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말 한마디에 젊은 모가지를 내걸었는데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나라를 앞세워 꼬드긴 사람들이 그저 우리를 이용하고 버린 것이다.”
지난 9월2일 북송된 김인서 김선명 등 비전향 장기수들에 관한 북한 중앙방송의 보도내용이다. 대대적인 국가적 환영을 받으며 ‘사회주의 조국’의 품에 안긴 북송 장기수 63명 중 46명은 남파공작원이다. 이들의 송환을 목도하면서 한숨짓는 이들이 있다. 같은 냉전시기에 북한에 파견되어 목숨을 내놓고 ‘대북사업’을 했던 북파공작원들이 그들이다.
북한이 오랫동안 남파공작원들에 대한 인도적 송환 등을 공개적으로 목청높여 요구하고 마침내 이를 관철시켜낸 이날까지 정부는 북파공작원의 존재 자체를 부인해온 터였다. 공작원의 파견 사실을 인정한다면 곧 휴전협정 위반을 자인하는 꼴이 된다는 이유로 북파공작원의 존재와 활동실상을 극비에 부쳐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 국회에서 민주당 김성호(金成鎬·통일외교통상위) 의원이 6·25 전후 북파공작원 366명의 명단을 입수, 공개함에 따라 북파공작원의 실체는 더 이상 부인만 할 수 없는 문제가 됐다.
김의원이 공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53년 2월~72년 7월 사이 북파공작원중 북에서 체포 실종 사망한 사람은 모두 7726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보상을 받은 경우는 12명에 불과하다. 특히 1960년 이후 북파된 2150명은 아예 법적으로 보훈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이같은 문제는 이들이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북파된 데서 비롯된다.
이같은 상황에서 북파공작원들의 명예회복과 합당한 보상 등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점차 가시화될 조짐이어서 관계당국을 곤혹스럽게 한다. 이런 움직임은 그 동안 보상은커녕 ‘북파 전력’ 때문에 되레 감시대상이 되고, 정상적인 사회활동에 지장을 받는 등 불이익을 당해온 생존 북파공작원 출신들을 중심으로 모색되고 있다. 이들은 북한이 남파공작원들을 당당히 데려가 영웅대접을 하는 마당에 국가를 위해 청춘을 사지에 내던진 사람들을 더 이상 모른 체해서는 안 된다는 불만을 갖고 있다. 아직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놓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최근 남북정상회담 이후 탈냉전 무드와 장기수 북송 등 상황의 급격한 변화를 지켜보며 연락이 닿는 ‘전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의견을 모으면서 전체모임도 계획하고 있다. 정부당국이 계속 침묵으로 일관할 경우에는 ‘법적’ ‘물리적’ 행동도 불사할 태세다.
“한번 갔다오면 가족까지 생활 책임진다”
이들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북파됐고 어떤 활동을 해왔는가?
‘신동아’는 북파공작원으로 북한 땅에 침투, 생명을 담보로 한 ‘대북사업’을 수행했던 공작원 두 사람을 만나 이들의 증언을 들었다. 처음에는 만나기를 극도로 꺼리던 이들 공작원들은 계속되는 설득 끝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지금까지 조금씩이나마 존재가 알려져온 50년대 북파공작원이 아니라 60~70년대에 활동한 북파공작원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본인의 동의를 얻어 실명으로 공개한다.
먼저 만난 이는 주진하(51)씨다. 인천 부평역 근처 찻집에서 만난 주씨는 5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무슨 운동이라도 하십니까? 생각보다 젊어 보이는데요.
“운동은 뭐, 그냥 옛날에 한가닥 ‘놀던’ 가락이 있어 그렇게 보이는 거겠죠.” ─‘한주먹’ 하셨던 모양이죠?
“북파공작원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힘없는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으면서 몸은 날쌘 사람들이 ‘사냥’ 대상이 돼요. 그러나 순수하기 때문에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말 한마디에 목숨까지 담보로 바치고는 아무것도 건진 게 없어. 나라를 앞세워 꼬드긴 사람들이 그저 우리를 이용하고는 버린 거죠. 또 그동안 우리를 진정으로 대변해준 사람도 없었고.”
─태어난 곳은 어디입니까?
“1949년 5월19일 서대문구 충정로 3가요. 남대문 국민학교를 졸업했어요.”
─부모님은 뭘 하셨습니까?
“이북에서 내려와서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셨어요. 나는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고. 형들이야 장남이고 그러니까 학교 보내는 거고 셋째는 찬밥 아닙니까. 전 집을 나와서 창신동 종묘 근처에서 놀았죠.”
─북파공작원으로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겁니까?
“거기서 생활하다가 여러 명이 첩보공작대에 같이 갔어요. 물색조가 우리한테 물색을 하러 왔어요. 저는 그때 뭘 해먹고 살았느냐면, 한마디로 불량 청소년이죠. 노벨극장 주변에서 남의 것 도둑질하고 유치장도 들락날락하고,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이 있었는데 거길 우리가 꽉 잡고 있었어요. 이런 생활을 하다가, 물색조에 강선규(가명)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 19~20세 때 접근해 가지고….”
─그 사람이 뭐라고 설득했습니까?
“자기는 정보부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7××부대라는 것이 있는데 6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이북에 한번 갔다 오면 제대증도 주고, 취직도 시켜주고 성과에 따라 보상금도 주는데, 보상금은 대체로 개인택시 한 대 값 정도 주고 다달이 연금도 준다 이겁니다. 그리고 가족한테도 매달 생활비를 보내준다 이겁니다. 우리로서는 그 얘기가 꿈만 같았죠. 나이 19 20 21세 되는 놈들이 ‘굵고 짧게’ 살아본다는데, 그때는 그런 맘이 들었어요. 그래서 멋도 모르고 거기에 응했죠.”
─그럼 바로 그 사람을 따라 나섰습니까?
“아뇨. 신상명세를 그 사람한테 다 밝혀주니까 1주일 후에 남산 야외음악당 앞에서 만나자고 합디다. 그러면서 증명서를 하나 주더라고요. 거기에 뭐라고 돼 있느냐면, 이 사람은 국가가 뭐뭐뭐 해가지고, 아이고, 기억도 잘 안 나는데, 하여간 그때 우리가 볼 때는 어마어마한 쯩(증명서)이에요. 그러면서 ‘너희들 사고 나서 파출소나 경찰서 잡혀 들어가면 그걸 보여라, 그러면 금방 내보낼 거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거 믿고 창신동 종묘 숭인파출소 다 때려 부쉈어요. 그 쯩을 내보이니까 어떤 사람이 와가지고 금방 내보내주더라고. 그러면서 풍족하지는 않지만 1주일 동안 쓸 생활비를 주는 거야. 1주일 후에 남산 야외음악당에 가니까 그 사람이 나와 있잖아. 다시 1주일 동안 쓰라고, 날짜가 적힌 그런 증명서를 또 주고 생활비도 줘요. 그렇게 세 번을 만났지.”
─실제 부대로 들어간 건 언제쯤입니까?
“갈월동에 가면 노동회관이 있는데 거기서 세 번째 만났고, 그후에는 남산 야외음악당 앞으로 오전 8시 반까지 집결해라 이거예요. 그때는 정말로 가는 거다 이거죠. 그 전에 한 달 동안 못 갈 사람은 커트를 해낸 거야. 모이라는 날 아침에 갔더니 여남은 명이 모였어요. 거기에 ‘D산업사’ 버스가 대기하고 있더라고. 그때는 정보부가 D산업사였나봐. 그 버스를 타고 남산을 한 바퀴 돌아서 약수동 길로 해서 광화문을 지나 영등포로 갔지. 영등포의 지금 국세청(세무서) 자리가 옛날엔 군부대 자리였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가 정보사령부 대기소야. 일반 군인들이 논산에서 올라와서 대기하고 있으면 양구 춘천으로 보내는 대기소였어. 거기로 데리고 가서 신체검사를 하더라고. 머리도 깎고 군복도 입히고. 부산 애들이 한 20명 먼저 와 있었어요. 그 사람들하고 합세해서 그날 저녁에 청량리역으로 가서 중앙선 열차를 탔는데 한 칸은 우리 애들밖에 없어. 아무도 못 들어오는 거야.
그렇게 밤새도록 가니까 강릉에 도착했어요. 거기 트럭 두 대가 와 있더라고. 주먹밥을 하나씩 줘서 먹고 트럭에 올라 타고 호로를 탁 씌우고 나서 정처없이 올라가는 거야.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지. 막아놨으니까. 대여섯 시간 올라가다가 내려놓은 곳이 알고 봤더니 강원도 고성군 △△리라는 곳이었어. 앞에는 바다가 보이고 뒤에는 설악산 무슨 바위 밑이야. 거기도 말하자면 대기소야. 거기서 내려놓고 겁을 주는 거야. ‘이 근처에 도망 못가게 전부 지뢰를 박아놓았다’고 말이야. 거기서 25일을 지냈어.”
─훈련은 어떤 걸 받으셨어요?
“25일 동안 일반부대 훈련소에서 하는 제식훈련에서부터 사격, 수류탄 투척 등의 교육을 받았어요. 그러고 나서 고성군 모 지역으로 올라갔어. 거기가 육군 첩보공작조 훈련소야. 거기는 우리 선배인 도깨비부대와 번개부대가 있었어. 두 부대는 한 부대에 인원이 100명 정도씩 있었어. 우리가 박쥐부대고, 우리 밑에가 땃벌, 이렇게 4개 부대가 있는 곳인데 여기는 민간인 통제구역이고 정말로 인간개발이 되는 거야. 25인용 텐트 쳐놓고 생활하면서 정말로 모진 교육을 다 받는 거야. 등에는 30㎏ 모래배낭을 짊어지고 양발에는 1.5㎏짜리 모래주머니를 차고, 그렇게 생활하는 거야. 거기서 교육을 받는데 산악훈련, 독도법, 사격 등을 배워. 사격도 AK 사격이야, 국산권총은 만져보지도 못했어요. 그리고 봉술, 태권도, 호신술 특공무술, 해검법(열쇠 따는 것), 통신 모스 부호, 민사심리(유사시에 적지에 들어가 그 지역 인민들을 동조하게끔 하는 전술), 절취도 훈련받아. 절취는 시내로 교육을 나가지.
그리고 흔적인멸과 폭파교육을 받았어요. 그것만 계속 반복적으로 받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게 산악하고 독도법하고 폭파야. 그것만 집중적으로 배우다가 팔리기 시작하는 거야.”
─그런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나요?
“내가 68년 7월29일 들어갔어요. 그런데 우리 선배들은 68년 3월부터 들어와 있었어. 68년 1월달에 김신조가 넘어왔거든. 그해 1월21일날 말야.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러면 안 되겠다, 우리도 만들자’고 지시해서 그런 부대를 만든 겁니다. 이렇게 되니까 3월 4월에 들어온 팀이 도깨비부대 1기, 5월 6월 들어온 게 번개부대, 7월 8월이 우리 박쥐부대고, 우리 뒤로 땃벌이가 있었어. 69년 1월이 되니까 1기가 ‘팔리는’(작전에 투입되는) 거야. 나를 가르친 팀장이 1기를 데리고 웅천대로 팔렸다고. 8명을 데리고 팔렸는데 걔들을 교육시키다 보니까 우리 생각이 나는 거야. 우리는 좀 늦게 들어갔어도 정말로 잘했어요. 진짜 날고 기었다고. 김신조는 산악훈련 팔부능선으로 1시간에 30㎞ 간다고 그러지만, 우리도 25㎞는 갔다고, 밤에 말야. 그러니까 이 양반이 우리 생각이 나거든. 그래서 우리 기수에서 6명이 1기 선배들에 합류되고 다시 거기서 최종적으로 4명이 차출된 거야. 거기에 내가 끼였지요.”
─그럼 이제 본격적인 임무가 하달되는 겁니까?
“그렇지. 우리 사령부 본사에서 납치임무가 떨어졌지. ▼▼리 ×××GP에 들어가서 납치를 하라는 거야. GP 근처에 텐트를 쳐놓고 낮에는 자고 밤에는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을 지나서 들어가는 거죠. 걔네들도 잠복조가 있거든요. 우리가 낮에 포대경으로 보면 잠복하고 나가는 것이 보여요. 그러면 그 자리에 가서 크래머 같은 것 깔아놓고 밤에 잠입하는 거야. 그러면 걔들은 안 나와. 그렇게 숨바꼭질 하면서 한 2개월이 지난 거야. 납치는 해야겠는데 ‘물건’은 잘 나타나지 않고, 우리가 여름에 들어갔는데 가을이 다 된 거야. 이거 안 되겠다 싶어 본사에서 다시 임무가 떨어졌어.
북방한계선을 넘어서 12㎞ 정도만 가면 P비행장이 나와. 그 앞에 새로 벙커를 지은 게 있는데 그걸 폭파하고 나오라는 거야.”
─그래서 다시 새 목적지까지 간 겁니까? 진입해가는 데 위험도 많았겠죠?
“물론 적의 방해장치가 있죠. 하지만 그런 건 다 알아요. 낮에 우리 GP에서 포대경으로 우리가 들어갈 루트를 개척한다고. 개척한 다음에 ‘큰선생’이 있는데 그 선생이 지뢰 지대가 어디고 녹색 장애물 지대가 어디고, 모래장물 지대가 어디고 전기 철조망 장애가 어딘지 다 알아요. 그리고 우리가 그 교육을 6개월 이상 받았으니까 다 지나가지. 지뢰지대를 피해서 지나가고, 녹색 장애물 지대를 피해서 지나가고, 모래 장애물 지대도 발자국 흔적 안 나게 지나가고 전기철조망 장애 지대도, 전기가 흐를 때는 5만 볼트나 흐르는데,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흐르는지 다 알아. 이걸 안 걸리게 지나가는 거야.
그리고 쟤네들(북한군)은 돈이 없으니까 천연적인 장애물을 많이 만들어놨어요. 울타리 장애물 같은 것도 돌멩이를 다 쌓아놓는다고. 어두워서 안 보이니까 건들기만 하면 와르르 다 무너지게 쌓아두는 거지. 그러면 아침에 걔네들이 순찰 돌 때 무너졌으면 ‘간첩이 지나갔구나’ 하고 수색을 한다고. 그런 교육을 받으니까 우리는 완전 전문가가 된 거야. 그래 가지고 남방한계선 철조망을 딱 열고 들어갈 때는 ‘이게 그건가 보다’ 하고 겁이 났는데 한 번 들어가고 두 번 들어가고 한 2개월을 들락날락하니까 악밖에 안 남는 거야. 걸리기만 걸려라,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니라 너 죽고 나 죽자, 이 정도로 악만 남게 되지. 그런 교육을 다 받았으니까.”
─목표지점에 도착해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걔네들이 내무반에서 다 자더라고. 폭파는 식은죽 먹기야. 먼저 벙커에 들어가서 폭파시키기 위해 디트리트 6기를 갖다 깔았지. 어디다 장착을 하면 완파가 된다는 걸 다 배웠거든. 만약을 대비해서 내무반에도 크래머로 해서 깔아놓고 전화기는 팀장이 쥐고 있는 거야. 벙커하고 내무반에 동시에 터지게 준비를 하고 있었지. 우리가 5명인데 1번은 체포조고 2번도 체포조고 3번은 팀장이고 4번은 난데, 팀장을 내가 보호하고 팀장이 폭약 설치하고, 5번은 우리 동기인데 후미를 담당했어요. 준비가 다 끝난 다음 팀장이 쥐고 있던 전화기를 누르면 꽝하고 터지는 거야. 벙커가 무너짐과 동시에 내무반에서 크래머 6발이 터졌어요. 완전 전멸시키고 나온 거지.”
휴지조각된 생활보장 계약서
―터질 때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까?
“거기서 한 50m도 안 될 거예요. 탄피들이 날라올 정도니까. 벙커 안에 교통호가 다 돼 있다고. 우리는 그 교통호에 숨어서 확인하고 각자 철수하죠. 먼저 나온 사람도 있고 늦게 나온 사람도 있고.”
―폭발이 있고 나면 북한군이 수색에 나설 것 아닙니까?
“양쪽에서 자동화기가 쏟아지지. 낮에는 추격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밤에는 걔네들이나 우리나 추격을 못해. 쏘기만 하지 추격을 못해요. 추격했다간 저희들이 죽거든. 그러니까 속전속결로 하는 거야. 우리는 지상 단기공작이기 때문에 북방한계선 넘어서 멀리까지는 안 가. 멀어봤자 30㎞야. 근거리에서 걔네들 교란시키고 이러는 거지.”
―철수를 마친 것은 언제 쯤입니까?
“9·9절날 들어갔다가 9월10일날 새벽 2~3시경 나왔어요. 들어갈 때는 하루 이틀 걸려도 나올 때는 날라다니니깐 1~2시간이면 나와버리거든. 나오니까 동이 트는데 OP 애들 GP 애들이 문 다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더라고. 사령부에서 나와 확인하고 있고.”
─임무 마치고 그 다음엔 어떤 생활을 했나요?
“나와가지고 안가에서 보안교육을 한 2개월 받았어요 입 벌리지 마라, 헛소리하지 마라, 2개월 동안 교육받고, 열흘 동안 포상휴가 주더라고. 그때는 처음으로 군복을 주더라고. 우리는 그때까지 하등사복 전사복을 입고 지내고 위장복을 입고 지냈거든. 그리고 신분증을 하나 해주는데 육군 첩보공작대 5★★ 지상대 이렇게 써 있었어. 그것만 보여주면 어디든지 통과됐지.”
―그때가 입소 후 처음으로 휴가 나온 겁니까?
그렇죠. 70년도 1월달인가 2월달에 나왔을 거야 아마. 한겨울이었니까.”
―첫 휴가 나와서 가족들 만나니까 뭐라고들 하던가요?
“가족들은 내가 어디서 뭘했는지 잘 모르지. 그래서 내가 물어봤다고, 생활비 같은 것 누가 안 보냈느냐고. 근데 그런 것 없었어, 아무것도 없었대. 되레 그 무렵 군입대하라고 신체검사 통지서가 나왔어. 정말 어이가 없더라고. 신체검사를 내가 뭐하러 하냐, 받아 갖고 나온 신분증을 가지고 육군첩보대 5★★ 지상대 대장한테 갔지. 휴가 갔더니 이런 것이 있습디다 라고.
그런데 얼마 뒤 또 신체검사 통지서가 나왔어. 나는 안 들어가고 버텼어요. ‘너희들이 나한테 해준다는 것은 해줘야지 들어갈 게 아니냐’. 보상도 안 해주고, 가족들한테 생활비도 안 주고 아무 약속도 안 지켜주는데 내가 왜 들어가냐 이거지.”
─처음에 북파공작으로 들어갈 때는 가족들에게 그런 걸 다 해준다는 약속을 받고 들어갔어요?
“그럼요.”
―서면으로?
“다 썼지. 도장까지 찍은 계약서를 썼다니깐. 생활비도 보내주기로 하고.”
―그럼 계약위반 아니냐고 따졌어요?
“그렇게까지는 얘기하지 못하고, 그냥 부대에 안 들어가고 한 20일간 서울에 쳐박혀 있었어. 신촌 이대입구라든지, 내가 옛날에 놀던 창신동에 가서 설쳤어. 한 친구가 서울 사령부에서 나와 가지고 계속 나를 따라다니길래 ‘나 안 가’라고 버텼어. 그러니까 잡아가지는 못하고 따라다니면서 나를 설득하더라고.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 거고 큰일 나니까 들어가자고. 그 친구 집이 후암동인데 거기서 하루밤을 자고 같이 들어갔어.
들어갔더니 이 자들이 나를 안가에 집어넣더라고. 거기서 한 2~3개월 정도 하는 일 없이 어영부영 세월만 보내니까 영등포 양평동으로 키퍼반 교육(조교교육)을 가라 이겁니다. 갔지. 거기서 교육 받으면서 내가 1등을 했어요. 내가 원래 힘이 좋아요. 그 당시 진종채씨가 사령관으로 왔어. 그 양반이 오자마자 내게 1호로 표창장을 줬어. 조교교육을 마치고 5★★부대로 들어가서 ‘돼지’(공작원 피교육생)를 두 명 키웠지. 여럿을 한번에 교육시키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을 키워서 내보내고 또 하나를 받아가지고 교육시키고 그랬다고. 산악부터 시작해서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1 대 1 교육을 시키는 거야.”
“잡히면 산채로 껍질 벗긴다, 자폭하라”
―그렇게 키워낸 후배들도 북한에 ‘파견’ 됐나요?
“그럼요. 다 살아서 왔어요. 성공해 가지고 왔어. 수집(적의 서류 등을 훔쳐내는 것) 쪽일 건데,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는 나도 잘 몰라. 그건 비밀이니까.”
―북파 임무 중에서 가장 힘들고 위험한 게 어떤 겁니까?
“수집이야. 수집은 10명 들어가면 8명은 죽어요. 특공은 5명이 한팀이 돼서 들어가는데 들어가다가 재수가 없어서 발목지뢰를 밟으면 발목이 날아가기도 하지.”
─만약 그런 지뢰를 밟으면 죽었다고 봐야겠네요?
“선생들이 우리한테 그래요. ‘너희들은 올라가서 생포되든지 자수를 하게 되면 죽는다’고. 이북에서 우리를 최고악질로 본다 이겁니다. 세워서 묶어놓고 산 채로 껍데기를 벗긴대요. 그 고통이 어마어마 하니까 올라가다가 유사시에는 자폭하라고 세뇌교육을 받았어요. 영화에서처럼 극약 같은 걸 주는 게 아니라 수류탄 같은 걸로 자폭하라 그러더라고.”
―특공은 가서 타격을 하면 끝이지만 수집은 직접 들어가서 해와야 되니까 어렵겠군요. 요인 납치도 상당히 어려울 것 같은데.
“납치는 특공 파트가 하는 건데 우리 선배들이 굉장히 크게 했어요. 자랑스러운 선배들이지.”
―소련 대령 납치했다는 그건가요?
“예. 소련 고문관들 전방 시찰 나온 거 납치해오고. 그래 갖고 처음으로 무공훈장이 세 개가 나왔지. 그 선배들한테 배워가지고 그 이듬해 내가 투입된 거지.”
―그 비행장 벙커폭파로 상 받으셨어요?
“상은 못 받았지만, 전 육군 첩보대 내에서 최고실력을 인정받았지. 내 나이가 50이 넘었어도 그건 아직 생생해요. 그 세뇌 속에서 헤매고 살았으니까. 그런 애들이 나뿐만 아니라 엄청 많아. 사회에 적응 못하고 말야. 그러니 사회에 나와 방탕 생활도 하고 그랬어.”
─사회에 나와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죠?
“그때 일했던 친구 중에서 생활고에 허덕이니까 사시미칼을 가방에 가지고 다니면서 가정파괴범 짓을 한 경우도 있어. 교도소에서 17년간 썩다가 결국 청송감호소에서 자살했대요. 애들이 그래요, 환상에 사로잡혀 가지고, 거기서 세뇌받으면서 니네는 대한민국 최고다, 니네가 무슨 짓을 해도 다 빼주니까 걱정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세뇌를 받고 나온 사람들이 할 게 뭐 있겠어. 그 전에도 얘들이 가정환경이 좋은 애들도 아니었고 가진 기술도 없었고, 재건원에 있다 온 애들, 구두 닦다 온 애들, 그런 애들이거든요.”
― 동료들 중에서 작전에 실패한 경우도 있을 것 아닙니까?
“실패한 경우는 모르고, 내 동기 중에 김아무개라고 있는데 걔는 올라가서 자수했어요. 그래 갖고 대남방송도 나와요. ‘김일성 어버이 수령 덕택에 잘 있으니까 너희들 거기서 고생하지 말고 올라와서 자수하라’고 말야
─사회가 그런 험한 고생한 것을 제대로 보상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금년 봄에 정보사 ○○실장을 만나가지고 그랬어요. 나는 국가를 위해서 이렇게 했다지만, 결국 국가를 위해서 일을 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일을 한 거다. 내가 이렇게 밑바닥에서 헤매고 살 줄 알았다면 나는 옛날에 일할 당시에 올라가서 자수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니 실장이 수긍하더라고요. 정보사도 알지. 지금 남북이 냉전이 계속되고 있다면 그 친구들이 우리 하던 일 그대로 해야 할 후배들 아니요? 그 친구들도 심정적으로야 우리 맘을 알 거야.”
―완전히 제대를 한 건 언제입니까?
“71년도 8월에 나왔어요. 제대할 때 제대증을 하나 줘서 보니까 육군 상병 주진하, 군번은 31062921, 돈 600원 주더라고. 그리고 집에 가서 기다려라 좋은 소식이 갈 거다, 그걸로 끝이야.”
-그래서 집에서 당초의 보상약속이 이행되기를 기다렸나요?
“기다리면 좋은 소식 갈 거라니까 기다렸지 뭐. 소식이 금방 올 줄 알았지. 물론 정보사에 가서 하소연도 많이 해보고 떼도 많이 써봤지만 대답은 똑같아요. ‘얼마 후에는 당신들한테 국가적인 차원에서 국가유공자로 처우를 해주는데 남북 통일이 돼야 된다’ 이겁니다. ‘남북통일이 되도 적화통일이 되면 안 돼. 그럼 당신들은 죽어요. 평화통일이 되는 전제조건에서만 독립유공자식으로 처우를 받을 거다’ 이러는 거야.
근데 그게 언제냐 이 말이야? 우리가 다 죽고 난 다음에? 이렇게 따지면 또 그래요. ‘그 전에 당신들한테 보상을 해주면 우리 정부가 정전협정을 위반한 걸 인정하는 셈이 된다’는 거야. 그래서 해주고 싶어도 못해준대. 이 따위 헛소리나 하고 있더라고. 북한은 뭐 정전협정을 잘 지켜서 남파공작원들을 보란 듯이 영웅대접해가며 데리고 갔나? 우린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어. 그저 울컥하면 정보사 쫓아가서 소란이나 피우는 거지. 그나마 내가 여태까지 살았으니까 이런 소리도 하는 거지, 올라가서 죽었다든지 나와서 살다가 죽었다든지 그러면 아무 소용도 없는 거야. 일하다가 죽으면 행방불명이야. 지금 세월이 좋으니까 이런 소리도 하는 거지 어디 가서 입 뻥긋도 못했지. 정말로 숨기고 살았어.
주씨는 이 대목에서 지난 세월이 한스러운 듯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북사업’(북파공작)을 한 과거 때문에 사회활동에서 불이익을 받은 경우도 있었나요?
“많죠. 먹고 살려고 막노동을 했어요. 구반포 아파트 지을 땐데 그 당시 중동 바람이 불어가지고 많이 나가더라고요. 나도 한신공영에서 한 2년 일했는데 감독이 잘 봐가지고, 나보고 서류를 내라고 해서 다 냈는데 맨날 신원조회에서 걸리는 거야. 도저히 안 되겠어서 내가 방탕했어요. 그러다가 부산을 갔어. 부산에 가면 한국어업훈련소가 있어요. 국비생으로 교육시키고 캄차카 반도에 적극적으로 내보냈다고. 거기서 열심히 교육받고서 원양어선 타고 참치 잡으러 나갈려고 그랬는데 신원조회에서 또 떨어진 거야. 그렇게 불이익 당한 게 수도 없어.”
―옛날 전우들끼리 최근 부쩍 자주 모인다면서요?
“좀 모입니다. 이리저리 서로 연락 닿는 사람끼리 연결되다 보니 서울에 한 20명 이상 되고 속초에도 다음달에 모임이 결성되는데 거기도 많이 있어요. 부산에는 한 40명 정도 될 거요. 앞으로 정부의 성의 있는 조치가 없으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지도 몰라. 50년대 활동했던 박부서 선배처럼 우리도 뭐 진정서 내보고 할 생각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그런 복잡한 순서는 잘 몰라. 안 되면 ‘우리 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어요.”
쫓기는 건달 등 두드린 물색조
또 다른 증언자는 김종복(金鐘福·58)씨다.
현재 홍제동에서 ‘성보종합개발’이라는 건물관리 용역회사를 운영하는 김씨의 출생지는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가양리. 김씨의 부친(지난 3월 작고)은 종로에서 주먹생활을 하던 처지였고, 김씨 자신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잦은 주먹다짐으로 ‘사고’를 치다가 졸업을 몇 달 남기고는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권투를 시작했다. 부친 및 계모와의 잦은 불화 끝에 집을 뛰쳐나온 김씨는 구두닦이를 하면서 청부폭력에도 빠져들었다. 그는 권투솜씨를 밑천 삼아 청량리를 근거지로 ‘세븐클럽’이라는 폭력서클까지 만들었다.
김씨가 21세이던 63년 말 세븐클럽이 칼부림 사건을 벌이면서 멤버들 일부가 교도소에 들어가고 김씨는 수배대상이 됐다. 형사들에 쫓기던 김씨는 종로구 창신동 친구집 앞을 서성거리다 누군가 등을 툭툭 치는 손길을 느꼈다.
“형사인 줄 알고 돌아서서 때려 버리고 도망가려고 했어요. 근데 돌아보니깐 형사 같진 않았아요. 그러면서 ‘나하고 차 한잔 합시다’, 그러더라고. 체격도 좋고 사람이 멋지게 생겼어요. 그래서 ‘당신, 날 보자는 이유가 뭐요’ 그랬더니 ‘국가를 위해서 한번 일 해볼 생각이 없느냐’ 그러더라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국가를 위해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하니까 ‘뭐 이 딴 놈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고 물으니까 ‘이북으로 넘어가는 것 아슈?’ 그러지 않겠어? 처음엔 ‘간첩이구나’ 생각했지. ‘옳지, 너 잘 걸렸다. 나는 너 잡으면 보상금도 받고, 죄도 면제될 거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냥 따라갔습니까?
“대폿집에 따라 들어갔죠. 근데 밥을 사주고 흥인동 여인숙으로 데려가더니, 그날부터 4일 동안 화장실 가는 것까지 쫓아다니더라고. 당시엔 몰랐는데, 이게 나에 대한 신원조회를 하던 시간이었다고 그래요. 그러다가 종로 5가 왕관다방으로 날 데려갔는데 거기에 A선생이라고 날 가르칠 교관이 와 계시더라고. A선생 얘기인즉 ‘당신 생명까지도 보장할 수 없는 일인데, 그래도 하겠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좋다. 단지 하나 조건이 있다. 내가 갔다 오면 청량리 경찰서를 한번 부수겠다. (주먹을 불끈 쥐며) 이런 게 맺혀 있기 때문이다’고 말이죠. 어린 건달 소견에 그런 건데, 저쪽 얘기가 ‘좋다. 걱정하지 마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경기도 포천군 모처로 데려갔어요. 거기에 방을 얻어놨더라고요. B라는 조교가 거기 있더라고요. 거기서 질리도록 고기를 먹었어요.”
─그곳이 훈련소인 셈이었나 보죠?
“그래요. 교육은 한밤에 주로 산 타는 훈련이 많았어요. 밤 10시부터 산을 타고 ‘7부 능선 내지 8부 능선을 타라, 정상은 절대 타지 말라’ 이런 요령을 배웠습니다. 그런 교육을 약 2개월20일 동안 받았습니다.”
─침투는 언제 하게 됐습니까?
“64년 2월23일이에요. 날짜도 안 잊어먹습니다. 내 모가지 팔았던 날이기 때문에 잊어먹으려야 잊어먹을 수가 없는 거죠. 그에 앞서 20일날 오전에 외출을 나갔다 사고를 쳤습니다. 운동도 했겠다, 거기서 사람을 개 패듯이 패고 들어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게 문제가 됐는지 어떻게 됐는지 2월23일날 내게 침투명령이 떨어진 겁니다. 침투명령이 떨어졌을 때 이젠 죽으러 가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DMZ에서 받은 스타급 ‘차렷총’ 예우
─하달받은 명령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3가지의 부서가 있었습니다. 절취반, 사진반, 납치반 이렇게. 절취반은 들어가서 도둑질해오는 거고, 사진반은 사진 찍어오는 거고, 납치반은 3명이 1개조가 돼 넘어가서 납치를 해오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절취반이었습니다. 제가 목표로 한 상대는 ○○시내에 있는 인민군 박격포 연대였어요. 당시에 거기 원래 있던 부대가 옮기고 박격포 연대가 왔다고 그러는데 거기에 대한 자료를 빼오는 것이 제 임무였습니다.”
―사지에 들어가기에 앞서, 본인이나 가족에 대한 보상문제는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가 있었습니까?
“그 전에 제가 ‘입사’할 때 입사원서를 씁니다. 거기에 이미 썼죠.
―’입사’라고 하시는데, 회사명은 무엇입니까?
“AIU라는 회사입니다. 입사원서를 썼는데, 나는 ‘죽으면 죽고 살면 사는 거지’라면서 뒤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죽기 아니면 살기다’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살아 돌아오면 뭘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까?
“그런 건 없었습니다. 월급이 나오니까요. 당시에 15만 원 받았습니다. 두 달 정도 나왔다고 하는데 내가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기억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받았다니까 받았나보다 하는 거지.”
―침투일정은 어떻게 짜여 있었습니까? 심경이 착잡하셨겠습니다.
“단기침투입니다. 최소한 1주일의 기한을 줍니다. 1주일치 부식을 지고 갑니다. 침투명령이 떨어지고 나서는 기가 막힙디다. 침투할 때는 사방에 막이 쳐진 이동차량으로 데리고 갔어요. 민정경찰이 있는 DMZ로 간 거죠. 비무장지대의 남방한계선에 도착하니까 기분이 이상합디다. 수색중대원들이 다 나와서 차렷자세를 하고 서 있더라고요. 짚차에서 내리니까 ‘받들어 총’을 해주더라고요. 그건 스타급에 대한 예우예요. ‘너는 죽으러 가는 거니까 죽으러 가는 것에 대한 예우다’ 뭐 이런 거겠죠. 방으로 들어가니까 인민군 군복을 주더군. 인민군 하사 계급장을 단 군복을 입고 민정경찰들이 중앙분계선까지 호위를 해줘서 넘어갔습니다. 넘어가기 직전에 내가 그랬죠. ‘내가 살아오면 장기침투를 자원하겠다’고 말이죠. 장기침투는 제3국을 통해 이북에 들어가서 생활을 하는 겁니다. 간첩이죠.”
―장기침투를 자원하신 이유는 뭡니까?
“사실 그때만 해도 혼자몸이다 보니까, 가족이라는 건 생각하지도 않았고, 만사가 귀찮았어요. 국가를 위해 일하다 죽는다고 하면 나중에 이름 석 자는 남을 게 아니냐… 그때는 어린 마음에 영웅심리에서 그런 생각을 한 거죠”
─깊숙이 침투해 ‘물건’을 꺼내오는 게 상당히 위험한 작업이었을 텐데….
“8부능선을 쭉 타고 가는데, 평소 1/15000로 찍은 항공사진으로 ‘실체전’ 교육을 받은 게 큰힘이 되었어요. 그것을 놓고 보면 실물을 보는 거나 똑같습니다. 가정집 하수도 거르는 것까지 나올 정도니까. 목표지점에 도착해보니 막사가 세 개가 있었어요. 첫번째 막사가 내무반, 두 번째 막사가 사무실, 반은 뭔지 모르고, 세 번째 막사가 식당, 또 반은 뭔지 모르고, 그 앞에 건물이 있어요. 교육을 받을 때 뭐라 배웠냐 하면, ‘1차적으로 들어가서 오물(쓰레기)을 전부 챙겨 넣어두라’고 해요. 왜 그러냐면 사람들이 글씨 쓰다가 한 자가 비뚤어지면 찢어서 버리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다 수집해서 넣었습니다. 사무실 문은 열려고 해봤지만 도저히 안 되더라고. 걔들은 그때 열쇠가 없어서 철사로 둘둘 감아놓은 형태가 되서 참 열기 어렵습디다. 어떻게든지 해볼려고 하다가 도저히 열지 못하고 그 오물만 갖고 나오게 됐죠. 메모지를 잔뜩 넣은 거예요. 야전 상의와 바지 등 큰 주머니 네 곳에 꾸역꾸역 집어넣었어요. 양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죠.”
‘지뢰 밟았구나!’ 자살하려 칼 뽑다
─철수는 순조로웠나요?
“군사분계선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그랬죠. 그러다 그 중앙분계선에서 지뢰를 밟은 겁니다. 중앙분계선에 돌이 있어서 그 위에 걸터 앉았습니다. 더우니까 좀 쉬려 한 거지. 대남방송이 ‘남반부에 계신 국군 장병 여러분, 박정희 도당이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나오길래 ‘미친 자식들’이라고 눈을 부라리면서 헛웃음을 쳤어요. 눈이 쌓여 있었는데 눈을 뭉쳐서 입에다 넣고 돌 밑으로 탁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돌 밑으로 한 발을 딛는데 ‘꽝’ 한 겁니다. ‘꽝’ 하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리니까 내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 지뢰 밟았구나’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데 대남방송 하던 게 갑자기 뚝 끝나는 겁니다. 지뢰소리가 나니까.”
―그때가 몇 시쯤이었습니까?
“23일 10시쯤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지뢰를 밟은 게 새벽 2시쯤 될 거예요. 침투지였던 ○○에서 군사분계선까지 얼마 되지 않아요. 60리예요.잰 걸음으로 걷는다면 4시간 반에서 5시간 정도 걷습니다. 우리 같은 경우는 젊어서 운동도 했고 힘도 있고 그러다 보니까 분계선에 도착했을 때 2~3시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지뢰를 밟은 소리가 나면 북한군도 수색병이 나오지 않나요?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그때 내가 무장을 어떻게 하고 갔느냐부터 말할께요. 절취반이나 사진반이 (북한에) 들어갈 때는 절대 권총이나 총을 주지 않고 대검만 줍니다. 왜냐면, 우선 위급하면 사람이 순간적으로 총을 쏘게 되죠. 그 총소리에 사람이 다 몰립니다. 그건 자살행위죠. 그렇기 때문에 총이나 권총은 안 주고 칼을 갖고 갔는데, 자살하려고 칼을 뽑았어요. ‘병신이 돼서 살면 뭐해’, 그러면서 호흡을 하니까 호흡은 정상이 되더라고요. 가슴을 만져보니까 이상이 없어, ‘아휴, 이 정도면 괜찮겠다’, 그러는데 여기(턱을 만지며)가 이상하게 따끔하더라고요. 구멍이 뚫려서 손가락이 여기(검지손가락 밑둥을 가리키며)까지 들어가는 거야. 거기서 뭐가 덜그럭덜그럭 해요. ‘그래도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하며 뛰려고 하니까 이 밑(왼쪽발을 가리키며)에 농구화 바닥이 다 날라간 거예요. 엄지발가락은 갈라져서 발등 위에 붙어 있고.
그래도 ‘이 다리 하나 잘라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소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모르는 분들은 ‘그 몸을 갖고 나무에 뭐 하러 올라갔느냐’, 그런 생각을 하겠죠.
하지만 적이 먼저 나를 발견한다면 물론 나는 120% 죽겠지만, 만일 내가 먼저 적을 발견했을 때는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약 10~20% 정도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람이라는 게 정찰활동을 하면 위는 잘 안 쳐다보게 됩니다. 땅 밑을 살피며 전진하거든요. 내 딴에는 북한군이 그렇게 나올 거라고, 머리를 굴린다고 나무 위로 올라간 겁니다.
올라가서 있으니까 대남방송이 다시 흘러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이놈들이 짐승이 가다가 밟은 걸로 아는가 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내려와서 걷는데 도저히 걸을 수가 없는 거예요. 피가 흐르고. 그때 농구화를 큰 걸 신고 갔는데 이쪽(오른쪽) 신을 벗어서 이쪽(부상당한 왼쪽) 발에다 신었는데도, 힘들었어요. 나무를 잘라서 지팡이를 만들어서 걸어도 힘이 들고, 배낭 있던 것 다 벗어버리고, 쉬다가 걷다가 하면서 남으로 남으로 갔어요.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나서 보니까 개울인데 얼음이 얼었어요. 입을 대고 물을 마시니까 목으로 넘어가야 될 텐데 넘어가지 않는 거야. 이리(턱에 손가락으로 구멍 모양새를 만들어보이며)로 새는 거야. 그래서 막고 먹고…. 근데 이런 처지인데도 졸음이 와서 미치겠더라고. ‘잠들면 안되지’ 하는 생각을 하며 거기서 기어나와 민정경찰이 있는 데까지 와서 암호를 대고 그냥 쓰러져 버렸지.”
“우리 아들 목숨판 돈 내놔라”
─거기서 정신을 잃었나요?
“쓰러지니까 민정경찰 친구들이 ‘이 자식 쇼(위장 월남)하는지 몰라’, 이런 소리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내가 ‘야 이 개××들아. 내가 누구누구다, 사람 죽어가’, 라고 소리쳤지.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쳐다보니까 A선생하고 B선생이 와 있었어. 내가 나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던 거예요. 죽거나 붙잡히면 금방 대남방송으로 나오니까. 그런데 내 온몸이 피투성이니까 B선생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더라고요. 그 다음에는 모르겠어요.
정신을 차리니까 △사단 야전병원이더라고요. 시계를 안갖고 있으니까 시간은 모르겠고. 간호사들이 오더니 이북 얘기를 해달라는 거예요. 얘기는 해주는데 아파 죽겠다고 했죠. 육군병원으로 후송이 됐는데 정신을 잃었다가 깼다가 하니까 정확한 시간을 모르겠습디다. 내 기억으로는 토요일 오후 같아요. 문병일 박사가 턱을 수술했습니다. 다 묶어놓고 다리도 치료했죠. 그러는 중에 B선생이라는 분이 늘 병원에 와 있었습니다. 감시라면 감시고 보호라면 보호고.
―‘퇴사’하신 건 언제였죠? 나와서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그해(64년) 8~9월 됐을 겁니다. 입은 여기가 붓고 다리는 절뚝절뚝하면서 청량리로 나왔습니다. 나오니까 다 도망가는 거예요. 나하고 아는 척을 안하려 그래. ‘야, 오래간만이다’ 그러면 ‘응, 오래간만이다’ 그러면서 피하는 거예요. 왜냐, 이북으로 넘어갔다 온 놈이 살아서 나타났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나름대로 ‘쟤하고 만났다가는 뭔 일이 생길지 모르지’ 뭐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어요. 다정한 친구들까지 그러더라고요. 내게 운동을 가르쳐준 원장님까지도 ‘야, 나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만나자’ 그러면서 가버리시더라고요.
―최근 북한의 장기수 송환 등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어요?
“제가 교육받을 때 ‘생포되면 자살을 해라. 붙잡히면 너희들은 거기에서 교육받고 도로 남파된다. 어차피 너희들은 죽는 목숨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입 다물고 거기서 죽어라’ 이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억울하다는 마음은 가졌지만, ‘나도 보상받을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은 가졌어요. 하지만 감히 빽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으로서 어디다 얘기했다가 나한테 불이익이 온다든가 이러면 우리 집안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거단 말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50년 가까이 만고풍상을 겪어오면서 이제사 조금씩 내 직함이나 만들고 살겠다 하는 입장인데 나 하나 삐딱해서 집안이 무너질 수는 없죠. 그러니까 차라리 없던 일로 생각하고 살겠다, 이런 심정으로 살아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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