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키싱구라미의 ‘이념’을 녹인 ‘초코파이’의 휴머니티

  • 변정수 미디어평론가

    입력2006-08-02 13: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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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 대결구도를 소재로 다룬 ‘쉬리’와 ‘JSA’는 영화적 접근방식과 주제의식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쉬리’가 이념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세련된 반공영화’라면 ‘JSA’는 휴머니티를 바탕으로 한 ‘통일 영화’다. 1년 간격으로 각각 흥행신기록을 세운 두 영화는 대북인식의 변화와 시대 분위기를 절묘하게 반영하고 있다.
    지 난 6월, 그야말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이 자체가 세계적인 뉴스거리거니와 첫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합의를 도출해낸 성과도 돋보였던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의외였던 사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남한 사회의 반응이다.

    1970년대 초반 그의 존재가 전면에 부상한 이후 30년 동안 줄곧 반공 드라마 따위를 통해 ‘인격 파탄자’쯤으로 알려진 이외에 그에 관한 다른 정보를 전혀 접할 수 없는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거부감은커녕 오히려 호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김정일 신드롬’. 캐릭터 상품이 출현하고, 그가 입었던 재킷이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으며, 거침없는 말투나 단숨에 술잔을 비우는 광경이 화제로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그저 교묘한 이미지 포장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경계의 시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건 오히려 본의 아니게 비난이라기보다는 칭찬에 가까운 주장으로 여겨졌다. 그 모든 것이 연기에 불과하다면, 그건 그만큼 그가 대단히 세련된 정치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 어쨌든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의 ‘인격 파탄자’가 아님은 물론 뛰어난 정치 지도자라는 걸 인정하는 셈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현행법상으로는 ‘반국가단체의 수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남북정상회담 이후 야당 의원조차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제기했지만, 어찌 됐든 국가보안법 폐지까지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의 축제 분위기에 들떠 엄연히 존재하는 국가보안법을 순간적으로나마 잊었던 것인가. 대답은 잠시 보류해두자.

    하루아침에 찾아온 해빙



    그로부터 정확히 두 달 후, 이산가족 교환 방문과 상봉이 있었다. 거기에는 훨씬 더 구체화된 충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간의 대화가 전국으로 생방송되는 가운데, 50년 만에 만난 아들을 북에 남겨두고 돌아와야 하는 남쪽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열심히 살라는 의례적인 당부 끝에 “장군님한테도 충성하고…”라는 말을 덧붙인다.

    아무리 방북 전 사전 교육을 통해 불필요하게 북쪽 사람들을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그들의 체제를 인정하라’는 내용이 전달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시쳇말로 이만저만한 ‘오버’가 아닐 수 없었다. 북을 자극하지 않는 것까지는 좋다지만 오히려 남쪽에서 보수적인 북한관을 고수하는 이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는 아찔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충격적인 발언은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달 남짓이 지났다. 영화 ‘JSA’. 현실이 아닌 허구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스크린 속 북한 병사에게서 가슴이 찡하도록 진한 인간적 정취를 경험한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이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반공 영화’의 메시지에 충실했음에도 단지 북한군이 인간적으로 묘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난을 당한 영화가 한두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명한 예로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는 끝내 개봉조차 할 수 없었으며, 이감독 자신도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다.

    ‘JSA’는 불과 1년 전 ‘쉬리’가 세웠던 흥행 기록을 경신하며 또 하나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쉬리’의 기념비적인 기록은 한국 영화산업의 가능성을 보여준 동시에, 어느 평론가가 “(흥행 성공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환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는 위험을 경고했을 만큼 일반화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JSA’가 그 기록들을 하나하나 깨고 있는 것이다.

    추석 연휴를 끼고 개봉돼 첫 주말 최다 관객 동원(서울 9만명)의 기록을 세우며 돌풍을 예고한 ‘JSA’는 지난해 설 연휴 때 개봉한 ‘쉬리’의 기록(5일간 서울 22만명)을 두 배 가까이(서울 42만명) 앞지르며 불과 7일(‘쉬리’는 9일) 만에 전국에서 100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서울 관객이 100만명을 넘어서는 데 걸린 기간은 불과 15일(‘쉬리’ 21일). 또 개봉 둘째 주말에는 첫 주말보다도 많은 관객(서울 21만3000명)이 드는 보기 드문 이변을 연출하며 외화 ‘미션 임파서블2’가 보유하고 있던 주말 관객 최다 동원 기록(서울 19만5000명)을 깨며 기염을 토했다. 그래서인지 ‘쉬리’가 세운 ‘전국 580만’의 대기록을 깰 수 있을 것인지가 벌써부터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영화 흥행에 뒤따르게 마련인 부수적인 효과도 만만치 않다. ‘쉬리’의 성공에 힘입어 ‘키싱구라미’라는 물고기 기르기가 유행된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또 제주도의 어느 호텔에서는 이 영화를 촬영한 방과 벤치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기도 했다. ‘JSA’도 이에 뒤질세라 숱한 화제를 만들고 있다. 지포 라이터가 불티나게 팔리는가 하면, 초코파이의 판매량이 영화 개봉 전보다 하루 평균 2000상자(19만2000개)가 더 늘어나 제과회사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고, 영화 전편에 흐르는 ‘부치지 않은 편지’를 수록한 가수 고 김광석의 앨범도 평소에 비해 2배 가량 더 팔린다고 한다.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앨범은 영화 개봉 열흘 만에 3만장 이상 팔려나간 것으로 발표되었다.

    한국 영화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쉬리’와 그 신화를 보란 듯이 재연하고 있는 ‘JSA’. 이 두 영화는 흥미롭게도 모두 남북의 적대적 대치상황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다. 물론 남북의 대치상황이라는 소재만으로는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정작 흥행 돌풍을 유도한 새로움은 이 닳고닳은 뻔한 소재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다.

    ‘쉬리’는 북의 특수공작원과 남의 정보요원 사이의 비극적 사랑이 주는 감동을, 무력을 통해 남북 문제를 해결하려는 북한 특수부대의 비인간성과 극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화해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대북 인식 면에서는 획기적인 진전으로 평가할 만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총질을 해대는 테러 집단이, 북한 정권의 지시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남한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데 불만을 품은 이탈세력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에서 변화의 기미는 분명하게 감지된다. 그 전까지라면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설정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어쩌면 오히려 북한 정권을 정면으로 겨누지 않는다는 것 자체를 불온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쉬리’는 세련된 반공영화

    ‘쉬리’의 대북 인식은 그런 점에서 매우 양면적이다. 우선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적 시각에서 보자면, 남북 정상이 동석한 가운데 진행되는 축구 경기나 그러한 화해분위기를 무장 테러를 통해 방해하려는 이탈세력이라는 설정은 매우 불온한 상상력이다. 지금까지의 반공교육에 따르자면 북한 체제는 ‘정치적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폐쇄 사회이며, 모든 일이 ‘수령님’의 한 마디에 좌지우지되며, 모든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전체주의 덩어리였다. 따라서 서울을 방문한 북한의 최고 지도자를 제거하려는 체제 불만세력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 불만의 이유라는 것도 북한 정권이 남한과 화해와 협력을 추구한다는 것인데, 이것도 ‘북한 정권은 전쟁 미치광이’라는 반공교육에 대한 심각한 배반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정반대의 평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비록 이탈세력으로 설정되었다고는 하지만, 박무영(최민식)이라는 캐릭터는 기존의 반공영화에서 보아오던 북한군의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혹 그것은 대북 인식과는 무관하게 그저 할리우드 영화 따위에서 익히 보아오던 반사회적 테러리스트의 일반적인 성격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일개 테러리스트 이전에 ‘북한 사람’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평화를 파괴하려는 무장 테러리스트는 왜 꼭 북에서 와야만 하는가. 주로 할리우드 영화들이 보여준 테러 집단의 이미지 역시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은 못 된다. 똑같은 질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들은 왜 꼭 공산권이 아니면 아랍계일까?

    한층 흥미로운 것은 테러리스트에 대한 묘사다. 국제 테러조직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는 인간적인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적’으로 묘사된다. 반면 자국 내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는 ‘범죄자’일 뿐이다. ‘적’과 ‘범죄자’는 엄연히 다르다. ‘범죄자’는 응징의 대상이지만, ‘적’은 말살해야 할 대상이다. ‘쉬리’에서 북한 특수부대 장교인 박무영이 ‘범죄자’가 아니라 ‘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쉬리’의 이러한 한계는 이 영화의 장르적 특성에서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할리우드 스타일의 화려한 스펙터클을 의도했다면 당연히 단순명료하게 정의된 ‘적’이 있어야 하며, ‘적’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일각에서 ‘쉬리’를 ‘세련된 반공영화’라고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 애호가로 알려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쉬리’의 대북관에 대해 언짢은 심사를 표출했다는 얘기가 들리는 것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쉬리’에 대해 상반된 평가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간의 대북 인식이 너무나 편향되어 있었던 탓이기도 하다. ‘쉬리’가 ‘세련된 반공영화’라 할지라도 반공 측면에 대한 비판과 별도로 ‘세련됨’에 많은 점수를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이나 그간의 반공영화들이 보여준 대북 인식이 단세포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쉬리’가 책임질 부분은 아니며 그런 점에서라면 ‘쉬리’는 ‘반공영화’라도 ‘제대로 된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기대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도 남은 셈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쉬리’가 흥행에 성공한 비결일 것이다. 관객은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지 통일교육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군인답지 않은’ 군인들

    그런데 ‘JSA’의 구도는 ‘쉬리’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 이 영화에는 인격화된 분명한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은 영화 안의 악당이 아니라 영화 밖의 현실에 존재하는 분단과 그로 말미암은 적대, 그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적과의 스펙터클한 싸움을 구경하는 대신, 영화 전체를 짓누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힘겹게 의식하면서 영화 밖의 현실로 진지하게 눈을 돌릴 것을 요구받는다.

    그렇게 우리의 시선이 영화를 넘어 현실로 나아갔을 때 거기엔 ‘김정일 신드롬’이 있고, 이산가족 상봉의 감동이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기가 막힌 우연의 일치다. 지금은 정확하게 ‘JSA’ 같은 영화를 요구하는 시기인 것이다. 관객들은 이를테면 남과 북의 청년들이 어울려 호형호제하며 닭싸움을 하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어색하지도 않고 허황하지도 않게 이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영화의 비극적 결말은 더욱 가슴아픈 절실함으로 남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핵심을 이루는 그 ‘군인답지 못한’ 천진난만함이 얼마나 자연스러웠으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근무했던 제대 군인들이 영화사로 몰려가 ‘이 영화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라는 점을 자막에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항의한다고 해서 이 영화의 개연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김훈 중위 사망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 판문점 근무자가 실제로 대북 접촉을 했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정작 아이러니컬한 점은 이 영화의 원작인 박상연씨의 소설 ‘DMZ’와 관련된 뒷얘기다. 소설가 이문열씨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작품은 1997년 초 발표 당시 ‘오늘의 작가상’ 후보로 최종심까지 올라갔다가 탈락되었는데, ‘판문점에서 남북 병사들이 접촉을 한다는 설정이 비현실적’이라는 데 심사위원 다수가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김훈 중위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일이다.

    남북한 병사의 만남을 통해 이 영화가 전달한 메시지는 1980년대 말 북한을 방문했다가 옥고를 치른 소설가 황석영씨가 쓴 방북기의 제목을 빌려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사람이 살고 있었네’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북한 군복을 입고 있는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한다. 북한 군복을 입은 존재가 ‘악마’가 아니라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격 파탄자’가 아니라는 것만큼이나 또는 ‘장군님에게 충성하라’는 당부가 전국으로 생방송된 것만큼이나 깜짝 놀랄 만한 일종의 ‘문화 충격’이다.

    ‘악마’가 아닌 북한군인

    게다가 이러한 ‘문화 충격’은 실제로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당장 남북간의 교류가 급격하게 확대될 터인데, 우리는 그 동안 입으로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되뇌었을 뿐,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가 보여준 보기 드문 미덕은 거꾸로 함정으로 작용할 위험에 빠진다.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인데, 달리 준비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는가. 부딪쳐 보면 사소한 갈등이야 없을 수 없겠지만 별다른 충돌 없이 금세 잘 어울리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다.

    물론 긴장을 완화하고 적대를 해소하고 화해의 물꼬를 트는 데는 그런 낙관이 분명히 필요하다. 경계하고 낯설어하고 불안해하는 태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50여년을 다른 체제에서 다른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마음이 통할 수 있을까?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에 별다르게 노력하지 않아도 거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의 마음을 열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인내와 노력이 요구되는가.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 모든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는 특수한 정황이 제시된다 하더라도 50여년간의 단절과 적대는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특수한 정황일 수도 있다. 이는 뒤에서 좀더 본격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원작 소설과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는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휴머니즘이 그만큼 허술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컨대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인간적인’ 냄새가 실은 너무나 ‘남한적’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다. 우리에게는 언뜻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나름의 문화적인 배경 속에서 휴머니티를 드러낼 수 있는 그런 북한의 모습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실제로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만난다면, 영화에서처럼 ‘자연스럽게’ 동질감을 확인하는 부분보다 그렇게 얼마간의 낯가림 속에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야 하는 부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오경필(송강호)과 정우진(신하균)이 이수혁(이병헌)을 만나기 전에도 닭싸움을 하고 놀았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혹은 그때까지 닭싸움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해도 처음 배운 놀이라서 더 재미있게 놀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그들이 이수혁에게 가르쳐줄 그들만의 놀이는 없었을까. 이수혁이 가져간 도색잡지만큼이나 거꾸로 이수혁에게 신기하게 보였을 그들의 문화는 없었을까. 도대체 왜 김광석의 테이프니 지포 라이터니 하면서 이수혁만 선물하는 것일까. 바르는 구두약을 선물하고 사용법까지 알려주는 남성식(김태우)에게 정우진이 답례로 줄 만한 것은 정말 없었을까?

    물론 앞서 ‘쉬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한 편의 영화에 불과한 ‘JSA’가 책임져야 할 문제는 아닌지도 모른다. 설령 그런 소재들을 넣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북한의 생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그 운동 자체가 공안 당국의 탄압을 받기도 했거니와 그렇게 해서 알려진 내용도 피상적인 정보였지 좀더 피부에 와닿는 일상적인 정서까지 속속들이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 통제’는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보다 가난하고 생활 수준도 낮으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받기만 하고 우리는 베푸는 입장이라는 무의식적 우월감이 투영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만큼은 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체제의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만나는 데 있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 이산가족 상봉 때 방북자를 대상으로 한 사전 교육 내용에도 언급되었다시피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쉬리’의 대북 인식이 구태의연한 반공 영화에서 진일보하면서도 그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있었던 양면성을 가지는 데 반해, ‘JSA’는 반공영화의 구도로부터는 완전히 탈피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 전혀 다른 차원에서나마 역시 극복해야 할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원작 소설 ‘DMZ’의 문제의식은 영화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어쩌면 영상 매체와 활자 매체가 다르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기에, 평면적으로 비교해서 어느 쪽이 낫다 못하다를 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또한 영화가 원작을 훼손한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렇긴 해도 위에서 지적한 ‘JSA’의 문제점과 ‘DMZ’에서 나타난 문제의식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영화에서는 북한군 장교가 들이닥치면서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장교만 등장하지 않았어도 아무 문제없이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남과 북의 화해를 가로막고 있는 원인이 ‘외부’ 혹은 ‘체제’(=정권)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또는 거꾸로 말하자면 마치 남북의 책임 있는 당국자가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기만 한다면 일반 국민들은 이미 친구가 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런데 소설의 사건 전개는 전혀 다르다. 네 사람이 마지막 작별의 밤을 보내고 있을 때 부근에서 오발 사고로 인하여 총성이 울린다. 이 총성이 수혁의 마음속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무의식을 순식간에 일깨운다. 영화에서는 “전쟁이 나면 우리도 서로 쏴야 돼?”라고 묻기만 하는 데서 그쳤던 근원적인 질문이 비록 착각일망정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을 작가 박상연씨는 ‘조건 반사’로 설명한다. 쉽게 말해서 ‘생명의 은인’이든 호형호제를 하며 친하게 지냈든 어쨌든 현실적으로는 ‘적’일 뿐이라는 식의 논리적이고 의식적인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20여 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받아온 반공교육의 망령이 한밤중에 터진 총성을 신호로 자기도 모르게 고스란히 되살아난 것이다.

    반공교육의 조건반사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이 비극을 준비하기 위해 작가는 50년 전에 일어났던 더 참혹한 비극을 마련해두고 있다. 영화 속에서는 가볍게 스치듯 지나간 제3국행 포로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거제도 수용소에서 과격파 공산 포로의 행동대장이었던 이연우는 반공 포로와 충돌하는 과정에 친동생과 마주친다. 그는 공산 포로들의 공격으로부터 동생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동생의 팔목에 동여매진 천(반공 포로의 표식)을 풀어주려고 하지만, 그 순간 “미군이다!”라는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팔을 뻗어 손에 든 칼로 동생을 난자하고 만다. 이 섬뜩한 ‘조건 반사’! 미군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가 눈앞에 있는 동생조차 못 알아보도록 한 것이다. 수혁의 경우도 실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비극은 누구 때문에 일어난 것인가. 물론 궁극적으로는 국민들을 ‘파블로프의 개’로 만들어버린 극단적인 반공 체제의 결과이겠지만, 그 뿌리깊은 강박을 극복해야 할 책임은 오롯이 우리들 삶의 몫으로 돌아온다. 우리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채 잠재의식의 심연에 도사리고 있는 그 피폐한 상흔을 우리 스스로 드러내 제거하지 못한다면 남북간의 진정한 화해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언제 어떤 계기에 그 무의식이 이빨을 드러내며 튀어나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소설 속에서는 분단의 문제에 천착하면서도 소설 뒤에 붙인 ‘작가의 말’을 통해 통일에 대한 맹목적 집착에 대해서도 똑같은 어조의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작년이던가, 어떤 기관에서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하는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중 비교적 높은 비율을 차지한 답변 중에 이런 것들이 기억난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 다리가 길어지고 싶다, 날씬해지고 싶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삐삐를 갖고 싶다, 등등. 그것은 매우 다양했고 특별히 압도적인 것은 없었다. 내가 그 기사를 관심 있게 본 이유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같은 내용의 설문 조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80% 이상의 응답을 얻어내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한 소원은 바로 통일, 통일이었다. 내가 그 설문지를 받았더라도 그 당시엔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때의 설문 조사 결과가 조금도 조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것은 거대하고도 무서운 폭력이다.”

    50여년간의 반공·반북 교육으로 길들여진 우리의 대북 강박이 영화 한두 편으로 하루아침에 씻은 듯 사라지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쉬리’나 ‘JSA’는 탈분단 시대를 열어 가는 대북 인식 전환에 있어 그 첫발을 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두 작품의 성공에 고무되어서든, 또는 남북 화해 분위기의 가속화에 힘입어서든, 앞으로 남북 화해의 메시지를 담는 영화들이 많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미처 다루지 못했지만, ‘쉬리’에서 ‘JSA’에 이르는 사이에도 ‘간첩 리철진’이 무척이나 의미 있는 대북 인식의 전환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쉬리 2’가 기획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쉬리’의 한계를 ‘JSA’가 넘어섰듯이, ‘JSA’에서 드러난 한계도 앞으로 나올 또 다른 영화가 넘어서면서 단순하고 천박하던 우리 사회의 대북 인식이 더욱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들을 확인해줄 것이다. 다만 ‘바람직한 대북관’이라는 질문에 결코 정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남과 북이 만나는 다양한 모습들을 다양한 시선에서 포착해내어 좀더 풍부한 경험이 축적된다면 그 하나하나가 거대한 ‘화해’의 물살을 형성하지 않을까 한다.

    ‘JSA’를 넘어서

    오경필의 초코파이가 적절한 비유가 될 것이다. 이수혁의 썰렁한 권유대로 남으로 넘어와서 실컷 먹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전통적인 ‘반공영화’였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물론 오경필은 입 속의 것을 뱉어냄으로써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또는 오경필의 바람대로 북한이 초코파이보다 더 맛있는 과자를 만들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있는데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맛있는 과자를 자랑만 하지 말고 그쪽에 우리보다 더 맛있는 과자가 있는지 알아보려는 진지한 노력이 이제부터라도 필요하다. 그리고 두 극단 사이에도 오경필이 맛있는 과자를 먹을 방법은 무수하게 많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데서부터 남과 북이 만날 수 있는 실질적인 단초가 열릴 것이다.

    그러나 이럴 수도 있다. 만일 북한이 더 맛있는 과자를 미처 만들어내기도 전에(혹은 심지어 이미 있을지도 모르는 더 맛있는 북한산 과자를 몰아내고) 초코파이를 매개로 남북의 입맛이 통일되어 버린다면? 이런 의문을 ‘JSA’ 다음에 나올 영화가 해명한다면 ‘쉬리’와 ‘JSA’에 이어 대북 인식에 또 한 번의 커다란 전환점을 기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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