도 더워서 머리에서 땀이 뚝뚝 떨어집니다. 선뜻할 정도라니까요. 엄마가 그러시는데 기운이 없고 힘들어서 그렇게 땀이 나는 거랍니다.
여러분도 힘드셨죠. 이럴 땐 자꾸 밖에서 일하는 분들이 생각나서 마음이 답답합니다. 누군가는 밖에서 일해야 하는데….
오늘 정말 맛있는 밥을 먹었습니다. 엄마가 매일 오시는데 오늘은 짐이 많아서 아빠도 함께 오셨습니다. 아빠에게 뭔가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어디선가 들어놨던 음식점 생각을 해냈습니다.
자동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곳이라서 걱정이 많았지만, 나의 영웅 진통제를 챙기고 내가 먹고 싶다고 박박 우겨서 나갔습니다.
저도 처음 가보는 곳이라서 걱정도 되고 뭐니뭐니해도 통증이 갑자기 올까 봐 정말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걱정을 완전히 씻어줄 만큼 저렴하고 맛있는 집이었습니다. 무슨무슨 정식이었는데, 가짓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약간 올드패션적인 맛이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당연히 옛날에 먹었던 맛있는 음식얘기까지 하면서 너무나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요, 엄마 아빠가 아무래도 그 금액이 아닌 것 같다, 더 비쌀 것 같다며 걱정까지 하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찻속에서 통증이 미미하게 시작됐지만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습니다. 맛있는 음식보다도 맛있는 얘기와 오랜만에 맛보는 가족과 여유로운 식탁이 저를 너무나 행복하게 했습니다.
지나고 보면 그런 식탁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느끼질 못했죠. 그냥 잘 먹었다는 정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웃으며 식사하는 것이 이렇게 즐겁고 가슴 뿌듯한 일인 줄 예전엔 정말 몰랐습니다.
병으로 알게 된 또 하나의 깨달음일까요? 요놈의 병, 알게 해주는 것도 많다니까….
주부라면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시고요, 남편이라면 멋진 외식을 준비해보세요.
우리 삶이 이렇게 즐거운 건지 놀라울 정도로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아이가 시골에 갔습니다. 시아버님이 정년퇴임하시고 고향에 집 한 채 손수 지으셨는데 그곳에 내려가시는 데에 묻어갔습니다.
제가 아이를 줄곧 데리고 있었는데 이번주에는 매일 오던 친정어머님 집 이사가 있어서 영 자신이 없어 몸도 아픈 아이를 보냈습니다.
며칠은 잘 보냈지만 이틀만 지나면 전화가 자주 옵니다. “엄마야? 나야. 응.” 별로 할 얘기도 없으면서 자꾸 전화를 합니다.
이제 다섯 살인 제 아이는 좀 특이합니다. 다섯 살인데도 우리말을 잘 못하면서 다섯 살짜리용 스티커 붙이기 공부 같은 건 단어니 뭐니 다 알고 붙입니다. 게다가 영어도 곧잘 합니다. 쉬운 말은 안 하고 버버거리면서 자주 어려운 말을 해서 저희를 놀라게 합니다.
자기 이름도 잘 쓰고 아빠, 엄마 이름까지 써댑니다.
아이가 3세 때부터 제가 투병하기 시작했으니 녀석도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제게는 보채지도 않고 힘들게 하지도 않는 편입니다. 특히 요즘 들어 통증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을 볼 땐 정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제가 심하게 아플 때마다 어디론가 사라져 안 보이는 데서 놉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랑 다시 놀지요.
그래서 저는 아이가 모르나 보다 아니면 부딪치기 싫은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이 녀석이 통증이 한창인 제 방으로 와서는 “엄마, 아파? 괜찮아, 괜찮아” 하고 등을 두드려주고는 나가는 겁니다. 갑자기 아픈 것도 잊고 놀라서 눈만 껌벅거렸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에 아이를 보낼 때도 걱정했습니다. 할아버지댁에 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요. 엄마와 떨어지니까….
그런데 오늘은 자기가 솔선해서 짐도 추리고 기분 좋게 떠났습니다. 얼마나 기특하던지. 차에 타서는 “엄마 아파?” 하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아프지 말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통증으로 몸부림칠 때도 살아야 한다는 가장 큰 이유를 주는 것은 역시 자식입니다. 하루라도 안 보면 걱정되는 것이 자식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아픈 저를 보는 부모님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한마디라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파서 배운 것이 또 있었네요.
쇼핑도 진통제가 되는 군요 2000년 8월 15일
오늘은 남편의 대학시절 친구 가족들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결혼하기도 전에 서로 만나서 이젠 벌써 10년 지기가 된 절친한 사이입니다. 처음에는 남자 넷에 그들의 여자친구 둘 이렇게 여섯으로 시작한 모임이 이젠 다들 결혼하고 거기다가 하나둘씩 아이까지 낳아서 인원이 참 많아진 모임입니다.
왠지 선물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만나기도 힘들고 어려운데 뭔가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남편과 함께 약속시간 1시간 전에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했습니다. 물론 진통제를 먹고 준비를 했죠.
갈 때는 걱정스러웠습니다. 백화점에서 통증으로 꼭 쓰러질 것처럼 점점 아파왔습니다. 돌아올까도 생각했지만 남편 몰래 꾹 참고 약을 한 번 더 먹기로 했습니다.
도착해서 각 집안의 아이들의 옷과 태어날 아기의 장난감을 사면서 저는 아픈 것도 잊었습니다. 수다스럽게 이리저리 다니면서 이옷 저옷 고르고 있는 제가 정말 신기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포장해서 잘 전해주고는 약발이 거기까지인지 다시 괴로워져 일찍 자리를 떴습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을 위해, 받는 사람이 행복해할 모습을 상상하면서 물건을 사는 것은 제게 진통제 이상의 힘을 발휘했습니다. 내 아이를 위해서는 사지 못하던 비싼 옷도 척척 사면서도 아까운 줄 몰랐습니다.
주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지, 받을 것을 생각지 않고 주는 것이 이렇게 뿌듯한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오늘의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오늘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준비해 보세요. 대신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예요. 행복이 갑절로 당신에게 돌아올 거예요.
못난이 반지 2000년 8월 16일
보통 다른 사람의 장신구를 보고 한마디 할 땐 “정말 멋지군요” “어디서 구했어요” 등의 감탄사가 나오는 것이 상례지만, 내 넷째손가락의 반지엔 모두 다 “이거 진짜 자기 거예요?” 하고 묻습니다. 심지어 친한 친구들은 그 반지를 못난이 반지라고 불렀지요.
하지만 전 남편으로 부터 그 반지를 받고 나서 결혼해서 잠시 결혼반지를 끼었을 때를 제외하곤 줄곧 끼고 있습니다.
남편은 만난 지 1년쯤 되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즈음, 난 원래 둔감한 그에게 넌지시 반지를 내놓으라는 경고성 발언을 했습니다. 당시 학생이었던 우리는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등교했는데, 하루는 주머니에서 뭘 꺼내더니 주먹 안에 감추고는 눈을 감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모르는 척 눈을 감았습니다. 잠시 후 눈을 떠보니 잼병 뚜껑만한 조그만 양철 상자였습니다. 기가 막혀 아무 소리도 못하는 제게 그는 “정말 맛있더라. 사탕이야” 하며 함박만하게 웃었죠. 전 저도 모르게 외쳤습니다. “이 바보야 반진 줄 알았잖아…”
며칠 뒤 그는 촌스런 핑크색 플라스틱 반지곽을 꺼내면서 마음에 안 드는 디자인이라고 투덜댔습니다. 하지만 난 “뭐 괜찮은데” 하며 침착한 척했지만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그 반지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14K의 촌스런 그 반지. 연애기간 5년 동안 보관했던 그 핑크색 반지곽. 싸울 때마다 그 반지곽에 넣어 헤어질 때 줘야지 했던, 추억의 물건입니다.
아프면서 전 이 반지만 끼고 있습니다. 역시 지금도 남편이 미울 땐 휙 빼서 어딘가에(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곳) 두고는 화해하면 찾아 끼는 우리 부부 사이의 끈과 같은 반지입니다.
훗날 아들 녀석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건네주려고 합니다. 이 못난이 반지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놓는 마력이 있단다 하면서….
약이 끊기고 다음 약을 받을 때까지 공백기간이어서인지 몸상태가 무척 안 좋습니다. 엉덩이도 부어서 의자에 앉지 못할 지경입니다.
진통제도 제 운을 다했는지 점점 그 효과가 떨어져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짜증만 나고 눈물이 흐르는군요.
집에서 살살 걷는 것 이외에는 운동이 없어서 어제는 아파트 층계를 걸어 내려갔다 올라왔다를 해봤습니다. 난간을 잡고 하는데도 5층 정도 하고 나니 숨이 차고 몸도 아파 그냥 와버렸습니다.
얼마 전까지 15층 거리도 끄떡없이 다녔는데….
몸이 쇠약해지는 이런 증거들이 저를 너무나 슬프게 합니다.
게다가 오늘은 엄마의 이삿날이기 때문에 혼자서 해내야 합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자꾸 걱정이 됩니다. 나 혼자 있을 때 어떻게 되면 어쩌지 하고 말입니다.
아, 이렇게 하소연하고 났더니 약간 기분이 풀리는 듯도 합니다. 말이라는 건 정말 멋진 수단입니다.
칼럼을 쓰는 것도 걱정입니다. 이제 독자님도 꽤 늘어서 제 글을 기다리는 것 같은데 하루에 한 건씩 쓰기는 벅차다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이해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든 누구든지 제게 한 번은 기도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다시 컴퓨터 앞으로 돌아올 것도 믿습니다.
옛날 일기숙제 하다가 한 페이지도 못 채우면 늘 시를 적어넣곤 했는데, 오늘도 그래야겠네요.
더운 하루 잘 보내시고, 건강 조심하세요.
고름 짜기
어릴 적 고름이 든 종기를 나는 아파서 끙끙대며 만지기만 하고 짜지를 못했다.
고름은 피가 썩은 것이고 고름은 결코 살이 안 된다고 어머니는 감히 선언하셨다.
손만 살짝 닿아도 엄살을 떠는 나에게 어머니는 악창까지 나와야 낫는다고 발끈 눌러버렸다.
전신의 충격, 눈알이 아리면서 마침내 종기는 터지고 피고름과 함께 뿌리가 뽑혔다.
썩은 고름이 빠진 자리에 새살이 차고 다시 피가 돌고 마침내 상처는 깨끗이 나았다.
종기가 무서워 슬슬 만지며 고름이 아까워 버리지 못하는 겁쟁이
살이 썩고 피가 썩고 마침내 온몸이 썩을 때까지 우리는 아프다고 바라만 볼 것인가?
슬슬 어루만지기나 하며 거죽에 옥도정기나 바르며
진정으로 걱정하는 어머니의 손길을 거부할 것인가?
언제까지나 고름을 지니고 이 악취, 이 아픔을 견딜 것인가?
고름은 피가 되지 않는다.
고름은 살이 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자꾸만 외치고 있구나!
눈물이 흐릅니다 2000년 8월 18일
어제 속상한 얘기를 올려놓고는 영 마음이 찜찜했는데, 오늘 아침 님들의 글을 보니 더 마음이 꽉 막혀왔습니다.
제가 무엇인데 이렇게 많은 사랑을 주시는지요. 힘들다는 투정 한마디에 수많은 글들을 올려주신 님들께 너무나 감사합니다.
아침에 소식들을 들으며 자꾸 눈물이 흘렀습니다.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짙은 애정의 편지가 날아오다니, 그리고 그 내용들은 한결같이 저의 건강과 투병의 건투를 비는 글들이었습니다.어제는 엄마 없이 지냈습니다. 엄마가 없어서 불편했다기보다는 엄마의 부재가 저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잘 지냈습니다. 새로 약이 도착해서 그걸 먹었는데 약이 좀 셌는지 먹고는 금방 쓰러져 자는 것의 연속이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의 새벽부터 깨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관장을 하고 성경을 좀 읽고 컴퓨터를 켜는 게 제 일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글들에 감동하고 놀라고 빙그레 웃고, 울고.
이젠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다해서 제 남편보다도 님들께서 제 상태를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글쎄….
어렵고 힘든 세상이지만 나 아닌 남들이 내게 보내주는 애정이 이렇게 많으니 제가 어찌 삶을 쉽게 포기할 수 있겠어요. 가끔씩은 죽여달라고 소리지르지만 그건 다 거짓말인 것을 나도 알고 하나님도 아십니다. 아무리 아파도 이겨내야 하는 것이 제 숙명이듯이 여러분도 지금 가지고 있는 문제거리들을 운명으로 생각하시고 받아들이고 해결하세요.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이면 기쁨이 오리니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요. 언젠가는 울음의 저녁이 가고 기쁨의 아침이 오겠지요. 그 기쁨의 아침이 오늘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힘든 저를 일으켜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주셔서 저도 너무나 사랑합니다.
매일 한 사람씩 용서하세요 2000년 8월 19일
제가 암에 걸리고 나서 읽은 많은 책의 내용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치료되고 싶으면 매일 한 사람씩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건강으로 가는 잃어버린 열쇠 같은 것이어서, 우리의 사고와 인식을 바꿀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술이며, 두려움에서의 해로운 영향을 사랑으로 변화시켜주기도 합니다. 결국 남을 미워한다는 것은 내 안에 많은 분노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고, 그 분노에서 해방되는 길이 용서라는 것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저는 여기에 한가지 덧붙이고 싶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결국 용서할 거라면 왜 좀더 일찍 그 마음을 갖지 못할까요?
우리에게는 용서받고 용서해줘야 할 일이 많습니다. 항상 용서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두세요. 과거의 상처나 실수에 대한 기억을 지금 이 순간에 끌어다 넣지 마세요. 가족, 인간관계, 이해, 그리고 동정심은 과거에 매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답니다. 용서하세요. 당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전부, 그리고 완전히 당신을 용서합니다 하고 소리쳐 말하고 용서의 따뜻함과 포만감을 느끼세요. 그것은 평화 그리고 건강입니다.
매일 한 사람씩 용서하세요.
약이 새로 오고 나서 그 약이 세서 그랬는지 밥 먹고, 약 먹고, 진통제 먹고, 자고의 생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떨 때는 자느라고 밥 먹는 것도 넘기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운은 없고 의욕도 없습니다.
일요일을 쉬고 오신 피곤한 엄마에게 음식타박을 무지하게 했습니다. 사실 제 입엔 그게 먹을 수조차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제가 지금 이상상태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반복의 시기에도 통증이 올 때가 있습니다. 진통제와 타이밍이 안 맞은 것이지요. 그럴 땐 정말 벽이라고 뚫고 나갈 것 같은 심정입니다. 그리고 삶에서의 모든 책임과 의무를 하나님에게 다 떠넘기고 하나님이 잘 돌봐주실 테니, 제발 지금 데려가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중국의 병원에서는 20여 일의 약을 더 주면서 한번 해보자고 한 모양인데 도대체 제가 20일을 견딜 수 있을는지 걱정입니다.
삶이라는 것이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질이 있는 것인데 제 삶의 질은 요즘 거의 0입니다.
또 기도합니다. 제발 몇몇의 시간에는 통증을 주지 마십사 하고요(사실 누군가가 주는 것도 아닌데). 남편과 아이가 집에 들고 나갈 때, 밥 먹을 때, 그리고 칼럼 쓸 때입니다.
컴퓨터에 앉는 것도 점점 시간이 적어지고 새 칼럼 내기도 힘들어집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응원이 있으니, 숨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 제가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그 순간까지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나 여러분에게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비가 그치면 맑은 하늘이 나타나듯이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요.
환절기가 된 듯합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가끔씩 가족들의 살냄새를 맡아보세요 2000년 8월 22일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아이를 안아보았습니다. 단순히 껴안는 것이 아니라 비디오를 보느라 정신 없이 앉아 있는 아이의 얼굴 목 팔 다리 등 배를 모두 만져보고 쓰다듬어보고 그리고 안아보았습니다.
내 아이만의 살냄새… 왜 그리도 좋던지요.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최근에는 너무 아파서 아이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엄마가 악악거리며 아파하는 모습이 아이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인지 이젠 아이도 제가 방에 들어가 있으면 으레 아픈 줄 알고 그 방에는 잘 들어오질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언제나 웃어줍니다. 유치원에 갈 때도, 올 때도 엄마를 찾으며 소리칩니다. 이럴 땐 내가 없어 대답할 수 없으면 어떡하나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자식이라는 게 얼마나 많은 것을 부모에게 주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오히려 의무와 책임감 때문에 허덕였습니다. 하지만 아프고 나니 아이는 제 인생의 모든 것이며, 아니 인생 그 자체, 바로 나 였습니다.
오늘 아이의 살냄새를 맡으며 다시 한 번 결심했습니다. 절대 내가 먼저 포기하지 말아야지. 아이를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지지는 말아야지 하고요.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라고 하던가요. 아무 말 않고 비디오만 보던 제 아이가 오늘 제가 살 이유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아이나 부모, 가족을 안고서 살냄새를 맡아보세요. 무엇보다도 귀한 삶의 의미, 바로 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왜 나여야만 하는지 2000년 8월 23일
생각보다는 이런 생각을 적게 한 편입니다. 왜 내가 이 병에 걸려 고생해야 하나, 이 고통을 겪어야 하나….
처음에 발병시에 잠깐, 그리고 종교를 가지고서는 뜸하다가 통증 앞에서 무너진 적이 가끔 있습니다.
그래요, 왜 저여야만 하나요. 세상에는 정말 많은 걸 가진 사람이 많은데 왜 별로 가지지 못한 내가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나, 생각해 봤습니다.
제 남편은요, 확률이래요. 모 아니면 도라는 것이지요. 보통 무신론자들이 하는 말이긴 한데, 저는 종교를 가지지 않았을 때도 이 말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우리 인간의 삶이 마치 주택복권 당첨되듯이 아무 이유 없이 희비가 엇갈린단 말입니까?
지금 저는 이 고통에 분명 뜻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단순한 고통이라면 그건 그냥 통증이고 멈추기 위해 약을 더 먹든가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어떤 뜻이 분명히 있기에 오늘도 방바닥을 기면서도 살아남으려 버틴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온 약에도 진통 성분이 있는 모양인데 그것으로는 모자라 아직도 하루에 세 번 이상 뽕이 들어간 약을 먹습니다. 기운이 없고 매사에 의욕이 없고, 입맛이 뚝 떨어집니다. 안 먹으려 애를 쓰지만 결국 항복하고 마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칼럼도 쓰고 아이도 안아주고 잠도 자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사는 날까지 제 삶의 질은 제가 지켜야 하니까요.
그냥 누워서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누가 그랬다죠, 죽는다는 것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라고요.
넋두리가 길어졌습니다. 여러분도 ‘왜 내가…’하는 일이 많으실 거예요. 그럴 때마다 미지의 큰 뜻을 생각하고 견뎌보세요. 울며 몸부림치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가벼워질 겁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요즘은 생활 패턴이 달라졌습니다. 저녁 먹고 나서 약과 함께 진통제를 먹으면 1시간쯤 아프다가 곯아떨어지곤 합니다. 그리고 34시간이나 너끈히 잔답니다. 물론 그 사이에 몇 번 깨기는 하지만요.
새벽 4~5시경부터 10분에 한 번씩 깨다가 6시가 되면 관장을 합니다. 그리고 성경 좀 읽고 쓰고 하면 남편과 아이가 나가야 할 시간이라 칼럼에 들어갈 시간이 없답니다. 또 약기운이 떨어져서인지 아침에는 무척 아픕니다.
그래서 칼럼에 들어오는 시간이 오후 5~6시경이 되는군요. 여전히 많은 기도와 용기를 주시는 님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비가 계속 옵니다. 비가 와서 더 아픈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지만 기분은 좀 우울합니다. 옛날에는 비를 참 좋아했는데. 그래도 더위가 가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오늘은 암에 걸리고 난 뒤 달라진 또 하나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정확히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에 걸리기 전에도 물론 저는 매사에 감사하는 편이었습니다. 특히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더 했지요. 하지만 암에 걸리고 나서는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병원에서 간호사가 부드러운 말 한마디만 해줘도 그 말을 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했습니다. 가족에게도 물론 어떤 일이건 난 당신이 이 일을 해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말합니다. 없는 돈에 선물공세는 물론이구요.
예전엔 인생이 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표현할 기회가 있겠지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게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사랑한다는 말도, 화가 났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지금 합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편해졌어요. 반응하는 사람들도 금방 표현해 주고 진심으로 대해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고 더 많이 미래에 매달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오늘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오늘 하세요. 그리고 고마운 일이라면 더욱 그렇구요. 상대방이 당신보다 더 많은 행복감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미친 사람 같습니다 2000년 8월 26일
요즘은 그냥 기운 없고 통증 있고, 피곤한 하루하루입니다. 그래서인지 도대체 감정이 통제되질 않습니다.
감정을 통제한다는 것, 원래 이런 것은 제게 불가능하고 무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병이 생기고 나서 달라졌죠.
여기서 말하는 건 물론 나쁜 감정인데 끝간 데를 모르고 계속해서 버전업되더라는 겁니다. 소리지르기, 던지기, 함부로 말하기, 아프게 말하기, 째려보기, 문 꽝 닫기… 이루 말할 수 없게 점점 커지고 늘어만 갔습니다.
문제는 그러고 나서 시간에 대한 자신의 또 다른 감정입니다. 절대적 후회와 나에 대한 배신으로 다시 한 번 감정이 상합니다. 용서가 안 되는 거지요. 심지어는 몸이 아니라 아예 마음에 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조금 나아졌지만 아직도 통증이 오면 심하게 말을 합니다. 처음엔 애원하다가 명령하다가 자포자기, 완전히 몸은 테크노댄스를 추고 있고, 내가 자신을 들여다볼 때 정말 악 소리가 납니다.
감정은 물론 존중받아야겠지요. 하지만 특히 저처럼 환자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는 것처럼 위험하고 병을 키우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스트레스죠. 나쁜 감정을 가지면 당연히 스트레스가 쌓일 것 아닙니까? 바로 스트레스가 암의 원인이니까요.
우리 마징가 제트 남편의 말에 따르면물론 저도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감정이 생길 땐 한발짝 물러나 그 사건 자체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요소가 나를 자극했는지 원인을 알면 결과까지 가는 과정도 쉽게 알 수 있다는 거지요. 이러면서 꼭 덧붙여서 저를 더 쥐구멍 찾게 하는 것이 바로 나를 화나게 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아무한테도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는 것입니다. 사실 내 자신빼고는 나를 화나게 만든 원인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나면 허탈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몇 가지 방법을 씁니다. 첫번째가 화가 나면 곧바로 감정을 표현하고 해결할 것, 그리고 감정이 통제되지 않을 때는 방에 들어가 잠시 혼자 있을 것. 이러면 금방 문제가 해결됩니다. 어쩔 때 내가 뭐하고 있지 하고 되물을 때도 있다니까요. 이렇게 해도 안 될 때는 시간이 지나고 남편에게 얘기를 합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랬고 이랬다. 얘기하다 보면 얼마나 하찮은 일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10번 중에 1번만 성공하면 금방 탄력이 붙어 성공률이 늘어난답니다.
여러분도 오늘부터 감정을 한번 다스려보세요. 생각보다 정말 쉬우실 거예요.
암에 걸려 얻게 된 또 한 가지 행운이었습니다!
머리를 잘랐습니다 2000년 8월 27일
제목을 쓰고 나니 굉장히 엽기적이군요. 하여튼 오늘 이발을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보니 온가족 머리에 비상이 걸렸더군요. 저는 지난 2월 거동에 불편이 없을 때 짧게 잘랐던 머리가 어깨를 훌쩍 넘겨버려 아주 불편하고 보기 흉했고, 아이나 아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큰맘 먹고 큰 진통제 먹고 미장원에 갔습니다.
아들녀석이 난리를 쳐서 애를 먹었지만 비교적 잘 다녀왔습니다.
나올 무렵 아프기 시작했으니 다행이지요. 아들녀석은 햄버거와 거기서 주는 공룡선물을 받고는 신이 났습니다.
미장원에서 잘려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내 병도 저렇게 잘려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암덩어리들도, 나쁜 감정의 찌꺼기들도 잘 드는 가위로 자르고 싶었습니다.
또 놀랍게 길어버린 머리카락을 보면서 세월의 깊이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 세월이 이렇게 지났구나.
하여튼 저는 귀 밑 2cm 정도의 단발머리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양파 같다네요.
여러분도 일이 안 풀릴 땐 머리를 잘라보세요. 지나간 싫은 세월도, 아픔도, 슬픔도, 머리카락과 함께 다 잘라버리세요.
저처럼 홀가분한 기분이 들 거예요.
이젠 머리 감을 때도 편하고 말릴 때도 편하고 통증으로 헤드벵(?)을 할 때도 훨씬 수월할 것 같습니다.
미장원 언니에게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어제는 배가 아파서 잠을 더 설치면서도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꿈도 잘 안 꾸고 꾸어도 기억을 못하는 편인데 몇 가지 장면만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습니다.
제 대학 친구 중에 친한 녀석이 있습니다. 술도 많이 먹었고, 바른 말도 서로 잘 해주던 놈이었습니다. 남자면서도 참 다정했습니다.
남들은 씨씨나고 놀릴 정도였지만 서로 시기가 다르게 조금 사랑도 했던 사이였지요.
얼마 전 그 애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병에 걸린 걸 처음으로 얘기한 친구도 그 애였지요. 내가 얘기하지 말랬다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입을 다물어서 저를 감동시키기도 했습니다.
전화는 그런 안부전화였습니다. 알고 보니 청주의 제 친구가 제 상태를 얘기하고 전화해보라고 한 모양이었습니다. 바쁜 회사 생활, 그리고 딱히 전화해도 할 말이 없을 어려운 그 애의 상황을 잘 알면서도 전 너무나 섭섭했습니다. 전화도 흐지부지 끊어버렸지요.
그런데 꿈에 그 애가 나타났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이 모두 의사인지 가운을 입고 사람들을 보살피고 있었는데 제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살아 현장에 복귀했는데 그 애가 보이는 것입니다. 저는 외면했습니다. 그때 놀라며 쓸쓸해하던 그 애의 표정이 꿈을 깨고 나서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제 딴에는 굉장히 섭섭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입장을 알면서도 화를 내는 내가 더 미워졌습니다.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꿈을 깨고는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아이의 쓸쓸한 표정이 황당해하는 표정이 자꾸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습니다. 물론 친구는 반갑게 받았고 또 그저 그런 얘기를 하다가 끝났지만 마음은 가벼웠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 순간에도 왜 인간은 이다지도 이기적일까요. 별일도 아닌 것으로 꿈까지 꾸다니 말이에요.
여러분은 저같이 이기적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후회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해결했으면 좋겠습니다.
친구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
청소를 했습니다 2000년 8월 29일
오랜만에 손수 청소를 했습니다. 엄마가 매일 오셔서 해주시는 일인데 오늘 갑자기 엄마가 오시기 전 오전에 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청소기가 왜 그렇게 무거운지 낑낑대며 청소기를 밀고 걸레로 훔쳤습니다.
물론 미미한 통증은 있었지만 잘 해나갔는데 다 끝내고 나서 아주 죽을 뻔했습니다. 얼마나 아프던지…
그래도 몇 달 만의 노동은 제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매일 하는 일이라고 지겨워하던 일이 왜 그렇게 성스럽게 느껴지던지요. 청소기가 빨아들이는 먼지들이 얼마나 고맙든지요.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 닦는 걸레질은 마치 성스러운 예식 같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동경이었을까요, 아니면 나도 아직 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을까요, 참 행복했습니다.
그렇지만 곧이어 통증이 오니 맹목적으로 일했던 제가 한심해졌습니다. 상태를 보아가며 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조금 있다 도착한 엄마에게는 비밀로 했습니다. 그저 좀 깨끗하다 싶은정도였나 봐요.
먼 과거가 아닌 바로 몇 달 전만 하더라도 할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이 너무나 그립고, 또 왜 그때 소중한 일인 줄 몰랐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단순한 청소나 집안일도 건강하게 살아있는 증거였던 것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 번 결심합니다. 머지 않은 미래에 또다시 후회할 많은 일들을 미리 막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소중히, 아주 열심히 하기로 말이에요.
아프면서 왜 이렇게 범생이가 돼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바른생활 페이지인 줄 알겠어요.
학부모가 된다는 것 2000년 8월 31일
남편과 상의하여 아이를 다음주부터 놀이방에서 어린이집으로 승격시켜 보내기로 합의한 후 집 근처 어린이집에 남편과 아이와 같이 견학을 갔습니다.
그냥 아파트 집안에서 하는 놀이방을 다니던 아이가 이제 많이 자라서 또래가 많은 집단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어린이집은 거의 유치원 수준이었습니다. 멋진 교구들, 많은 교실, 많은 선생님….
원장님과 상담하는 사이 아이는 벌써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궁금함을 풀고 있었습니다.
말이 좀 느린 아이에 대한 걱정도 선생님께서 어느 정도 풀어주시고, 무엇보다도 체계적인 교육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맘에 들었습니다.
어느새 재미 붙여 안 가겠다는 아이를 협박(?)하여 데리고 집으로 오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이제는 정말 나도 학부형이구나,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내가 유치원에 처음 갔을 때 엄마도 이랬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말 큰 책임감이 생겼습니다. 아이가 그만큼 컸다는 데에 대한 자부심도 들었습니다.
아이가 새로운 집단에 잘 적응할지 정말 걱정입니다. 엄마를 닮았으면 거의 적응 100%의 삶을 살 텐데….
오늘은 밥을 먹고 있는 아이가 유난히 커보입니다. 자식이 자란다는 것이 이렇게 대견한 일인 줄을 정말 몰랐습니다.
역시 제 부모님의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군요. 저를 키우면서 느꼈을 자부심, 대견함, 실망감, 특히 잘못했던 일들이 자꾸 떠올라 한동안이나 사죄의 기도를 올려야 했습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며 저도 함께 한 등급 승격한 엄마가 된 셈입니다. 새로운 항해의 출발이겠지요.
9월이 되었습니다. 9월은 제게 특별한 달입니다. 극심한 통증이 시작된 지, 그러니까 구르기 통증이 시작된 지 만 3개월 되는 달입니다.
제가 다니던 한방병원에선 물론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이지만 통증이 생긴 지 3개월이면 다 죽더라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죠.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느끼는 통증이 의사가 말하는 통증보다 적은 것인지 그래서 3개월을 버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한방병원에 가기 전 양방병원에선 아예 3개월 정도의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참 특별한 느낌이었습니다.
새로 사는 느낌일까요. 하긴 여전히 아팠지만요.
며칠 전부터 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누워서 양쪽 방향으로 누우면 배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 상체를 세우고야 잠이 듭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로 오래 자지 못해 꼭 깹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오늘도 제손으로 청소했습니다. 좀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했습니다. 내친 김에 진통제도 먹지 말아볼까 했다가 완전히 KO패당하긴 했지만….
이런 시도들이 제가 살아 있는 증거처럼 느껴집니다. 다 여러분 덕입니다. 수없이 죽기를 바라던 많은 시간들, 이젠 아무리 아파도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진 않습니다.
산다는 것, 이렇게 치열하군요. 쉽게 쉽게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이렇게 치열하게 사셨겠지요.
우리 모두 화이팅!!!!!
아이와 놀기 2000년 9월 2일
오늘은 원래 남편이 쉬는 토요일이라 엄마도 안 오시는 날인데, 남편이 회사에 일이 있어 나가버려 고스란히 아이와 제가 하루종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오랜만입니다. 워낙 기운이 달려서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이 힘들었거든요.
화가 났습니다. 힘들 것을 생각하니 힘들기 전부터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시댁은 쌍둥이 조카들이 와 있고, 모처럼 맞은 엄마의 휴가를 빼앗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나가고 그때가 오전에 아주 아픈 시간입니다. 아이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밀가루 반죽놀이를 하자고 했습니다. 아이에게 엄마가 아파서 못한다고 얘기하고 났는데 이 녀석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부러운 듯 화면만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린 것이 벌써 눈치로 엄마 아픈 것을 아는구나 싶으니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밀가루를 꺼내 반죽을 해주었습니다. 이미 프로는 끝났지만 녀석은 정말 기분 좋아했습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아픈 시간이 길어져서 힘이 드는데 이번에는 녀석이 심심한 모양입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괴로워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책 몇 권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좋아하는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켜 함께 나눠(녀석이 3분의 2를 먹었습니다) 먹었습니다.
포만감에 신나하다가 진통이 완전히 안되서 힘들어하는 제 곁에 와서 눕더니 지금까지 잡니다.
세상에 이렇게 착한 아들이 또 있을까요. 걱정했던 게 기우가 되어버렸습니다.
글쎄, 녀석 때문에 힘들어서인지 하루종일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견딜 만한 아픔입니다(조금 기어다닐 만한).
이제 남편도 들어온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제 소원이 있다면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사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입학식날 가보는 게 제 꿈입니다.
그때까지만 살 수 있다면 아이가 저를 기억할 수 있을 것도 같아서요. 그리고 초등학교 입학식날 엄마가 없는 건 정말 슬플 것 같아서요.
아이 때문에 산다고도 할 수 있는 삶을 살면서 가끔은 아이가 뒷전일 때가 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아량 많은 우리 예쁜 아들인데….
아이를 볼 때마다 나의 분신, 바로 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이의 얼굴에 항상 밝은 제가 비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우리 아들 기특하지요?
뜨게질하기 2000년 9월 3일
아프고 나서부터 뜨개질을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동네에 뜨개방이 있어 물어가며 배울 수도 있어서 좋았습니다. 지금은 아파서 가지 못하지만….
통증을 잊어보려고 시작했습니다. 조금 효과도 있었고, 그보다 더 큰 효과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면서 주위 사람에게 선물하는 재미였습니다.
아들의 카디건, 시어머니 핸드백, 엄마 모자, 아이의 모자와 가방 세트, 형님의 가방, 조카들의 돌복 등 정말 신나게 했습니다.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재미가 정말 솔솔했습니다.
그런데 통증이 점점 심해가면서 집착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이걸 다 완성 못하고 죽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마구 속도를 내어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지요.
형님도 걱정하면서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충고도 했습니다.
한 달 정도 전부터 뜨개질을 못 하다가 갑자기 오늘 아이의 모자를 하나 떠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을 모자가 없거든요. 게다가 제 아이는 남자가 왜 그리 외모에 신경을 쓰는지 모자와 가방을 정말 좋아한답니다.
보채다가도 모자 만들어줄게 하면 뚝 그치니까요.
유치원에 가는 내일에 맞추겠다고 속도를 냈지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루에 그것만 잡고 있어도 제 실력으로는 3~4일은 걸리거든요.
자꾸 욕심이 생기고, 집착이 생기고 왜그러는지….
아이 모자부터는 천천히 시간이 될 때 기쁘게 해야겠습니다. 그래야 아이도 기쁘게 쓰겠지요.
적어도 무언가를 언제까지 하겠다는 강박관념 없이 편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겠어요. 그게 건강에도 좋을 듯하구요.
그래도 참 많이 떴답니다. 아유, 보여드리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